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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21화 (21/214)

제21회 네 걸음이면 충분하다.

“하하하하하!”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대청을 쩌렁쩌렁 울렸다.

“사람 죽이겠다는 말이 이렇게 웃으실 일입니까?”

웃음을 뚝 그친 아버지가 단정하듯 말했다.

“마군주는 죽일 수 있어도, 혈천도마는 어림없다.”

아직은 못 죽인다는 말씀.

“그럼 왜 저를 혈천도마와 충돌하게 만드셨습니까? 책임지십시오!”

“오냐, 책임지마.”

시원한 대답만큼이나 책임도 시원하게 지셨다.

“네게 황천각주를 맡기겠다.”

난 깜짝 놀랐다. 설마 나를 황천각주에 임명할 줄은 정말 꿈에도 예상 못 했으니까.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물론 천마의 의지에 불가능한 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일개 조사관이 마군주를 죽인 것은 가능한 일이더냐?”

일이 이렇게 흘러가자, 어쩌면 아버지는 애초에 나를 황천각주로 임명하는 일까지 염두에 두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강 한 번 제대로 잡고 싶다면서?”

나는 저 말이 이렇게 들렸다.

칼을 쥐여줄 테니, 한번 날뛰어 봐라.

좀 더 나쁘게 말하자면 네가 방패가 되고 칼받이 노릇을 해라.

아버지가 직접 나서기에는 이래저래 걸리는 일들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천방지축 날뛰는 천마의 막내아들이라면?

‘혹 저를 이용해서 아버지가 미뤄두셨던 일들을 처리하시려는 겁니까? 제가 죽든 말든 상관없이요.’

비정한 부정(父情)인지, 아니면 나를 후계자로 삼으려는 결정에서 나온 선택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래, 이 문제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말자.

일전에 아버지가 해준 말씀이 옳다.

―절대 알 수 없는 것이 사람 마음이다.

마음을 읽으려 하지 말고, 보고 들은 대로 판단하면 된다. 상대의 마음을 읽어서가 아니라 펼쳐지는 상황으로 판단하는 거다.

아버지는 원래 이런 사람이었다. 벽에 자식을 위해 글귀를 남기는 사람이기도 하고, 이용 가치가 있다면 이렇게 자식을 위험한 일에 내던져버리는 사람이기도 한 것이다.

오히려 이런 아버지라서 편하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해드리고, 내가 필요한 것을 얻으면 되니까.

“소를 잡으라고 내보내시면 칼 한 자루는 쥐여주셔야죠.”

“원하는 게 있느냐?”

회귀한 후 반드시 가야 할 곳 중 한 곳의 이름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저를 천마서각(天魔書閣)에 넣어 주십시오.”

천마서각은 온갖 귀중한 무림비급을 모아둔 곳으로 천마를 비롯한 극소수의 허가된 사람만이 출입할 수 있었다.

“천마서각은 왜?”

아버지의 표정에 절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곳에 들어간다고 절세신공을 익힐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비급 제목만 보다 끝날 거다.”

그만큼 많은 비급이 있었다. 설령 운 좋게 최상의 무공을 찾는다고 해도 내가 익힌 비천검법과 비슷한 수준.

아버지의 눈빛에 ‘그걸 네가 모를 리 없을 텐데?’라는 의구심과 질책이 담겼다.

“제 운을 시험해 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궁금하실 거다. 이놈이 대체 무슨 의도로 이러는가 하고.

잠시 나를 응시하던 아버지가 결정을 내렸다.

“네게 어떤 야비한 의도가 있는지 모르겠다만.”

굳이 안 붙여도 좋았을 말씀을 하신 후에야 아버지는 허락하셨다.

“칠 일간 천마서각 출입을 허락한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칠 일, 아직 후계자가 아닌 나에게는 그야말로 파격적인 시간이었다. 그만큼 황천각주를 맡기는 일이 중요한 일이란 뜻이기도 했다.

“본교의 기강은 딱 칠 일만 기다리라고 하십시오!”

* * *

내가 천마서각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에 이안은 몹시 흥분했다.

“도련님, 천마서각에 들어가시면 한 가지 무공을 집중적으로 외워서 나오셔야 해요. 욕심내시면 아무것도 얻지 못해요. 참, 밥은 꼭 챙겨 드세요. 괜히 시간 아낀다고 식사를 거르시면 기억력이 떨어져서 오히려 손해니까요. 아, 그리고 거기가 너무 넓어서 길을 잃을 수 있으니…….”

쉬지 않고 떠들어대는 이안을 보며 난 다시 한번 반성했다.

내 기억 속의 이안은 정말 과묵한 사람이었다.

