제1회 과거로 보내주시오.
귀령자(鬼靈子)는 심야의 방문자를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귀문(鬼門)의 주인으로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헤쳐온 그는 여러 차례 침입자를 경험했다.
그들은 여러 부류였다. 기세 좋은 놈, 치밀한 놈, 잘 싸우는 놈, 간계에 능한 놈, 가끔은 기세도 좋고 치밀하면서 잘 싸우고 간계에 능한 놈도 있었다. 물론 그조차도 살아서 이 장원을 나가지 못했다.
한데 눈앞의 사내는 지금까지의 침입자들과는 달랐다.
인생의 맵고 쓴맛을 다 맛본 저 고단한 눈을 보고 있자니 드는 생각은 한 가지뿐이었다.
‘젠장, 오늘이 내 제삿날인가?’
귀령자는 불안함을 애써 감추며 침착하게 물었다.
“우리가 구면이던가?”
“아니오.”
남자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참으로 듣기 좋았다.
“하면 이 밤에 어떤 일로 찾아온 것인가?”
부디 저 좋은 목소리로 ‘죽기 좋은 날이다, 이 귀신 나부랭이야.’란 말이 나오지 않기를!
“부탁이 있어서 왔소.”
스스로 떠밀려 지옥문 앞까지 다녀온 귀령자가 내심 안도하며 물었다.
“말해 보게.”
그러자 정말이지 평생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놀라운 부탁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과거로 보내주시오.”
순간 침묵이 흘렀다.
미묘한 눈빛으로 상대를 응시하던 귀령자가 나직이 물었다.
“인간이 어찌 시간을 거스를 수 있단 말인가?”
“나야 모르지요.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회귀대법(回歸大法)을 펼칠 수 있는 당신이 알려주셔야지요.”
귀령자는 그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내가 그것을 펼칠 수 있단 것을 어찌 알았는가?”
회귀대법은 오직 자신의 가문에만 비밀리에 전해지는 비법이었다.
“서진(徐眞).”
그리운 이름에 귀령자는 격정에 휩싸였다.
“내 동생을 어찌 아는가?”
“낭인 시절 동료였소.”
“지금 어디에 있는가?”
“죽었소.”
“아아!”
귀령자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회귀대법은 수백 년에 걸쳐 그의 가문에서 연구되어 내려오고 있었다. 아버지 대에서도 미완이었기에 자신과 여동생은 어려서부터 아버지를 도와 회귀대법을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었다.
그리고 십 년 전, 동생은 더는 못 견디겠다며 야반도주하다시피 가문을 떠났다. 귀령자는 동생을 이해했다. 가문의 대업이라는 미명에 그녀는 꽃다운 이십 대를 모두 연구에 바쳤으니까.
“진이는 어떻게 죽었나?”
“복수는 내가 했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오. 그녀가 죽기 전에 당신에게 이 말을 꼭 전해달라고 했소. 자신은 원 없는 인생을 살다 간다고. 부디 오라버니도 그랬으면 좋겠다고. 대법만 연구하는 인생을 살지 말고 부디 자신의 인생을 살라더이다.”
귀령자는 깊은 회한에 빠졌다.
남자는 그가 감정을 추스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오늘의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다.
“대법은 완성시켰소?”
귀령자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내 대에서 드디어 대법을 완성시켰네.”
순간 남자의 얼굴에 기쁨이 스쳤다. 그가 환한 표정을 짓자 남자가 꽤 호감형의 미남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언제로 돌아갈 수 있소?”
“그건 정할 수 없네. 십 년 전으로 갈 수도 있고, 삼십 년 전으로 갈 수도 있지. 아기 때로 갈 수도 있고 운 나쁘면 어제로 돌아갈 수도 있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니 걱정하지 않을 거요.”
“자넨 당장이라도 돌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군.”
귀령자의 얼굴에 씁쓸함이 스쳤다.
“대법은 불가능하네. 가능했다면 이미 내가 돌아갔겠지.”
“대법을 완성했다 하지 않았소?”
“대법에 필요한 재료를 다 구하지 못했다네.”
“재료는 내가 구해오겠소.”
“불가능하다니까.”
“말씀해 보시오.”
“대법에 필요한 아흔아홉 가지 재료 중에서 끝내 구하지 못한 다섯 개의 재료가 있네. 그 첫 번째만 해도 절대 구할 수 없지. 자네 음뢰종(音雷鐘)이라고 들어봤나?”
