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회 몰래 가르쳐주면 되죠.
천마서각에서 나온 나는 천마전부터 찾아갔다.
“다녀왔습니다.”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시던 아버지가 앞으로 다가오게 했다.
“더 가까이 오너라.”
나는 다섯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조금 더.”
이번에는 세 걸음.
“더.”
계단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아버지는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무슨 무공을 익혔는지 궁금하셨겠지만, 나는 풍신사보를 사용하지 않고 걸었기에 내 움직임으로 뭔가를 알 수는 없었다.
“천마서각에서 무슨 무공을 익혔느냐?”
“비밀입니다.”
당연히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았다는 듯, 아버지는 망설이지 않고 마기를 발출했다.
“두 번 묻지 않겠다.”
날아든 마기는 앞서 도귀들이 보낸 마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따끔거리고 아픈 것이 아니라, 어두운 심연(深淵)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몸이 차가워졌고 진기의 흐름이 절로 느려졌다.
애초에 아버지에게 숨길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솔직히 대답했다.
“보법을 익혔습니다.”
“어떤 보법?”
“풍신사보입니다.”
이건 놀람이 만들어낸 정적이다.
이내 잠시 거두어졌던 마기가 다시 나를 덮쳤다.
“헛소리는 집어치워라.”
“정말입니다.”
마기는 나를 더 깊은 심연으로 끌어들였다. 마기가 목까지 차오르고, 얼굴까지 빠져드는 와중에도 아버지를 향한 내 눈빛은 숨기는 것이 없었다.
나는 늪과 같은 심연으로 한없이 빠져들었다. 숨이 막혀왔다. 설마 나를 죽이기야 하겠느냐는 마음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질식의 공포가 나를 엄습해왔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거대한 뭔가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았다.
‘!’
그것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를 짓누르던 것들이 사라졌고 나는 천마전의 붉은 융단 끝자락에 서 있었다.
마기를 거둬들인 아버지가 명령하듯 말했다.
“네가 배웠다는 무공을 펼쳐봐라.”
아직도 아버지는 그것이 풍신사보임을 믿지 않았다.
“그 대가로 뭘 주실 겁니까?”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신의 인생에서 누군가 조건을 걸며 뭔가를 요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테니까.
“살려는 주마.”
나는 옅게 웃으며 뒤로 물러나 대청 가운데 섰다.
그리고 풍신사보를 천천히 펼쳐 보였다.
암영보가 펼쳐지자 아버지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걸음부터 다른 무공과 다름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렇게 풍신사보의 초식을 모두 마쳤다.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아버지였지만 지금은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실전된 무공이었기에 아버지도 풍신사보를 오늘 처음 보았겠지만, 이 무공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정확히 알아보신 것이다.
“풍신사보를 어디서 익힌 것이냐?”
이제 아버지는 이 보법이 풍신사보임을 믿었다.
“천마서각에서 익혔습니다.”
휘익.
순식간에 공간을 가로질러 내 앞까지 온 아버지가 내 목을 움켜쥐며 차갑게 물었다.
“감히 내게 거짓을 고하는 것이냐?”
당장에라도 내 목을 부러뜨리려 했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내 몸에 손을 대는 순간이었고, 그 감정은 분노였다.
하지만 나는 화가 나지 않았다. 무공엔 진심인 아버지다. 그랬기에 저 자리에 있는 것이고, 이렇게 강한 것이겠지. 나는 이런 아버지를 이해한다.
“천마서각에는 풍신사보가 없었다.”
온몸의 피가 얼어붙을 것 같은 차가운 기운이 아버지의 손끝을 통해 전해져왔다. 앞서 심연에 잠겨 드는 것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저는 분명 그곳에서 익혔습니다.”
“거짓말이다!”
“그 많은 비급을 다 보셨다고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보법이 꽂힌 책장이 아니라 다른 책장에 꽂혀 있었을 수도 있지요.”
“그렇다면 넌 풍신사보가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몰랐습니다.”
“거짓말!”
“정말 몰랐습니다. 다른 무공을 익히려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이 부분만큼은 딱 잡아뗐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는 믿지 않으시겠지만.
아버지가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거두며 다시 물었다.
“어디에 있었더냐?”
“책장 아래 받침대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한데 네가 어떻게 발견한 것이냐?”
“삐뚤게 받쳐져 있는 것을 바로 하려다가 발견했습니다.”
