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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8화 (8/214)

제8회 칼날이 달빛에 반짝일 때.

혈천도마의 제자가 내 손에 죽었다는 소문이 교내에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했다.

그 파급만큼 이안의 걱정도 커졌다.

“난리도 아니에요. 만나는 사람마다 다 도련님과 양포 이야기만 해요.”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리고 제 이야기도요.”

싸움의 원인이 된 그녀였으니 당연히 이런저런 말들이 많을 것이다.

“유명해지면 좋지. 유명해지려고 온갖 미친 짓을 다 하는 것이 우리 무림인들이잖아?”

“저는 싫어요.”

“앞으로 더 유명해질 텐데, 어쩌나?”

이안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표정이 어둡지는 않았다. 이 난리의 중심에 변화라는 긍정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명예를 중요시하는 혈천도마님이라 걱정이에요. 제발 그냥 넘어가셔야 하는데.”

“누가 그래? 혈천도마가 명예를 중요시한다고?”

“네? 아닌가요?”

“명예를 중요시하는 사람이 제자들의 쓰레기 짓을 방치하고 용인해?”

“모르시는 것 아닐까요?”

“그건 우리 혈천도마님의 섬세함을 너무 과소평가하는 거고.”

“전에도 그렇고. 자꾸 혈천도마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처럼 말씀하세요.”

“혈천도마뿐만 아니라 다른 마존들에 대해서도 알만큼은 알아. 명색이 천마 아들인데, 그쯤은 조사해 둬야지.”

이안이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쳐다보았다. 나에 대해서 뭐든 알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 대체 자기 몰래 언제 그런 조사를 했을까 궁금하겠지.

“그럼 왜 혈천도마께서는 제자들의 파행을 그냥 두는 거죠?”

“그건…….”

확실한 이유가 있지만 이안에게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이안이 납득할만한 다른 이유를 들었다.

“그게 편하니까.”

“네?”

“행실 바른 제자보다 욕심 많고 이기적인 놈들을 다루기가 더 쉽거든. 혈천도마는 오랫동안 수제자를 정하지 않고 제자들을 경쟁시키고 있어. 왜냐? 그래야 소모품으로 쓰기 쉬우니까. 두고 봐, 양포의 빈자리도 며칠 내로 채워질 테니까.”

“무서운 분이셨네요, 도마님.”

“난 제자들이 더 무섭다. 뻔히 사부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서도 달려드는 그 녀석들이.”

“전 도련님을 모실 수 있어서 기뻐요.”

“당연하지. 어따 비교를 해? 이안아, 간만에 술 한잔할래?”

그녀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

“간만이 아니라 처음이니까요.”

“처음이야?”

“네.”

지금까지 너와 술 한잔 안 했다고? 너는 대체 무슨 동력으로 날 위해 몸을 던진 거냐?

“가자. 오늘 마시고 죽자!”

이안과 함께 마가촌(魔家村)으로 갔다.

마가촌은 본교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처음에는 마인들 가족들이 사는 작은 마을로 시작한 그곳이 이제는 큰 도시가 되었다.

난 그녀를 데리고 마가촌에서 제일 비싸고 좋은 주점으로 들어갔다.

“역사적인 날인데 좋은 곳에서 마시자.”

“저는 작고 허름한 곳도 좋습니다.”

그녀는 사람 많은 곳을 부담스러워했다. 어딜 가도 일단은 그녀에게 시선이 몰리니, 아무래도 싫겠지.

그녀를 배려해서 따로 마련된 주점의 특실로 들어갔다.

“주량이 얼마나 돼?”

“많이는 못 마십니다.”

“오늘 주량이 얼마인지 확인해 보자. 걱정 마, 취하면 내가 업고 간다.”

“저…… 무거워요.”

“괜찮아. 이 팔뚝 봐라.”

“제 팔뚝의 반이네요.”

“내가 아직 힘을 안 줘서 그래!”

그녀와 첫 술자리이니만큼 좋은 술과 요리를 잔뜩 시켰다.

“처음 먹어보는 요리에요. 이것도, 저것도.”

“다 먹어보고, 맛있는 것은 더 시키자.”

“뱃속이 놀라겠어요.”

“호위한다고 바빠서 대충 때우지? 앞으론 신경 써서 먹어.”

“보세요, 이 몸이면 대충 먹어도 괜찮답니다.”

그녀가 두툼한 팔뚝을 들어 보이며 씩 웃었다.

“대충 먹으면 더 살찐다. 내가 뭘 먹나, 이건 어떤 재료로 만들어지나. 먹는 데 신경 쓰면 쓸수록 살이 덜 찌지. 살 빼려면 미식가가 되어야 해.”

“아! 전 몰랐어요! 앞으로 그럴게요.”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어떤 음식을 먹어도, 매일 굶어도 그녀의 살은 빠지지 않는다는 것을. 저 살은 음식으로 찐 살이 아니기 때문에.

물론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부작용을 모른다 생각해서, 저렇게 말하는 것일 뿐. 부작용을 밝히고 한 마디 원망 섞인 농담이라도 할 법한데…… 너무 어려서부터 어른이 된 그녀다.

