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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43화 (43/214)

제43회 내 검은 눈보다 빠르다.

그녀의 등장에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오늘 검존이 이곳에 온다는 이야기를 그에게 하지 않았으니까.

“어서 오십시오, 선배님. 이리 앉으세요.”

일화검존 역시 이 자리에 혈천도마가 있을 줄은 몰랐는지 표정이 굳은 채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돌아설 것 같은 그녀에게 차분히 말했다.

“오늘 도마 어르신 생신입니다. 아무리 미운 사람이라도 생일 정도는 축하해 주는 거라 배웠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돌아갈 수는 없었는지, 일화검존이 자리에 앉았다.

그녀가 합류하자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나는 왜 오라고 한 건가요?”

나중에 풍류주점에서 술 마시자고 한 것을, 나와 단둘이서 마시자는 것으로 들었던 모양이다.

“오늘 좋은 날이니 함께 축하하자고 불렀습니다.”

“다음에는 혼자 있을 때 부르세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혈천도마가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인가?”

정말 오랫동안 참아왔던 불만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일화검존 역시 발끈하며 쏘아붙였다.

“뭐라고요? 뭐가 불만이냐고요? 그걸 몰라서 지금 묻는 건가요?”

감정의 검은 그녀의 검보다 더 빨리 뽑혀 나왔다.

“그래, 몰라서 묻는다. 대체 뭐 때문에 그리 화가 나 있는데?”

“당신! 바로 당신!”

“내가 뭐?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때…….”

“닥쳐요! 닥치라고요!”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이 나올까 봐 그녀는 긴장했다. 그녀의 분노와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져왔다.

“당신은 이기적인 머저리야.”

“뭐라고?”

혈천도마도 벌떡 일어났다.

“당신 닮은 그 무식한 도 휘두르려고? 그래, 한 번 해보시지. 또 술 취해서 마음대로 지껄여보라고!”

도마의 손에 들린 멸천대도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그들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싸우지 않을 것임을 알았기에.

마존들끼리는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철칙이 있었다. 말싸움도 하고, 뒷이야기도 하고, 온갖 내분은 있을지언정 생사대결은 펼치지 않았다.

이건 아주 오랫동안 지켜온 생존원칙 같은 것으로, 팔마존이 지금까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기도 했다.

“아직 자정이 되려면 좀 남았으니까, 잠시 고정하시지요.”

그러자 일화검존이 카랑카랑한 어조로 목청을 높였다.

“이공자! 대체 뭐 하는 짓이야! 날 얼마나 업신여겼으면 이딴 수작이냐고?”

항상 예를 갖추던 그녀의 평정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고정하십시오.”

“고정 못 하겠네.”

“검존님을 모신 이유를 말씀드리지요. 솔직히 저는 검존 선배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서 두 분이 화해하시기를 바랐습니다. 대체 무슨 일로 이렇게 서로를 미워하시는지 모르겠지만요.”

그러자 일화검존이 긴 한숨을 내쉬며 평소의 모습을 애써 찾았다.

“술 한잔 마셔서 화해할 수 있었다면, 지금까지 왜 사이가 나빴겠어요?”

“풀릴 때까지 만나고 또 만나는 거죠. 욕도 하고, 머리도 잡아 뜯고. 풀릴 때까지 계속 만나서 싸우는 거죠.”

“이공자, 욕심이 너무 과해요. 내가 첫날 분명히 말했어요. 도마와는 함께 갈 수 없다고.”

“그럼 선배님께선 혼자서 저를 후계자로 만들어주실 자신 있으신가요?”

“자신 있어요.”

“저는 믿을 수 없습니다. 두 분이 사이가 나쁜 것이 공적인 이유라면 저도 알고 있었겠지요. 하나 본교의 누구도 모릅니다. 아마도 지극히 사적인 이유이기 때문이겠죠. 대업을 위해 사적인 감정을 털어내지 못하는 선배님을 믿고 어떻게 제 인생을 걸겠습니까?”

일화검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뭐라 말을 쏟아내려던 그녀가 나와 도마를 무섭게 노려보고는 홱 돌아서 그곳을 떠나갔다.

혈천도마는 자신의 술잔을 비운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축하는 잘 받았다. 망할 놈아!”

꽝!

오늘도 결국 탁자를 부순 후 혈천도마도 그대로 나가버렸다.

