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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42화 (42/214)

제42회 불운과도 잘 부딪쳤으니.

거처로 돌아오는데,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혈천도마가 기다리고 있던 그 자리에 일화검존이 앉아 있었다.

놀랍게도 술상까지 차려놓고서 말이다.

“이공자, 오늘 하루도 고생했으니 한잔하고 가세요.”

“좋습니다, 선배님.”

나는 일화검존 앞에 앉았다. 혈천도마를 대할 때와 마찬가지로 편하게 미소지었지만 내심 긴장했다.

“술은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잖습니까?”

“이 술은 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이공자를 위한 술이에요.”

“감사합니다.”

그녀가 술을 따라주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술을 마셨다.

“그 술에 독이라도 들었으면 어쩌려고 확인도 하지 않고 마시죠?”

“확인은 안 했지만 대비는 했습니다.”

“어떻게요?”

나는 입속에서 피독주를 뱉어냈다. 독연을 막아주기도 하지만, 이렇게 입에 물고 술을 마시면 입안에서 독을 중화시키기도 한다.

“언제 이걸?”

“아까 인사드리면서 슬쩍 물었지요.”

“피독주를 물었는데도 어찌 표가 나지 않았죠?”

“최상급 피독주라 워낙 작기도 하고, 입에 넣고도 발음이 새지 않게 훈련도 했습니다.”

일화검존의 표정에 감탄이 스쳤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선배께서 제게 좋은 감정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덥석 주시는 술을 마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피독주를 물고 있었다는 것을 솔직히 말했기에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대신 이것만은 확인했다.

“도마가 주는 술도 피독주를 물고 마셨나요?”

“그건 아닙니다.”

순간 일화검존의 표정이 굳어졌다.

“도마는 믿고 나는 믿지 않는다?”

“도마 어르신과는 그 첫술을 마실 때까지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요.”

“우리도 있었잖아요?”

“아뇨, 없었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일화검존이 항변했다.

“장호를 중복해서 추천한 것은 저였어요.”

“장호를 추천해주셨지만, 그건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도마 어르신과 인연을 맺지 말라는 강요를 위해서였죠. 그게 저를 위한 선택이었습니까?”

난 대답이 아쉬운 일화검존을 몰아붙이기만 하진 않았다.

“저는 선배님과 많은 일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래서 피독주 없이 주시는 술도 마시고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세요.”

“왜 마음에 없겠습니까?”

“그 마음에는 이미 도마가 있잖아요?”

“선배님이 저라면, 누가 마음에 있기를 바라겠습니까?”

그게 바로 당신이라는 듯 나는 피독주 없이 술을 마셨다. 그녀를 믿는다는 내 행동에 일화검존의 표정이 풀어졌다.

그녀는 도마와 비교되는 것조차 거부하는 사람이다. 둘 중 하나라면 당연히 자신을 선택하리란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기도 했고. 독 같은 것, 당연히 타는 사람 아니고.

“이공자.”

“네.”

“원하는 것을 말하세요.”

“제가 후계자가 되도록 도와주십시오. 대신 도마 어르신과 절연하라는 조건 없이 도와주십시오. 제가 원하는 것은 그것뿐입니다.”

“이공자, 세상에 조건 없는 도움은 부모에게나 바라야 하는 법이에요.”

거절의 뜻을 밝힌 일화검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냥 가려던 그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도마에게 생일선물을 줬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네.”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지만, 사실은 이것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뭘 줬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내가 술상에 올려둔 피독주를 들었다.

“이걸 드렸습니다.”

“귀한 것을 줬군요.”

“귀한 것을 받았으니까요.”

일화검존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깐 고민하는 듯 보였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 풍류주점에서 한잔할 겁니다. 생각나시면 오십시오.”

일화검존은 대답 없이 떠나갔다.

* * *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내 거처로 돌아왔을 때, 또 다른 손님이 있었다.

놀랍게도 아버지가 내 거처의 마당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두 마존에 이어 아버지까지. 오늘 하루에 제목을 붙이라면 거물들과의 만남이라고 해야겠다.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이십니까?”

“어찌 사나 보러 왔다.”

