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회 칼춤 한 번 추겠습니다.
대성을 이룬 비천검법을 연마하고 또 연마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연마했던 무공인데, 젊어진 몸으로 펼치는 비천검법은 또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래서 무공은 평생 정진해도 그 끝을 볼 수 없다고 하는 것이리라.
비천검법을 수련하면서 동시에 아버지가 알려준 기발출 수련도 했다. 또 이번에 마정단으로 늘어난 내공과 외공이 균형을 이루도록 노력했다.
그렇게 수련에 수련을 거듭한 결과.
이곳에 들어온 지 구십칠 일이 되었을 때, 나는 늘어난 공력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기발출 역시 더욱 능숙하게, 더 많은 수의 기를 발출할 수 있게 되었다. 거미줄까진 아니지만, 벌써 열 개 이상의 기를 동시에 발출할 수 있었다.
“됐다. 여기까지.”
남은 삼 일은 조용히 마음을 다스리고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했다.
이곳에 들어온 지 백 일째 되던 날, 나는 비석을 옆으로 밀었다.
그러자 밖으로 나가는 문이 열렸다.
“으아, 이 맑은 공기! 벽곡단아, 이젠 안녕이다!”
크게 기지개를 켜며 그곳을 걸어 나왔다.
소천동 출구에 천마전의 무인이 한 명 기다리고 있었다.
“어이쿠! 공자님!”
그는 깜짝 놀라서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놀라시오?”
“이 공자님이 나오면 곧장 천마전으로 모셔오라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데 이렇게 일찍 나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적어도 오늘부터 백일은 기다려야 한다고 하셔서.”
“언제부터 기다린 겁니까?”
“오늘부터 나왔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백 일에서 이 백일 사이에 나올 거로 예상하신 거였다. 아버지가 바라보는 나의 재능이다.
이 정도면 꽤 높이 봐주셨는데?
거기에 또 하나, 적어도 내가 죽을 것으로 생각지는 않으셨구나.
어쩌면 나를 소천동에 넣으신 것이 벌이 아니라 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무인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 * *
천마전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혼자 계셨다.
아버지가 앉아 계신 태사의를 향해 붉은 융단을 천천히 걸었다.
이 융단을 사람들은 ‘피의 길’이라 부른다. 얼마나 많이 피를 흘려야 저곳에 도착할 수 있을까? 아버지는 얼마나 많은 피를 보고서야 저곳에 앉으실 수 있었던 걸까? 저 자리를 지키려면 또 얼마나 많은 피가 흘러야 할까?
“딱 백 일 걸렸구나.”
아버지의 말씀에 입이 근질거렸다. 관문은 하루 만에 깨버렸다고. 그게 지금 당신 아들이라고. 정말 뒷산 대나무숲이라도 찾아가야 할까 보다.
“발버둥을 쳤지만, 아버지 기록은 깨지 못했습니다.”
“구체는 제대로 잘랐느냐?”
“열 내지 않고 잘 잘랐습니다. 그렇게까지 실마리를 남겨주셨는데, 당연히 잘 잘라야죠. 마지막 환영진에서는 쉬지 않았고요.”
그때 나는 보았다. 아버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것을. 지금까지 보았던 그 비웃음이 아니었다. 진짜 기뻐서 짓는 미소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미소는 지어지자마자 사라졌다. 아버지에게 미소는 신기루 같은 거다.
“아주 멍청이는 아니구나.”
“그럼요, 누구 아들인데요.”
회귀 전에 내가 인식했던 아버지는 자식들의 목숨을 건 후계자 다툼을 즐기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자식의 죽음도 교의 미래를 위해 감내하는 사람이지, 적어도 다툼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한데 저를 왜 부르셨습니까?”
내게 용무를 말하기에 앞서 아버지는 한 사람을 그곳으로 불렀다.
그는 바로 본교에서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권력을 지닌 총군사(總軍師)인 사마명(司馬明)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마 군사님.”
“단지 백 일 만에 소천동을 통과하다니. 대단하십니다, 이 공자.”
그는 총군사이자 본교의 머리를 담당하고 있는 통천각(通天閣)의 각주이기도 했다. 중원의 모든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실권자로 아버지의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인물이었다.
“백 일간이나 받은 벌이지요.”
“벌입니까? 상입니까?”
사마명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아마 벌을 내리시려다가 실패하신 거겠죠?”
“하하하.”
사마명이 웃었고, 나도 함께 웃었다.
그렇게 인사가 끝나자 사마명이 본론을 꺼냈다.
“오늘 이 공자님을 뵙자고 한 것은 한 가지 교내의 일을 상의하기 위해서입니다.”
교내의 일을 처리하는데 형이 아니라 나를 불렀다? 그것도 소천동을 나오자마자 이렇게?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상황이다. 보통의 경우 교내의 일은 형에게 맡겼으니까. 외부에 나가 있더라도 서찰을 보내서 맡겼을 테고.
