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회 차라리 잊지 마라.
“억울합니다. 제가 한 일이 아니라고요!”
황천각 취조실에서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은 일화검존이 이끄는 북천검가의 무인 배종탁(裵宗鐸)이었다.
그는 검가의 어린 시비를 겁탈한 혐의로 고발되어 붙잡혀 와 있었다. 예전이라면 사건화되지도 않았을 일인데, 이번에는 고발이 들어온 다음 날, 즉시 배종탁이 체포되었다.
“그 시비가 절 모함하는 겁니다! 그 애와 대질시켜 주십시오! 저는 억울합니다.”
“시비가 왜 그대를 모함하겠나?”
“그야 모르죠. 누군가의 사주를 받았거나, 아니면 제가 그 아이에게 어떤 실수를 했을지도요. 하지만 적어도 저는 그 아이를 겁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말 억울한 듯 보였다.
“좋아, 대질시켜 주지.”
“당장 데려와 주세요.”
내가 신호를 보내자 밖에서 대기하던 서대룡이 열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를 데리고 들어왔다. 아이는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야! 너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배종탁이 버럭 아이에게 소리를 질렀다.
내가 손을 들어 그의 흥분을 가라앉혔다.
“조용! 한 번만 더 소릴 지르면 대질 신문은 없다.”
“네. 억울해서 그럽니다.”
내가 여자아이에게 물었다.
“널 겁탈한 사람이 저자가 맞냐?”
여자아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보십시오! 제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고 끄덕였습니다.”
“아는 사람인데 얼굴을 자세히 볼 필요가 있나?”
“죄책감에 절 쳐다보지 못하는 겁니다.”
“정말 그대 짓이 아닌가?”
“아닙니다, 하늘에 맹세코 아닙니다. 이렇게 아이 말만 믿고 저를 처벌하면 저는 너무 억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여자가 그리웠으면 기루를 찾아가면 되는데, 왜 저런 어린애를 건드리겠습니까?”
“나야 모르지. 네가 말해봐. 어린애를 보면 흥분되나?”
“저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종탁이 아이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무고죄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지? 용서할 테니까 솔직히 말해. 아니라고 말해!”
아이가 겁에 질린 듯 몸을 움츠렸다.
“저 보세요! 덜덜 떨잖아요?”
“그건 겁이 나서 그렇고. 겁탈한 것을 발설하면 고향에 있는 가족들까지 찾아가서 죽이겠다고 했다면서?”
이번 사건은 이 소녀가 고발한 것이 아니었다. 아이가 다른 시비에게 말했고, 그 시비가 친구 대신 풍류주점 건너편에 마련된 황천각 지부를 찾아가서 고발한 것이다.
“왜 저 아이 말만 믿는 겁니까?”
“저 아이를 믿으니까.”
“너무 편파적이지 않습니까?”
“네가 겁탈한 게 확실하니까.”
“그러니까 확실한 증거를 대라고요! 저 아이 말만 믿지 마시고요.”
내가 서대룡을 쳐다보자 그가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다시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들어왔다. 앞서 들어왔던 아이보다는 조금 더 큰 여자아이들이었다.
그 아이들을 보는 순간, 배종탁이 흠칫 놀랐다.
“기억하지? 이전에 네 시비로 일했던 아이들이다.”
“알고 있습니다. 많이 컸구나!”
배종탁이 그녀들에게 반갑게 인사했지만 아이들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이 증언을 듣는데 갑자기 궁금해졌어. 이번에 저질렀는데, 이전에는 안 저질렀을까?”
그렇게 이전 시비를 찾아 조사한 결과, 그녀들 역시 겁탈당했다는 것을 알아낸 것이다.
“이미 모든 증언을 마쳤다. 아이들을 겁탈했던 방식이 똑같더군. 협박도 똑같고. 그렇게 이삼 년 농락하다가 다른 아이로 갈아치우고.”
더는 발뺌이 불가능해졌음을 깨닫자 배종탁의 표정이 바뀌었다. 억울함을 호소하던 자는 사라지고, 원래 본성을 드러냈다.
