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우리가 마귀인데.
새 검을 받았을 때는 처음이 중요하다.
검은 무인과 교감하는데, 흑마검과 같은 절세보검은 교감의 깊이가 다른 검과는 비교할 수 없다.
검이 무인을 거부하는 경우는 없지만, 교감이 잘 이루어지지 않으면 검이 지닌 위력을 최고로 끌어내지 못한다.
검의 성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극음(極陰)의 기운을 지닌 병기를 극양(極陽)의 내공을 지닌 사람이 사용한다거나, 불문(佛門)의 무기를 사공(邪功)을 지닌 이가 사용한다거나.
더불어 검을 다루는 방식도 중요하다. 이 흑마검처럼 거친 성질을 지닌 검을 부드럽게 다룬다거나, 부드러운 백화검을 거칠게 다룬다거나. 이런 경우도 검이 지닌 위력을 십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회귀 전 삶에서 나는 검이 주인과 동화되어 스스로 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그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고, 나도 저런 검을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 검과 그렇게 동화될 수 있을까?’
운기조식으로 마음을 다스린 후, 흑마검을 뽑아 들었다.
진기를 주입하지 않았는데도 검 자체의 예기(銳氣)에 주위가 서늘해졌다.
―반갑다, 내가 앞으로 네 주인이다.
천천히 흑마검에 내력을 주입했다. 내 내공과 흑마검이 처음 만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서리기 시작한 검강.
하늘을 닮은 푸른색 물결이 검날을 타고 일렁였다.
‘확실히 다르구나!’
지금까지의 검강 색과 달랐다. 흑마검이기에 더 짙고 어두워질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밝으면서도 환한 느낌을 주는 푸른색이었다. 사소한 것에 더 감격할 때가 있는 것처럼, 검강의 색이 바뀐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너 마음에 든다.’
나는 내 감정이 그대로 흑마검에 전해지기를 바랐다.
검강을 회수한 후 이번에는 비천검법의 초식을 발휘했다.
흑마검은 부드러운 검이 아니다. 검의 성질에 맞게 최대한 강력하고 거친 기세를 담아 초식을 운용해야 한다.
흑마검으로 펼치는 비천검법은 기존에 펼쳤던 것과는 다른 느낌을 주었다.
한차례 초식을 마친 후 마음속으로 검에게 말했다.
―당분간 우린 이 검법으로 살아남을 거다. 나중에 정말 끝내주는 무공을 알려줄 거야. 그때까지 잘 버티자. 알겠지?
나는 흑마검과 교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마음만 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기에 흑마검이 손에 익을 때까지 수련하고 또 수련했다.
밥 먹고 수련하고, 눈뜨자마자 수련하고. 때론 밥도 먹지 않고 수련했다. 잘 때도 손에 쥐고 잤다. 꿈속에서도 수련했다.
그렇게 한동안 수련에만 매진했다.
오늘도 수련장을 가려고 집을 나서던 나는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랐다.
수백 명의 마인들이 집 앞 큰 공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혈천도마의 수하들인 도귀들이었다. 혈천도마가 시켜서 온 것인지, 혹은 자발적으로 온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를 향한 감정이 적대적인 것은 확실했다.
차가운 눈빛과 함께 그들이 내뿜는 마기가 내게 쏟아졌다.
나도 모르게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회귀 전의 그 긴 인생에서도 이렇게 많은 사람의 기운을 한꺼번에 받아본 적은 없었다. 좋은 기운이라도 질릴 판인데, 이건 명백한 살의였다.
더 버티면 내상을 입을 상황!
그럼에도 물러나지 않자 그들의 마기가 더욱 강해졌다. 정말이지 마기가 소나기처럼 투두둑 몸에 박혔다. 온몸이 찢어질 듯 아플 때, 불현듯 떠오른 한 가지 비술.
난 마기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한 가지 구결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천맥강화술(千脈强化術).
회귀 전 인생에서 배워뒀던 몇 가지 비술 중 하나로, 혈맥을 강화할 수 있는 비술이었다.