내 거처에 아버지가 온 것은 처음이었다. 사냥도 처음, 함께 밥 먹은 것도 처음, 거처를 찾아온 것도 처음. 아버지와는 이렇게 처음인 것이 많다.

“들어가시죠?”

“사내놈 혼자 사는 냄새나는 방에 뭐하러.”

“그럼 의자라도 내오겠습니다.”

“됐다. 오늘도 충분히 앉아 있었다.”

“하긴. 예전에 마의가 그러더군요. 오래 앉아 있는 것이 건강에 제일 나쁘다고요. 앉아 있는 시간만큼 단명한답니다. 태사의에 너무 오래 앉아 계시지 마십시오.”

나는 아버지 옆에 가서 나란히 섰다.

“오래 살고 싶으냐?”

“그럼요. 아직 안 해본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다 해보고 죽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버지는요? 천마 말고 해보고 싶은 것 없으십니까?”

“없다.”

너무 단호한 대답이라서, 나는 오히려 ‘너무 많아서 대답할 수가 없다’라고 들렸다.

“언젠가 아버지와 같이 중원에 나가보고 싶습니다.”

아버지가 힐끗 나를 쳐다보았다.

“뭐, 무림맹 치러 가자는 말씀은 아니고요.”

이 농담만은 우스웠는지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그냥 여기저기 사람 사는 곳 둘러보자고요. 어떻습니까? 나중에 저와 세상 구경 한 번 하시는 것은요? 설산(雪山)이 여름에 가면 그렇게 시원하다던데.”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린 잠시 저 멀리 석양 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는 길에 일화검존을 만났습니다. 도마와 관계를 끊으면, 자신이 뒷배가 되어주겠답니다.”

있는 그대로 아버지에게 말했다.

“너는 누구와 손을 잡고 싶으냐?”

“다루기는 검존이 편할 것 같은데. 도마가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요.”

“그렇게 방심하다 죽는 거다.”

“확실히 늙은이가 사람을 방심시키는 재주가 있습니다.”

도마에 대해선 아버지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도마에게 천외신단을 왜 주신 겁니까?”

“예전에 한 가지 일을 맡겼다.”

아버지는 무슨 일인지는 말해주시지 않았다. 아버지도, 도마도 젊은 시절에 있었던 일이 분명했다.

“어떻게 할 작정이냐?”

“두 사람 다 가지고 싶습니다. 좌도우검, 좌사우사로요.”

아버지가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았다.

“괜한 욕심이 아닙니다. 제 본능이 이렇게 말합니다. 앙숙 같은 저 둘을 같이 데려가면 훨씬 결과가 좋을 거라고요. 처음에는 힘들겠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편할 거야. 자꾸 이렇게 속삭입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냐?”

“아버지가 핏속에 물려주신 자신감 아닐까요?”

이제 노을은 절정을 이루며 아버지와 내 얼굴을 붉혔다.

아버지가 불쑥 말했다.

“검존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아버지를 돌아봤지만, 그 말만 하시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점을 이용하라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니 봐주라는 말씀인지.

“처음 혈천도마를 만났을 때, 그가 그러더군요. 자기는 평생 불운과 함께 살아와서 자주 안 보는 게 좋다고요. 그런데 요즘 아버지를 뵙는 것만큼이나 그 사람 자주 보고 있습니다.”

난 두 사람을 데려가려는 의지를 다시 한번 밝혔다.

“불운과도 잘 맞부딪쳤으니, 상처와도 부딪쳐 보겠습니다.”

* * *

그날 저녁, 풍류주점에서 술을 마셨다.

혈천도마에게도 오라고 했고, 일화검존에게도 오라고 했다. 누가 올지, 혹은 둘 다 안 올지 알 수 없었다.

“이것 좀 드셔보십시오.”

주인장 조춘배가 요리를 하나 가져와서 내밀었다. 특별히 나 먹으라고 만든 모양이다.

“고맙소. 앉아서 같이 한잔하시오.”

“어휴, 제가 어딜 감히 앉겠습니까?”

“나랑 술 마시기 싫으신가 보오.”

“그럴 리가요.”

조춘배가 자리에 앉았다.

나는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조춘배는 어이쿠, 어이쿠를 연신 내뱉으며 내 술을 받았다.

