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회 제대로 찾아오셨소.
“뭐냐니까, 저놈?”
권이 양당을 노려보며 물었다.
“아직 없애지 않은 낭인 놈이오.”
“없앴어야지! 원래 약속은 여자와 아이만 넘겨주는 것이었잖아?”
“내가 처리하겠소.”
“당장 처리해!”
양당이 검을 뽑아서 내게 다가왔다. 그는 나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내 앳된 얼굴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자만과 착각을 일으킬지, 얼마나 많은 양당을 불러올지.
“딱 보니 주인을 배신한 파락호 새끼들인데,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까? 아마 살인멸구하고 네게 줄 돈까지 꿀꺽할걸?”
그러자 권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뭐? 주인을 배신한 파락호 새끼?”
“애 앞이라 그 정도에서 그친 거야.”
권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거 이상하게 미친놈이네.”
“정곡 찔리니까 당황했지? 정말 저놈 죽이고 돈 꿀꺽하려고 했었지? 그러지 마라, 저놈 동료들까지 다 죽이고 여기까지 왔다.”
속마음을 숨기지 못한 권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 버러지 같은 낭인 놈이!”
권이 수하들에게 소리쳤다.
“저 새끼부터 죽여!”
복면을 쓴 세 사람이 앞으로 나섰다.
“봐라, 저 새끼부터란다. 나 다음에 너라는 소리 아니냐?”
그 말에 양당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도망갈 때 가더라도 돈은 받고 가야지.”
한 걸음 뒷걸음쳤던 양당이 흠칫 놀랐다.
“무슨 헛소리냐? 내가 언제 도망갔다고?”
그가 버럭 화를 내던 바로 그 순간.
쉭!
권이 기습적으로 던진 암기가 허공을 갈랐다. 갑자기 날아든 암기를 피하지 못하고 양당은 그대로 꼬꾸라졌다.
“병신이 일을 이따위로 처리하고 있어.”
나는 죽은 양당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렇게 살면 이렇게 온다니까, 네 차례도.”
이번에는 권에게 말했다.
“너도 쟤랑 똑같아. 한 놈이라도 살려서 날 상대하게 해야지. 성질난다고 죽여버리면 어떻게 하나? 다들 분노 조절을 이리 못해서 오래 살아남을 수나 있겠냐고?”
“저 새끼 주둥이질 언제까지 들을래?”
권이 소리치자 세 복면인이 검을 뽑아 들며 다가섰다.
과연 그들은 굳이 양당을 살려서 방패막이로 삼을 필요가 없는 실력자들이었다.
나는 여인을 바라보며 아이 눈을 가리라는 시늉을 했다. 여인이 아이를 감싸 안으며 눈과 귀를 막았다.
난 이 싸움을 길게 끌지 않았다.
그들이 공격하기 전 내가 먼저 몸을 날렸다.
풍신사보 중 명왕보를 발휘했다.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경지였지만, 상대를 갓난아기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에게 방어하고 말고 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번쩍하는 순간 난 상대의 코앞까지 다가서 있었고, 나를 인지하는 순간 목이 잘렸다.
두 번째 사내의 복면 속 눈이 부릅떠지는 것이 보였다. 만약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면 이 정도쯤 아니었을까 싶다. ‘헉! 뭐가……’에서 그의 목도 그어졌다.
세 번째 복면인은 동료 둘이 죽었음에도 적절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흐른 시간은 여전히 눈 한 번 깜박이기도 전이었으니까.
원래 내 무공에 풍신사보가 더해진 지금, 그들의 실력으론 백 년을 대비해도 막을 수 없는 공격이었다. 앞서와 마찬가지로 세 번째 복면인 역시 명왕보로 파고들어서 비천검술로 베었다.
권은 경악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의 눈에는 세 줄기 검선이 동시에 그어졌고, 수하들 역시 일제히 쓰러지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쾌검술?”
“쾌검술은 쓰지도 않았다만, 지금 네 눈에는 그렇게 보였겠구나.”