“풍천교(風天敎)의 신물?”
“맞네. 바로 그것이지.”
풍천교는 혈교(血敎)의 후신으로 새외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지닌 곳이었다.
“회귀대법을 시행하려면 음뢰종이 울려 퍼질 때 나오는 음파가 필요하다네. 한데 그 음뢰종은 풍천교의 보물로 교주의 권좌 뒤쪽에 놓여 있지. 이래도 구해올 수 있다는 것인가?”
귀령자는 음뢰종을 빌려달라는 부탁조차 못 했다. 그랬다간 그 성질 더러운 풍천교주의 손에 가문이 멸문당할 테니까.
“구해오겠소.”
단호한 대답과 함께 남자는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돌아서 그곳을 떠났다.
“미친놈인가?”
당시의 귀령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동생에 대해 더 묻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면서.
남자가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였다.
불면증에 시달려 잠 못 이루던 어느 밤, 한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졌던 그는 다시 귀령자 앞에 나타났다.
그는 커다란 음뢰종을 등에 짊어지고 있었다. 종에 조각된 악귀들은 새외에서 이곳까지 먼 길을 온 것에 화가 난 듯, 더욱 흉측해 보였다.
“한번 쳐 보겠소?”
귀령자는 눈을 부릅뜬 채 음뢰종을 살피고 또 살폈다.
“이럴 수가! 으아! 이럴 수가!”
믿기 어려웠지만, 이것은 혈교의 혈기(血氣)가 은은히 흐르는 진품 음뢰종이었다.
“이런 미친! 대체 이것을 어떻게 구해온 것인가?”
“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오. 다음 재료는 어떤 것이오?”
남자의 담백하면서도 자신에 찬 눈빛은 방금의 호언이 결코 허풍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하지만 이내 귀령자는 탄식했다.
“자네가 운 좋게 풍천교의 신물을 가져왔다고는 하나, 다음 재료는 구할 수 없을 것이야.”
“무엇이오?”
“신룡가의 신물인 신오향로(神奧香爐)라네. 대법에는 신오향로에서 피어나온 향이 필요하다네.”
신룡가(新龍家).
무림맹 봉문(封門) 이후 새롭게 부상한 정파의 상징이자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가문이었다. 풍천교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세력.
“알겠소. 세 번째 재료는 향로를 가져온 다음에 듣겠소.”
“음뢰종을 내게 맡기고 간단 말인가? 내가 이것을 들고 달아나 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풍천교에 알릴 거요. 당신이 종을 들고 튀었다고.”
해볼 테면 해보라는 말을 남긴 후 남자는 바삐 그곳을 떠났다.
그리고 다시 세월이 흘러갔다.
―과연 올해는 구해올까?
해가 바뀔 때마다 드는 의구심. 그 의구심이 대여섯 차례 반복되던 어느 해 가을, 남자는 신오향로를 가지고 돌아왔다.
“정말 가져왔구나!”
귀령자는 신오향로를 직접 보면서도 믿지 못했다.
“대체 어떻게 가져올 수 있었나?”
“구구절절 책으로 쓰면 대여섯 권은 써야 할 거요.”
“말해주게. 열 권이라도 읽겠네. 궁금해!”
“그럴 시간 없소.”
대체 무엇이 이 남자로 하여금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게 하는 것일까? 이 능력이라면 이번 생에서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렇게나 돌아가려 한다면?
“자네가 돌아가려는 이유가 복수 때문인가?”
“그렇소.”
“자네 실력이라면 이번 생에서도 복수가 가능할 텐데?”
“불가능하오.”
“대체 원수가 누구길래?”
남자의 입에서 한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화무기.”
“으허헉!”
귀령자의 입에서 탄식이 터져 나오게 한 그 이름.
화무기(華武技).
그에게는 두 개의 별호가 있다. 첫 번째는 삼봉이다. 학문이나 기예에 능통한 식견 높은 노학자에게나 어울릴 법한 별호. 하지만 그의 삼봉은 봉오리 봉(峰)자가 아니다. 받들 봉(奉)도 아니다. 화무기의 봉은 봉인할 봉(封)이다.
