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4화 (14/214)

제14회 요즘은 유식한 놈이 더 용감하다.

마군주의 집무실 앞에서도 막아서는 이들이 있었다.

“사전 약속 없이는 뵐 수 없습니다.”

“공식 조사를 나온 거다. 비켜라.”

“그럴 수 없습니다.”

서대룡과 마군 사이의 반복되는 실랑이를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서대룡이 들고 있던 명령서를 마인들 앞에 내밀었다.

“이 명령서에 어떤 문양이 그려져 있는지 보이나?”

공문서이니 배경에 천마의 상징이 새겨져 있었다.

“이 명령서를 막는 건 우릴 막는 것이 아니야. 교주님을 막는 거지.”

천마가 언급되자 마인들은 흠칫 놀랐다. 아마 공문서 배경을 보여주며 천마를 언급한 사람은 내가 처음일 거다.

“우린 우습게 봐도 되지만 이건 우습게 보면 안 되지? 안 그래? 왜? 교주님도 우습게 볼 거야? 그렇게 보고할까?”

“아,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러자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모셔라.”

마인들이 안도하며 문을 열었다.

서대룡은 느꼈을 것이다. 앞서 문지기들에게도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감히 아버지를 입에 담기 어려웠겠지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 천마의 권위임을 알아야 한다.

“이 공자, 어서 오시게.”

마군주 구천양은 평범한 체구지만 덩치 큰 마군들을 압도할만한 기세를 지닌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의 형 혈천도마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닮은 얼굴, 닮은 눈빛이지만 혈천도마의 눈동자에서 본 불길은 보이지 않았다.

“어찌 뵙기가 우리 아버지 뵙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우리 애들이 무례를 범한 모양이네. 원체 무식한 놈들이니 자네가 이해해 주게.”

“우르르 몰려나와 시비나 거는 걸 보니 할 일이 없어 보이던데 책이라도 좀 읽히시지요.”

“무식해야 용감하지 않겠나?”

“옛말이죠. 요즘은 유식한 놈들이 더 용감합니다. 작전도 잘 짜고, 뭘 해야 할지도 잘 알고요.”

“내가 나이를 먹다 보니 세태에 뒤처지나 보네.”

짧은 대화가 오가는 중에도 우린 기싸움을 하고 있었다. 교내 정치에 닳고 닳은 마군주는 감정동요 없이 내 말을 받았다.

“한데 이 공자께서 어떤 일로 이번 조사의 책임을 맡은 건가?”

“아버지께서 제게 벌을 주시려는 모양입니다.”

“벌이라니?”

“사냥 갔을 때 제가 실수를 좀 했습니다.”

“아!”

마군주는 이제야 이해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를 조사관으로 보낸다는 소식에 무슨 속셈인지 온갖 생각을 다 했을 것이다.

“하면 황천각의 이번 조사는 왜 시작된 건가? 혹 이전처럼 투서라도 날아든 건가?”

대수롭지 않은 척 굴었지만, 마군주는 내심 긴장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조직이라면 모를까, 황천각만큼은 대충 뭉개서 넘길 수 있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죄가 밝혀지면 정해진 법대로 집행까지 해버리는 곳이 황천각이었으니까.

“수사와 관련된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는 말해줘도 되지 않겠나?”

우리 사이란 말을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쓰다니. 정말 이 정도 뻔뻔함은 있어야 교내 파벌 싸움의 중심이 되는 거다.

“군주님께는 솔직히 말씀드리죠. 맞습니다, 투서가 날아들었습니다.”

“역시 그랬군.”

솔직히 말하자 옆자리에 있던 서대룡이 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이 말했다. 이렇게 다 말한다고요? 내 눈빛이 말했다. 괜찮아, 다 말해도 돼.

이렇게 주고받는 눈빛에 마군주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의 눈에는 이런 행동들이 어설퍼 보일 테니까, 오히려 내게는 유리한 상황이다.

“투서가 날아들면, 황천각에서는 무조건 조사관을 파견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만.”

마군주는 당연히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마군 같은 무식하고 거친 자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다 보면 온갖 음해에 시달리게 된다네.”

“저는 오히려 그런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음해도 머리를 굴려야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말씀하신 대로 무식한 자들이라면 투서를 넣을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무식한 놈들이 욕심이 보통이 아니거든. 아무리 자네라도 조심해야 할 거야. 무식과 욕심이 합쳐지면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도 벌어지거든.”

은근한 협박에도 나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조사를 마칠 테니 불편하시더라도 이해 좀 부탁드립니다.”

살짝 굳었던 마군주의 표정이 풀어졌다.

“불편하다니? 우리가 그런 사인가? 이거 섭섭하구먼.”

“혈천도마께서 제 형님을 지지한다는 것은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닙니까?”

“그야 그렇다지만, 형님은 형님이고 나는 나 아닌가? 나는 우리 이 공자를 지지하고 있네.”

대놓고 하는 거짓말에 나는 활짝 웃어주었다.

“하하. 말씀만으로도 든든합니다. 자, 그럼 앞으로 며칠만 잘 부탁드립니다.”

