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49화 (49/214)

제49회 허락 안 하시면 바짓가랑이라도.

풍류주점에 첫 번째로 도착한 사람은 마군주 장호였다.

커다란 덩치와 얼굴의 상처는 주점 내 모두를 압도했다. 장호가 일 층을 가로질러 이 층으로 올라올 때까지 손님들의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다가 그가 우리 자리에 합류하자 비로소 멈췄던 시간이 흘러갔다.

“잘 지내셨습니까, 이공자님.”

“나는 잘 지냈네. 괜히 바쁜 사람 부른 건 아닌지 모르겠군.”

“만약 이 자리에 안 불러주셨으면, 많이 섭섭했을 겁니다.”

“당연히 불러야지. 내 사람들과 다 같이 하는 첫 술자리인데. 자, 내 술부터 한 잔 받고.”

장호에게 술을 가득 따라주었다.

“감사합니다.”

서대룡과 장호도 인사를 나눴다. 지난번, 투서 사건으로 서로 안면은 있는 사이였다. 가뜩이나 체구가 작은 서대룡 옆에 장호가 앉으니 덩치가 세 배는 더 커 보였다.

술을 한 잔 마신 후 장호에게 물었다.

“많이 바빴지?”

“부임 초반에는 바빴는데 이제는 좀 괜찮아졌습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있거나 고민되는 일 있으면 언제든 찾아오게.”

“그럼요. 제일 먼저 찾아뵙겠습니다.”

언제봐도 듬직한 장호였다. 겉보기와는 달리 감정적이고 섬세했으며 사람 관계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다.

장호가 오자 술 마시는 속도가 빨라졌다. 장호는 큰 덩치만큼이나 술을 잘 마셨다.

술을 마시면서 서대룡은 장호를 힐끗힐끗 몰래 쳐다보았다. 눈치를 보는 것이 아니라, 부러움이 담긴 눈빛이었다.

“부러우냐?”

내가 정곡을 찌르자 서대룡은 흠칫 놀랐다.

“뭐가요?”

“장 군주 부러우냐고.”

서대룡이 취기를 빌려 솔직히 대답했다.

“네, 솔직히 부럽습니다. 저도 한때는 군주님처럼 되고 싶었습니다. 비록 실패했지만요.”

“아직 안 늦었다.”

“전에 말씀하셨죠. 제가 이미 늦었다고 한탄하니까, 실망스럽다고요. 한데 늦은 걸 어찌합니까? 벌써 제 나이 서른둘인데요.”

“그래도 안 늦었다.”

순간 발끈하려던 서대룡이 앞에 놓인 술을 마셨다. 원래 다른 상대였다면 남 일이라고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말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술로 화를 삼켰지만 서대룡은 상기되어 있었다.

“정말 늦지 않았습니까?”

진심으로 묻고 있음을 알았기에 나도 진심으로 대답했다.

“늦긴 늦었지.”

“어휴, 그럼 그렇지.”

서대룡은 실망했다. 혹시나 정말 안 늦었나 하는 마음이 있었던 모양이다.

“대신 그래서 좋은 점도 있지.”

“뭡니까, 그게?”

“더 진심으로 노력할 테니까. 검을 한 번 내질러도 남들보다 더 온 힘을 다해 내지를 테고, 걸음을 한 번 떼어도 남들보다 깊은 고민이 담길 테니까.”

“그렇더래도 결국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따라잡을 수 있어. 아, 마침 저기 좋은 본보기가 오네. 현실부정의 화신!”

내 시선을 따라 서대룡과 장호가 일 층을 쳐다보았다. 커다란 덩치의 이안이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면서 이 층 우리들 자리로 허겁지겁 올라오고 있었다.

“자네보다 한발 먼저 그 길을 걸어간 사람, 요즘 연무장에서 먹고 사는 사람, 그래도 저렇게 밝은 사람, 저기 온다.”

자리에 도착한 이안이 사과부터 했다.

“아, 정말 죄송해요, 씻고. 무복 갈아입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술 먹는 자린데 뭐가 그리 급해?”

“급해야죠, 귀한 분들과 함께하는 자린데요.”

이안이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장 군주님. 서 조사관님.”

밝게 인사한 그녀를 두 사람이 빤히 쳐다보았다. 늦어서 그런가 싶어 이안이 다시 사과했다.

“죄송해요, 제가 늦었죠?”

서대룡이 그녀를 빤히 본 것은 본보기란 말 때문이었고, 장호는 다른 이유에서였다. 장호가 정중히 그녀에게 말했다.

“뭔가 달라지셨어요, 이안 님.”

“제가요?”

“네. 어딘지 느낌이 다릅니다.”

