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8회 혼자 사는데 뭐가 외로워.
주위 사물이 살아 있는 것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 서탁도, 장식장도, 벽에 세워둔 검과 부채도 모두 흘러내렸다. 마치 뜨거운 열기에 녹아서 흐물거리는 것만 같았다.
바닥 역시 파도가 치는 것처럼 출렁거렸다. 걷기도 힘든 이곳에서 보법을 발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 보였다.
벽과 천장 역시 출렁거리고 있었고, 바둑판 같은 선들까지 생기면서 시야를 어지럽혔다.
섭혼마존의 목소리가 동굴 속 그것처럼 깊게 울려 퍼졌다.
“자네가 살았던 세상은 허상일 뿐이야. 지금 보고 있는 이곳이 진짜 세상이지.”
자연스럽게 천마호신공이 발동했다. 만약 천마호신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이미 그에게 정신을 빼앗기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공격을 가해 위기를 벗어날 상황도 아니었다.
저 앞에 서 있는 섭혼마존이야말로 허상일 테니까.
아직은 가장 강력한 사술을 발휘한 것이 아니었기에 이 상황을 제어할 수 있었다. 나는 귀기를 다스리며 차분히 말했다.
“술값을 아낄 수 있는 세상이군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이렇게 취한 것처럼 어지러우니.”
이미 쓰러졌어야 할 내가 차분히 농담하는 것을 보자, 섭혼마존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음 순간 내 귀로 그의 속삭임이 들렸다. 여러 사람이 속닥속닥 소문을 나르는 그런 중첩된 목소리였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이공자가 잠룡이 되어 승천하기 시작했다더니.”
어느새 그는 내 옆에 와 있었다.
내 옆에 선 그가 허상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었다.
베어봐야 알 것 같은데, 과연 놈을 벨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부터 들었다. 검을 뽑기도 전에 이런 생각이 들었으니, 그와 싸움이 벌어진다면 정말 힘든 싸움이 될 것이다.
아버지가 왜 찾아와서 경고까지 해주셨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천마호신공이 발동된 상황인데도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이때 공격까지 해온다면 대체 섭혼마존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나는 옆에 선 섭혼마존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무나 평범했기에 오히려 비범해 보이는 그의 얼굴.
“저는 승천할 생각이 없습니다. 가늘고 길게, 이 세상에서 오랫동안 즐기고 싶습니다. 강해지려는 것도 그 때문이죠.”
정확히는 섭혼마존이 추구하는 삶이었다. 그는 가늘고 길게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까. 그는 죽기 전에 여러 말들을 남겼는데 다음도 그가 자주 했던 말이었다.
―내가 강해지기 위해 평생 노력한 것은 그 누구에게도 죽지 않기 위해서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정말 소중하게 여기는 인물이었다. 심혼대법 역시 그런 자기애의 발로였고.
섭혼마존이 날 보며 히죽 웃었다.
“멋진 생각이군.”
동시에 주위의 울렁거림이 멈췄다.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지자 어느새 주변이 바뀌어 있었다.
정신 나갈 것 같았던 공간은 사라지고 이번에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광경이다.
섭혼마존은 저 멀리 들판 가운데 서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소리쳤다.
“정말 멋진 무공입니다.”
원래 그의 심기를 뒤틀려면 무공이란 말 대신 사술이나 눈속임이라 말했겠지만, 지금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그의 세상에선 한 수 접어주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으니까.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지.”
그가 자랑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풍천교주도 이와 똑같은 무공을 펼칠 수 있다. 과거 음뢰종을 구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었다. 두 사람이 배운 무공의 뿌리는 혈교 마공에 있었으니까.
“어떤가? 이런 세상에서 살고 싶지 아니한가?”
그는 멀리 서 있었지만 목소리는 바로 옆에서 들렸다.
“가르쳐 주시면 감사히 배우겠습니다.”
그러자 다시 섭혼마존이 순식간에 내 앞에 나타났다.
“생각보다 음흉하군. 천하의 신공을 거저먹으려 들다니.”
“덕분에 저를 얻으실 수 있지 않습니까?”
그가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의 시커먼 눈동자가 점처럼 작아졌다.
“자네가 무슨 생각 하는지 훤히 다 보이는군. 혈천도마같은 머저리는 속여도 날 속일 수는 없지.”
“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내 머리채를 흔들며 귀싸대기를 날리고 싶어 해. 내 뺨을 갈기면서 이렇게 말하는군. 이 병신아, 네까짓 게 뭔데 말을 안 들어?”