“그렇게까지 예를 갖출 것 없소.”

“아닙니다. 갖춰야지요. 각주님 덕분에 우리가 얼마나 편해졌는데요?”

“좀 편해지셨소?”

“아무렴요. 이 골목에 황천각 지부가 생긴 이후에는 무인들이 술 마시고 행패 부리는 일이 확 줄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갚지도 않을 외상 남기는 일도 많이 줄었지요.”

“다행이오.”

“이게 다 이공자님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잘 살펴보다가 이건 내게 알려야겠다는 일이 생기면 꼭 말씀해주시오.”

“알겠습니다.”

조춘배가 내가 준 술을 시원하게 마신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또 다른 사람이 와서 꾸벅 인사를 하고 갔다.

“감사합니다, 이공자님.”

무슨 일 때문에 감사한지 말하지 않았다. 아마 그 역시 황천각 도움을 받은 모양이다.

그가 인사만 하고 후다닥 제자리로 갔을 때, 누가 내 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인기 많군.”

커다란 도를 등에 매고 걸어온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였다. 그의 등장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지난번 도마와 술을 마셨을 때는 이른 시간이라 손님이 없었는데, 오늘은 손님이 많았다.

그들에게 마존과 같은 곳에서 술을 마시는 일이 어디 편한 일이겠는가?

내가 일어나서 모두에게 말했다.

“마존께서는 더 없이 인품이 높으신 분입니다. 그러니 걱정마시고 술 드십시오. 이쪽에 와서 술주정만 안 하면 됩니다.”

농담까지 곁들이자 긴장이 풀렸다.

내가 자리에 앉자 혈천도마가 불퉁한 얼굴로 말했다.

“거짓말은 왜 하나?”

“착한 거짓말이죠. 돈 내고 술 마시러 왔는데, 눈치 보면서 마실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 꼴 보기 싫음 가면 되지.”

“그 말씀 하시려면 저 사람들에게 돈부터 나눠주세요. 이 돈 가지고 딴 곳에 가서 먹어라. 주인장에게도 손해 본 만큼 돈 주고요.”

“또 착한 척은.”

“착한 척이 아니라 이게 기본인 겁니다.”

“이게 마인이냐?”

“마인은 뭐 사람 아니랍니까?”

“이보게, 이공자. 이럴 때면 자네가 본교 사람인지 무림맹 사람인지 헷갈린다네.”

나도 내 정체성의 바탕이 마교라 생각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지난 삶에서 젊은 시절 본교를 떠나 평생 중원을 떠돌았다.

그때 많은 사람을 만났다. 낭인시절은 물론이고 대법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온갖 인간군상들을 겪었다. 상처도 받았고, 분노도 느꼈으며, 진정한 인간애가 어떤 것인지도 알았다.

내 삶의 가치관은 그때 다 만들어졌으니, 어떤 의미에서 나는 마도, 정도, 사도 아닌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절대악을 없애고 새로운 마도를 세우려는 것 역시 그런 경험적 배경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나는 들뜬 목소리로 술잔을 높이 들었다.

“자, 생신 축하드립니다. 아직 자정이 지나지 않았으니, 축하는 유효하네요.”

“그 목소리 좀 낮추게.”

뭐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였지만, 생일잔치만큼은 부담스러운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만난 이후 이렇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하긴 누가 있어 이렇게 축하를 해줬겠는가? 물론 형식적인 축하선물은 수도 없이 받아봤겠지만, 오늘 이 자리와는 의미가 달랐을 테니까.

“앞으론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나이 드는 것이 뭐 좋은 일이라고 축하까지 하나?”

“핑계 삼아 이렇게 술 마시고 노는 거죠.”

“이공자도 보기보다 술을 좋아해.”

“맞습니다. 저도 몸속에 주충(酒蟲) 몇 마리는 키우고 있습니다. 비 올 때 고개 드는 놈도 있고, 우울하거나 괴로울 때 고개 드는 놈도 있죠. 어르신은 술 좋아하십니까?”

“예전에는 좋아했는데…… 요즘은 많이 줄였지.”

바로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끊지는 않았군.”

고개를 돌려보니 조금 떨어진 곳에 일화검존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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