나는 다시 탁자값을 옆 탁자에 올려두며 주방 앞에 선 조춘배에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 때려 부수는 버릇부터 고쳐야겠죠?”

조춘배가 어색하게 웃으며 한마디 농담을 던졌다.

“요즘 같아선 목수가 되면 돈을 더 많이 벌 것 같습니다.”

나도 웃으며 객잔을 나섰다.

두 사람이 만나면 이렇게 될 줄 예상했다.

이들을 자꾸 끌어내야 한다. 묻어둔 감정이 끌어내서 서로 부딪치고 욕하고 싸우고. 그러다 보면, 스스로를 잡아먹은 케케묵은 원망이, 막상 돌이켜보면 별 게 아니었구나를 깨닫게 만들어야 한다.

가능한 일이라 생각한다. 두 사람은 이미 살아온 세월이 훨씬 많았으니까.

그들의 화해는 시간이 필요한 일이었는데, 일화검존은 단 하루도 기다려주지 않았다.

* * *

그날 밤, 잠을 자다가 눈을 떴다.

나를 깨운 것은 천마호신공이었다. 외부에서 느껴지는 기운에 나는 침상에서 일어나 흑마검을 차고 밖으로 나갔다.

나를 깨운 사람이 마당 가운데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일화검존이었다.

“역시. 보통 실력이 아니군요.”

별다른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내가 깬 것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제가 잠을 깊이 못 자서요.”

“이공자.”

“네, 선배님.”

등을 돌린 채 그녀가 말했다.

“이공자 때문에 고요한 호수에 파문이 일고 있어요.”

그 호수는 본교를 의미하는 것일까? 그녀 자신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일까?

“저는 아직 젊어서 고요한 호수보단 폭풍이 치는 바다를 동경한답니다.”

“예전에 내게 이런 말을 했지요? 꿈이나 이상 따위로 수하의 마음을 공짜로 얻으려는 사람을 경멸한다고.”

“네.”

“나도 경멸하는 사람이 있어요.”

“어떤 사람입니까?”

“말만 번드르르하고 실력이 따르지 않는 사람이죠.”

“제가 그런 사람인가요?”

“그런지 아닌지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요?”

일화검존이 등을 돌린 채 천천히 검을 뽑았다. 완벽한 발검이었다. 뒤돌아 서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어떤 허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일화검존에게 차갑게 말했다.

“제가 싫어하는 사람이 또 있습니다.”

“누구죠?”

그녀는 돌아보지 않고 물었다.

“강한데 배려가 없는 사람입니다. 힘으로 찍어눌러서 관계를 유리하게 이끄는 사람을 경멸합니다. 그 빈곤한 상상력으로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는 꼴을 보기 싫습니다.”

검존의 몸에서 마기가 폭발했다.

“닥치세요! 잘한다 잘한다 해줬더니 건방이 도가 지나칩니다.”

그녀가 내게 돌아섰다. 그녀의 눈에서는 서릿발처럼 강력한 마기가 쏟아져나오고 있었다.

“만약 제가 이기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갈등이 생기자마자 곧장 나를 찾아온 그녀를 보면서, 그녀를 내 사람으로 만들 유일한 방법은 오직 실력으로 누르는 것임을 깨달았다.

백 번 정치보다 한 번의 실력행사가 더 효과적인 상황, 도마와의 관계는 나중 문제였다.

순간 검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긴다고 말했나요?”

“네.”

“만약 이공자가 나를 이기면, 이공자가 원하는 대로 해주겠어요. 죽으라면 죽겠어요.”

그녀가 자기 목숨을 걸었다. 절대 지지 않을 자신감이었다.

“좋습니다.”

“만약 이공자가 지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 역시 선배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죠.”

“제가 원하는 것은 간단해요. 도마를 이공자의 삶에서 쳐내세요.”

그녀의 자신감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버지 다음으로 무공이 강하다고 자부하고 있는 그녀였으니까.

“제가 원하는 것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전혀 궁금하지 않아요. 영원히 들을 일 없는 이야기에요.”

난 천천히 흑마검을 뽑았다.

“그럼 오늘 제가 원하는 것에 대해 알게 되겠군요.”

검을 뽑아 든 우리는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마존급 고수가 얼마나 빠른지 나는 잘 안다. 공격을 보고 막을 수 없다. 수련으로 다져진 본능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죽는 거다.