“당, 당신 뭐야?”
공포에 질린 권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대답 대신 여인에게 물었다.
“저자는 누구요?”
“권원이란 자로 우리 집안을 지키는 가신 중 한 명이었어요. 저는 황금장주(黃金莊主)의 여식인 금사연(金司戀)이에요.”
“황금장!”
나는 깜짝 놀랐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사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이 여인의 부친은 중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다는 거상(巨商) 금아수(金阿洙)로 복건제일거부(福建第一巨富)이자 황금장의 주인이었다.
내가 먼 길을 달려온 이유였다.
황금장의 반란.
임추가 말해준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황금장주가 가장 믿었던 가신에게 배신을 당해 목숨을 잃은 사건.
마침 일정이 바뀌어 놈들의 마수를 피했던 황금장주의 딸은 낭인을 고용해서 달아나려 했지만, 결국 모두 목숨을 잃었다.
“소협을 고용하고 싶어요. 부디 저희를 도와주세요.”
“상황이 바뀌었으니 제 몸값은 비싸졌습니다.”
“다행이네요. 이쪽은 아무리 비싼 몸값이라도 감당할 수 있으니까요. 부디 저자를 죽이고, 아버지를 구해주세요.”
그러자 권원이 내게 사정했다.
“날 살려주시고 우리 쪽에 붙으시오. 어르신에게 말씀드려서 저 여자보다 돈을 더 주라고 하겠소!”
“황금장주 딸보다 돈을 더 준다고? 어떻게?”
순간 권원은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를 향해 걸어가며 차갑게 꾸짖었다.
“가신이었다면서? 그럼 네 자리는 저 여인과 아이 앞이어야지.”
권원은 필사적으로 내 검을 피하려고 했지만, 우리 둘의 실력 차이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발악으로 메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권원의 뼈와 살을 가른 내 검이 심장마저 꿰뚫었다.
그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그가 죽는 모습에 비로소 금사연은 안도했다. 물론 아이의 눈과 귀는 꼭 가린 상태였다.
나는 권원과 복면인들의 품을 뒤져서 암기로 쓸 비수를 챙겼다. 지금부터 가야 할 곳에는 적들이 버글거릴 것이다.
“갑시다.”
“우리 양이부터 안전한 곳에 데려가야 해요.”
내가 마부석에 올라타며 말했다.
“타시오. 지금 가장 안전한 곳은 내 옆이오.”
금사연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내 실력을 직접 보았고 어차피 내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목숨이었다.
그녀가 아이를 데리고 올라타자 마차는 왔던 길을 되돌아 빠르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여상(呂相).
황금장 수호세가인 여가장(呂家莊)의 장주이자 오늘 배신의 주동자.
그는 오늘 거사를 위해 장장 십 년을 준비했다. 그 세월 동안 황금장의 주요 무인들을 회유했고, 몇몇은 사고로 위장해 제거했으며, 회유와 제거가 불가능한 무인들은 멀리 외부로 내보냈다.
그는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금사연과 함께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금사연과 아이가 마차에서 내리자 그는 환하게 웃었다. 수하들이 두 사람을 생포해 왔다고 착각한 것이다.
“으하하하!”
그로서는 이들 모자를 놓쳤다면 평생 편한 잠을 자지 못했을 것이다.
“권원은 어디 갔느냐?”
그는 내가 권원의 수하인 줄 알았다.
“죽었소. 나 빼고 다 죽었소.”
내 말투에서 어떤 위화감을 느꼈겠지만, 그는 다음 질문이 더 궁금했다.
“어떤 놈에게?”
“젊고 잘생긴 신비 고수였소.”
“뭐라고?”
여상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버럭 소리쳤다.
“한심한 놈! 너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적에게 그따위 칭찬을 늘어놓는 거냐?”
“사실이니까.”
“좋다. 그렇다고 치고. 그럼 너는 어떻게 살아남은…….”
여상이 흠칫하더니 상황을 파악했다.
