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회 이미 충성하고 있습니다
일화검존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겉으로는 이십 대로 보이지만, 실제 두 배는 더 나이가 많았다. 그래서 본교에는 이런 말이 있다.
세상은 변해도 검존은 변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가 갈수록 더 젊어지고 있는 그녀다.
그렇다고 하늘하늘한 저 외모에 속아서 헛짓거리했다간 그대로 혀가 잘리고 차디찬 철검이 심장에 박힐 것이다. 그녀의 독문병기인 일화검(一花劍)의 검집에 새겨진 붉은 동백꽃이 피처럼 강렬하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어르신.”
“어르신이란 말은 언제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네요. 선배라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녀는 정중히 나를 대했다. 나뿐만 아니라 하급 무인에게도 항상 존대하며 예를 잃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그녀였다.
“어르신과의 배분을 생각하면 그럴 수 없습니다.”
“나이가 많으니 존경해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존경은 존경할만한 사람에게 하면 됩니다. 나이가 어려도 존경받을만하면 존경해야 하듯이요.”
“좋습니다. 선배님의 뜻을 따르지요. 대신에 저도 편하게 이 공자라 불러주십시오.”
“그러지요.”
내가 서대룡을 그에게 소개했다.
“여기는 이번 사건을 조사한 특별조사관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려드리려 데려왔습니다.”
서대룡이 일화검존에게 정중히 포권했다.
“특별조사관 서대룡입니다. 이번 사건을 보고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일화검존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됐어요. 황천각에서 죄를 지었다고 판결이 났으면 죄를 지은 거겠지요. 어린 시비를 겁탈한 자라면 죽어 마땅한 자니 본 검가에서는 이번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일어난 일은 문제 삼지 않겠어요.”
내가 서대룡에게 물러나라고 눈짓했다. 서대룡이 조용히 모옥 밖으로 나갔다.
일화검존이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내가 찾아온 이유가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다.
“요즘 이 공자의 노고로 본교에 변화의 바람이 일고 있다고 들었어요.”
“천방지축 날뛰고 있습니다.”
“본교가 발전할 수 있다면, 그게 어디 천방지축이겠어요?”
일화검존은 팔마존 중 가장 마교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었다. 당장 이 허름한 모옥만 봐도 그렇다. 명문정파 노고수가 은거한 곳처럼 단아하게 꾸며져 있다.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십니다.”
“선배님이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시니 가능한 일입니다.”
일화검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쭈글쭈글한 얼굴에 괜한 금칠은 마세요.”
이 말은 명백히 의도된 말이다. 이 말을 유도하기 위한.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선배께서는 지금도 이십 대처럼 보이십니다.”
“이십 대라니요! 가당치도 않은 소립니다!”
손사래를 치는 그녀 얼굴에 감출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이 사람은 뒷전에 물러나 무학의 이치를 깨닫는 것으로 충분한 사람이랍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말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화무기의 손에 아버지가 죽고 본교가 봉문을 당한 이후, 내부에서는 본격적인 권력다툼이 벌어졌다. 팔마존은 물론이고, 본교의 이름난 고수들이 저마다 교주 자리를 놓고 다퉜다.
그래서 첫 번째 교주가 누구일까?
놀랍게도 눈앞에 있는 이 여인, 바로 일화검존이다. 지금의 이 나긋한 미소와 차분함을 생각하면 믿기 어렵겠지만, 그녀는 가장 먼저 움직여서 교주 자리를 차지했다.
그 과정에서 피바람이 불었다. 그녀는 가차 없었다. 짧았던 교주 생활 내내 피바람이 불었다. 그래서 정치라도 잘했으면 좋았겠지만, 일화검존의 통치력은 욕심을 따르지 못했다.
무능력한 자가 욕심이 많으면 벌어지는 모든 비극을 일으켰고 채 삼 년을 채우지 못하고 차기 교주에게 목숨을 잃었다. 그렇기에 그녀에 대한 내 평가는 박할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번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이 부담스러웠습니다.”
“왜 부담스러웠나요?”
“들으셨겠지만 근래 남도종과 충돌이 많았습니다.”