“비슷한데 틀렸습니다. 이 병신아, 네까짓 게 뭔데 사람을 죽여? 양심 없는 네 심장부터 꺼내 보자! 어떻습니까? 좀 다르죠?”
섭혼마존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는 나를 죽일 자신이 있었기에 강자의 여유를 발휘했다.
“교주 아들이니 죽기도 힘들지? 그래서 내 손에 죽고 싶은 거지?”
“그럴 리가요. 죽은 천하제일보다 살아 있는 삼류가 낫지 않겠습니까?”
이 말 역시 섭혼마존이 자주 했던 말이었다.
섭혼마존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는가 싶더니.
점처럼 작아졌던 그의 검은자위는 원래대로 돌아왔고, 귀기 역시 모두 거둬들였다.
주변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다시 우린 섭혼마존의 방에 마주 보고 있었다.
“방금 내가 보여준 것은 맛보기에 불과하다네. 마음만 먹으면 지옥 같은 곳을 열어서 평생 못 나오게 할 수도 있지. 이래도 내가 두렵지 않은가?”
“두렵죠, 두렵습니다. 그러니까 아버지를 설득하겠다고 하지 않습니까?”
잠시 멍하게 날 쳐다보던 섭혼마존이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웃음 하나조차 평범하지 않은 그였다. 웃음은 상대의 마음을 헤집는 괴소(怪笑)였다. 내부가 진탕하며 속이 울렁거렸다.
“이 정도면 인정해야겠어. 과연 도마가 줄을 대려고 설쳐댈 만했군.”
역시 그는 나와 도마와의 관계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긴, 이 섭혼마존뿐만 아니라 나머지 마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보게, 이공자. 이만 돌아가시게.”
“아버지 얼굴을 봐서라도 당분간은 자중하십시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아버지를 두고 한 협박이었기에 두세 달은 먹힐 것이다.
“나를 또 본다면 이 세상으론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거네.”
나는 아무 대꾸 없이 걸어 나왔다. 그와 말로 하는 대화는 이제 끝났으니까.
* * *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서대룡이 내게 물었다.
“오셨던 일은 잘 처리되었습니까?”
“잘 되었다면 잘 되었고, 못 되었다면 못 되었고.”
“각주님께서 저 무서운 섭혼마존을 이렇게 찾아오셔서 해결책을 찾으시려 한 것만 해도 잘하신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게 뭐든…… 아무도 하지 않았던 일이니까요. 저는 거기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어둡고 삐딱한 녀석의 위로라니.
“화 많이 나셨지요?”
“그래 보여?”
“네.”
“처음 시체를 봤을 때는 화가 많이 났었는데, 지금은 괜찮아. 이미 마음의 결정을 내렸거든.”
잠시 날 쳐다보던 서대룡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떤 결정인지 대답 안 듣고 가?”
“이미 들었습니다. 지금까지 항상 보여주신 눈빛이시잖아요. 불가능을 해내시기 전에 보여줬던 눈빛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이래서 오른팔은 꼭 있어야 해.”
“자꾸 절 오른팔이라고 하시는데 각주님 오른팔은 이 무인 아닙니까?”
“이안? 이안은 오른팔 아니지.”
“그럼 제가 이 무인을 제치고 오른팔인 겁니까?”
살짝 기대하는 그였다.
“오른팔은 맞는데 이안을 제치지는 못하지.”
“무슨 뜻입니까?”
“이안은 내 심장이지, 심장.”
“이젠 오른팔이어도 섭섭한데요?”
나는 크게 웃었고 서대룡이 따라 웃었다.
“제가 오늘 술 한잔 사겠습니다.”
“정말? 우리 드디어 최고급 기루 가는 건가?”
“풍류주점입니다.”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고, 서대룡이 박봉을 외쳤다.
“좋아, 그럼 우리 짠돌이 서 조사관이 오랜만에 사는 술이니 왼팔과 심장, 왼쪽 날개까지 다 불러서 마시자.”
“왼팔은 마군주이실 테고 심장은 이 무인, 하면 왼쪽 날개는 누굽니까?”
“있어. 자, 가자고.”
내가 성큼성큼 걸어갔다. 저만치 앞서가다 서대룡을 돌아보았다.
“안 가?”
원래 그 자리에서 서대룡이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어서요. 마음 같아선…….”
“마음 같아선?”