마군을 이끄는 군주의 눈은 확실히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자 이안이 나를 슬쩍 쳐다본 후, 웃으며 말했다.

“수련 지옥에 빠지니 살까지 빠지네요. 좀 달라졌죠?”

물론 그래서가 아님을 나도, 이안도 잘 알고 있다. 비천검법을 전수받은 후, 그녀의 기도가 바뀐 탓이다. 아직 비천검술에 대해서는 외부에는 절대 말해선 안 될 비밀.

장호 역시 그 때문만은 아님을 느꼈겠지만, 더는 변화에 관해 묻지 않았다.

“날씨도 우중충한 것이 저도 술 생각이 간절했었답니다. 저 술 주세요!”

이안이 잔을 내밀었고, 내가 술잔 가득 따라주었다.

“수련한다고 고생 많다, 이안.”

“고생은요. 당연히 할 일이죠. 그리고 저보다 도련님이 훨씬 수련 많이 하시는 것 알아요. 잠까지 줄여가면서까지 하시잖아요.”

그러자 서대룡이 깜짝 놀랐다.

“정말요?”

“모르셨어요?”

이안의 물음에 서대룡이 나를 쳐다보았다.

“누가 봐도 농땡이를 칠 것 같은 분이신데.”

“그렇죠. 한데 저 게을러 보이는 껍데기 속에는 어마어마한 노력파 무인이 한 명 들어 있답니다.”

서대룡이 나를 봤다가 장호를 봤다가 다시 이안을 봤다. 그리고 혼자 술을 마셨다.

“저만 패배자가 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일은 열심히 하시잖아요?”

이안의 위로에 서대룡이 고개를 푹 숙였다.

“오늘 일 내일로 미루고 술 마시러 왔어요.”

“아아, 저런. 우리 서 조사관님 껍데기는 엄청 부지런해 보이시는데.”

이안이 슬쩍 그를 놀렸다. 이럴 때 보면 이안은 깔깔웃음이 어울리는 영락없는 젊은 여자애다.

“자, 오늘의 패배자를 위해서 우리 한잔해요!”

이안이 잔을 들었고, 우리가 건배했다. 패배자 역시 기분 나빠하지 않고 제가 그 주인공입니다라며 마지막 건배에 동참했다.

“어때?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도 제대로 무공 배워볼래?”

“네? 각주님께요?”

“아니.”

“그럼 누구에게요?”

서대룡이 자신도 모르게 장호를 쳐다보았다.

“거긴 왜 봐. 우리 중에 제일 바쁜 사람을.”

“아, 전에 집행무인들 훈련해 주셔서 혹시나 했습니다.”

“가르쳐 줄 사람 있으면 배울래? 정식 제자는 될 수 없겠지만, 네게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쳐 줄 수는 있을 거다.”

“누군데요?”

나는 누군지 알려주는 대신 그에게 말했다.

“네 각오가 먼저야. 다시 태어난다는 다짐이 서면 말해. 누군지 알려줄 테니까.”

나는 그를 차기 황천각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차기 각주가 되기에는 너무 젊었다. 그렇다고 사문이 좋거나 정치적인 인맥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각주가 되기 위해선 뭔가가 필요했다.

그러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전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서 어쩌면 더 잘 어울릴지도 모를 한 사람이.

“일각 준다. 고민해봐.”

“네? 여기서 당장 결정해요?”

“원래 이런 일은 오래 고민하면 결정 못 내려. 오늘 술자리 끝나면 다시 원점이야. 너도, 나도. 알잖아?”

그러자 서대룡은 진지한 고민에 빠졌고, 우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밖을 보며 술을 마셨다. 서대룡을 위해서 조용히 술을 마셨다. 나도, 이안도, 장호도 요즘 생각이 많을 때였으니까.

우리가 술 한 병을 비웠을 때 서대룡이 결정을 내렸다.

“해보겠습니다.”

“정말?”

“네.”

“자네 인생이 바뀌는 일이야.”

“각오 됐습니다. 인생 뭐 있습니까? 기회가 왔다 싶으면 잡는 거죠! 저 잘못돼서 죽으면 볕 잘 드는 곳에 묻어 주십시오!”

“예쁜 여자들 많이 다니는 길목에 묻어 주마.”

“좋습니다.”

서대룡이 앞에 놓인 술을 시원하게 비웠다.

“오! 축하드려요!”

이안이 힘차게 박수 쳤고 장호가 축하한다고 인사를 건넸다.

“다른 사람이 권했다면 어림없었을 겁니다. 한데 각주님이 권하시니까, 이상하게 귀가 얇아지면서… 이거 잡자. 기회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안이 웃으며 동조했다.

“우리 도련님 설득력은 고금제일이시죠.”

