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31화 (31/214)

제31회 미친놈은 너다.

입으로 향하던 내 술잔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자신의 물이 되어달라고? 설마?

“무슨 뜻인지요?”

“내 사람이 되어 달라는 거네.”

도마가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는 형을 지지하는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형을 버리고 나를 선택한다고? 정말이지 혈천도마를 만난 이래 가장 의외의 순간이었다.

“이 공자.”

“네.”

“천마가 되고 싶은가?”

“되고 싶습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그 술을 마시게. 내가 자네의 뒷배가 되어 주겠네.”

“어르신께서는 형을 지지하시잖습니까?”

“자네가 이런 미친놈이었다는 것을 몰랐을 때의 선택이지.”

“용도 되었다 미친놈도 되었다 제가 바쁘군요.”

미친놈은 너다.

난 그의 동생을 죽였고, 제자를 폐인으로 만들었으며, 수하를 가둬둔 상황이었다. 한데도 이 늙은이는 내 뒷배가 되어 주겠다는 제안을 하고 있다. 이 늙은이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라면 뭐든 팔아치울 인간이다.

“저는 어르신의 동생을 죽였습니다.”

“부모 품 떠나면 남이지. 혈육이 죽었다고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느낀다고? 웃기지 말라고 하게. 인간이란 게 제 손톱 아래 박힌 가시가 더 아픈 법이라네.”

이 늙은이, 지금 뱉는 말들은 다 진심이다.

“어차피 대공자와는 정식으로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마음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거지.”

“어르신을 얻는다면 천군만마를 얻는 일이 될 겁니다. 한데…….”

“뭘 망설이는 건가?”

“제가 어르신을 믿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형을 버리는 것처럼, 저를 버리실 수도 있을 테니까요.”

“버릴 상황이 되면 버려야지. 나라고 자넬 믿어서 이러겠나? 지금까지 난 누굴 믿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네.”

“하면 왜 저를 선택하신 겁니까?”

“이렇게 겁 없이 밀어붙이는 자네의 광기라면 내 운명을 걸어볼 수 있겠다 싶어서.”

“결국 미친놈이라서 선택했다는 뜻이군요.”

“그 광기로 싹 다 잡아 먹어버리는 거야.”

만약 내가 이 나이 때의 청년이었다면, 선택받았다는 우쭐함에 혈천도마의 말을 전적으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늙은이들이 젊은이들을 이용해 먹을 때 사용하는 치사한 수법을 잘 안다.

천마가 되고 싶은가?

앞서 했던 질문이 그러하다. 마치 그의 손을 잡으면 천마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착각이 들게 하는 말이다.

지금 던지는 이런 질문도 같은 속셈이 깃들어 있다.

“만약 천마가 된다면 어떤 천마가 될 텐가?”

“적어도 제가 다스리는 본교는 마존이 나서서 황천각주에게 외압을 넣지는 못할 겁니다.”

“하하하. 역시 내 눈은 정확했군.”

기분이 더러워도 절대 내색하지 않는 저 능구렁이 같은 태도도.

모두가 이 순간의 내 결정을 현혹하는 저 늙은이의 고단수다.

일단 나는 정중히 거절했다. 인간관계의 밀고 당김에 있어, 당긴다고 끌려가면 매력 없는 먹잇감이 되는 법.

“저를 높이 평가해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이나, 지금은 제 맡은 일을 해야 할 때 같습니다. 아버지가 뭐라 생각하시겠습니까? 중책을 맡겼더니 일은 안 하고 정치질이나 한다지 않겠습니까?”

“교주님을 앞세워 숨는다. 과연 현명한 선택일까?”

“무슨 뜻입니까?”

“황천각주? 만약 자네가 그 일을 잘 해낸다면 어떻게 될까? 교주님이 자넬 계속 황천각주 자리에 앉혀둔다면? 평생 황천각주로 썩을 생각인가? 지금 그 일은 과정에 불과해. 자네가 선택해야 하는 길은 언제나 하나라네. 후계자가 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 중 하나지. 그걸 헷갈리는 순간, 길을 잃고 황천각이라는 허울 좋은 숲속을 헤매게 되겠지.”

그는 아버지를 끌어들여서 설득을 마무리 지었다.

