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44화 (44/214)

제44회 첫날보다 편한 얼굴로.

아쉽게도 내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공자,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일화검존의 목소리가 떨렸지만, 그녀는 차분함을 유지했다.

원래 그녀의 계획은 이랬을 것이다. 첫 세 수를 가볍게 양보하고, 한 이삼십 수정도 나를 가지고 놀다가 이기려 했을 텐데. 오히려 그녀 자신이 단 세 수만에 패한 것이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흑마검이니 조심하시라고요.”

나는 흑마검 덕분에 이긴 듯 말했지만, 그녀는 핑계로 자신의 패배를 덮을 만큼 나약한 사람은 아니었다.

“흑마검이 아니라 천마검이었다 해도, 내가 져서는 안 되는 싸움이었어요.”

검 때문이 아니라 실력 때문에 졌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비밀을 알려드리죠. 전 이미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습니다.”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벌써 대성을 이뤘다고? 믿을 수 없어요.”

비천검법의 무공 수준은 마존들이 익힌 무공과 비슷했다.

그런 상승의 무공을 내가 벌써 대성을 이뤘다고 하니 그녀의 불신은 당연했다.

“우리 아버지를 모르십니까? 그냥 아들이라고 황천각주 자리에 앉히겠습니까?”

“설령 이공자가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다 하더라도…….”

“내공이 부족했을 거라고요? 전 천외신단을 복용하지 않았습니까?”

“아!”

굳이 소천동에서 마정단을 얻은 것까지 이야기하진 않았다.

“이번 비무는 제가 이겼습니다. 인정하십니까?”

“…….”

그녀는 인정하지 못했다.

“이공자의 실력이 이 정도인 줄 알았다면 내가 그렇게 방심하진 않았을 거예요.”

내 실력을 몰랐고, 선공 삼수를 양보한 상태에서 벌어진 일이다. 게다가 말을 하려는 순간 당한 공격에 검이 날아갔던 것이고. 그녀에게는 여러 악재가 겹쳤다.

“그래서 인정 못 하신다는 겁니까? 만약 검존께서 약속을 어긴 것이 알려지면, 평생 비겁자 꼬리표가 선배님을 괴롭힐 겁니다.”

“닥쳐요! 그딴 불필요한 말로 나를 자극할 필요 없어요. 나는 약속을 지킵니다. 이공자, 뭘 원하죠?”

“지면 목숨까지 내주신다고 했으니.”

“이 대결은!”

뭐라 변명하려던 그녀가 입을 다물었다. 방심해서 졌든, 무공이 약해서 졌든, 진 것은 진 것이었다. 세 수를 양보하겠다고 자만했던 것도 자신이었고.

“원하는 것이 내 목숨인가요?”

“그럴 리가요. 도마 어르신께 미친놈이란 소릴 여러 번 들었지만, 그 정도로 미친놈은 아닙니다.”

“그럼 원하는 것이 뭐죠?”

“제 사과를 받아주십시오.”

순간 검존은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검존께 무례하게 대한 점, 사과드립니다. 진심으로 드리는 사과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녀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를 희롱하는 건가요?”

“아뇨, 오늘 선배께 무례했습니다. 그 자리에 선배를 부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겼으면서도 내게 사과하는 이유가 뭐죠?”

“솔직히 말씀드릴까요?”

“당연히!”

“이렇게 사과드리고 선배님의 환심을 사고 싶습니다. 그래서 선배님이 저를 진심으로 지지하게 하고 싶습니다.”

“진심? 후계싸움에서 진심을 말하는 건가요? 그딴 것이 통하는 바닥이라고 여겼다면 실망이군요. 이공자가 이렇게 순진한지는 몰랐어요.”

“상대에 따라 다르겠죠. 저는 상대가 흙을 뿌리면 진흙탕에 밀어버리고, 물을 끼얹으면 똥물로 대응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선배님께는 순진함으로 승부하고 싶습니다.”

“왜죠? 내가 순진해 보여서요?”

“아뇨. 고고하신 성품이시니까요. 팔마존 중 누구보다 존경받을만한 분이시니까요.”

