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회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훈련은 오늘로 끝이다.”
장호의 말에 집행무인들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욕을 얼마나 했는지 셀 수 없을 정도로 힘든 훈련이었지만, 얻은 것이 많았다.
무공이 비약적으로 발전하진 않았지만, 해이해져 있던 정신만큼은 바짝 당겨졌다.
집행무인쯤 되는 고수들에게 정신력의 차이는 실력 차이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장호는 틈틈이 집행무인들의 무공을 봐주면서 잘못된 자세나 버릇을 교정시켜주었다. 덕분에 무공실력이 실질적으로 향상된 이도 여럿이었다.
장호는 마지막까지 집행무인들 하나 하나에게 자세를 어떻게 고치고 앞으로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정말이지 지옥 훈련을 받았던 집행무인들이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을 거다.
“훈련을 조금 더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때 옆에서 지켜보던 내가 나섰다.
“그건 힘들게 됐다. 장 대주가 이번에 마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마군주란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훈련장에만 있어서 외부 소식을 듣지 못한 탓이다.
“축하드립니다.”
누군가의 축하에 함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장호가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대들과 함께 한 시간을 잊지 못할 거네. 그럼 다음에 보세. 아니지, 내 입장에서 자네들을 보면 큰일 난거지. 우리 평생 보지 말자고!”
그렇게 농담까지 곁들인 마지막 인사를 한 후 장호는 그곳을 떠났다.
장호가 서 있던 단상에 내가 섰다. 집행무인들은 훈련 첫날의 눈빛과는 사뭇 다른 눈빛이었다.
“이보게들, 마군주에게 훈련받은 최초이자 마지막 무인들!”
내 말에 몇몇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우리 아버지를 체포해 오라고 명령해도 겁 없이 갈 수 있겠지?”
다시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져 나왔다.
그렇게 분위기를 풀어준 후, 나는 그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전했다.
“무공도 중요하고, 잘 싸우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집행무인이란 이름이 붙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부심이라 생각한다. 본교의 규율을 지키고 체제를 수호한다는 자부심, 우린 우리 길을 가는 거다. 알겠나?”
“네!”
“훈련받느라 고생했다. 연회를 준비해뒀으니 오늘은 실컷 마시고 쉬도록!”
앞서 우렁찬 대답보다 더 큰 기쁨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 * *
혈천도마는 매일 만나던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 우뚝 서 계시는 모습이 마치 저를 지켜주는 수호석(守護石) 같으십니다.”
“날 돌대가리라고 놀리는 건가?”
“그럴 리가요?”
일화검존을 끌어들인 것 때문에 노발대발 화를 낼 것 같았는데, 그는 평소답지 않게 차분했다.
“장호를 마군주에 앉힌 것, 축하하네.”
“감사합니다.”
나는 그 어느 때 보다 긴장하고 있었다. 이 늙은이가 갑자기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오늘의 혈천도마는 장호가 그랬던 것처럼 평소와 다른 의외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주 차분했다. 마치 이 혈천도마란 사람은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렇기에 사람의 한 단면만 보고 그 사람을 단정해선 안 되는 거다. 앞면에 속지 말아야 한다. 아직 나는 혈천도마의 뒷면이 어떤 모습인지 알지 못한다.
“어떻게 검존을 설득한 건가?”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하시면 솔직히 말씀드리죠.”
“화 안 내겠네.”
“어르신이 진정한 마존이라고 검존 선배의 자존심을 건드렸습니다. 어르신을 이용한 거죠.”
혈천도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그렇다면 자네가 속은 거야. 그 잔머리가 자네의 얕은 수작을 몰랐을 리 없지.”
그는 일화검존을 싫어했지만 적어도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그건 검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가 이번 일에 끼어들었다는 것은, 도마의 사람 보는 눈을 믿는다는 의미기도 했으니까.
“그 여우는 분명 자네에게 수작을 부릴 거야. 자넬 도와줬다는 이유로 나와 못 만나게 하겠지. 그럼 어떻게 할 텐가?”