장호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룡은 기분이 좋은지 술을 또 비웠다. 평소 잘 마시지 못하는 그가 과음하고 있었다.

“한데 아시다시피 조사관 일을 십 년을 했습니다. 특별조사관에 오르려고 밤도 많이 샜고요. 그걸 다 버리려니 마음이…….”

“조사관을 왜 그만둬?”

“네?”

“그만둘 필요 없다고. 황천각에서 제일 필요한 사람이 자네인데, 그만두긴 뭘 그만둬? 일과 시간 이후에 무공 배우란 뜻이야.”

서대룡은 내 말을 농담으로 들었다.

“피곤해 죽으라고요?”

“대신 못다 이룬 꿈은 이루겠지.”

진지하게 대답하는 날 가만히 쳐다보더니 서대룡이 깜짝 놀랐다.

“설마? 진심이세요?”

“당연히 진심이지. 뒤늦게 배우면서 뭐가 그리 급해. 천천히 일 끝나고 배워.”

“늦었으니까 급하죠. 그렇게 배워서 고수가 될 수 있을까요? 제 인생 모든 것을 걸고 도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서대룡이 장호를 쳐다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지원을 바랐다. 하지만 장호는 호응 없이 내 말을 들으라는 듯 나를 쳐다보기만 했다.

원군을 구하지 못한 서대룡이 다시 전장으로 돌아왔다.

나는 차분히 그에게 말했다.

“보통 그래서 다 실패하지. 생각에는 인생을 다 걸 수 있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게 잘 안 되거든. 오히려 아침부터 밤까지 시간이 남아돌면 더 힘들다. 이렇게 시간이 많은데 나는 왜 발전이 없나,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나, 자괴감에 패배감에. 그냥 내 일을 하면서 조금씩 귀한 시간 쪼개서 노력할 때가 훨씬 더 큰 성과를 낸다. 그건 일이 아니라 즐거움이 되기도 하니까.”

당사자인 서대룡 말고 이안과 장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대룡은 심경이 복잡해 보였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누구에게 배우느냐다. 서로 합이 잘 맞는, 진짜 고수에게 배우면 수련 시간은 그다지 의미 없다. 그런 사람에겐 차 한잔 마실 시간만 배워도, 어설픈 놈이 평생 지껄인 소리보다 나을 거다.”

“진짜 고수, 누구요?”

이안과 장호마저도 누굴 사부로 삼으려는지 궁금해했다.

“곧 올 거야.”

“여길 온다고요?”

서대룡뿐만 아니라 이안과 장호도 깜짝 놀랐다.

“그럼 서 조사관님이 이런 결정을 내리실 줄 알고 계셨던 건가요?”

“점쟁이냐? 그걸 알게. 우발적으로 생각해 낸 거지.”

“그럼 그분은 이 상황을 모르겠네요?”

“당연하지.”

“맙소사!”

서대룡이 한 잔 더 마셨다. 벌써 평소 주량을 훨씬 넘긴 그는 술이 술을 부르는 단계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허락받느냐 마느냐가 최고 승부야. 안 되면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야지.”

우린 꼭 허락을 받아내자며 다 같이 술을 마셨다.

이안은 서대룡에게 술잔에 입만 대라고 했지만, 중요한 일을 앞두고 그럴 수 없다며 술잔을 깨끗이 비웠다.

“누군지 모르지만, 꼭 허락받아내겠습니다. 허락 안 하시면 오른쪽 바짓가랑이는 제 것입니다. 각주님이 왼쪽을 맡아주십시오.”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일이 이뤄진다고 생각해서인지, 서대룡은 한껏 상기되었다.

“도련님이 구해주신 사부님이면, 정말 훌륭하고 좋은 분이실 거에요.”

하필 이안이 그 말을 하자마자.

번쩍! 우르릉! 꽝!

벼락이 치고 천둥소리가 들렸다.

“이제 본격적으로 쏟아지려나 봐요!”

바로 그때였다.

“아, 저기 오네.”

내 말에 모두의 시선이 일 층을 향했다.

그곳으로 한 사람이 들어서고 있었다.

상대를 확인한 이안이 입을 틀어막으며 비명을 참았다.

장호 역시 흠칫 놀라며 눈을 크게 떴다.

등을 돌리고 있던 서대룡이 마지막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서대룡이 실시간으로 놀라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눈을 크게 떴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벌떡 일어나려다가 술을 쏟는 모습까지.

쿵.

우리 자리에 도착한 사람이 커다란 도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의 작고 찢어진 눈에서 살벌한 마기가 뿜어져 나왔다.

“건방지게 어디서 사람을 오라 가라야?”

도착한 사람은 바로 혈천도마였다.

쏴아아아아아!

기다렸다는 듯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