이후의 그녀 삶을 생각하면 지금 한 말은 전부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 일들은 아직 벌어지지 않은 일이다. 나와의 만남을 분기점으로 그녀의 운명이 바뀐다면, 피바람을 일으켰던 미래는 사라지고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지 않을까? 그녀 눈동자 속에서 보았던 삭막한 황무지에 꽃을 피울 수 있지 않을까?

“정말 제가 그렇다고 생각해요?”

“네, 고상하시고 기품이 있으십니다.”

그녀는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그 칭찬이 기쁘면서도 한편으론 뭔가 마음이 복잡한 모습이었다.

나는 걸어가서 바닥에 꽂힌 일화검을 뽑아서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거처로 들어갔다.

들어가서는 그대로 잠을 잤기 때문에 그녀가 얼마나 오래 그곳에 서 있다가 돌아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 * *

다음 날 밤, 일화검존이 다시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밤새 잠을 자지 못했는지 눈과 얼굴이 부어 있었다.

“이공자의 사과는 받아들이겠어요.”

“감사합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뭡니까?”

“어제 대결은 내가 졌어요. 인정하죠. 대신 오늘 다시 붙어요.”

나는 단번에 거절했다.

“싫습니다.”

“왜 싫죠?”

“이제는 두 번 다시 이길 수 없을 테니까요. 검존께서 방심하지 않았다면, 선공을 양보하지 않았다면 전 결코 이기지 못했을 겁니다.”

“이공자는 비천검법의 대성을 이뤘잖아요? 공력도 충분하고요. 다시 싸워도 이길 수 있어요.”

“못 이깁니다.”

“왜 그렇게 확신하죠?”

“인생에서 한두 번 찾아오는 행운이었습니다. 전 그걸 실력이라 자만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이겼을 때의 조건은 걸지 않겠어요. 대신 졌을 때는 이공자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어요.”

그야말로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것이다.

그녀가 왜 교주가 되어 피바람만 일으키다 무너졌는지 알 것 같았다.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내가 뭘 요구할 줄 알고. 참으로 어리석고, 순진하다.

“선배님, 어제 승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굳이 저를 이기려 하시지 않아도 됩니다. 어차피 어제 일은 아무도 모를 겁니다.”

“사람 일은 알 수 없죠. 술기운에 내뱉어 버릴 수도 있고.”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주도권을 내가 쥔 이상, 천천히 그녀를 내 쪽으로 끌어들이면 되는 것이다.

“오늘은 푹 주무십시오. 얼굴이 상해 보입니다.”

그렇게 돌아서 들어가는데 그녀가 불쑥 말했다.

“수치스러웠어요.”

내 발걸음을 멈추는 말이었다.

다시 그녀에게 돌아섰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이긴 것은 순전히 운이었다고요.”

“단지 비무에 졌기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 수치심의 원인은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 있었다.

“얼굴은 안된다는 그 말, 생각하면 할수록 너무 수치스러웠어요.”

검이 날아들었을 때, 그녀가 외쳤던 말이다.

얼굴은 안 돼!

“그럴 수 있죠. 얼굴인데. 남자인 저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죠. 하지만 검존은 그럴 수 없어요. 차라리 얼굴을 찔리고 말지.”

그녀는 그 말을 내뱉은 게 너무 자존심 상하고 수치스러웠던 모양이다.

물론 나는 그 말을 뱉은 그녀를 이해한다. 그녀는 자신의 명예나 검존이라는 자부심만큼이나 외모에 대한 자부심도 강했다. 잘 싸운다는 말보다 예쁘고 젊어 보인다는 말을 더 듣고 싶어 하는 그녀였으니까.

“이제 내가 다시 온 이유를 알겠나요?”

“네.”

“그럼 나와 싸워주겠어요?”

그녀는 절실함이 가득했지만 내 대답은 그에 부응하지 않았다.

“싫습니다.”

내가 돌아서자 뒤에서 그녀의 외침이 들렸다.

“이공자!”

“그냥 이 한 번의 행운을 만끽하게 해주시면 안 됩니까?”

그러자 검존이 뜻밖의 말을 꺼냈다.