“네놈이구나!”
나는 옅은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여상이 소리쳐 수하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나와 마차 주위를 포위했다.
“여자와 아이를 구했다면 멀리 달아날 일이지, 왜 호랑이굴로 다시 돌아왔나?”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호랑이가 어딨나? 길러준 주인을 문 개새끼들만 득실대고 있구먼.”
여상은 물론이고 주위를 둘러싼 자들이 살기를 뿜어냈다. 그들은 여상의 수족들과 배신한 황금장의 무인들이었다. 찔리는 것이 있기에 그들은 더욱 차가운 분노로 양심을 가렸다.
마차 옆에 선 금사연이 아들을 꼭 안았다. 공포에 질릴 상황이었지만, 그녀는 겁을 먹은 기색이 아니었다. 여유는 오직 강자의 몫임을 잘 아는 그녀였고, 상인의 혈육답게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내가 편히 싸울 수 있도록 아들을 데리고 마차로 들어갔다.
여상 역시 내가 보통이 아님을 느꼈기에 매우 조심스러웠다.
“소협은 누구시오? 우선 안으로 들어가서 한잔하면서 말씀 나눕시다. 좋은 술로 대접하겠소.”
“그렇게 예의 차릴 것 없다. 착한척해도 안 봐준다. 빌어도 안 봐주고. 그러니 마음껏 욕하고 지랄해라.”
회유책이 먹히지 않을 것을 직감한 여상이 차갑게 명령했다.
“합공해서 죽여라!”
그는 ‘합공’이란 말을 강조했다.
명령이 떨어지자 사방에서 놈들이 달려들었다.
쉭! 쉭! 쉭! 쉭! 쉭!
시원한 바람 소리와 함께 내 손에서 비수가 날았다. 피해야지, 튕겨내야지란 생각이 들었을 때는 이미 비수는 그 생각마저 끊어버리고 급소에 박힌 후였다. 달려들던 무인들이 후두두 떨어지며 바닥을 뒹굴었다.
회귀 전 인생에서 익혔던 비도술은 비도종사(飛刀宗師) 서문철(徐文哲)의 탈명비술(奪命秘術)이다.
이전에도 이후에도 나는 이보다 뛰어난 비도술을 찾지 못했으니, 평생 가져가도 될 무공이었다.
가져온 비수가 떨어지자, 살아남은 자들이 기뻐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비도술의 고수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아주 짧은 순간의 기쁨이었다.
나는 검을 뽑아 들고 놈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고수와 중수 사이의 여러 단계의 실력이었는데, 대성을 이룬 비천검법 앞에서는 어떤 변별성도 보여주지 못했다.
내가 한바탕 장내를 휘젓자 적들은 모두 쓰러졌고 여상의 얼굴은 핼쑥해졌다.
“대협께선 누구시오?”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이 소협을 대협으로 만들었다.
“대협은 무슨! 그냥 지나가다 돈 냄새 맡은 칼잡이지.”
“얼마면 그냥 물러가 주겠소?”
“돈 많아?”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정도로는 있소.”
“그렇게 돈이 많은 놈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거야? 네 인생을 바꾸고 싶었으면 네 돈을 써야지, 왜 딴 사람 돈을 건드려? 그것도 모시던 주인 돈을.”
대답이 궁색한 여상은 입술을 잘근 깨물 뿐이었다.
그가 머리를 굴리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망설이던 바로 그때.
“검을 버려라!”
뒤쪽 건물에서 놈의 수하가 금아수의 목에 검을 겨눈 채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수하 딴에는 인질극을 벌여 나를 굴복시키려던 모양인데, 그 모습에 여상은 탄식하며 낭패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금아수를 숨겨서 나와 협상을 하려 했는데, 멍청한 수하가 그를 밖으로 데려온 것이다. 어쨌거나 이미 일은 벌어졌기에 여상은 버럭 소리를 내지르며 나를 압박했다.
“어서 검을 버려! 안 그러면 황금장주는 죽는다!”