“술 먹고 실수한 겁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갑자기 차분해진 놈의 모습은 조금 전까지 억울함을 호소하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저잣거리의 연희단 패거리의 연기를 보는 것만 같았다.
놈이 아이들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솔직히 너희들도 좋았잖아? 끝날 때마다 돈도 줬잖아?”
그러자 제일 어린 시비가 품에서 동전을 꺼내 바닥에 던졌다. 와르르 쏟아지는 동전들. 그녀는 한 푼도 쓰지 않고 가지고 있다가 오늘 가져온 것이다.
배종탁은 그 모습을 못 본 척 고개를 돌리며 내게 간청했다.
“황천각 역사상 시비를 건드려서 뇌옥에 들어간 예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미리 공부도 했네. 맞아.”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하늘에 맹세하겠습니다. 각서를 쓰라면 쓰고요. 아니, 아예 여자 시비는 두지 않겠습니다.”
“넌 뇌옥에 안 갈 거다.”
내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전부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놈이 히죽 웃으며 아이들을 쳐다보았고, 아이들은 모두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대신 다른 곳에는 가야 한다.”
“어딥니까?”
“여기.”
쉬익! 푸욱!
내 검이 단칼에 놈의 목을 베었다. 놈은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못하고 절명한 채 의자와 함께 뒤로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아이들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으로 놈의 피가 흘렀다.
난 곧장 아이들에게 돌아섰다.
“너희들을 괴롭혔던 자는 이제 죽었다. 너희들 가족이 죽을 일도 없다. 그러니 앞으로는 걱정하지 말고 살아라.”
아이들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너희들이 당한 일,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다. 어차피 잊지 못한다면 차라리 오늘 일을 잊지 마라. 이놈이 죗값을 치르는 이 순간으로 너희들이 당한 일을 덮어버려라. 저자의 모습은 이 마지막 최후만 기억해라.”
이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아이들은 시체를 쳐다보았다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잠시 후 그들 중 제일 나이 든 아이가 나서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복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다른 아이들도 함께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어흐흑.”
제일 어린 시비가 울음을 터뜨렸고, 다른 아이가 그녀를 안아주었다. 안아주던 아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러내렸다.
시비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사는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과거의 나 역시 그러했고.
“내게 감사할 필요 없다. 저놈을 벌줄 수 있었던 것은 너희들이 용감하게 증언해 준 덕분이다. 너희들이 해낸 응징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용감하게 잘 살아라.”
“네.”
“그리고 혹시라도 이자의 친구나 가족에게 보복당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앞으론 황천각이 너희들을 지켜줄 테니까.”
이제 제일 나이 많은 소녀까지 눈물을 쏟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 우리가 강자존이라는 미명에 빠져 이 아이들을 지켜주지 못한다면, 우린 아버지가 그토록 싫어하시는 정파 놈들에게 목이 잘리게 될 겁니다. 아니, 잘려야 됩니다. 목이 잘려도 할 말 없어야죠.
조사관들이 들어와서 아이들을 데리고 나갔다. 앞으로도 특별히 이 아이들을 신경을 써주라고 했으니, 아이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이 일 또한 교내에 소문이 날 테니, 함부로 시비를 건드는 놈들도 줄어들 것이고. 마인이기에 이런 일쯤은 당연하다는 생각, 그 그릇된 생각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조사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이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저놈 잡아떼는 모습을 볼 때만 해도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한 줄 알았습니다. 정말 무섭네요.”
“귀신보다 더 무서운 게 인간이다.”
“한데 저자는 북천검가 소속입니다. 일화검존께서 그냥 계실까요?”
“자기 수하가 어린 시비들을 지속적으로 겁탈했어. 그런 자를 죽였다고 이걸 문제 삼는다? 안 그러는 게 좋을걸?”
“도련님은 겁 안 나세요?”
“겁나지. 이런 쓰레기들을 다 못 치우고 죽을까 봐.”
“도련님이 황천각주가 되신 이후에 본교가 점점 착해지고 있어요. 이러다 무림맹보다 더 선한 사람들로 가득 차면 어쩌죠?”
난 곧장 그녀의 농담을 바로잡았다.