이렇게나 수다쟁이인 그녀인데.

그때의 난 그랬나 보다. 그저 후계자가 되고 싶은 열망만 가득한 채 천마전 지붕만 쳐다보았던 모양이다. 정작 내 꿈을 이루게 도와줄 사람들은 바로 눈앞에 이렇게 서 있는데.

그래서 이안은 과묵해졌으리라. 이 말 많고 유쾌한 여인을 과묵하게 만든 것은 나다.

“제 말씀 들으셨습니까?”

“들었어. 한 가지에 집중하고, 밥 잘 챙겨 먹어라.”

“잘 주무시고요. 그럼 꼭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랄게요. 잊지 마세요. 후계자가 아닌데 천마서각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에요.”

“어휴, 귀에서 피 나겠다. 으윽, 이미 나고 있을지도.”

“앗, 죄송해요. 앞으론 말수 줄이겠습니다.”

“아냐. 우울증 걸린 수신호위는 더 끔찍해.”

“그럼 제 말 꼭 명심하시고, 아 또 생각하셔야 할 것이 비급을 찾으실 때는…….”

“제발!”

사실 이안은 그렇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 넓은 천마서각에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내가 천마서각에 들어오려는 이유를 설명하자면, 회귀대법의 마지막 재료인 비마혼을 찾을 때로 돌아가야 한다.

난 비마혼을 구하려고 봉문 이후의 천마신교로 돌아갔었다.

얼굴에 깊은 상처를 내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었고, 교를 떠난 지 수십 년이 지난 데에다 얼굴까지 훼손한 나를 그들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나는 일반 무인에서 새로운 교주와 독대할 수 있을 정도의 자리까지 오직 내 힘으로 올라갔다.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마혼을 구했던 그 마지막 해, 나는 한 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풍신사보(風神四步).

풍신사보를 얻은 사람은 바로 당시 봉문마교의 교주였던 주백도(周栢道)였다. 봉문 이후 수십 년 세월 사이에 교주가 여섯 번이나 바뀌었으니, 본교가 얼마나 혼란했을지 상상할 수 있으리라.

난 그가 술자리에서 내게 했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실전된 풍신사보를 찾는 바람에 교주 자리에 오를 수 있었지.”

풍신사보.

단 네 개의 초식으로 이뤄진 명실공히 최고의 보법.

한때 천마의 무공을 보좌하기도 했다는데 어느 대에선가 실전되면서 더는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한데 주백도가 그 풍신사보를 얻은 것이다.

“……전대 교주와 그 혈육들이 갑자기 참변을 당하는 바람에 천마의 독문무공인 구화마공이 실전되었다네. 그나마 다행은 천마전만 쓸렸기 때문에 본교의 전력을 보존한 채 봉문할 수 있었다는 점이지. 이후 본교는 교주 자리를 두고 혼란의 연속이었지. 만약 내가 풍신사보를 얻지 못했다면 본교는 혼란이 계속되다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무너졌을 것이네.”

자신의 무공에 보법을 더한 것만으로 교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으니, 풍신사보가 얼마나 뛰어난 무공인지 알 수 있었다.

“풍신사보는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천마서각에서. 당시 난 천마서각의 관리 책임을 맡고 있었지.”

“그곳에 비급이 있었다면 왜 실전되었다고 알려졌습니까?”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

그날 그와 술을 마시지 않았다면, 그날 그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면, 그날 그가 취기에 올라 무용담을 자랑하지 않았다면, 나는 풍신사보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천마서각은 내가 살면서 본 서고 중에서 가장 넓었다.

아흔아홉 개의 거대한 책장이 서고를 꽉 채우고 있었는데, 무공에 관한 온갖 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곳곳에 보는 사람의 심장을 뛰게 하는 절세 무공들도 있었는데 본교가 오랜 세월을 거쳐 모아온 비급들이었다.

나는 천천히 오래된 책 냄새를 음미하며 책장 사이를 걸었다. 끝도 없는 책장들, 그 책장에 꽉 채워진 무공비급들, 정말 제목만 읽어도 칠 일이란 시간이 모자랄 것 같았다.

물론 나는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를 할 필요가 없다.

“여기구나.”

내가 멈춰 선 곳은 열아홉 번째 책장 앞이었다.

이곳에는 음공(音功)에 관한 비급들이 꽂혀 있었다. 물론 내 새 인생을 음악과 함께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꽂혀 있는 비급들이 아니라 책장 아래를 보았다. 책 무게에 한쪽이 내려앉은 책장의 높이를 맞추기 위해 책이 한 권 받쳐져 있었다.

내공을 사용해서 책장을 살짝 들었고, 아래에 받쳐져 있던 책을 꺼냈다.