내 공격을 하수들이 막지 못하고 죽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검은 그들에게 보이지 않는다.

휘이잉.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에 검존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가 늘어뜨린 검 끝을 살짝 비틀었다. 그것만으로도 기세가 달라졌다.

이런 긴장감, 오랜만이었다.

“이공자, 비록 그대를 죽이지는 않겠지만 조심해야 할 거예요. 내상을 입을 수도 있을 터.”

이 대결이 꼭 죽여야 하는 적과의 생사대전이었다면 나는 ‘조심해야’라는 말을 꺼냈을 때 상대의 호흡을 끊고 출수했을 것이다. 상대를 무시하는 자만에서 비롯된 말이니, 출수의 기회는 그때다.

물론 지금 이 싸움은 생사대전이 아니었으니, 우린 차분히 대화를 나눌 여유가 있었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한데 제 검이 흑마검이라서 선배님의 검이 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녀는 내 걱정은 무시했고, 오히려 한술 더 떴다.

“이공자에게 세 수를 양보하겠어요.”

과거 선배들이 후배들을 상대할 때 세 수를 양보했다. 옛사람들이나 그러했고, 요즘은 후배들에게 양보하는 선배를 찾아볼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검존은 낭만이 있는 사람이다.

“양보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자, 그럼 후배 가겠습니다.”

나는 결코 자만하지 않았지만, 대신 한 가지 실력만은 감췄다.

풍신사보는 사용하지 않고 상대하려는 것이다. 비장의 한 수는 언제나 감춰야 하는 법. 그건 일화검존 역시 마찬가지일 테니까.

내 작전은 이것이었다.

‘양보한 삼 초식 안에 끝낸다.’

나는 탐색전은 생략하고 곧장 대성을 이룬 비천검술을 발휘했다.

제일식 균천식(均天式)이 펼쳐졌다.

쉬이이이익!

한 줄기 검광이 그녀를 가로로 양단하는가 싶었는데.

챙애애애애앵!

그녀의 가슴 앞에서 검과 검이 부딪쳤다. 그녀의 놀람이 검을 타고 전해진다. 내 공격에 담긴 내공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을 테니, 진짜 숙적을 만났을 때의 위기감이 그녀의 온몸 털을 곤두세우고 있을 것이다

연속해서 두 번째 공격이 펼쳐졌다.

제이식 변천식(變天式)이 화려한 검광을 흩뿌렸다. 검은 그녀의 눈앞에서 열두 번 변화를 일으켰고, 검존은 뒤로 물러나며 일일이 공격을 튕겨냈다.

하지만 아홉 번째 변화에서 그녀는 약속을 어겼다.

쉬이익!

챙.

그녀의 검이 내 가슴으로 날아들었고, 몸을 비틀며 흑마검으로 공격을 쳐냈다.

일화검존은 세 수를 양보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공격을 감행했다.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변천식의 계속된 변화를 단지 수비만으로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공격을 통해서 방어를 대신한 것이다.

“이런.”

낭패한 그녀가 뭐라 변명을 하려던 그때.

나는 세 번째 공격을 날리고 있었다. 이때가 기회였다. 심기가 크게 흔들린 상태에서 심지어 말까지 하려고 했으니.

제삼식 현천식(玄天式)이 날아들었다.

쇄애애애애액!

카앙!

검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들려온 한 마디 외침, 절대 검존의 입에서 나와서는 안 될 말이 터져 나왔다.

“얼굴은 안돼!”

그리고 이어진 정적.

내 검은 일화검존의 얼굴 앞에 멈춰 있었다. 사실 그녀의 외침보다 검은 먼저 멈췄다. 내 검은 그녀의 눈보다 빨랐으니까.

반면 손을 벗어난 그녀의 일화검은 허공에 떠 있었다.

우리의 시선이 함께 일화검을 향했다. 검은 포물선을 그리며 바닥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일화검존은 영원히 그것이 바닥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푹.

일화검이 바닥에 꽂혔다. 파르르 떨리는 검, 새하얀 검손잡이 때문에 마치 백기가 흔들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모습을 멍하게 지켜보던 일화검존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했다. 그녀는 이 상황이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빛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바랐다.

그녀의 첫마디가 쌍욕이 되기를.

그녀가 굳건히 쌓아 올린 고고함의 둑에서 돌 하나가 빠져나오기를. 그 구멍으로 그녀의 상처를 엿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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