이 말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던 아버지가 수하를 불러 그것을 가져오게 하려다 말았다.
“이미 비급의 중요 부분은 없애버렸겠군.”
“어떻게 아셨습니까?”
“나라도 그렇게 했을 테니까.”
잠시 나를 노려보던 아버지는 내게 날아올 때만큼이나 빠른 속도로 태사의로 돌아갔다.
“구결을 불러라.”
역시! 이래야 우리 아버지지.
내 목적은 아버지를 꺾고 천마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다. 지난번과 똑같은 상황으로 화무기 놈을 기다릴 생각도 아니다.
놈을 죽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회귀의 목적은 아버지와 천마전 식솔들을 살리는 것이었으니까.
복수가 이번 회귀의 전부가 되게 하지 않을 것이다. 복수는 회귀의 이유고, 회귀의 목적은 이번 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화무기를 죽인 후, 아버지가 자리를 물려주실 때까진 교에 묶이지 않고 천하를 떠돌며 즐겁게 살아갈 작정이다.
그때부터가 진짜 내 인생이다. 이 젊은 몸으로 거칠 것 없는 삶을 살 것이다. 내 자서전의 제목은 ‘인생은 검무극처럼’이다.
그런고로 아버지에게 보법을 가르쳐주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공짜로는 안 되지.
“싫습니다.”
화가 난 아버지가 다시 내게로 날아오는 수고를 덜어드리기 위해 나는 재빨리 말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죠.”
“사냥터에서 내가 가르쳐준 비기는 공짜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건 사냥터에서 드신 술값이지요.”
뻔뻔한 내 말에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체 지금까지 어떻게 참았더냐? 이렇게 뻔뻔한 놈이.”
“커야 개기죠. 이제 키는 아버지보다 제가 큽니다. 이렇게 클 때까지 이 악물고 꾹 참았습니다.”
나는 아버지에게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아버지. 저 못 이깁니다. 제가 얼마나 고생을 많이 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는데요.
“원하는 것이 있느냐?”
“드릴 것이 무공구결이니 무공구결로 받는 것이 공평하겠지요. 마음 같아선 구화마공을 전수받으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울 듯하니, 아쉬운 대로 천마호신공(天魔護身功)을 원합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천마호신공은 말 그대로 몸을 보호하는 호신공으로, 오직 천마에게만 전수되는 천마의 독문무공이었다.
“불가(不可)!”
“이쪽은 풍신사보입니다. 엄밀히 따지면 제가 손해 보는 장사입니다.”
“천마호신공은 오직 천마와 그 후계자만이 익힐 수 있다.”
“몰래 가르쳐주시면 되죠. 어차피 천마호신공은 절대 표나지 않게 발동하는 무공이니, 남들은 결코 알지 못할 겁니다.”
외부에 알려질 일은 없는 무공이었다.
아버지의 고민이 느껴졌다. 정색해서 화를 내고, 강하게 압박하면 결국 나는 알려드려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러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버지였다.
어쨌든 내 처지에서는 반드시 얻어야 하는 무공이었다. 천마호신공을 익히면 목숨 하나가 더 생기는 셈이니까.
“생각해 보시고 기별 주십시오.”
정중히 인사하고 돌아서려는데,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신 풍신사보가 먼저다.”
놀랍게도 아버지는 천마호신공의 전수를 결정하신 것이다.
정말 천마호신공을 알려주신다고?
어쩌면 아버지는 내가 후계자가 되기를 바라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어차피 팔마존들을 상대하다 죽을 놈이니, 신경 쓰지 않는 것일까?
“좋습니다.”
“왜 흔쾌히 받아들이는 거냐? 내가 풍신사보만 받고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적어도 아들 앞에서 쪽팔린 짓을 하실 분은 아니시니까요.”
아버지의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쪽팔린다는 표현까지 쓴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최강수를 쓴 거다. 아버지가 어찌 내 속을 모르겠는가?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렇지만 풍신사보를 그냥 넘겨드릴 수는 없잖아요?’
다행히 아버지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어리숙하게 무공구결을 바치는 것보다, 이렇게 대가를 챙기는 것을 더 높이 평가하실 분이니까.
“좋다. 구결을 알려다오.”
“네.”
풍신사보의 구결을 아버지에게 알려주었다.
아버지는 조용히 눈을 감고 구결을 되새겼다.