“약속했어요. 절대 지지 않기로.”

“누구와요?”

“그분을 제외한 누구에게도 지지 않기로.”

그분? 검존이 그분이라 칭하는 사람이라면?

“설마?”

순간 내 머릿속을 스친 사람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교주님과 약속했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검존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다.

아버지와 검존 사이에 어떤 깊은 유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언제 하신 약속입니까?”

검존은 대답 대신 아버지에 대한 존경을 드러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은 오직 교주님뿐이에요.”

그녀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아버지를 존경하는 사람이, 교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피바람을 불러일으켰단 말인가? 대체 왜?

“교주님과의 약속을 어기기 싫어요.”

그녀는 내가 불손한 오해라도 할까 봐 재빨리 덧붙였다.

“혹시라도 지금 불경한 생각을 한다면 내 분명히 말하겠어요. 교주님을 향한 내 순수한 존경심을 욕보이지 말라고요.”

“아뇨,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다행이군요.”

“아버지가 왜 그리 존경스럽습니까?”

검존은 옅게 웃을 뿐, 자세한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아버지와의 일을 꺼냈다면 그녀로서 마지막 수를 사용한 것.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좋습니다. 아버지와 하신 약속은 지켜야죠.”

일화검존이 기뻐했다. 지금까지 보였던 미소나 웃음을 전부 가식으로 만드는, 진짜 기뻐서 웃는 웃음이었다.

“그렇게 좋습니까?”

“좋아요.”

“저는 이번에도 최선을 다할 겁니다.”

“제가 원하는 바에요.”

두 번째 승부도 최선을 다해 싸웠다.

오히려 첫 비무보다 더 흥분되었다. 일화검존은 방심하지 않았고,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격정이 가득했다.

물론 이 싸움은 죽이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오직 승부를 겨루는 비무였다.

탐색을 위한 십여 수가 지났고, 몸이 풀린 백여 수를 거쳐, 화려한 초식들을 쏟아내며 삼백여 수가 지났다.

비무가 계속되면 될수록 우린 점점 승부를 떠났다.

순수하게 무공을 겨루는 재미에 빠져든 것이다. 누가 이기느냐는 나중 문제였다.

불가능해 보이는 초식이 연계되는 것에 놀라기도 했고, 내 허점을 재빨리 파악하는 감각에는 더욱 놀랐다.

‘아! 정말 대단하다! 이 사람은 정말 검에 尊을 붙일 자격이 있다.’

원래라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틈도 없겠지만, 우린 약속이나 한 것처럼 쉬어야 할 순간에 물러나서 쉬었다.

온전히 무공을 겨룬다는 사실에만 빠져들었기에, 우린 우리가 겨뤘던 여러 초식들을 되새김질했다.

순수하게 무공을 겨루는 이 순간이 지난날 그 어떤 생사의 갈림이 줬던 괘감보다 더 큰 즐거움을 주고 있었다.

아버지나 이안에게 느꼈듯 나는 그녀에 대해서도 오해한 부분이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녀의 명예욕과 자존심은 황량한 그녀의 정신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다. 그 근원은 무공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적어도 검술에 있어서 그녀는 세상 누구보다 진지했고, 진심이었으며 진짜였다. 검술을 대하는 자세만큼은 아버지가 무공을 대하는 모습을 연상시킬 정도였으니까.

평생을 오직 검술만 배웠던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검으로 하는 대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승부는 무승부였다. 필살의 의지가 없는 싸움에서 우린 박빙의 실력이었다.

“필살의 한 수를 사용하지 않으셨을 테니, 이 승부는 제가 졌습니다.”

“마찬가지 아닌가요?”

“아뇨, 저는 이게 제 실력 전부입니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일화검존이 불쑥 말했다.

“이공자, 고마워요.”

그녀는 그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섰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첫날보다 편한 얼굴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앞으로 그녀가 어떻게 나올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지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니 내일 다시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오늘의 비무가 영영 끝일 수도 있고.

그녀와의 비무는 내 감정을 움직였다.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의 삭막한 황무지 같은 정서를 적시기에 충분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녀에 대한 투자는 지금부터다. 내 사람 하나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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