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몇십 년 만에 먹는 계사면인가?
거처로 돌아온 난 동경(銅鏡) 앞에 섰다.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은 파릇했고 생기가 넘쳤다. 온종일 거울만 보고 있으라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젊어진 모습을 즐기다가, 문득 화무기를 떠올렸다.
놈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디선가 강해지기 위해 지옥 훈련을 받고 있을까?
놈이 더 강해지기 전에 찾아내서 죽일 수만 있다면 간단히 해결인데. 문제는 화무기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무림에 등장했고, 삼봉을 이룬 후에는 무림을 떠나 칩거해 버렸기 때문에 화무기에 대한 정보는 알려진 것이 전무했다. 그렇다고 전 중원에 사람을 풀어 화무기란 이름의 사람을 찾는 것도, 화무기의 돌발행동을 유발할 위험한 시도이다.
결국 내가 화무기보다 강해지는 것이 최선이다.
다행히 하늘은 내게 충분히 준비할 시간을 주었다. 시간을 내 편으로 삼아서 강해질 것이다.
화무기를 떠올려서였을까? 단전의 내공이 꿈틀거리며 반응했다.
산공독은 애초에 하독된 적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린 후였다. 비무가 끝난 후에는 이렇게 중독된 흔적이 없으니, 구평호는 제대로 독을 구해온 셈이다.
하긴 그러니 감히 천마의 혈육에게 산공독을 탈 생각을 했겠지.
잠시 그렇게 상념에 잠겨 있다가, 내 인생에서 가장 고마운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안(李安).”
내 부름에 문밖에서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네, 도련님.”
“들어와.”
그러자 문이 열리며 한 젊은 여인이 들어왔다. 무복이 터질 것 같은 그녀는 뚱뚱함을 넘어서 비대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수신호위(守身護衛), 이안.
이때는 몰랐다. 그녀가 이렇게 거대한 것이 그녀가 익힌 무공 때문이란 것을. 아니, 나 때문이란 것을.
전신석화공(全身石化功).
살을 일시적으로 돌처럼 단단하게 만드는 무공으로 그녀에게만 은밀히 전해진 비인부전(非人不傳)의 비기였다. 몸이 거대해지는 것은 이 무공의 치명적인 부작용.
난 거울을 통해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나 어때?”
거울 속에서 그녀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강호에서 제일 잘 생기셨습니다.”
이안의 목소리가 이렇게 좋았구나.
중원에서 목소리 좋은 사람을 뽑는 대회에 나간다면 반드시 우승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 정도로.
“재미없다.”
“월봉 주는 사람의 질문은 언제나 답이 정해져 있는 법이죠.”
목소리만 좋은 것이 아니라 넌 이렇게 유쾌한 성격이었구나.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친 이안이 내게 물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그날 내가 살아난 것은 이안 덕분이었다.
화무기가 날 죽이기 위해 날린 검기를 그녀가 몸을 던져 막았다.
화무기의 검기는 그녀의 전신석화공을 꿰뚫었지만, 그 과정에서 미세하게 방향을 틀었다. 그랬기에 내 심장을 아슬아슬하게 빗나간 것이다.
화무기는 내 죽음을 확인하지 않았다. 자신의 공격이 빗나갔을 것이라 여기지 않았을 테니까. 이안의 희생과 그의 자만이 나를 살린 것이다.
‘고맙다, 이안아.’
날 위해 목숨을 던질 준비가 되어 있는 그녀였는데, 이 당시의 난 그저 일개 호위로만 여겼다. 그녀의 존재를 당연하게 여겼다. 평소에 공기가 얼마나 고마운 줄 모르고 살아가는 것처럼.
“오늘 비무는 잘하셨어요. 정말 끝내줬어요.”
난 그녀에게 돌아섰다. 거울 속이 아니라 실제 그녀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기억 속의 그녀와 실제 그녀는 차이가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더 컸구나.’
난 가만히 그녀를 쳐다보며 어린 시절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서글서글한 눈매에 오뚝한 코, 웃을 때 너무나 예뻤던 인형 같은 모습을. 다들 그녀에게 이대로 크면 천하제일미(天下第一美)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 예뻤던 소녀가 어느 날 뚱뚱해져서 나타났다. 너무 살이 쪘기에 그녀가 얼마나 울었고, 얼마나 눈이 부었는지 알지 못했다.