“오히려 교주님은 나와 손잡는 모습을 주목하실 거네. 내가 선택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자네의 몸집은 커질 테고 모두의 눈에 띄게 되는 거지.”

하지만 혈천도마가 간과하는 바가 하나 있다.

본교의 기강을 잡고자 하는 의지 말이다. 여기에는 내 의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도 함께 깃들어 있다.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이 술은 결정을 내리면 마시겠습니다.”

내가 들고 있던 술잔을 도로 내려놓았다.

결정을 미뤘음에도 혈천도마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당연히 그래야지. 머저리처럼 마시란다고 마시면 안 되지.”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뒤에 박아둔 멸천대도를 뽑아 들었다.

땅에서 도를 뽑아 들던 그 기세로 나를 향해 휘둘렀다.

나는 피하지 않고 날아드는 공격을 흑마검을 뽑아 막았다.

카앙!

쇳소리 섞인 폭음이 터져 나왔다. 교차한 검과 도 너머에서 혈천도마가 말했다.

“대답은 내일 듣겠네.”

“오 일 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서로를 노려보던 팽팽한 기 싸움도 잠시.

“사흘 후에 보세.”

혈천도마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획 하늘로 솟구치더니 담장 너머로 사라졌다. 군더더기 하나 없이 빠르고 대단한 신법이었다.

흑마검을 검집에 넣은 후 손목을 돌렸다.

“망할 늙은이, 아파죽겠네.”

최선을 다한 공격은 아니었지만 날아든 도에 실린 공력이 보통이 아니었기에 손목이 욱신거렸다.

‘이 늙은이. 은근히 상대에게 고통 주는 것을 즐기고 있어.’

자신의 무공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주지시키는 거다. 그저 늙은이의 자존심이나 악취미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혈천도마의 이런 행동에 명백한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혈천도마는 쿡쿡 옆구리를 찔러대서 피멍이 들게 하거나, 오늘처럼 팔이 얼얼해서 며칠 동안 고생해야 할 고통을 준다.

이 고통은 상대에게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심는다. 그리고 이 물리적 폭력은 상대를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데 상당히 긍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겪으면 겪을수록 만만한 늙은이가 아니라는 것을 느낀다. 동시에 아버지가 왜 나를 내세워서 칼춤을 추게 하는지도.

혈천도마와 같은 존재가 하나가 아니라 여덟이나 있었으니. 이들이 팔마존이란 이름으로 똘똘 뭉쳐 있다면, 아버지라도 상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자기들끼리는 험담에, 뒷말에, 지지고 볶고 싸워대지만, 천마전을 상대할 때만큼은 한마음이 되는 그들이니까.

게다가 그들은 본교의 주력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없애버린다면 당장 무림맹이나 사도맹이 쳐들어올 것이다.

‘내가 미친놈이라서 좋다고? 그건 내가 어디까지 미칠 수 있는지 모를 때나 하는 말이지.’

거처로 들어가기 전에 이안의 개인 수련장에 잠시 들렀다.

이안은 내가 왔다는 것도 모를 정도로 수련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내가 말한 대로 기초체력 훈련 중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 헐떡이면서도 이안은 꾹 참으며 수련에 매진했다.

‘왜 너냐고?’

내 명령이라면 미련곰탱이가 되니까. 넌 원래 미련곰탱이가 아닌데, 날 위해 기꺼이 이런 사람이 되어 주니까.

잠시 그녀가 수련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나는 내 방으로 돌아왔다.

술을 챙겨와 창가에 앉아 여유를 가졌다.

화무기를 생각하면 단 일각조차 쉴 수 없지만 그렇다고 앞만 보고 내달리기만 하진 않을 것이다. 주위를 돌아볼 여유를 잃으면 반드시 놓치는 것이 생길 테니까.

그렇게 휘영청 밝은 달을 안주 삼아 오랜만에 몇 잔의 술을 마셨다.

아버지를 생각했고, 혈천도마를 생각했으며, 또 다른 마존들을 생각했다. 화무기를 죽이고 난 뒤의 내 삶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 * *

다음 날이 되어서도 양태는 기가 꺾이지 않았다.