“앞으로 나랑 맛있는 것 먹으면서 배워.”

이안이 날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제게 비법 좀 알려주세요.”

“무슨 비법? 요리?”

“아뇨.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렇게 바뀔 수 있는지요.”

나는 그녀를 보며 옅게 웃었다.

“왜? 너도 바뀌고 싶어?”

“그건 아니지만…….”

그녀가 술잔을 비웠다. 어찌 변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녀의 마음속에는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이 영원히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힘들 때면 그날을 떠올릴 거고, 그래서 더 힘들어질 테고.

‘원래의 네 모습을 되찾으면 그런 비법 따윈 필요 없을 거다. 세상 사람들이 다 너를 추앙할 테니까.’

내가 따라주는 술을 공손히 받으며 이안이 물었다.

“도련님, 후계자는 어떻게 되실 작정이세요?”

지금껏 묻지 않았던 질문을 하는 것은 내게서 그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리라.

내가 술잔을 들며 나직이 말했다.

“아부만이 살길!”

이안이 웃으며 자신의 잔을 들어 살짝 부딪쳤다.

“교주님 마음을 꼭 녹이세요!”

그녀와 함께 술을 비웠다.

술을 잘 못 마신다더니 이안은 술을 곧잘 마셨다.

물론 그녀를 취하게 만든 대가를 치러야 했다. 만취한 그녀를 업고 돌아와야 했으니까.

돌아오는 내내 그녀는 등에 업혀서 소리쳤다.

“걱정마세요! 제가 도련님을 꼭 지켜드릴 거예요. 저만 믿으세요!”

“걱정 하나도 안 했는데, 네 말을 자꾸 들으니까 걱정된다.”

“걱정마시라니까요! 제가 지켜드립니다!”

“그래, 걱정 안 해.”

“하셔야죠. 걱정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걱정마세요! 제가 지켜드리니까요!”

“하하하.”

그때 건물 창이 열리며 누군가 소리쳤다.

“어떤 얼빠진 년이 한 소릴 자꾸 해대냐?”

창으로 얼굴을 내민 남자를 보며 내가 말했다.

“날 봐서 좀 봐주게.”

“너 누군데?”

“천마신교 이 공자라네.”

잠시 멍하게 나를 쳐다보더니 빛처럼 빠른 사과가 날아들었다.

“어이쿠, 죄송합니다. 공자님!”

동시에 열렸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창문이 닫혔다.

이안은 등에 업힌 채 쌔근쌔근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늦게 업어줘서 미안하다.’

거처로 돌아온 나는 그녀를 침상에 눕혀 두고 밖으로 나왔다.

마당에 다리를 뻗고 앉아서 달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와 생각하면 멸문 이후 도피 생활을 하며 난 깊은 패배감에 빠져 있었다. 회귀라는 목적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면 삶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우울감이었다.

그 무렵 서진을 만나지 않았다면? 그래서 회귀대법에 대해 알지 못했다면? 결국…… 자결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화무기를 찾아가서, 정작 그는 만나지도 못한 채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의 손에 비참하게 죽었겠지. 그래, 그랬을 거다.

그렇게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 있을 그때.

바로 옆에서 무엇인가 번쩍 달빛에 반사되었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을 때, 커다란 칼날이 얼굴 옆에 있었다.

무식하게 큰 대도(大刀)의 날에 긴장한 내 얼굴이 비쳤다.

칼날이 서서히 눕혀지며 그 뒤에 칼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칼을 쥔 거칠고 깡마른 손등의 주름은 지난 세월이 호락호락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연륜의 골이었다. 그 골짜기 너머 날카로운 눈빛이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혈천도마였다.

이렇게 갑자기 날 찾아올 줄은 몰랐기에 나는 내심 놀랐다.

내 목을 자를 듯 겨누고 있는 칼은 그의 독문무기인 멸천대도(滅天大刀)였다. 무림십대병기에 이름을 올린 멸천대도는 어지간한 병기는 부딪치는 순간 박살을 내 버려서 병기파괴자(兵器破壞者)라는 별칭이 붙어 있었다.

멸천대도가 뿜어내는 차가운 마기가 온통 주위를 휘감았다. 숨이 멎을 것 같은 서늘한 한기에 온몸의 솜털이 일제히 섰다.

‘저 칼이 내 목을 치러 날아들면 피할 수 있을까?’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회귀 전의 삶에서 얻은 심득이 아무리 깊어도, 지금은 내공이 압도적으로 딸렸으니까.

긴장감이 고조되던 그 순간, 주위를 휘감던 차디찬 기운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혈천도마가 싱긋 웃으며 멸천대도의 손잡이 끝으로 내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왜 그랬대?”

왜 자기 제자를 죽였느냐는 뜻.

방금까지만 해도 날 죽이러 온 살수 같은 기도였는데, 이제는 친근한 이웃집 노인네처럼 싱글거리며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르고 있다.

“머저리처럼 굴어서 그랬죠.”

무덤덤한 대답에 혈천도마가 빤히 나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비슷하지만 다른 눈빛이다.

