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회 바가지를 씌울 겁니다.
늦도록 수련장에서 무공수련을 했다.
지금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련이었다. 화무기에게 지는 순간, 내가 쌓아가는 이 모든 과정이 아무리 값지고 훌륭했다 하더라도 말짱 헛수고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수련이 너무 힘들 때면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딱 일 각의 수련이 모자라서 화무기에게 죽는 상상. 물론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런 절망적인 상상은 게으름을 타파하는 데 제법 도움이 된다.
다행히 오늘의 수련은 회귀 이후 가장 기분 좋은 수련이었다.
단전에서 정순하면서도 웅혼한 공력이 휘몰아쳤다. 초식의 위력은 한층 더 강해졌고, 속도는 빨라졌다.
지금 내 내공은 마존들과 생사대전을 겨룰 수 있을 정도로 올라섰다. 내 나이에 비하면 그야말로 누구도 믿지 못할 공력이었다.
‘아직 부족해.’
더 모아야 한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내공이었으니까.
계속된 수련에 풍신사보는 상당한 진척이 있었다. 언젠가 벽을 만나는 순간이 오겠지만, 수련 초반인 지금은 한 번 펼칠 때마다 실력이 느는 기분이 들었다.
풍신사보를 펼치면 펼칠수록, 나는 싸우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였다. 풍신사보는 끊임없이 나의 투심을 자극했다.
―참아라, 널 마음껏 세상에 드러낼 순간도 올 테니까.
그렇게 한바탕 풍신사보의 초식을 마쳤을 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공력이 또 늘었구나.”
깜짝 놀라 돌아보니 아버지가 서 계셨다.
“정말 귀신이십니다.”
기척 없이 등 뒤에 와 있는 것도, 초식을 보는 것만으로 내 내공이 늘어난 것을 알아맞히는 것도.
나는 솔직히 말했다.
“혈천도마에게 천외신단을 얻었습니다.”
사건이라면 대사건인데, 아버지는 별달리 놀라지 않았다.
“왜 안 놀라세요?”
“그에게서 얻을 것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게 자그마치 천외신단이었다니까요?”
“도마 그이가 천외신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깜짝 놀랐다. 혈천도마는 이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알고 계셨죠?”
그러자 알고 있었다는 사실보다 더 충격적인 내용이 흘러나왔다.
“오래전에 내가 준 거니까.”
“맙소사! 그걸 아버지가 준 거라고요?”
문득 혈천도마가 나보다 자신이 아버지와 더 친하다며 바닥에 줄을 긋던 모습이 떠올랐다. 한때 두 사람 사이가 굉장히 좋았다는 것은 이로써 확실해졌다.
“그와의 내기에서 너는 무엇을 걸었느냐?”
“저는 저를 걸었습니다.”
“도마 그이가 단단히 손해 보는 장사를 했구나.”
“제 장사는 이제부터입니다. 팔마존들을 상대로 바가지를 제대로 씌울 작정이니까요.”
예전이라면 헛소리라며 한마디 하셨을 아버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듣고만 계십니까?”
“너라면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이제야 제 진가를 알아봐 주시는군요.”
“너는 왜 그리 마존들을 미워하느냐?”
“그들을 보고 있으면 이런 환청이 들립니다. 이봐, 너 천마가 되고 싶지? 한데 어쩌나? 우리가 밀어줘야 천마가 될 수 있는데. 내가 뒷배가 되어 줄까? 원해? 그럼 내게 잘 보여봐.”
“피해의식 아니고?”
“그럴지도요. 어쨌든 싫습니다.”
나는 혼자서 이 싸움을 할 생각이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할 싸움이기에, 적어도 팔마존과 관련해서는 솔직한 심정을 전했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몰라도 아버지와의 관계만큼은 꼬여선 안 된다.
“수련해라.”
돌아서는 아버지에게 내가 고마움을 전했다.
“장호를 마군주에 앉혀주셔서 감사합니다.”
“너 때문이 아니라 두 명의 마존이 추천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다시 한번 더 아버지를 불렀다.
“아버지.”
아버지는 돌아서지 않은 채 대답했다.
“왜 그러느냐?”
“저는 행복해질 겁니다.”
순간 아버지의 등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의외의 말이었을 것이다.
