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51화 (51/214)

제51회 그게 전부다.

“으으으!”

서대룡이 온갖 인상을 다 쓰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목말라, 물! 물!”

“옆에!”

누군가의 말에 서대룡은 본능적으로 손을 뻗어 침상 옆 협탁에 놓인 물을 마셨다.

“으, 머리야. 앞으로 내가 술 마시면 개다, 개.”

서대룡이 주전자 채로 물을 들이켰다.

갈증을 풀고 나서야 자신이 낯선 곳에서 깼음을 알아차렸다. 침상은 크고 푹신했으며 침구는 부드럽고 고급스러웠다.

‘그러고 보니 방금 ‘옆에’라고 말한 사람이 누구였지?’

서대룡이 주위를 살폈다.

저 멀리 한 사람이 창가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었다. 햇살 때문에 그가 누군지 알아볼 수 없었다.

“누구?”

점차 눈이 빛에 익숙해지면서 서대룡의 눈에 들어오는 그의 형체.

“으악!”

서대룡이 비명을 질렀다. 책을 읽고 있던 남자는 바로 혈천도마였다.

“여, 여기가 어딥니까? 왜 마존께서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너무 놀란 서대룡은 말까지 더듬었다.

“내 방이니까.”

“어이쿠! 제가 왜 여기에 있습니까?”

“기억 안 나느냐?”

“……네.”

“주점에서 헤어지려고 할 때, 네가 벌떡 일어나더니 내가 업고 가야 한다고 고래고래 소릴 질렀다. 어떻게 제자를 버려두고 갈 수 있느냐고. 내 바짓가랑이까지 붙잡았지.”

“제가요? 설마요?”

맙소사, 결국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말았구나라는 생각에 서대룡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발을 허용한 것이 몇십 년 만인지 모르겠군.”

혈천도마가 서대룡을 스윽 쳐다보았다.

“죽고 싶은데 절벽에서 뛰어내릴 용기가 나지 않느냐?”

“…….”

그때 서대룡의 마음에 드는 한 가지 의문.

“한데 왜 저를 어르신의 침상에 재운 겁니까?”

“물론 그것도 기억 안 나겠지?”

서대룡이 헉하며 긴장했다.

“데려와서 객방에 재우려니까, 제자를 이런 허접한 곳에 재운다고 날 인정머리 없는 사부라고 했지. 그리고는 바닥에 주저앉아서 자신은 이런 대접 받아도 싼 놈이라며 온갖 주접에 눈물까지 흘렸고.”

“…….”

“사는 게 힘드냐? 나도 힘들었다. 널 죽이고 싶은 것을 참느라.”

서대룡이 후다닥 침상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술 끊겠습니다.”

“그 좋은 술을 왜 끊나? 네 주사를 끊어야지.”

“네, 다 끊겠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제가 어제 너무 술을 많이 마셔서요.”

아무리 자신이 소리치고 행패를 부렸어도 수혈을 짚어 객방이 아니라 마구간에 던져놓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이렇게 자기 방에, 그것도 침상에 재워줬다는 것이 너무 의외였다. 물론 검무극 때문이겠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침상에 재워줄 줄이야. 서대룡은 혈천도마의 새로운 면모를 보았다.

“가봐라.”

“네.”

겉옷은 침상 옆 탁자 위에 잘 개어져 있었다. 물론 시비가 개었겠지만, 뭔가 제대로 대접받고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혈천도마는 책을 읽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낯설었다.

‘내 앞에서 유식한 척하려는 건가?’

한데 이상하게도 책 읽는 모습이 어울리기도 했다. 방을 둘러보니 책장이 여러 개 있었고 책도 많이 꽂혀 있었다.

그때 그의 눈에 띄는 책이 있었다.

“어? 이 책은?”

서대룡이 무심코 책장에서 책을 뽑아 들었다. 한 소년이 절세고수 사부를 만나 영웅으로 성장하는 모험담으로, 어려서부터 몇 번을 읽었던 책이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책입니다. 혹시 읽으셨습니까?”