“저야 어르신이 우선입니다.”
“장호를 도와준 것을 내세울 텐데?”
“그건 어르신이 먼저 도와주셨으니 괜찮습니다.”
“과연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했을 때도 그럴까? 바로 이것처럼.”
혈천도마가 품에서 작은 상자를 꺼내서 내밀었다.
“약속은 약속이니.”
나는 상자를 받아서 조심스럽게 열어보았다.
푸른 빛이 도는 한 알의 단약은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영험한 영기(靈氣)를 발하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실로 아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외신단이다.”
이 순간만큼은 놀라는 척 연기가 필요 없었다. 이렇게 흔쾌히 천외신단을 내놓는 모습에 정말 놀랐으니까. 영약을 구하려는데 괜찮은 것이 없다는 둥,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쉽게 내놓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었는데.
“오! 정말 천외신단입니까? 이걸 어떻게 구하신 겁니까?”
“오래전부터 보관해온 것이다. 나도 복용하지 않고 아껴둔 것이지.”
“정말 절 주시는 겁니까?”
“다시 가져갈까?”
“그럴 리가요.”
혈천도마는 속이 쓰린지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이공자, 자네에게 내 남은 인생을 걸어보겠네.”
혈천도마는 자신이 지닌 가장 강력한 패를 내놓았다.
일전에 아버지에게 말했었다. 혈천도마는 소장 가치가 없다고.
이제 그 말은 정정해야겠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화끈하게 나온다면, 나 역시 당신을 제대로 소장해 보겠다고.
형에게 갈 천외신단이 나에게 오면서 나와 혈천도마의 운명이 바뀌었다. 억지로 온 것이 아니라 ‘기꺼이’였기에 더욱 크게 바뀌었다.
“저를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정중히 그에게 포권한 후,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지금 여기서 신단을 복용할 테니 호법을 서주시겠습니까?”
그러자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내 앞에서 신단을 복용하겠다고?”
“네. 어르신이 주신 것이니, 어르신 앞에서 복용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운기조식을 할 때 호법을 서준다는 것, 이 행위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무인에게 있어 믿음의 마지막 단계다.
“날 믿는다는 건가?”
“믿기 때문에 이 천외신단도 복용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여기에 독을 탔다면, 저는 해독제를 얻기 위해서 어르신이 시키는 대로 해야 할 테니까요.”
혈천도마의 눈빛에 흥미로운 기색이 스쳤다.
“내가 독을 타지 않았다고 믿는 이유는?”
“그런 비열한 방식을 선택할 분은 아니시니까요.”
“나는 내가 꽤 비열하다고 생각하는데?”
“비열함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요. 제 눈에 비친 어르신은 판까지 엎으면서 약속을 어기시는 분은 아니니까요.”
“자네 예감이 틀렸다면?”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습니다. 자, 그럼 잠시만 호법을 서 주십시오.”
사실은 안전한 모험이었다. 왜냐하면 혈천도마는 독공이나 사술(邪術)이라면 치를 떨 정도로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망설이지 않고 천외신단을 복용했다.
혈천도마는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설마 진짜로 자신의 앞에서 영약을 복용할 줄 몰랐던 모양이다.
천외신단은 회귀 전 인생에서도 본 적이 없는 영약이었다.
‘신단아, 부디 잘 녹아라.’
입안에서부터 녹아내린 천외신단의 약효가 목구멍을 넘어 온몸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앞서 소천동에서 복용했던 마정단보다 훨씬 더 큰 기운이었다.
천맥강화술로 강화된 혈맥은 이 엄청난 기운을 통로를 크게 열고 환영했다. 천리마처럼 내달리는 신단의 기운을 혈맥은 기꺼이 들판이 되어 받아주었다. 질풍처럼 내달린 영기가 온몸의 미세 혈맥으로 뻗어나갔다.