내 시선이 사마명 너머 태사의에 앉아 계신 아버지에게로 향했다. 결국 이번 결정은 아버지의 뜻이 개입된 일이다.
“말씀하시지요.”
“얼마 전 투서(投書)가 날아들었습니다. 마군(魔軍) 내부에서 비리가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마군은 본교의 무력 조직 중 하나로 소속 마인들의 성정이 거칠기로 유명했다.
‘아!’
내심 탄식한 이유는 마군의 수장이 바로 혈천도마의 친동생이었기 때문이었다. 또다시 혈천도마가 얽히는 순간이었다.
“지난해에도 투서가 날아들어 황천각(黃泉閣)에서 조사한 적이 있습니다.”
황천각은 반역과 비리, 부정부패를 조사하는 기관이었다. 조직의 성격상 모두가 싫어하지만, 그 모두에 우선하는 힘 있는 조직.
“하지만 당시 조사는 실패했습니다. 아무도 관련된 증언을 하지 않았고, 파견되었던 특별조사관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를 살해한 마군은 자결했고요.”
워낙 큰 사건이라 나도 기억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마군 내부에서 사건조사를 방해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증거를 찾지 못했다. 결국 사건은 흐지부지 덮이고 말았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 다시 투서가 날아든 것이다.
“이 공자께서 특별조사관이 되어서 이번 일을 처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제가 왜요? 라는 말은 필요치 않았다.
시작하기도 전에 위험한 냄새가 펄펄 풍겨오는 이 일은 아버지의 시험이었으니까.
마군과 같은 정예조직에서 비리 사건에 연루되면 참형이다. 결국 비리를 저지른 누군가는 어떻게든 자신의 죄를 감추려 할 테고, 조사관이 천마의 자식이라고 봐주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혈천도마가 내게 경고까지 한 상황에서 그의 동생이 수장으로 있는 조직을 건드린다?
“저를 사지로 내모시는군요.”
사마명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맞습니다. 이번 임무는 목숨을 걸어야 할 겁니다.”
나는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계시던 아버지가 불쑥 생각지도 못한 말씀을 하셨다.
“그들을 휘어잡고 목줄을 틀어쥘 거라면서?”
사냥터에서 아버지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야 천마가 되었을 때의 일이죠.”
“그래서 지금은 무서워서 못 하겠다?”
“아니, 말씀을 또 그렇게 하시면 제가 안 할 수 없는데…….”
아버지는 나를 소천동에 넣으면서 혈천도마의 체면을 살려주었고, 이번 시험으로는 혈천도마를 견제하려 하고 있다. 대체 아버지의 속마음은 어떤 것일까?
문득 사냥하던 날 밤에 했던 아버지의 말씀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아버지를 위해 절 죽일 수 있으십니까?
―이게 고민거리가 된다면, 독심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아선 안 되겠지.
내 시선이 아버지와 허공에서 마주쳤다.
무뚝뚝한 눈빛은 사냥 갈 때와도 똑같았고, 나를 소천동에 넣을 때와도 똑같았다.
달리 생각하면 이건 아버지의 결정이 아니다.
내가 달라진 모습으로 아버지를 대했고, 그 결과로 나온 아버지의 선택이니까. 결국 내가 선택한 길이기도 하다.
“그 멋진 별들을 보면서 뱉은 말인데, 책임져야죠. 제가 맡겠습니다.”
흔쾌한 수락에 아버지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칼춤 한번 시원하게 춰드리겠습니다.’
반면 사마명은 내 수락이 뜻밖인 모양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말씀드렸다시피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본교의 곳간을 털어먹고 있는 놈들을 그냥 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뭡니까?”
“조사권뿐만 아니라 즉결처분권(卽決處分權)도 주십시오.”
즉결처분권.
조사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대상을 죽여도 그 책임을 지지 않는 특권을 의미했다.
전례에 없는 일이었기에 사마명이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아버지는 살짝 고개를 끄덕여 허락했다.
“좋습니다. 대신 되도록 명확한 증거가 있을 때만 즉결처분권을 행사해 주십시오.”
“물론입니다.”
“어려운 일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혹여 제가 죽거들랑 무극은 용감했었노라고 비석에 새겨 주십시오.”
사마명이 피식 웃었다.
“내일 이 공자를 보좌할 황천각 조사관을 보내겠습니다.”
“기왕이면 아름다운 미녀로 보내주십시오.”
“하하하. 요즘 이 공자께서 새로운 면모를 보이신다고 들었는데, 정말 많이 달라지셨군요.”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술이라도 한잔해야죠.”
정중히 포권한 후에 그곳을 나가려다 힐끗 아버지를 돌아보며 말했다.