세 시진이 지났을 때, 아버지는 풍신사보를 펼쳐내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눈 한 번 깜짝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아버지가 펼쳐내는 풍신사보는 내가 펼쳤던 것과 같으면서도 달랐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 무공을 이렇게 해석한다.
난 아버지가 펼치는 풍신사보를 단 한 동작도 빠지지 않고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이대로 흉내 내겠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부분이 나와 다르고, 왜 다른지. 그 미세한 차이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무학의 경지가 결정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초식을 다 펼친 후 아버지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나 역시 방금 아버지가 펼친 풍신사보와 내가 펼친 풍신사보를 비교하며 깊은 명상에 빠져들었다.
나는 배워야 한다.
무공을 대하는 아버지의 자세를. 최고가 생각하는 방식과 해석의 깊이를.
이윽고 아버지가 명상에서 깨어났다.
“정말 좋은 무공이구나.”
아버지에게서 좋은 무공이란 말이 나왔다면 이건 극찬이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라도 꿀꺽하실 수 없죠?”
아버지는 코웃음을 치셨지만, 이번만큼은 만족스러움이 함께 깃들어 있었다.
이제 회귀 후 가장 큰 변수를 만들었다.
과연 화무기는 풍신사보까지 익힌 아버지를 이길 수 있을까?
물론 화무기는 내가 때려잡을 생각이긴 하지만, 이렇게 아버지에게 풍신사보를 전한 것은 일종의 대비책이었다.
아버지는 약속을 지켰다.
“지금부터 천마호신공을 전수하겠다. 딱 한 번만 말할 테니 잘 외워라.”
구결을 듣기 전에 나는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아버지는 정말 딱 한 번만 말해주실 거기 때문에 머리로 외울 것이 아니라 직접 구결을 운용해서 몸으로 외우려는 것이다. 나 정도 되는 고수가 아니라면 시도해선 안 될 일이다.
아버지가 천마호신공의 구결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명문혈에서 신유, 지실, 위유로 부드럽게 내기를 움직여라. 이때의 진기는 풀잎에 내려앉는 눈처럼 가벼워야 한다. 비유, 간유, 격유까지 속도가 중요하다. 걷다, 뛰다, 가볍게 비상하듯 속도를 올리고 신주, 풍문, 곡원에 이르러서는 폭포가 내리치듯 힘차게 쏟아내라…….”
구결은 처음부터 대놓고 어려웠다. 그야말로 난이도는 극상. 구결대로 진기를 움직이면서도 정말 심장이 철렁철렁했다. 이렇게 어려운 구결인 것을 알면서도 직접 구결을 운용하는 것을 말리지 않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울 정도였다.
당연하게도 몇 번의 위기가 닥쳐왔다. 작은 위기들은 잘 넘겼는데, 막바지에 이르러 큰 위기를 맞았다.
순식간에 진기가 역류하면서 혈맥이 터질 듯 폭주했다. 팽팽해진 혈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일전에 천맥강화술로 혈맥을 강하게 만들지 않았다면, 분명 큰 내상을 입었을 것이다.
‘천맥강화술을 익힌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한 안배였구나. 그렇다면 나는 오늘 죽지 않을 거다!’
떨어지면 주화입마와 내상,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절벽 끝자락에서 나는 긍정의 화신이 되어 맞서 싸웠다.
또 나는 믿었다.
아버지에게 무공을 배우다 죽을 운명은 아니라고.
내 믿음이 통한 것일까?
야생마처럼 날뛰던 진기가 가라앉았다. 내력은 원래 가야 할 혈맥을 따라 흘렀고, 고비를 넘긴 나는 천마호신공의 마지막 구결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후우우우.”
긴 호흡으로 일주천을 갈무리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아버지는 천마전의 커다란 창에 서서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내게 이렇게 큰 위기가 오간 것을 알고 계셨을까?
내가 주화입마에라도 빠졌다면 과연 도와주셨을까?
아버지의 입에서 ‘이제부터 네가 차기 천마다’라는 말을 듣기 전까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창밖을 쳐다보면서 천마호신공의 위대함에 대해 말했다.
“목숨이 경각에 이르면, 천마호신공은 스스로 발동한다. 후일 천마호신공이 대성을 이룬다면 너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에 떠오른 한 가지 의문.
‘그런데 아버지는 왜 돌아가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