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회 비가 그치면 새들이 날아다닐 겁니다.
혈천도마가 자리한 사람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그 못마땅한 눈빛에 담긴 뜻은 이러했다.
‘나더러 이런 떨거지들 사이에 앉으란 말이냐?’
그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내가 반갑게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자, 이리로 앉으십시오.”
모두가 일어나서 정중히 인사하자 그가 못 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나는 왜 부른 거냐?”
예전에 검존이 오해했듯 내가 혼자 있을 줄 알았던 모양이다.
사실 혈천도마는 술자리에 누가 있느냐는 둘째 문제고, 그냥 이런 술자리 자체가 낯설고 부담스러운 사람이었다. 내가 생일선물을 줬을 때처럼, 그는 이런 사적인 분위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주점에 왜 불렀겠습니까? 같이 술 마시자고 불렀지요.”
내가 그에게 술을 따라주었다. 떨떠름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혈천도마는 술을 받았다.
“젊은 사람들하고 어울려야, 젊어지는 겁니다.”
“젊어져서 뭐 하게.”
“하루라도 젊어지면 좋은 거죠. 고수면 뭐하고, 권력을 가지면 뭐 하겠습니까? 세월 앞에선 다 무릎 꿇어야 하는데.”
“새파랗게 젊으면서 뭔 세월 타령이냐?”
우리들의 대화를 다들 놀란 얼굴로 듣고 있었다. 혈천도마와 내가 이렇게 편하게 대화를 나눌 줄은 몰랐을 테니까.
“이 순간을 즐기면서 살자는 말씀이죠. 다들 죽으면서 뭘 후회하고 죽겠습니까? 무공 더 못 익힌 것? 내공 더 못 쌓은 것? 저쪽 어디에 사는 검귀 못 이긴 것? 다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다들 죽기 전에 이 난리를 떠는 거다. 그딴 병신 같은 후회나 하면서 죽지 않으려고.”
“어르신은 다르실 겁니다.”
“내가 뭐라고.”
“어르신이야 연세에 비해 젊고 깨어있으시잖아요?”
자고로 칭찬이란 게 사람들 앞에서 해주는 칭찬이 최고 아니겠는가?
“흥!”
혈천도마는 코웃음을 치며 술을 마셨지만, 그리 싫지만은 않은 표정이었다.
서대룡은 그가 들어온 이후 정말 복잡한 얼굴이었다. 그의 만취한 눈빛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싫어요, 안 돼요! 아니죠? 장난이죠?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 그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맞았다. 나는 혈천도마를 서대룡의 사부로 삼으려 한다.
장호가 혈천도마에게 술을 올렸다.
“일전에 저를 추천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야 인사드립니다.”
“내 뜻이 아니라 여기 이공자 때문이었으니 인사는 저쪽에 하게.”
“저는 충분히 받았으니, 어르신도 인사받으십시오. 사실 어르신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죠.”
혈천도마가 장호를 쳐다보며 말했다.
“충분히 감당할 자리라 여겨서 추천했으니 신경 쓰지 말게.”
“감사합니다.”
마존에게 처음 듣는 칭찬에 장호의 표정이 밝아졌다.
사람의 본성은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태도는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혈천도마와 지금 이 자리의 혈천도마는 정말 큰 차이가 있다. 내가 이런 제안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어르신께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뭐냐?”
나는 서대룡을 쳐다보았다. 그는 더는 술기운을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친구, 무공 좀 가르쳐주십시오.”
생각지 못한 말이었는지 혈천도마는 깜짝 놀랐다.
“이 쥐방울이 누군데?”
내가 그를 소개하려던 그때, 서대룡이 고개를 번쩍 들며 혀 꼬인 소리로 외쳤다.
“권력지향형의 비정한 성격이지만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상남자이고, 다들 침묵할 때 홀로 손을 드는 반골이면서 평화주의자이자 각주님의 오른팔 서대룡입니다! 그리고 저 쥐방울 아닙니다!”
한바탕 쏟아내고는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우린 알 수 있었다. 서대룡이 완전히 취해버렸다는 것을.
“하하하.”
나는 소리 내 웃었고 이안은 고개를 숙이며 웃음을 참았다. 장호는 피식 웃으며 술을 마셨다.
만취한 상황에서도 내가 했던 말을 정확히 기억하는 걸 보면 기억력에 있어선 천재였다.
“저 이상하게 미친놈은 뭐냐?”
“많이 취했으니 이해해 주십시오.”
“무공은 무슨! 자네 얼굴 봐서 안 죽인 것만 해도 다행인 줄 알아라.”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싫다.”
“어르신!”
혈천도마가 나를 노려보듯 쳐다보았다.