“아버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아들과 같이 한잔…….”
아버진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듣지도 않으시고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렸다.
내가 사마명을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겉으론 까칠하시지만, 은근히 잘해주신다고요.”
“전혀 그래 보이진 않습니다만.”
미소와 함께 한마디를 남긴 후 사마명도 그곳을 나갔다.
나는 그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군사님도 점점 아버지 닮아가십니다.”
사마명 역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두 사람 앞에서는 나는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려 했다. 그들에게 나는 파릇파릇한 청년이었으니까. 항상 마음속에 되뇐다. 과거의 어둠을 이 삶에 끌고 오지 말자고. 나는 새로 태어났다고.
천마전 앞에서 크게 기지개를 켰다.
이 시험을 잘 통과해서 후계자 자리로 한 걸음 더 다가가는 거다.
* * *
다음 날 아침, 이안이 황천각 조사관이 찾아왔다고 알려왔다.
“도련님, 저도 따라가서 돕겠습니다.”
마군을 조사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녀도 잘 알았다.
허락 대신 물었다.
“예뻐?”
“네?”
“밖에서 기다리는 조사관 예쁘냐고.”
“네?”
“괜히 오붓한 시간 방해하지 마! 질투 금지!”
그때 이안이 대체 무슨 소릴 하냐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조사관 남잔데요?”
“뭐라고?”
잠시 후 이안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온 사람은 눈에 띄게 작은 키에 우울해 보이는 눈빛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남자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황천각 특별조사관 서대룡(徐大龍)입니다.”
이름은 대룡인데 몸집은 정반대였다. 심지어 목소리도 작았다.
“왜 자네가 왔어? 총군사께 황천각에서 제일 미녀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서대룡이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그분 눈에는 제가 제일 미녀로 보였나 보죠.”
서대룡의 농담에 옆에 서 있던 이안이 풋 하고 웃었다.
“웃어? 이 비극적인 상황에서?”
이안이 재빨리 표정 관리를 했다.
“아닙니다.”
“아, 오랜만에 미녀와 오붓한 시간 좀 가지려 했더니.”
내가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일이나 하자. 마군에 대해 아는 대로 말해 봐. 버벅대기만 해. 미녀를 대신한 비극적 운명이 어떤 건지 보여줄 테니까.”
내 농담 섞인 말에 서대룡이 기다렸다는 듯 설명했다.
“마군은 마군주 휘하 총 육 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교주님의 직속 명령만 수행하는 조직으로 각 대는 삼십 명, 마군주까지 총 일백팔십일 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부군주는 없고, 일 대주가 그 역할을 대신하는데, 마군주의 심복입니다.”
“잘 외워왔네.”
“여기 마군들에 관한 자료입니다.”
그가 두툼한 서류를 내게 건넸다. 마군들의 인상파기와 이력들이 모두 적혀 있는 서류였다.
나는 그중에서 손에 잡히는 대로 한 장을 꺼냈다.
“종표에 대해 말해봐.”
이건 못 외우겠지? 하는 마음이었는데 그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마군 일대에 속한 자로 올해로 칠 년 차입니다. 독문무공은 구혼장(求魂掌)이라는 장법(掌法)이고 성격이 아주 잔혹합니다. 술과 도박을 좋아해서 몇 번이나 사고를 쳤지만 마군 측에서 무마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 물었다.
“뭐야? 어떻게 알아? 친구야? 원수야?”
“아닙니다.”
나는 다른 서류를 한 장 꺼내서 물었다. 이번에도 정확히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있었다.
“설마 여기 백팔십 명 다 외웠어?”
“네. 정확히는 백팔십일 명이죠.”
“천재잖아?”
“오랫동안 조사해온 일입니다.”
“아냐, 아냐. 이걸 다 외웠다면 천재야, 천재.”
“노력으로 인정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오, 겸손하기까지. 이제 좀 달리 보인다.”
작은 키에 좀 우울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그 우울한 분위기가 천재의 까칠함처럼 느껴졌다.
“절 보낸 이유가 미녀인 이유 말고도 있지 않겠습니까?”
“오, 겸손하기만 하면 재미없으니까, 잘난 척도 좀 해주고. 자네, 황천각에 수석으로 들어갔지?”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거지! 이안, 들었지? 수석이었냐는 질문에 어떻게 아셨습니까? 이런 대답쯤은 나와줘야지. 멋있다, 멋있어. 그렇지만 아쉽게도 사귀는 여잔 없을 테고.”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집에 거울 없어?”
“분하지만 없습니다.”
“뭐가? 거울이? 여자가?”
“아뇨, 무례한 상관에게 저항할 용기가요.”
“하하하.”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왠지 마음에 드는 녀석이다.
자, 그러면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볼까?
“그럼 마군주는 어떤 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