나는 이 거대한 기운을 완벽하게 내공으로 녹이기 위해 운기조식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렇게 여러 차례 정성스러운 운기조식이 끝나자, 나는 천외신단의 영험한 기운을 단전에 갈무리할 수 있었다.
눈을 뜨자 조금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날 쳐다보고 있는 혈천도마의 모습이 보인다.
“신단 맛이 어땠나?”
“꿀맛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은 평생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젠장! 빌어먹을!”
그는 자신이 먹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직접 드신 것보다 열 배는 더 값지게 소화되었다고 확신합니다.”
이제 당장 눈앞의 혈천도마와 붙어도 내공 때문에 졌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단전에서는 정순한 내력이 넘치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주름이 많았다.
“이보게, 이공자.”
“네, 어르신.”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자네 정체가 뭔가? 자네가 뭔데 내 마음을 뒤집어서 천외신단까지 뱉어내게 한 건가?”
나는 곧장 내공을 끌어올리며 마기를 발출했다. 폭발하는 화산이 용암을 분출하듯, 마기가 터져 나왔다. 지금까지 그에게 보였던 것과는 다른 차가우면서도 엄격한 기운이었다.
“장차 그대를 이끌 사람이오. 그때까지 그대가 살아있다면 말이오.”
자신을 짓누르는 숨 막히는 기운 속에서 혈천도마의 표정에 여러 감정이 스쳤다. 적어도 화를 낼지언정 비웃지는 않았다.
내가 마기를 거둬들이자 얼어붙었던 주위 공기가 풀어졌다.
“배짱이 두둑한 것만은 인정하지.”
“저도 하나만 묻겠습니다.”
“묻게.”
“어르신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 늙어서 원하는 것이 뭐가 있겠나? 그저 살아온 대로, 관성에 이끌려 계속 살아가는 거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열정적이시지 않습니까?”
“내가?”
“날 밀어붙일 때 보면, 젊은 사람 같거든요. 활활 타오르는 불길이 느껴집니다.”
이 순간 나는 혈천도마의 눈에서 또다시 불길을 보았다. 여전히 혈천도마는 불길 속에 홀로 서 있다.
“그래 보이나?”
“네.”
반면 그는 스스로에 대해 자신이 없는 듯 말했다.
“다행이군. 요즘 나는 내가 다 식어버린 줄 알았는데…….”
나는 이것이 어떤 마음인지 짐작했다. 바구니에 아무리 많은 야망과 열망, 욕망을 담아도 세월이 무심하게 덜어내 버리는 것이 있다.
“술 주십시오.”
“술을? 이번 내기에 내가 졌는데?”
“천외신단을 아끼지 않고 내주시는 순간, 내기에서 이기셨습니다. 어르신의 술, 받겠습니다.”
“진심인가?”
“앞으로 저를 잘 이끌어 주십시오.”
내가 상대하기에도 이렇게 까다로운데, 내 적들은 얼마나 힘들겠는가? 혈천도마를 진정한 내 사람으로 만들 생각이다. 그게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감격한 혈천도마가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자, 받게.”
나는 혈천도마가 준 술을 시원하게 마셨다.
“앞으로 잘해보세!”
“네, 개수작을 부려도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부려 주십시오.”
잠시 흠칫하던 혈천도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마존이 된 이후로, 자신에게 개수작이란 말을 면전에서 한 사람은 내가 처음일 것이다.
“한잔 더 하시죠.”
“좋네!”
나는 안다. 지금 저렇게 활짝 웃고 있지만, 그는 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열지 않았다. 혈천도마는 빼꼼히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것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저 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모른다.
사람 마음은 절대 알 수 없다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나는 혈천도마란 사람에 대해 예측하거나 단정 짓지 않을 작정이다. 딱 보이는 대로만 판단할 거다.
그리고 우리 관계는 저 문이 활짝 열리는 날 결정되겠지.
당신 불길에 내가 타죽든, 당신이 내 검에 찔려 죽든, 우리가 영원한 친구가 되든, 그날 결정이 나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