“흥! 황천 각주, 당신 사람 잘못 건드렸소. 날 건드는 것은 남도종 전체를 건드는 것과 같다는 것을 모르시오?”

이렇게 혈천도마를 앞세워 협박하다가.

“나를 풀어주기만 하면 없었던 일로 하겠소. 마존의 분노도 내가 직접 말씀드려서 각주에게는 아무런 해가 가지 않게 하겠소.”

또 이렇게 회유도 했다.

그는 살면서 이런 절박한 상황을 겪은 적이 없었다. 기록을 보니 도귀로 시작해서 십도귀를 거쳐 백도귀가 되기까지 승승장구한 인생이었다. 고생한 적도 없었고 누구 하나 자신의 인생에 시비를 건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그는 알지 못했다. 진심으로 사죄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껏 세상을 살아온 방식대로 회유와 협박을 할 뿐이었다.

나는 어제와는 달리 차분히 양태를 대했다.

“양 무인. 앉아보시오. 오늘 남도종에서 이번 사건에 유감을 표한다고 공식적으로 발표했소.”

그러자 양태가 뛸 듯이 기뻐했다.

“내가 말했잖소. 마존께서는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실 거라고. 자, 이제 날 풀어주시오.”

이제 곧 풀려날 것이란 생각에 양태의 표정이 온화해졌다.

“우리 지난날은 다 잊읍시다.”

마치 나를 용서해주기라도 하겠다는 그의 태도에 나는 차분히 물었다.

“왜 내가 지금 당신을 정중히 대하는 줄 아시오?”

“그야 좋게 마무리 짓자는 것 아니오?”

“아니오. 당신을 마지막으로 보는 날이기 때문이오.”

“그 말이 그 말이잖소? 내가 나가고 나면 우리가 다시 볼 일은 없을 거요.”

양태의 얼굴에 기쁨이 가득했다. 이제 저 얼굴이 지어야 할 진짜 표정을 찾아주어야 할 때다.

“뭔가 착각하시는 것 같소.”

“착각?”

“남도종은 우리에게 유감을 표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 표했소. 남도종의 명예를 실추시킨 당신에게 유감이라고.”

“……뭐요?”

“그리고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을 남도종 무인이 일으킨 점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사과했소. 피해자에게도 사과하고 보상도 약속했소.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도 했고.”

“그 무슨…… 개소리요? 지금껏 남도종은 이런 일로 공식적으로 사과한 적이 없소. 그 어떤 사건이 터져도.”

양태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영광이겠소. 그런 남도종을 변하게 해서.”

“거짓말 마시오!”

“자, 그러면 즐거운 뇌옥 생활 되시길 바라겠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늦게 양태가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피웠다. 그냥 놔두라고 했다. 저 지랄도 오늘로 마지막이었으니까.

대신 마지막까지 단 한 번도 진심 어린 반성이 없었던 행동에 대한 책임은 져야 할 것이다.

나는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대룡에게 지시했다.

“뇌옥에 연락해서 제일 힘든 곳으로 보내.”

“네.”

본교의 뇌옥은 편한 구역을 가도 지옥이다. 뇌옥에 갈 바엔 참형을 당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그냥 나온 말이 아니다. 저 성격으론 뇌옥에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아들 역시 마찬가지고.

나는 그들을 동정하지 않았다.

내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평생 떵떵거리며 살았을 거고, 피해자인 곽수 일가족은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테니까. 내가 모르는 곽수가 이전에도 있었을 테고, 앞으로 또 다른 곽수들이 계속 생겨났을 거다.

협박을 받았던 조사관 종화 역시 앞으로의 삶이 완전히 망가졌을 테고.

그래서 일말의 동정이나 후회도 없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뭐가?”

“남도종에서 왜 사과 성명을 발표한 겁니까? 지금까지 전례가 없던 일입니다.”

“가서 물어봐. 왜 그랬는지.”

“할 수 있으면 그랬죠. 아마 지금 분위기에 남도종을 찾아갔다간 걸어서 못 나올 겁니다.”

“아니. 지금이야말로 남도종 연무장에서 춤을 춰도 무사히 걸어서 나올 수 있을 거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서대룡을 두고 난 성큼성큼 복도를 걸어가며 덧붙였다.

“앞으로 이틀 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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