“시비를 겁탈하지 않는 것, 이건 착한 일 아니잖아? 당연한 일이지.”
“아, 그렇죠.”
“우린 지금껏 그 당연한 일도 못 하고 있었던 거고.”
그때 서대룡이 다시 돌아왔다.
“각주님, 왜 그러신 겁니까?”
“뭘?”
“의도적으로 놈을 죽이셨죠? 저런 놈일수록 뇌옥에 가둬서 고생시켜야 한다는 것이 각주님의 지론이시잖습니까?”
본교의 뇌옥만큼은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운 곳이었으니까.
“그렇지.”
“한데 왜 죽여버리신 겁니까?”
역시 서대룡은 똑똑한 녀석이다. 나는 일부러 일화검존과 관련된 사건을 직접 처리했고, 그의 말처럼 의도적으로 놈을 죽였다.
“이렇게 죽여야 일화검존을 만나러 갈 공식적인 명분이 생길 테니까.”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혈천도마 문제만 해도 골치 아픈데 일화검존은 왜 만나시려고요?”
“두 번째 호랑이가 필요해서.”
“네?”
영문을 모르겠다는 서대룡을 보며 명령을 내렸다.
“지금 당장 검존에게 기별해. 취조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내가 직접 만나서 해명한다고.”
* * *
한 시진 후, 나는 서대룡을 데리고 북천검가로 향했다.
“꼭 저를 데려가셔야 합니까?”
“공식적인 방문인데, 각주 혼자 갈 수가 있나? 오른팔이 따라가야지.”
“제가 언제 오른팔이 되었습니까?”
“권력지향형의 비정한 성격이지만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상남자, 다들 침묵할 때 홀로 손을 드는 반골, 내 오른팔로 충분하지.”
“맙소사!”
“어떤 표현이 마음에 들어?”
“다 마음에 안 든다고요!”
이윽고 우린 북천검가의 입구에 도착했다.
혈천도마의 남도종이 본교의 남쪽을 차지한다면 일화검존의 북천검가는 북쪽을 장악하고 있었다.
“저는 북천검가는 처음입니다. 지금껏 제가 맡은 사건에는 북천검가와 관련된 사건이 없었거든요. 혈천도마와는 달리 일화검존께서 수하들 관리를 잘해오고 있었습니다. 검가의 마검들 역시 명예를 중요시했고요.”
“그런가?”
내가 시큰둥하게 반응하자 서대룡이 물었다.
“아니라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볼 때는 마검이나 도귀나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아서. 명예를 중요시하는 자들의 눈빛이 저래서 되겠어?”
입구를 지키는 마검들의 눈빛이 곱지 않았다.
이미 배종탁의 죽음에 대해 알려진 모양인데, 죄를 지었으니 죽었지 하는 반응보단, ‘고작 시비 좀 건드렸다고 우리 북천검가 무인을 죽이셨소?’라는 감정에 가까웠다. 물론 요즘 같은 때 감히 날 도발할 수 없었기에, 곧 모두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서대룡이 나직이 내게 말했다.
“평화주의자인 제가 요즘 들어 자주 보는 눈빛이네요. 누구랑 같이 있으면 자꾸 보게 되네요.”
“자네를 꾸미는 수식에 평화주의자도 추가해주지.”
“아…….”
우릴 안내할 무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존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는 사우종(沙佑鐘)입니다.”
사우종이야말로 일화검존의 오른팔로 알려진 사내였다. 북천검가 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실력자로 과연 그 기세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난 이 남자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개인적인 인연이나 친분 때문이 아니라, 그의 최후가 꽤 인상적이었기 때문이었다.
“반갑네.”
“저를 따라오시죠.”
사우종이 우릴 데리고 계속 안으로 들어갔다. 마검들이 기거하는 건물들을 지나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작은 모옥(茅屋)이 있었다.
아담하게 잘 꾸며진 이곳이 바로 일화검존의 거처다.
“황천각주께서 오셨습니다.”
사우종의 기별에 모옥 문이 열리며 백의를 입은 여인이 걸어 나왔다.
“어서 오세요, 검 각주.”
나긋한 목소리의 그녀가 바로 일화검존 소연랑(昭蓮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