나는 슬쩍 혈천도마의 남도종을 언급했다. 팔마존 중 서로 가장 사이가 안 좋다고 알려진 두 사람이다. 그런 이유로 도귀들과 마검들 역시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고.
“혈천도마 어르신께서는 저를 심하게 압박하셨거든요. 한데 또 이번에는 검가와 갈등이 생겼으니…….”
“나는 도마와는 엄연히 다른 사람입니다!”
혈천도마와 함께 언급되는 것조차 불쾌한지, 일화검존의 목청이 높아졌다.
“그럼요, 당연히 다르시죠.”
“말이 나와서 묻습니다만, 이번에 도마가 남도종에서 장호란 자를 마군주로 추천했다고 들었어요. 어떻게 된 일이죠?”
모옥에서 홀로 수련만 하고 있을 것 같지만, 그녀는 교내의 사건들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미래의 권력 쟁취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장호는 능력도 출중하고 충성스러운 자입니다.”
“내가 묻는 것은 도마가 왜 그자를 마군주로 삼으려 했느냐는 거예요.”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장호는 제 사람입니다.”
이미 알고 있었는지 일화검존은 놀라지 않았다. 그녀가 궁금한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어떻게 도마를 설득했나요?”
“어르신의 자존심을 자극했습니다. 명색이 마존인데 교를 위한 선택을 해야 하지 않느냐고요. 친분이나 정치 권력 때문이 아니라 진짜 능력이 있는 자를 추천해야 한다고요.”
“도마는 그딴 이유로 설득되지 않아요.”
“맞습니다. 아마 저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일 겁니다. 어쨌든 도마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교를 위한 마음은 팔마존 중 자신이 제일이라고요.”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 생각했는지 일화검존의 표정이 잔뜩 찌푸려졌지만 나는 모른 척 계속 말을 이어갔다.
“하나 어르신조차도 장호를 마군주로 앉히기는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총군사께서 방법을 제시했지만, 그 역시 쉽지 않아서.”
“군사께서 무슨 방법을 말씀하셨나요?”
“다른 마존께서 함께 추천하면 가능하다고 하셨습니다만, 문제는 그 일을 함께하실 마존이 안 계신다는 점이죠.”
“왜 없다고 생각하죠?”
“네?”
“교를 위한 마존이 도마밖에 없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아닙니다만.”
일화검존이 차가운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오늘 나를 찾아온 목적이 내 자존심까지 건드려서 도마 선배와 함께 장호를 추천해 달라는 것 아닌가요?”
이제는 솔직함을 보여야 할 때다. 술수와 진실이 뒤섞여서 대체 이 계략의 재료가 뭔지 알 수 없을 때, 비로소 그 계략은 맛을 내는 법이니까.
“눈치채셨습니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가요?”
“마군을 제 손에 넣기 위해서입니다. 그 영향력으로 한시라도 빨리 후계자가 되고 싶습니다.”
일화검존은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혈천도마 그 깐깐한 늙은이가 왜 나를 선택했을까? 형을 버리는 강수까지 쓰면서. 그녀는 분명 이런 의구심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교주님이 왜 이 공자를 황천각주에 앉혔는지 이제 확실히 이해가 가는군요.”
“왜죠? 저는 아직도 아버지의 뜻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서 내 눈을 들여다보듯 응시했다.
“이 공자는 묘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요.”
마치 자신감에 넘치는 사람만이 이렇게 허심탄회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다는 듯, 그녀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잠시 숙고하던 그녀가 이윽고 결정을 내렸다.
“좋아요, 저도 장호를 추천해주겠어요.”
“정말이십니까?”
나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내심 그녀가 추천해주리라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바로 도마와의 특수한 관계 때문에.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교를 위한 마존이 도마만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해두죠.”
그녀가 돌아섰다. 무언의 축객령임을 알았기에 그녀에게 정중히 인사했다.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녀가 이번 일에 나서는 것은 전적으로 혈천도마 때문이다.
혹시라도 내가 후계자가 될 인재이고, 그것을 도마가 먼저 알아봤을까 봐. 만약 그렇다면 도마가 나를 독차지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다. 도마에게는 길가에 떨어진 말똥도 주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고?