순간 한 줄기 검기가 허공을 찢어발겼다.
비천검법 제사식 염천식(炎天式).
원래도 거칠고 패도적인 검기발출식이었는데, 그것이 흑마검에서 강력한 내공까지 실리자 그 기세는 하늘이 놀라고 땅이 뒤집힐 정도였다.
쿠콰콰콰콱!
살아 있는 것처럼 회오리치며 날아간 검기가 무인을 치고 지나갔다.
금아수를 방패 삼아 몸의 삼분지 이를 숨기고 있었는데, 드러난 삼분지 일이 사라지고 없었다. 금아수만 세워두고 죽은 몸이 털썩 쓰러졌다.
검기를 날리느라 내공을 쏟아낸 지금이 기회라 여겼는지, 여상이 벼락처럼 검을 내지르며 기습했다.
대비하고 있었기에 그 회심의 일격은 당연히 빗나갔다. 연속되는 공격에 여상의 허점들이 계속 보였다.
평생을 갈고 닦았어도 내게 안 될 텐데, 수련이 있어야 할 자리에 탐욕이 들어찼으니, 내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곧장 제압할 수도 있었지만, 놈에게 몇 수 더 기회를 주었다. 여가장주를 손쉽게 제압한다면, 나에 대한 궁금증과 환상이 너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여상의 검이 요혈을 노리며 연속해서 날아들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이기에 공격은 필사적이었다.
보는 사람은 박빙의 승부에 숨을 죽였겠지만, 내 마음은 명경지수(明鏡止水)였다.
그렇게 삼십여 수가 지났을 때.
푹.
살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싸움은 끝이 났다.
내질러진 여상의 검은 허공에 멈춰 있었다. 그 검날에 금아수가 기뻐하는 모습이 반사되어 보였다.
여상의 공격을 비스듬히 교차한 내 검은 그의 심장에 박혀 있었다.
날 향한 여상의 눈에 원망이 가득했지만 나는 차분히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수호세가 가주잖소? 당신만은 이러면 안 되는 거였잖소? 다음 생에서는 돈을 벌고 싶으면 상인이 되시오. 사람을 죽이고 싶으면 살수가 되시고.”
이미 절명한 여상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검을 뽑자 그가 허물어졌다.
숨죽인 채 마차 창문으로 바깥을 지켜보던 금사연은 환호성을 지르며 아들과 함께 내렸다.
“아버지.”
“할아버지!”
금사연과 아이가 금아수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사연아! 양아!”
아버지를 부둥켜안고 금사연이 눈물을 흘렸고, 엄마가 울자 아이가 따라 울었다.
잠시 후, 갇혀 있던 황금장의 무인들이 풀려났다.
장내가 정리되자 금아수는 다시 한번 내게 고마움을 표했다. 금사연에게 앞서 이야기를 전해 들은 그는 자신을 구해준 것보다 딸과 손자를 구해준 고마움이 훨씬 컸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소. 소협은 우리 가문을 멸문에서 구한 은인이시오. 부디 존성대명(尊姓大名)을 알려주시겠소?”
여상과 그의 수하를 단신으로 처리했으니 나에 대한 궁금증이 얼마나 클지 상상이 되었다.
“그냥 지나가던 낭인에 불과합니다.”
“낭인왕(浪人王)이 왔더라도 이들을 이렇게 쉽게 처리하진 못했을 터인데.”
“과찬의 말씀이십니다.”
내가 끝내 신분을 밝히지 않자 금아수도 더는 묻지 않았다.
금사연이 금아수에게 앞서 나와 했던 약속을 전했다.
“은공께 약속했어요. 보상은 돈으로 하겠다고요.”
금아수가 흡족한 표정으로 딸을 칭찬했다.
“잘했다. 가장 확실한 약속을 했구나.”
여유를 되찾은 그는 비로소 복건제일거부의 면모를 드러냈다.
“만약 은공께서 필요한 것이 돈이라면, 오늘 제대로 찾아오셨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