그 어린 소녀는 그때도 오늘의 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도련님은 제가 지켜드릴 거예요.
대체 그 소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녀의 죄라고는 마교에서 태어나고, 호위무인으로 자란 것뿐인데. 그녀가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나 컸다.
천하제일미가 될 외모를 포기했는데, 나는 그녀의 마음을 보듬어주었을까? 어쩌면 뚱뚱해진 이후 점차 그녀를 냉담하게 대하지는 않았을까? 그녀와의 추억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반면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저 큰 몸을 던져서 검기를 막았고 덕분에 나는 살았다.
나는 이안을 살리는 것 만으로도 이 회귀는 충분히 보람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이안아, 나도 약속 하나 하마.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은 내가 꼭 없애 줄게.’
내가 불쑥 그녀에게 말했다.
“우린 친해지면 안 돼.”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 왜죠?”
“다른 무인도 아니고 호위 무인에게 정 쌓는 것은 나 대신 죽어달라고 점수 쌓는 거잖아? 야비한 짓이야.”
“무슨 말씀을 그리하십니까? 제가 도련님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당연한 희생이 어딨어? 언제나 자신이 우선, 그다음이 가족, 그다음이 호위 대상. 난 그런 합리적인 사람이 날 지켜줬으면 좋겠어.”
이안은 일말의 고민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전 도련님이 일 번, 이 번도 도련님입니다. 그리고 저, 가족 없습니다.”
이 고집 센 여자가 나를 생각하는 충성심의 크기를 감히 측정하지 못한다.
“오늘따라 이상하세요.”
“더 이상한 것 보여줄까? 가자.”
“어디로요?”
내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말했다.
“밥상 엎으러.”
그 길로 난 곧장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는 책임 숙수인 임 숙수를 비롯해서 주방 식구들을 모두 불러세웠다.
늘어선 이들 중에서 내가 불러낸 사람은 이곳에서 일한 지 삼 년 된 보조 숙수였다.
“왜 그랬어?”
“네? 무슨 말씀이신지요?”
“왜 내 밥에 산공독을 탔냐고.”
그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아닙니다, 전 아닙니다!”
회귀하니 좋은 점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이 녀석이 왜 산공독을 탔는지도 난 이미 알고 있다. 도박에 빠져 큰 빚을 진 그였다. 부모 돈도 탕진하고, 친우들 돈까지 모두 탕진한 그는 천마 혈육의 밥에 산공독을 타는 간 큰 짓까지 저지른 것이다. 노름이 이렇게 무섭다.
“받은 삼천 냥으로 또 노름하러 갔지?”
순간 녀석이 움찔하더니 그 자리에서 넙죽 엎드렸다.
“살려주십시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돈에 눈이 어두워서 큰 죄를 지었습니다.”
“구평호가 직접 찾아와서 돈을 줬나?”
“네.”
놈이 시인하는 순간 나는 단칼에 녀석의 목을 베었다.
서걱!
회귀 후 첫 살인이었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악이라 생각했던 자들은 가차 없이 죽이며 살아왔던 삶이었으니까. 그나마 고통 없이 죽여준 것이 놈에게 베푼 마지막 자비였다.
회귀 전 인생에서도 놈은 오늘 죽었다. 비무대회가 열린 그날 밤, 노름방에서 칼을 맞고 죽은 것이다. 아마도 살인멸구(殺人滅口)를 위해 구평호가 보낸 자객의 칼이었으리라.
어쨌든 먹는 음식에 독을 타는 일은 절대 용서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한 번의 용서가 또 다른 시도로 이어질 테니까.
“다른 자도 아니고 숙수란 놈이 밥에 독이라니!”
내 말에 참담한 표정을 짓던 임 숙수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왜 이래? 무릎도 안 좋으면서?”
“모든 것은 제 책임입니다.”
“이게 왜 임 숙수 책임이야? 독 탄 놈 책임이지.”
“주방에서 일어난 일은 모두 제 책임이니까요.”
내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임 숙수. 본교에서 불의한 일이 일어나면 우리 아버지 책임인가?”
“네?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왜 임 숙수는 자기 책임이라고 해? 괜한 소리 말고 저녁에는 계사면(鷄絲麵) 부탁해! 오랜만에 먹고 싶어.”