그녀는 정말 끔찍하게 도마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녀가 교주가 되었을 때, 맨 처음 죽인 사람이 바로 혈천도마였다.
* * *
다음 날 일화검존이 장호를 마군주에 추천했다.
이 전격적인 소식에 교내가 들썩였다. 마군의 대주가 후보로 나온 적도 없었고, 두 명의 마존이 뜻을 모아 한 사람을 추천한 적도 없었다.
특히 그 두 마존이 사이가 좋지 않은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었으니 오죽하겠는가? 자연스럽게 장호가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천마전에서도 교주 검우진과 총군사 사마명이 이 일에 관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설마 이 공자가 검존을 끌어들일 줄은 몰랐습니다.”
“두 사람의 불화를 이용했겠지.”
“모두가 그들의 불화를 알고 있지만, 누구도 이번 일을 이렇게 쉽게 해낼 수는 없을 겁니다.”
혈천도마도 일화검존도 모두 만만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니까. 모두가 뻔히 아는 불화를 이용하려 했다간, 역효과만 날 것이다.
“장호란 자는 어떤가? 마군을 맡겨도 되겠는가?”
“능력 자체는 출중한 자입니다. 다만 순수 무인에 가까워서 정치적인 입지가 약합니다. 그런 장 대주를 선택한 것부터 아주 영리한 선택이었습니다.”
“애초부터 장호를 발굴한 것은 아니었을 거네.”
“그 말씀은?”
“감정적인 선택이었겠지. 생각보다 감정적인 아이라네.”
사마명은 검우진의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까지 자식에 대한 평가를 자신에게 말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점이자 단점이군요.”
사마명의 말에 검우진은 단호히 말했다.
“단점이지.”
사마명은 옅은 미소로 말을 아꼈다. 최근 교주가 검무극에게 마음을 열고 있다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누구나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교주가 검무극을 후계자로 삼을 것으로 생각지 않았다. 검우진은 드러나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결정을 내리곤 했기 때문이다. 아직은 모를 일이다.
“마군주 문제는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요?”
“둘이 추천했다면 받아들여야지. 그 사람들 체면도 있는데.”
검우진은 기다렸다는 듯 명령을 내렸다.
“장호를 마군주에 앉히게.”
* * *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이 마군주가 되었다는 소식에 장호가 가장 먼저 나를 찾아왔다. 그는 마군주가 되었다는 사실에 기쁨과 걱정을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장 대주 성격으로 볼 때 아마 은혜는 못 갚을 거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내가 장 대주를 마군주에 앉힌 이유는 두 가지네. 첫 번째는 그 자리에 가장 걸맞은 사람이라 생각해서지. 장 대주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마군과 본교를 위해서 장 대주가 적임자라 여겼네.”
“과분하게 여겨주셔서 몸들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마군이 내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서지. 한데 첫 번째 이유와 두 번째 이유가 상충하지 않나? 강직한 장 대주께서 사적인 관계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거네. 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난 그대에게 친분을 강요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걱정 말게.”
그러자 장호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저를 처음 만났을 때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제 친구의 죽음 때문에 투서를 넣었습니다. 복수하기 위해서였죠. 제 목숨도 거기에 걸었고요. 보시다시피 저는 사람과의 관계를 인생에서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감정적인 사람입니다. 조직을 위해서 사적인 관계를 버리는 사람으로 보셨다면, 저를 잘못 보신 겁니다. 그때 공자님께서 오지 않았다면, 아마 저는 그때 죽었을 겁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내가 가지 않았다면 그는 그 사건으로 죽었다.
“저는 공자님께 충성하고 싶습니다. 아니, 이미 충성하고 있습니다. 물론 교주님과 교에 충성하고, 마군을 위해서 노력하겠지만, 가장 충성하는 것은 공자님이십니다.”
그는 진심을 말하고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사람을 수하로 얻었다는 것을.
“저도 공자님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함께 있으면 어떤 어려운 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분이십니다.”
“이 정도 아부면, 정치를 못 해 불이익을 받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군.”
“하하, 저 그렇게 깨끗한 놈 아닙니다.”
“앞으로 잘 부탁하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의 커다란 손을 굳게 맞잡았다. 난 이 크고 거친 사내의 의외성이 마음에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