아버지의 눈빛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면, 혈천도마의 눈빛은 명확했다.

적의(敵意).

나는 그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았다.

“세상에 어떤 머저리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교주의 막내아들에게 시비를 걸러 온답니까?”

휘릭!

혈천도마의 무릎에 놓여 있던 도가 튕겨 올라오며 다시 내 목을 겨눴다.

“이 머리통을 잘라 가서 교주님 눈에 넣어보라고 할까? 아픈지 안 아픈지?”

칼날 위를 흐르는 서슬 퍼런 살기는 ‘농담처럼 들렸겠지만, 아니야’라는 주인의 의지를 담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그 무섭게 찢어진 눈에 제 머리통은 안 들어갈 것 같은데요?”

내가 한발 물러나자 칼날 위를 흐르던 기운이 순식간에 손잡이 쪽으로 사라졌다. 대단하다. 깡마른 저 몸으로 이런 강대한 기운을 이리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혈천도마가 이번에는 멸천대도로 우리가 앉아 있는 앞쪽 바닥에 긴 선을 쭉 그었다. 그리고 왼쪽 끝부분 한 뼘쯤 되는 곳에 세로줄을 그었다.

“여기서 여기까지가 우리 이 공자, 여기서 저 끝까지는 나.”

구 대 일의 비율로 선이 구분되었다.

“이게 뭡니까?”

“교주님이 아끼는 정도라네.”

혈천도마 자신이 구, 내가 일이었다.

내가 손가락으로 삼분지 이쯤 되는 곳에 선을 새롭게 그었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아들인데. 이쪽이 저, 저쪽이 어르신이겠죠.”

이번에는 내가 칠, 혈천도마가 삼이었다.

혈천도마가 능글맞게 웃었다.

“시험해 보면 되겠네. 내가 이 공자 머리통을 들고 가면 교주께서 과연 날 죽일까, 살릴까?”

“천마의 부성애를 너무 과소평가하시는 것은 아니신지.”

“그러니까 시험해 보자고.”

멸천대도가 다시 천천히 나를 향해 움직였다.

나는 도의 옆면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누르며 내 목으로 다가오는 것을 막았다. 도는 차가웠다. 아무리 혈천도마가 환하게 웃고 있어도, 이 차가움이 혈천도마의 본질이다. 그걸 잊으면 죽는 거다.

“시험은 안 해도 되겠네요. 아들은 둘이고, 어르신은 하나니.”

혈천도마가 히죽 웃었다.

“이 공자는 내 제자처럼 머저리가 아니네.”

“제자분이 어르신을 닮았다면 아직 살아 있었을 텐데요.”

혈천도마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며 탁탁 두드렸다.

“이 공자, 이 늙은이는 평생 불운(不運)과 함께 살아왔네. 그러니 자주 안 보는 것이 좋아.”

말을 마친 혈천도마가 사라졌다. 내 옆에서 휙 하고 솟구친 몸이 저 멀리 어둠 속으로 떨어졌다.

그렇게 혈천도마가 사라지자 나는 옆구리부터 살폈다. 아까 혈천도마가 도의 손잡이로 쿡 찌른 곳에 시퍼런 피멍이 들어 있었다. 장난스럽게 ‘쿡쿡’ 찌른 것처럼 보였지만, 내게 온 충격은 ‘쾅쾅’이었다. 마지막에 어깨를 두드린 것도 마찬가지였다.

“젠장, 망할 늙은이.”

그를 대하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회귀한 사실과는 별개로 변수가 만들어내는 위험성은 항상 조심해야 했으니까.

내 머리통을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겠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했다는 것은, 정말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있다는 거다.

얼핏 보면 제멋대로처럼 보이지만 그는 제멋대로인 사람이 아니다. 언제나 철저히 계산하고 또 계산하는 사람이다. 제멋대로라고 느껴진다면 그 역시 계산된 제멋대로다. 그래서 상대하기가 까다로운 인물이었고.

그에 대해 여러 정보를 알고 있었지만, 잘 안다고 해서 잘 다룰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정보는 정보일 뿐, 이 유리함을 뒤집을 변수는 언제든 생길 수 있는 법이니까.

‘그나저나 왜 나를 찾아왔을까?’

제자를 죽인 것에 대한 경고일까?

아니다. 이안에게 말했듯 그는 평판을 중요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나를 보러 온 것이다. 비무대 위에서 보여준 모습이 인상적이었을 거고, 사냥을 소원으로 빈 것도 특별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거기에 자신의 제자까지 베어버렸으니 나를 시험할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다. 내게서 단맛이 나는지, 똥맛이 나는지 직접 맛보려고 온 거다. 내가 후계자가 될 수 있는지를 보려고.

‘어떤 맛이었소?’

내게 그는 매운맛이었다. 고작 혀 한 번 대었지만, 화끈했다. 대신 맛있게 매운맛이었다.

‘내 첫 상대가 혈천도마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필이면 혈천도마의 제자와 비무를 하는 날로 돌려보냈으니까.

‘아마도 당신의 그 큰 칼이 하늘의 눈에 유독 잘 띄었나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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