대체 몇십 년 만에 먹는 것인가?
“엊그제도 드셨는데요?”
“임 숙수, 나 아직 칼 들고 있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맛있게 해서 올리겠습니다.”
주방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안이 다급히 물었다.
“죄송합니다. 호위 책임자인 제 탓입니다.”
“왜들 이렇게 책임 못 져 안달이야? 책임병이라도 걸렸어?”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됐고. 이번 일 교내에 소문이나 쫙 내. 구평호가 사주했고, 독 탄 숙수 놈은 내가 베었다고.”
“혈천도마 쪽에서 부인할 겁니다.”
“그래봤자야. 여기 보고 들은 눈과 귀가 많아서.”
주방 식구들이 모두 보았으니, 부인해 봤자 소용없을 것이다.
“더러운 짓 했으면 나쁜 소문이 나야지. 쫙 소문내! 교내의 개들도 ‘산공, 산공’ 짖게 해!”
“알겠습니다.”
“가자.”
뒤따라오던 이안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 정말 오늘 뭔가 달라지신 것 같습니다.”
가장 가까이서 나를 보필하던 그녀였기에, 내 변화를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안 하시던 농담도 하시고. 행동이나 말씀도 달라지신 것 같고.”
“오늘부터 달라진 인생을 살기로 했다.”
“갑자기요?”
“응, 갑자기. 난 사람이 매일 조금씩 바뀐다고 생각지 않아. 어떤 계기가 있을 때, 확 바뀌는 거지. 그게 어렵고, 자주 있는 일이 아니라서 다들 사람 안 변한다고 말하는 거 아니겠어? 가자.”
난 그녀가 어떤 계기인지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 *
“이게 다 필요한 겁니까?”
이안은 내가 아버지와의 사냥을 위해 준비한 물건들을 보며 깜짝 놀랐다.
나는 커다란 혁낭(革囊)에 준비한 물건들을 차곡차곡 담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해.”
“도련님이 야영에 일가견이 있으신 줄 몰랐습니다.”
이안아, 본교에 있는 어떤 사람도 나만큼 야영을 많이 해본 사람은 없을 거야.
“아버지와 함께니까 준비 많이 해야지.”
“부디 좋은 시간 되셨으면 좋겠어요.”
“그게 되려나?”
괜한 엄살이 아니었다. 다른 것들은 자신 있었는데, 아버지와의 관계만큼은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 나이보다 더 살아본 나였기에…… 오히려 더 자신이 없다.
“되게 하셔야죠. 될 겁니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늘은 좋은 꿈 꾸세요.”
하지만 그날 잘 자지 못했다.
제대로 악몽을 꾸었다. 꿈속의 나는 여전히 회귀대법의 재료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원래 있던 곳에 재료가 없어 온갖 곳을 헤매다니는 꿈이었다.
그때 들려오는 이안의 목소리.
“도련님, 괜찮으세요?”
아마도 꿈꾸면서 비명이라도 지른 모양이다.
“안 괜찮아. 더러운 꿈이었어.”
“무슨 꿈을 꾸셨길래요.”
“네 경우로 비유하자면 다시 최하급 무인부터 시작하는 꿈?”
“아아! 차라리 절 죽여주세요.”
난 침상에 앉은 채로 벽에 세워진 동경을 쳐다보았다. 꿈은 꿈일 뿐이라는 듯,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이 보였다.
젊어진 내 모습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이렇게 젊은 시절의 아침을 다시 맞이할 수 있다면, 매일 악몽을 꾼다 해도 괜찮다.
“긴장하신 것 같아요.”
“호랑이보다 더 무서운 사람과의 동행이잖아.”
“저라면 숨도 제대로 못 쉴 거예요.”
“나 씻으러 간다. 새 무복으로 준비해줘.”
“네.”
지난 삶에서 힘이 들 때면 회귀하면 뭘 할까를 상상했었다. 정말 상상만 해도 기분이 좋았고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많은 상상 어디에도 회귀 이튿날 아버지와의 사냥은 없었다. 내 본능적인 선택이 옳았는지는 사냥이 끝나는 순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준비를 다 마친 난 커다란 혁낭을 매고 아버지가 기다리고 계신 천마전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