그가 섭혼마존의 거처를 쳐다보았다. 들어가서 섭혼마존 머리채 잡고 끌고 나오고 싶은 눈빛이었다. 자신이 강했다면, 그랬을 것이란 열기가 느껴졌다.
우리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나는 요즘 이 작고 우울한 사내에게 꽤 많이 의지하고 있다.
“마음만 받자.”
“그래야죠!”
서환진을 나온 우리는 함께 풍류주점으로 향했다.
“비가 오려나 봅니다.”
과연 먹구름이 잔뜩 낀 것이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날 잘 잡았네. 비도 오고 오늘 술값 장난 아니겠는데?”
“풍류주점에서라면 괜찮습니다. 여자가 없으니 돈 쓸데도 없고.”
“아…… 너무 슬픈 이야기잖아? 안 되겠다. 술은 내가 사야겠다.”
“이공자님도 여자 없잖습니까?”
“난 이안 있잖아?”
이안이 나올 줄은 몰랐는지 서대룡은 눈을 껌벅거렸다.
“호위잖습니까? 그렇게 따지면 저도…….”
“그때 그 후배 있다고?”
서대룡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그 후배는 아니라고요!”
우린 풍류객잔 이 층 제일 넓은 자리를 잡았다.
“어서 오십시오, 각주님.”
요즘 주인장 조춘배에게 최고의 손님이 바로 나였다. 황천각 지부 덕분에 매상이 두 배는 올랐다는 그였으니까. 그뿐만 아니라 무인들의 횡포가 많이 사라져서 살맛 난다고 했다.
“오늘은 걱정 마시게. 탁자 부서질 일은 없으니까.”
“하하, 또 부서지면 어떻습니까? 사람만 안 다치면 됩니다.”
“기대하게. 여기 이 친구, 숨겨둔 쌈짓돈 나오는 날이니까.”
“맛있게 해서 올리겠습니다.”
조춘배가 본격적인 요리를 내오기 전에 술부터 가져왔다.
우린 잠시 아무런 대화를 하지 않고 조용히 술만 마셨다. 서대룡은 서대룡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생각에 잠겼다.
섭혼마존이 떠올랐다.
그를 떠올리면 죽이고 싶다는 생각과 함께 투심이 맹렬히 솟구친다.
예전의 나였다면,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지 않았을 거다. 수련장으로 달려가서 쉴 새 없이 검을 휘둘러 댔을 거다.
젊은 시절의 난 좌절을 겪을 때, 모든 마음과 정신을 그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으로 소진했다. 사람이 절박하면 노력으로 도피할 수도 있음을 그때는 몰랐다.
하지만 이젠 그러지 않는다.
분노가 치밀수록 차분해지려고 애쓴다. 수련하는 것만큼이나 내 사람들과 술을 마시는 일도 나를 강하게 하는 일임을 이제는 알고 있으니까.
그때 서대룡이 말했다.
“근데 저 오늘따라 기분이 좀 이상합니다. 계속 심장이 두근두근하네요.”
“예쁜 여자라도 봤어? 어디야?”
내가 장난스럽게 두리번거리자, 서대룡이 웃었다.
“여자 좋아하지도 않으시면서요?”
“누가 그래? 여자 싫다고.”
“아닌가요? 전 각주님이 여자에는 관심이 없으시다고 봤는데.”
여자라. 지난 삶은 평생 혼자 살아서 외롭기도 했고, 또 그래서 외롭지 않기도 했다.
“요즘 외로우십니까?”
“혼자 사는데 뭐가 외로워. 그냥 심심한 거지. 외로움은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느끼는 감정 아니냐?”
“오! 나중에 이 말씀 써먹어야겠습니다.”
“네가 좋아하는 후배에게 써먹어.”
“안 좋아한다니까요. 그리고 만날 일도 없습니다.”
“같은 조로 묶어서 일 시켜줄까?”
“됐습니다. 인연이 자연스럽게 이뤄져야지요.”
“봐, 좋아하잖아?”
“그게 아니라…… 됐습니다. 어휴, 제가 말씀을 말아야지.”
그가 술을 마셨다.
“아직도 계속 심장이 뛰어?”
“네.”
“오늘 운명적인 일이라도 일어나려나 보다.”
“설마요.”
그러는 사이 조춘배가 요리를 가져왔다.
이 순간만 해도 서대룡은 알지 못했다. 술을 사겠다는 오늘의 결정이 그의 인생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게 될지.
“오늘 진탕 마시자고요!”
술도 잘 못 마시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