진기의 통로인 혈맥은 무인에게 가장 중요한 부위지만, 무인의 몸 중에서도 강하게 만들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기도 하다.
천맥강화술은 여러 무인이 동시에 내기를 발출해서 대상의 전신을 두드려서 혈맥을 강화하는 비술로, 그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효과가 좋았다.
이렇게 많은 마기를 한꺼번에 받을 기회는 흔치 않았기에 나는 위험을 무릅쓰고 천맥강화술을 발휘한 것이다.
언젠가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그게 오늘이 될 줄이야.
내가 눈을 감으며 짐짓 고통스럽다는 표정을 짓자, 옳다구나 신이 난 놈들이 더욱 강한 마기를 쏟아냈다.
‘더, 더, 더!’
나는 기쁜 만큼 인상을 찌푸렸다.
놈들은 내가 물러서기를 바랐을 것이다. 마기를 피해 집 안으로 숨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렇게 며칠이고 이곳에서 압박해 나를 집 밖으로도 못 나오는 겁쟁이로 만들고 싶었으리라.
나는 천맥강화술을 펼치며 앞으로 한걸음 씩 나아갔다.
그러자 마기는 더욱 강하게 쏟아졌다.
온몸의 혈맥이 경련했고, 진기는 무서운 속도로 혈맥강화술의 구결을 따라 온몸을 휘돌았다.
이제 천맥강화술의 경지는 이단을 거쳐 삼단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더, 더, 더!’
앞으로 한 걸음씩 옮길수록 놈들의 마기는 발작했다. 기세 싸움이자, 자존심 싸움이었다.
그렇게 몇 걸음을 걸어 나간 것일까?
천맥강화술은 어느새 사단을 거쳐 마지막 단계인 오단을 향하고 있었다.
원래는 이렇게 빠른 성취는 불가능했다. 천맥강화술에서 가장 어려운 점이 시전자의 마음이 일치하여 하나의 기운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 내게 날아드는 마기에 실린 감정은 하나, 적의였다.
그렇게 끝도 없이 쏟아질 것만 같았던 마기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도귀들이 마기를 쏟아내는 데에도 내력의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마기가 완전히 사라졌을 때 나는 눈을 떴다. 천맥강화술은 마지막 오단을 완성한 후였다. 덕분에 내 혈맥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나를 쳐다보는 도귀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모두 경악하고 질린 얼굴이었다. 설마 내가 끝까지 마기를 버텨낼 줄은 몰랐겠지.
이렇게 개떼처럼 몰려와서 다짜고짜 마기를 쏟아내는 것은 비열하고 치사한 짓이지만, 오늘만큼은 용서해 주리라 생각했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그들을 향해 걸어갔다.
수백이 모였음에도 그곳은 내 발소리만 났다.
누군가 이때 ‘죽여!’라고 소리치면 순식간에 장내가 피바다가 될 것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이 기 싸움의 승자는 나였다. 앞서 날아들었던 마기를 견뎌낸 것으로, 이미 도귀들의 기세를 꺾어버렸으니까.
선두에 있던 도귀가 옆으로 피해 길을 내어주는 것을 필두로, 마치 일렬로 서 있던 조각들이 연속해서 쓰러지는 것처럼, 뒤에 서 있던 도귀들도 옆으로 비켜섰다. 나는 인파가 만들어낸 길 사이로 걸었다.
도귀들의 표정은 다양했다. 어떤 놈은 놀랐고, 어떤 놈은 질렸고, 어떤 놈은 감탄했으며 또 어떤 놈은 화가 나 있었다.
하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그 누구도 도발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세 싸움에서는 이겼지만, 괜히 자존심을 건들면 도귀들을 미쳐 날뛸 것을 알았기에.
그렇게 나는 조용히 그곳을 걸어 나왔다.
마지막 걸음을 옮길 즈음, 나는 도귀들의 감정이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내가 마기를 이겨낸 것과 그들 사이를 걸어 나간 배짱에 존경심을 표하고 있었다.