“제가 행복해야 주위 사람도 행복하고 본교도 행복해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뭐라 말하기 전에 내가 선수를 쳤다.
“딱 죽기 좋은 싸구려 감성이죠?”
“알면 됐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아버지가 한마디 덧붙였다.
“이 길을 가려면 행복 따윈 생각도 마라.”
아버지가 문을 닫기 전에 큰 소리로 말했다.
“싫습니다, 전 그 길을 가면서도 꼭 행복할 겁니다.”
마치 어림없는 꿈이라고 말하는 듯 쿵 소릴 내며 문이 닫혔다.
행복이란 말에 거부감을 가지는 아버지를 이해한다. 아버지도 나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았으니까.
행복은 패배자들의 도피처로 여겼으니까.
하지만 아버지, 제가 살아보니 목표를 이루려고 애쓰는 것만큼이나 행복을 느끼며 사는 것이 어렵더라고요.
……아니, 어쩌면 성공을 위해 달리기만 하는 인생보다 그게 더 어려울지도요. 오히려 우린 성공으로 도피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 * *
확실히 일화검존은 혈천도마와 달랐다.
자신이 도와서 장호를 마군주로 만들었으니 당장 달려와서 생색을 낼 법도 한데 일화검존은 전혀 소식이 없었다.
‘나보고 찾아오란 의미다.’
그녀가 체면과 명예를 중요시한다는 것이 이 하나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반면 혈천도마는 자신의 감정을 우선하는 사람이다. 성질나면 달려와서 버럭 해야 직성이 풀린다.
나는 좋은 술을 한 병 사서 일화검존을 찾아갔다.
일화검존은 모옥 마당에서 화원을 손질하고 있었다.
“꽃들이 참 예쁩니다.”
“나이 들면 꽃이 예뻐진다는 말이 있어요. 우리 이공자께서는 아직 먼 이야기지만.”
더 나이가 들면 그조차도 귀찮아진다는 것은 모를 거다.
“이번에 도움을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뜻으로 술을 사 왔습니다.”
“선물은 고맙지만, 나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아요. 끊은 지 오래됐죠.”
“아, 그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사실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일부러 술을 사 왔다. 너무 상대를 잘 파악하고 있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한다. 사소한 것들이 모여서 관계를 만드는 법이니까.
“자고로 도움을 받았으면 갚아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원하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그녀는 여전히 꽃을 손질하며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도마와는 인연은 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역시 혈천도마의 예상대로 그녀는 이것을 대가로 내세웠다.
“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도마는 이공자가 추구하는 이상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니까요.”
“외람된 질문이지만 제 이상이 뭔지 아십니까?”
“엄정한 질서와 규율을 가진 곳으로 본교를 바꾸겠다고 했다지요? 도마는 누구보다 규율에 속박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에요. 이공자와는 많은 충돌이 있을 겁니다.”
아마도 일화검존은 자신의 설득이 통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녀는 스스로에 대해 넘치는 자부심을 지녔으니까. 특히 도마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은 사람이라 여겼고.
“죄송하지만 선배님의 말씀은 따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순간 그녀의 신형이 흠칫했다.
“왜죠?”
“도마 어르신께서 제게 너무나 큰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원래라면 굳이 선물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천외신단을 받은 것을 그녀에게 흘릴 작정이었다.
나는 혈천도마와 함께 일화검존도 내 사람으로 만들 작정이다.
두 사람은 서로 사이가 지독하게 나빴기에, 오히려 다루기가 더 편할 점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두 사람의 감정이 어떤 식으로든 터져 나올 것이기에,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혈천도마가 좌사(左使), 일화검존은 우사(右使).
무림 역사상 가장 강력한 좌사와 우사가 될 것이고 좌도우검(左刀右劍)이 될 것이다. 이 둘을 좌우에 세우고 나머지 팔마존들 머리채를 쥐고 흔들 생각이다.
“어떤 선물이죠?”
“개인적인 선물이라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우리 관계가 그 정도 대화는 나눌 정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착각인가요?”
“아, 곤란한데요.”
잠시 고민하는 척하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그녀에게 말했다.
“검존께서 이번에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으니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 제게 천외신단을 주셨습니다.”