“나가면 자네들이 지낼 곳을 내어 줄 거네.”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는데, 마군주가 사족을 붙였다.

“조심하게. 정말 자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이라네.”

“가령 지난번처럼 조사관이 살해당한 일처럼요?”

“설마 교주님께서 우리 이 공자 죽으라고 여길 보냈겠나? 내 신경 씀세.”

“하하, 말씀만 들어도 든든합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서대룡과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뒤통수가 뜨거운 것을 보니 아마도 그의 표정은 잔뜩 굳어 있을 것이다.

‘그럼 당신이 조심해야겠네. 아버지가 날 보낸 것이 아무래도 나나 당신이나 둘 중 하나는 죽으라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 * *

총군사 사마명은 천마 검우진이 검을 손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흑마검(黑魔劍)을 오랜만에 꺼내셨습니다.”

천마신교의 사대보검 중 하나가 바로 이 흑마검이었다.

천마가 차고 있는 천마검(天魔劍)이 제일 좋은 검이고 그다음이 이 흑마검이다. 세 번째가 사령검(邪靈劍), 마지막이 백화검(白花劍)이었다.

보검들은 고유의 성질을 지녔는데, 흑마검은 거칠고 파괴적이었고, 사령검은 어둡고 악한 기운을, 백화검은 부드럽고 고결한 성격을 지닌 검이었다.

“혹 이 공자에게 주려고 꺼내신 겁니까?”

순간 검우진의 손길이 잠시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제 놈이 복이 있으면 받아 갈 테고.”

사마명은 짐작할 수 있었다. 이 공자가 이번 일을 제대로 처리한다면 이 검을 선물로 내리려 한다는 것을.

“이 공자가 마군주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사마명은 교주의 이번 결정을 이해하지 못했다. 최근 검무극의 행보가 예상을 벗어난 모습을 보여줬다고는 하나, 그렇다고 마군을 상대할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여겨서다.

“벌써 마군들과 충돌이 있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어쩌면 소천동을 통과한 것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자신감 때문에 오히려 일을 그르칠 수도 있었다. 아직 젊다. 젊어도 너무 젊어서 그 닳고 닳은 마군주를 상대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그렇기에 사마명은 이 흑마검은 다시 보물창고의 깊숙한 곳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 확신했다.

“이번 일은 제가 직접 나서서 처리했어야 했습니다.”

지난번 황천각 조사관이 살해당한 사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마군주가 황천각주를 포섭했거나 약점을 틀어쥐었음을. 황천각주는 수하의 죽음을 제대로 재조사하지 않고 덮었다. 따라서 황천각에 맡기지 않고, 자신이 이끄는 통천각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그러자 검우진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그 녀석이 그러더군. 우린 마도를 잃어버렸다고.”

순간 사마명이 흠칫 놀랐다. 그 말은 천마뿐만 아니라 교의 총군사를 담당하는 사마명에게도 실례가 되는 말이었다.

사마명은 불쾌한 마음보다 불안한 마음이 앞섰다.

“그래서 보내신 겁니까?”

이 말은 다시 말해서 ‘그래서 죽이시려는 겁니까?’란 말과 다르지 않았다. 아직 사마명은 검무극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접하고 느끼지 못했기에, 이런 생각은 당연했다.

“그 정도 큰소리를 쳤으면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이 말 역시 사마명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건방을 떨었으면 책임을 져야지.’

사마명은 잠시 침묵하며 신중히 검날을 닦는 검우진의 손을 지켜보았다. 혈육을 사지로 보냈음에도 검우진은 일말의 동요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잃어버린 마도는…… 직접 찾겠답니까?”

“그럴 모양이지.”

“최근에 이 공자가 보여준 행보라면 한 번 기대할 만하겠습니다.”

검우진은 말없이 검 손질에만 집중했다. 잠시 자리에 서서 검손질을 지켜보던 사마명이 작별을 고했다.

“그럼 전 일이 있어서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사마명이 정중히 인사한 후 그곳을 나섰다. 붉은 융단을 걸어 나오다가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검우진은 검무극의 생사에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검을 손질하는 손길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정성을 담고 있었다.

‘설마? 이 공자가 마군주를 처리하리라 믿으시는 건가?’

평소에도 쉽게 마음을 내비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더욱더 교주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사마명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붉은 융단이 끝나는 곳에 도착했을 때, 사마명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역시…… 흑마검은 다시 보물창고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 * *

마군들이 안내한 방에서 우린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거 너무 하네요.”

그들이 내어준 방은 전혀 청소되어 있지 않았다. 곳곳에 먼지가 가득했고, 심지어 천장에는 거미줄까지 있었다.

“이해가 안 됩니다. 아무리 마군주가 대공자를 추종한다지만, 그래도 이 공자께서 직접 오셨는데.”

“저들 눈에 나는 어차피 후계싸움에서 밀려 사라질 사람이거든. 다른 싸움도 아니고, 후계싸움에서 밀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겠어? 죽는다는 거잖아. 어디 그뿐인가? 나와 친하게 지냈다간 함께 숙청당할 위험도 있으니까.”