정도무림맹(正道武林盟) 봉문
사도연맹(邪道聯盟) 봉문
천마신교(天魔神敎) 봉문
무림을 지탱하는 가장 강한 세 세력의 수장이 모두 그의 손에 죽었다. 무림맹주가 죽었고, 사도맹주가 죽었으며, 천마가 죽었다. 그들의 가족과 항복하지 않았던 고수들도 모두 죽었다.
그래서 그의 두 번째 별호는 고금제일(古今第一)이다.
고금제일인 화무기.
이 시대의 절대자.
화무기는 세 곳을 봉문시킨 후 자신의 집을 천하제일맹으로 선포했고, 그를 신봉하는 수천 명의 고수가 그에게로 모여들었다. 무림일통을 이뤄낸 그를 사람들은 불사무신(不死武神)이라 불렀다.
“맙소사! 회귀해도 못 이길 상대야!”
“반드시 그자를 죽일 거요.”
“대체 어떻게? 그는 무림이 생긴 이래 역대 최고의 무공천재야.”
“천재 소린 나도 듣고 자랐소.”
“그는 하늘이 내린 천무지체(天武之體)라고!”
“나도 천무지체요.”
“뭐? 자네 대체 누군가?”
“놈에게 죽은 천마가 우리 아버지요.”
“!”
남자의 말에 귀령자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가 죽은 천마의 아들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이제야 앞서 그가 해낸 일들이 이해되었다. 보통 사람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 신분일 줄이야.
“하면 자네는 어떻게 살아남았나?”
그러자 남자는 옷자락을 풀어 헤쳤다. 가슴에 남겨진 상처는 귀령자가 ‘어이쿠, 자네 귀신 아닌가?’라고 소리칠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눈을 떴을 때, 시쳇더미 속에 있었소. 생매장되기 직전에 그곳에서 기어 나왔지.”
“그랬었군.”
“내가 화무기를 용서할 수 없는 이유는 나를 죽이려 해서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를 죽여서도 아니고 간사하기 짝이 없는 내 형을 죽여서도 아니오. 마(魔)가 붙은 인생을 살면서 누군가에게 죽는 것이 뭐 그리 대수겠소?”
“하면?”
“그날 화무기는 무공을 모르는 시비들과 숙수(熟手)들, 어린아이들까지 다 죽였소. 심지어 키우던 개와 고양이까지 다 죽였지.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생명을 말살했소.”
“거짓말! 믿을 수 없네.”
“당신이 믿고 안 믿고는 내 알 바 아니오.”
귀령자는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껏 봐온 남자는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이제 중요치 않소. 실제로는 정말 큰 뜻을 지닌 대협일지도 모르지. 누군가에게는 마교를 발본색원(拔本塞源)했다며 박수를 받을지도 모르겠소. 하지만 내게 화무기는 가족을 죽인 원수이자 일말의 자비심조차 없는 냉혈한(冷血漢)일 뿐이오. 아무리 따지고 계산해봐도, 이 시대에는 그를 죽일 수 없으니 돌아가서라도 죽여야겠소. 죽이기 전에 물어봐야겠소. 이렇게까지 강한 네가 그렇게 아이들까지 다 죽여야 했느냐고.”
귀령자는 넋이 나간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남자에게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남자가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날 내 호위는 날 지키려다 여기에 구멍이 뚫려 죽었소. 혼인은커녕 친구 한 번 제대로 사귀어본 적 없는 친구요. 밤낮으로 날 지키느라 말이오. 자, 그러니 내 소중한 시간을 더 뺏지 말고 말해주시오. 세 번째 재료는 뭐요?”
“자넨 정말이지…….”
“바쁜 사람이오. 그러니 다음 재료!”
귀령자는 남자를 만난 이래 가장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자네라도 이번만큼은 구해올 수 없을 것이네.”
“무엇이오?”
“만년화리(萬年火鯉)의 내단이네. 만년화리가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다고 기록된 것이 삼백 년 전이네. 어쩌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어.”
“정말 빌어먹을 대법이군. 당신, 이 자리에서 확 그냥 베어버릴까?”
“제발 참아주시게.”
“참아야지.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기다리시오. 이번에는 꽤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소.”
“이보게! 만년화리가 낚싯대를 드리우면 그냥 올라오는 줄 아는가?”
“만년화리도 결국 잉어잖소? 이 세상 어딘가 물속에 있겠지. 기다리시오. 꼭 구해올 테니.”
불가능을 향해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귀령자는 동생에 관한 이야기나 아직도 알지 못하는 그의 이름 따윈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