마인들은 단순하다. 약한 놈을 보면 짓밟고 강한 자를 보면 숭배한다. 비겁한 속성이라기보다는 본성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게 그곳을 완전히 빠져나왔을 때, 비로소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단 한마디도 그들과 주고받지 않았지만, 한바탕 큰 전쟁을 벌인 느낌이었다.
나는 그 길로 한 사람을 만나러 갔다.
붉은 융단을 걸어서 빈 태사의 앞까지 걸어갔다.
감히 계단을 올라가서 앉아볼 수는 없었지만, 저 자리에 앉아 이곳을 내려다보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했다.
그때 뒤에서 들리는 묵직한 목소리.
“앉고 싶으냐?”
목소리의 주인은 아버지였다.
나는 돌아보지 않은 채 대답했다.
“아뇨, 저는 저 의자에 갇히고 싶지 않습니다.”
“또 궤변을 늘어놓으려는구나.”
내가 웃으며 돌아서서 아버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버지는 나를 지나쳐 태사의를 향해 걸어 올라갔다.
“이리 올라오너라.”
태사의 옆에서 아버지가 나를 불렀다.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아버지 옆에 섰다.
“앉아라.”
괜한 객쩍은 소리 한마디 할 순간이었지만 나는 조용히 자리에 앉았다. 한번은 앉아보고 싶었던 자리였다.
“어떠냐?”
나는 태사의에서 보이는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붉은 융단을 중심으로 좌우의 기둥들과 벽에 새겨진 악귀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고 웅장한 장식들로 꾸며져 있었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장내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황량했다.
“굉장히 흥분될 줄 알았는데, 아무런 감흥이 없습니다.”
그러자 아버지는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나도 그랬다.”
고개를 돌려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그 무뚝뚝한 눈빛에 지난 세월의 회한이 스칠 법도 했지만, 아버지는 언제나처럼 변함없는 모습이었다.
“아까 도귀들이 몰려왔습니다. 혈천도마가 시킨 건지, 저희끼리 작당해서 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내 말을 끊었다.
“저희들끼리 간 거다.”
“알고 계셨군요.”
역시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셨다. 나도, 팔마존도, 모두 아버지의 감시하에 있다.
“그들은 제게 노골적인 적의를 보였습니다. 저는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고 버텼고요. 막상 버틸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그곳을 벗어나자 떨렸습니다.”
“그들이 두려웠더냐?”
“아뇨, 도귀들이 아니라 제 판단이 틀렸을까 봐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만약 누군가 흥분해서 달려들어 싸움이 벌어졌다면, 전 그곳에서 죽었을지도 모릅니다. 설령 살아남는다고 해도 도귀들을 학살한 제가 후계자가 될 수는 없겠지요. 그래서 두려웠나 봅니다. 모든 것이 걸린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이 또 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전했다.
누군가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고, 그건 이안이 아니라 아버지였다. 왜일까? 정서적으로는 이안이 더 가까운 사람인데.
“그런 생각이 들자 아버지가 뵙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무심히 툭 내뱉었다.
“마인은 돌아보는 사람이 아니다. 앞만 보고 가는 사람이지.”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가는 인생이라…… 그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 누구보다 나는 잘 안다.
‘아버지 말씀대로 돌아보지도 않겠지만, 그렇다고 앞만 보지도 않을 겁니다.’
우린 그렇게 태사의에서 보이는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여기서 보이는 풍경이 너무 황량합니다. 굳이 저런 악귀상을 세워둘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마귀란 것을 잊으면 안 되니까.”
그 말에 이질감이 드는 것을 보니 마귀로 살 팔자는 아닌가 싶다.
“차라리 미녀상 어떻습니까? 그 유명한 중원사화(中原四花)로 말입니다. 귀퉁이마다 한 명씩 세워두는 겁니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아버지가 한심하다는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헛소리가 나오는 걸 보니 일어날 때가 됐나 봅니다. 앉으십시오, 아버지.”
태사의에서 일어나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아래에서 돌아서니 아버지는 여전히 태사의 옆에 서 계셨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 눈빛을 마주 보며 차분히 물었다.
“혈천도마를 죽여도 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