“뭐라고요?”
그녀는 꽃을 손질하던 손길을 멈추고 내게로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의 여유와 고고함이 한순간에 깨졌다.
“정말 이공자에게 천외신단을 주었단 말인가요?”
일화검존은 혈천도마가 내게 천외신단을 준 것을 도저히 믿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녀는 더 놀랐다.
“그 신단은 지금 어디에 있나요?”
“이미 제가 복용했습니다. 한데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도마는 본래 욕심이 많은 사람인데, 그 귀한 걸 이공자에게 줬다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겠어요?”
“제가 신단보다 더 귀하다고 판단하신 모양입니다.”
농담처럼 던진 말이었지만 일화검존은 웃지 않았다. 실제로 그러하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이번에 도와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혹시라도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기별 주십시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그렇게 정중히 인사하고 떠나려는데, 검존이 나직이 나를 불렀다.
“이공자.”
그녀를 돌아보자 일화검존이 말했다.
“이공자가 본 도마는 어떤 사람인가요?”
“괴팍하고, 폭력적이고, 제 멋대로이고. 처음에는 싫었는데, 만날수록 괜찮아졌습니다.”
“천외신단을 줘서가 아니고요?”
“부정할 수는 없겠네요. 누군들 좋지 않겠습니까? 천외신단인데.”
“한낱 영약일 뿐이에요.”
“그 한낱 영약이 제겐 꼭 필요해서요.”
그녀는 어떻게든 도마와 나의 관계를 끊으려고 애썼다.
“앞으로도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도마와 연을 끊으세요. 도마는 아니에요.”
“그럼 증명하십시오.”
“뭘 말이죠?”
나는 잠시 그녀를 응시하다가 말했다.
“선배께서 도마 어르신보다 더 제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란 것을요.”
일화검존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본교의 기강을 잡고 정의를 세우겠다는 것은 헛소리였나요?”
“도마 어르신은 제게 천외신단을 주셨습니다. 관계를 끊으려면 제게도 명분이 있어야겠지요.”
“명분은 본교를 위하는 이상으로 충분하지 않나요?”
난 보란 듯이 피식 웃었다.
“꿈이니, 이상이니, 충성이니…… 그런 것들로 수하나 후배들의 마음을 공짜로 얻으려는 사람들, 저는 경멸합니다.”
그 순간 검존은 분노했고 나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차갑게 내려앉으면서 드러난 삭막한 눈빛.
그녀의 눈동자는 마치 황량한 사막처럼 느껴졌다.
혈천도마의 눈동자에서 이글거리는 불길을 보았다면, 일화검존에게서는 지독한 목마름을 느꼈다. 온화한 모습에서의 변화였기에 이 삭막함이 더욱 강렬하게 전해져 왔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제 나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화무기에게 봉문 당한 이후, 왜 그녀가 가장 먼저 움직였는지. 그녀의 야망이 왜 다른 팔마존보다 성급했는지. 저 삭막함을 무엇으로라도 채워야 했을 테니까.
원래라면 휘두른 채찍은 벽에 걸어두고 당근을 깎았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선배님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대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할 거고, 많은 결정을 내려야겠지요. 그때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확히 판단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십시오.”
그러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마 어르신이 주신 천외신단보다 귀한 것을 이 손에 올려주십시오.”
도마는 아니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반드시 혈천도마여야 한다. 그렇기에 당신이 이렇게 흔들리고 있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니까.
“이공자, 원하는 것이 뭔가요?”
그녀에게 내민 손바닥을 다시 접었다. 나는 그녀에게 도와달라고 하지 않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아뇨, 지금은 없습니다.”
그녀에게는 이렇게 들릴 것이다.
제겐 이미 도마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원하는 것이 없다고 했기에 그녀는 더욱 조급해질 것이다. 차라리 뭘 내놔라, 했으면 이성적으로 대응했겠지만.
“그럼 다음에 또 뵙지요. 이번에 도와주신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한 후 모옥을 나섰다.
한참을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그 자리에 서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이글거리는 눈빛을 향해 나는 다시 한번 꾸벅 고개를 숙인 후 걸음을 옮겼다.
그래, 그렇게 부글부글 끓어올라라.
물이 끓어야 요리는 시작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