그렇게 세상에 나온 낡은 비급 표지에 적힌 네 글자.

風神四步.

“정말 여기 있었구나!”

나는 뛸 듯이 기뻐했다.

다시 과거 주백도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풍신사보는 책장에 꽂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 귀한 비급이 열아홉 번째 책장의 받침대로 쓰이고 있었네.”

그가 이것을 발견한 것은 강박증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는 젓가락을 놓아도 똑바로 놓아야 하고, 옷을 개어도 반듯하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개어야 하는 성격이었다. 탁자 귀퉁이에 물잔이 올려져 있으면 그것이 떨어질까 신경 쓰여 밥을 먹지 못한다고 했다.

천마서각에서도 책장 아래 받쳐진 그것이 삐뚤어진 것을 보고 똑바로 맞추려는 과정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 귀한 비급이 왜 책장 받침이 되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무공을 발견한 주백도 역시 알지 못했다.

과거에 어떤 비화가 있었겠거니 한다.

천하제일의 보법을 이곳에 숨겨야 하는 어떤 사건이 벌어졌을 것이다. 후계 다툼의 과정일 수도 있고, 어느 대 천마의 잘못된 사랑의 결과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의 그릇된 야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덕분에 나는 풍신사보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비급의 첫 장을 열었다.

본격적인 구결에 앞서 도도하게 적힌 한 줄의 글귀가 내 가슴을 벅차오르게 했다.

―천하를 걷기에 네 걸음이면 충분하다.

그래, 이거지! 천하제일을 다투는 무공인데 이 정도 도도함은 있어야지.

풍신사보는 크게 네 초식으로 이뤄져 있었다.

암영보(暗影步)

점멸보(點滅步)

명왕보(冥王步)

쾌속보(快速步)

첫 번째 걸음인 암영보는 어딘가 잠입할 때의 보법이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의 눈을 피하는 정도지만, 경지가 오를수록 피할 수 있는 숫자가 늘어난다. 암영보가 대성을 이루면 수십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서도 순식간에 사라져 버릴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두 번째 걸음인 점멸보는 방어를 위한 보법으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날아들었을 때, 반드시 살길을 찾아내는 회피법이었다.

세 번째 걸음인 명왕보는 상대를 향해 파고드는 보법이었는데 어떤 방어나 회피도 무력화할 수 있다고 설명되어 있었다.

마치 명왕보는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내가 열어줄 테니, 목은 네가 따라.

따라서 명왕보와 점멸보는 그야말로 모순적이었다. 반드시 피하는 보법과 반드시 파고드는 보법, 두 초식이 충돌한다면 무공을 펼치는 무인의 자질에 따라 창이 부러지든, 방패가 뚫리든 할 것이다.

마지막 걸음인 쾌속보는 빠름의 끝이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경공술이었다. 쾌속보의 경지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중원은 좁아질 것이다. 대성을 이룬 쾌속보라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이동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했다.

결국 풍신사보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스며들고, 피하고, 공격하고, 달리고.

누군가를 상대함에 있어 이 완벽한 네 발걸음이면 충분하지 않느냐고.

나는 천마서각 구석에 앉아 조용히 구결을 외워나갔다.

이안의 조언은 충실히 받아들였다. 챙겨온 육포로 끼니마다 잘 챙겨 먹었고, 잘 시간이 되면 푹 잤다. 대신 맑은 정신으로 남은 모든 시간을 풍신사보에 집중했다.

구결의 깊이는 바다처럼 깊었고, 담긴 뜻은 하늘처럼 넓었다.

하나의 훌륭한 초식을 바탕으로 상황에 맞게 변형시켜서 사용하라고 만든 무공이었다. 그래서 수십 개의 초식으로 빈틈없이 꽉 짜인 무공보다 이해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회귀 전의 인생이 없었다면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깊이였다.

그래서였을까? 한 번 읽을 때가 다르고, 두 번 읽을 때가 다르고, 열 번째 읽을 때가 달랐다.

그렇게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구결에 빠져들었다.

천마서각에 들어온 지 칠 일 후, 나는 풍신사보의 구결을 완벽하게 외웠고 그것을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겨우 일 성의 경지였고, 앞으로 계속된 수련으로 경지를 높여갈 일만 남았다.

나는 비급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뜯어내서 삼켜버리고 나머지를 책장 아래에 받쳐두었다. 풍신사보는 천하제일보법에서 책장 받침으로 역할이 바뀌었다.

나는 다른 운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풍신사보를 배우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내 욕망에 솔직하고자 한다.

그러고 나서 나는 천마서각 밖으로 첫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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