“그런데 왜 나냐?”
“어르신께서 제일 실력이 좋으시니까요. 저 친구, 제일 실력 좋은 사람에게 배우게 하고 싶습니다.”
“내 제자가 아닌데 어찌 무공을 전수하겠느냐?”
“그럼 제자로 삼으십시오.”
“뭐?”
“현재 제자들 중 어르신의 자리를 물려줄 만한 사람 아무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막내 제자가 착하지만, 그 성격으론 후계자가 되긴 힘들 테고요. 여기 이 친구 어떻습니까?”
“싫다!”
혈천도마는 일언지하 거절했다.
“평생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셨을 것 아닙니까? 이제 싫은 일도 좀 하고 사십시오.”
“싫다니깐.”
“왜 싫습니까? 싫은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그냥 싫다. 싫은데 이유가 어딨나?”
바로 그때였다.
“저도 싫습니다!”
모두의 시선이 말소리의 주인을 향했다. 목숨 건 취기의 주인공, 서대룡이었다.
“저라고 좋겠습니까?”
놀란 이안이 그를 말리려 했지만 이미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혈천도마에게 결투장을 날리고 있었다.
“도마 어르신!”
다행히 도마야 라고 부르지 않았다.
“저 분명히 싫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저 가르칠 생각 꿈도 꾸지 마십시오! 안! 됩! 니! 다!”
그가 안 된다는 말을 한 자씩 끊어 말했다.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혈천도마가 출수할까 봐 다들 긴장했다.
목청을 높이던 서대룡이 이번에는 나를 쳐다보았다. 이미 녀석의 눈은 완전히 풀려 있었다. 하긴 제정신이면 혈천도마에게 저러지 못했겠지. 아, 이건 회광반조(回光返照)다.
“우리 존경하는 각주님! 제가 뭐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곧 자네가 살해당할 것 같으니, 내가 성심껏 대답해주지.”
“왜 저를 저 비정하고 무정한 사람에게 내던지려고 하시는 겁니까? 어흐흐흑, 이러시면 저 서럽습니다.”
혈천도마의 이마에 핏줄이 불끈 솟아올랐다. 나는 혈천도마에게 이해 좀 해달라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왜겠어? 무공 배우라고.”
“그러니까 왜요?”
“자네 자존감을 올려주려고.”
이 자리에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를 차기 황천각주로 만들어주기 위해서였다. 혈천도마에게 무공을 배우면, 누구보다 강력한 뒷배가 생기는 셈이니까.
“아아, 제가 자존감이 좀 낮긴 하지요.”
그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연이 옆에서 그의 몸을 붙잡아주었다.
“많이 취하셨어요. 제가 모시고 먼저 가겠습니다.”
부축해서 일어나려 하자 서대룡이 그녀의 손을 거부했다.
“저 안 취했어요, 우리 심장님.”
“심장요?”
“네, 저는 팔. 이안님은 심장. 팔보다 더 소중한 우리 심장님. 팔은 잘려도 되지만 심장은 다치면 안 되죠.”
이안은 서대룡이 취해서 헛소리를 지껄이는 줄 알 것이다.
질투쟁이 녀석, 머리는 좋아서 이 와중에도 기억할 건 다 기억하고 있구나.
난 다시 혈천도마에게 정중하게 부탁했다.
“일 마치고 반 시진만 가르쳐주십시오. 며칠도 좋고, 몇 년도 좋습니다. 이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루만 가르치셔도 됩니다. 일단 기회를 주십시오.”
“정말 저 주정뱅이를 믿는군.”
“어르신을 믿는 거죠.”
혈천도마와 서대룡은 어딘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있었다. 주류에서 약간 비켜서 있으면서도, 주류의 누구보다 큰 열정이 있는 점에서.
혈천도마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오려는 그때.
“저 싫다고 했습니다!”
서대룡이 먼저 선수 쳤다.
혈천도마가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그때 보았다. 혈천도마의 눈빛에 담긴 감정을.
‘정말 싫은 게 어떤 건지 알게 해줘? 개고생 한 번 시켜봐?’
그것도 모르고 서대룡이 눈을 거의 감은 채로 혈천도마 앞에서 입술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혀까지 내밀었으면 분명 잘렸을 거다.
다행히 혈천도마의 도가 날아들기 전에 서대룡이 탁자에 쿵 머리를 처박으며 잠들었다. 장렬한 전사였다.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남은 인생까지 통틀어 가장 용감한 주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의 인생을 바꾼 주사이기도 했다.
혈천도마가 내게 물었다.
“내가 저 망할 놈에게 무공을 가르치면 너는 무엇을 해줄 테냐?”