내가 서대룡을 손가락으로 지목했다가 손날로 목을 슥 그었다. 나와 친하게 지냈다간 너도 스윽이야였는데 서대룡은 그다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교주님을 봐서도 이렇게는 못 할 것 같습니다만?”

“아는 거지. 아버지가 이런 점은 신경 쓰지 않으신다는 것을. 오히려 흥미롭게 지켜보시잖아? 그리고 이 방은 마군주 작품이 아니라 고당 놈 지시일 거다.”

“속 좁은 놈이 원한을 품었으니…….”

“제 명줄만 줄이는 짓이야. 내 예언을 잊지 마.”

“암튼 저는 청소 좀 하겠습니다. 나가 계세요.”

“같이 하자.”

“그럴 수는 없습니다.”

“안 되는 게 어딨나?”

서대룡과 함께 그곳을 깨끗이 청소했다. 내가 직접 청소하는 것이 이상했는지 그는 몇 번이나 나를 쳐다보았다. 회귀 전 인생에서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살아왔는지 알면, 내게 있어 이깟 청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될 텐데.

그와 함께 청소를 마친 후에 서대룡이 가서 깨끗한 이불을 챙겨왔다.

“정말 여기서 주무실 겁니까?”

“응.”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우린 투서를 보낸 사람을 찾아야 해. 최대한 이곳에 있어야 우리에게 접근할 기회가 생기겠지.”

“그렇다면 제가 있겠습니다. 이 공자님은 거처로 돌아가셔서 주무십시오.”

“너 혼자 잤다간 밤에 변태 같은 놈이 침입할 수도 있어. 몸집 작은 남자를 보면 환장하는 변태라도 들어오면 어쩔 건데?”

나는 농담처럼 말했는데, 서대룡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같이 주무시죠.”

“내가 그런 변태면 어쩌려고?”

“저도 숨겨둔 마음을 꺼내겠습니다.”

칙칙한 녀석이 이런 농담을 하니 그와 나 사이에 찬바람이 휭 하고 부는 것 같았다.

“배고프다. 밥이나 먹으러 가자.”

방을 나선 우리가 건물을 나왔을 때, 입구에서 일대주 고당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러진 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는 모른 척 반갑게 인사했다.

“고 대주, 식사하셨소? 안 하셨으면 함께 갑시다. 헛, 손을 다쳤구려. 어쩌다가 다친 거요?”

고당은 화난 맹수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철천지원수라도 이렇게 무섭게 쳐다보진 않을 것이다. 원래는 차갑게 경고하려 했나 본데, 얄미운 내 반응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공자, 그대의 비겁한 짓은 잊지 않을 거요.”

그는 내가 기습을 해서 손이 부러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기습이 아니더라도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앞으로 내게 하려는 모든 수작은 죽음 위에서 하는 위태로운 외줄 타기가 될 거다.

“무슨 말씀이시오?”

내가 모른 척 딱 잡아떼자 놈이 이를 바드득 갈았다.

“가끔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더이다. 귀한 신분은 배에 칼이 들어가지 않을 거라고.”

“그 손으로 칼을 들 수나 있겠소?”

“어디 두고 봅시다. 칼을 떨구는지, 창자를 떨구는지.”

선을 넘는 악담이었음에도 나는 웃으며 손을 흔들어주었고, 그는 씩씩거리며 그곳을 떠났다.

“너무 자극하시는 것 아닙니까?”

“저놈이 날 자극한 거지.”

“네?”

“날 협박하려고 기다린 것도 저놈이고, 배에 칼을 쑤시겠다고 한 것도 저놈이잖아?”

“그러고 보니 그렇긴 하네요.”

“악당이니까, 원래 저런 놈이니까, 우린 이런저런 이유로 악인을 이해하는데 말이야. 난 그거 못난 짓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왜 악인을 이해해? 더 엄격한 잣대를 대야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가혹하게. 고개를 숙이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이 악당 새끼가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하고.”

완전히 공감한다는 듯 서대룡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밥맛 떨어지는 놈 봤으니, 제일 비싸고 맛있는 거로 사 먹자.”

“네.”

“돈 쓰겠다는데 좀 격렬한 반응 못 해줘?”

“죄송합니다. 제가 먹는 것을 즐기지 않아서요.”

“뭔들 즐기시겠어? 가서 넌 국수나 먹어.”

“네.”

정말 서대룡은 입이 짧았다.

그 비싼 요리를 반이나 남기는 것 보고, 다음에는 정말 국수나 사줘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렇게 식사하고 돌아왔을 때, 우린 잠시 멍하게 침상을 쳐다보았다.

침상 위에는 죽은 까마귀 한 쌍이 던져져 있었다.

서대룡은 그러잖아도 우울한 눈빛인데 더욱 우울해졌다.

“이불 다시 구해와야겠네요.”

“그 전에 그거 들고 따라와.”

“이건 왜요?”

내가 성큼성큼 방을 나서며 말했다.

“우리도 산 까마귀보다 죽은 까마귀가 필요하거든.”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