내 입에서 준비된 대답이 나왔다.
“오랫동안 묵은 감정을 풀어 드리겠습니다.”
“!”
그게 어떤 의미인지 혈천도마는 알 것이다.
잠시 흐르는 침묵이 흘렀고 우린 다시 술을 마셨다. 더는 무공을 가르쳐달란 대화는 하지 않았다. 그냥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조용히 술을 마셨다.
술 두 병이 더 비었을 때 이안이 뻗었고, 장호가 끝까지 남아서 나와 혈천도마의 술 상대가 되어 주었다.
술을 마시다 중간에 잠시 주점 밖으로 나왔다.
잠시 바람을 쐬며 서 있는데 혈천도마가 옆에 와서 섰다.
“아까 그 말 농담 아니었지?”
“네. 어르신의 무공을 공짜로 배우게 할 수는 없죠.”
혈천도마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과연 그는 일화검존과의 화해를 원하고 있을까?
길 건너를 쳐다보던 혈천도마가 불쑥 물었다.
“저기 저 지부는 효과가 있느냐?”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효과가 있냐고. 평판 올리는 데 도움이 되느냐는 말이다.”
아마 내가 인기를 높이기 위해 세운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다.
“네. 도움 많이 되고 있습니다.”
굳이 그에게 마가촌 주민들을 위해 세운 것이라 설득하지 않았다. 섭혼마존을 죽이는 것만큼이나 저들을 돕는 일도 중요하다는 것을 그는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서 조사관, 잘 부탁드립니다.”
“정말 내가 별짓을 다 하는구나. 애송이를 맡겨두고, 넌 뭐 하려고?”
“전 바쁩니다.”
“뭐가 그리 바쁘냐?”
“인간 같지 않은 것들 어떻게 죽일까 매일 궁리해야죠, 오른쪽 날개 구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죠, 아버지께 아부해야죠.”
그는 오른쪽 날개가 일화검존이란 것을 눈치챘다.
“그럼 혹시……왼쪽 날개가 나냐?”
“네. 오른쪽 하시고 싶으시면 바꿔드리겠습니다.”
혈천도마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넌 정말 미친놈이다. 검존과 나를 한 날개로 묶을 생각을 하다니.”
“처음에 저보고 그러셨죠. 제 광기라면 운명을 걸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광기로 다 잡아먹자고요. 벌써 잊으셨습니까?”
“네가 이렇게까지 미친놈인지는 몰랐다.”
“같이 미쳐보시죠. 살날 얼마나 남았다고 주저하십니까?”
“그게 어른에게 할 말이냐?”
“미친놈이니까요.”
혈천도마가 옅게 웃었다.
“조만간 출교해서 두어 달 자리 비울 겁니다. 그사이 우리 애들 잘 좀 살펴주십시오.”
“알았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알았다 이 한마디, 이 짧은 한마디 말이 너무나 든든하게 들렸다.
오늘의 술자리를 통해서도 그의 문이 조금 더 열렸음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그 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문을 활짝 열기 위해서는 다른 쪽 날개가 필요하다. 두 날개가 마주 보며 퍼덕거리며 다툴 때, 비로소 저 날개가 왜 저렇게 움직이는지를 알게 될 테니까.
“곧 비가 그치겠네요. 새들도 날아다닐 겁니다.”
술자리를 마치고 이안과 돌아오는 길이었다.
“오늘도 또 실수했네요.”
“실수는 무슨? 그렇게 마셨으면 잠드는 게 당연하지.”
“잠드는 것도 주사예요.”
“어차피 나 있는 자리 아니면 그렇게 안 마실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요.”
“그럼 주사 아니다. 휴식이지.”
내 말에 이안이 미소를 지었다.
“했던 질문 몇 번까지 가능하죠?”
“어떤 질문이냐에 따라 다르지.”
“가령…… 왜 이렇게 제게 잘해주세요?”
이 질문, 평생 받을 용의가 있다.
“한 다섯 번?”
“지금부터요?”
“응, 지금부터.”
“왜 이렇게 제게 잘해주세요?”
“앞으로 평생 부려 먹으려고. 만날 듣는 똑같은 답이 왜 그리 궁금하냐?”
이안이 배시시 웃었다.
“또 물을 거예요.”
“네 번 남았다.”
그렇게 우린 은은한 달빛을 함께 걸었다.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이안이 물었다.
“근데 참 서 조사관은요? 아까 보니 많이 취했는데. 먼저 갔어요?”
“너 깨기 전에 그 녀석 사부가 데려갔다.”
“사부요?”
이안이 놀란 눈을 크게 떴다.
“설마요! 같이 갔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