그가 신나서 혈천도마를 돌아보았다.

반면 혈천도마는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내 물건 함부로 만지는 놈이 제일 싫다.”

“헉!”

놀란 서대룡이 책을 떨어뜨렸고, 바닥에 안 떨어뜨리려고 발로 막았다. 발을 맞고 튕겨 나간 책이 바닥을 굴렀다.

정적이 흘렀다.

펼쳐진 채 구겨진 책을 보자, 서대룡은 눈앞이 캄캄해졌다. 곧 자신의 신세도 저 책처럼 되겠지.

서대룡이 후다닥 달려가서 책을 들고 구겨진 부분을 손으로 폈다.

“죄송합니다. 아, 다행히 재미없는 부분이 구겨졌습……죄송합니다!”

다행히 혈천도마는 서대룡의 팔을 자르는 대신 자신이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그는 용서의 화신이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소심하게 인사하고 방을 나서려는데 혈천도마가 불쑥 물었다.

“그 책은 왜 좋아하느냐?”

“아, 주인공이 저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가난하게 태어나 성격도 어둡고 주변 사람들이랑 잘 적응하지 못하고. 그런 녀석이 영웅이 되는 이야기라…… 지금까지 스무 번은 읽었을 겁니다. 곁에 두고 잠이 안 올 때면 한 번씩 꺼내 읽는 책입니다.”

잠시 서대룡을 응시하던 혈천도마는 뭐라 대꾸하지 않고 다시 자신이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재워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때 혈천도마가 다시 물었다.

“너는 이공자가 후계자가 될 것 같으냐?”

이 질문에 망설임은 필요 없었다.

“네.”

“이유는?”

“훌륭한 분입니다. 제가 봤던 그 어떤 분들보다요. 그분 때문에 본교가 변할 거라 믿습니다. 물론 좋은 쪽으로요.”

“그를 위해서 네 목숨을 바칠 수 있느냐?”

서대룡은 잠시 고민하다가 솔직히 대답했다.

“아뇨.”

“이공자가 훌륭한 사람이라면서?”

“저는 아니거든요. 남을 위해 희생할 위인은 못됩니다.”

여전히 시선은 책을 향하고 있었지만 혈천도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당에서 기다려라.”

“네!”

서대룡이 마당에 서서 혈천도마를 기다렸다.

‘혹시 각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가 없다고 대답해서 그 핑계로 두들겨 패시려는 건가? 죽을 수 있다고 할 걸 그랬나?’

그렇게 불안해하고 있을 때 혈천도마가 뒤늦게 나오더니 커다란 도를 한 자루 던졌다.

푹!

가볍게 날아온 도가 서대룡의 발 앞에 꽂혔다. 멸천대도만큼 크진 않았지만, 일반적인 도보다 날도 넓고 길이도 긴 대도였다.

“들어라.”

“네.”

서대룡이 도를 뽑아 들었다. 그가 기존에 익힌 무공은 검술이었기 때문에, 도법을 연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들어본 적도 거의 없었다.

“어떠냐?”

질문의 의도가 뭔지 몰랐지만, 서대룡은 일단 먼저 드는 생각부터 말했다.

“무겁습니다.”

혈천도마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게 전부다.”

“네?”

“그 무거움을 이해하는 것이 내가 전수하려는 도법의 처음이자 끝이다.”

“!”

순간 서대룡의 마음에 뭔가가 와닿았다.

“심장이 찌릿했습니다.”

도를 내려다보던 서대룡이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건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그렇고. 아님, 심장에 병이 있거나.”

“아! 네.”

혈천도마가 돌아섰다.

“이따 수련에 늦지 마라.”

“네! 늦지 않겠습니다!”

서대룡이 마당 구석에 도를 내려놓고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도를 챙겨서 나왔다.

그곳을 걸어 나가면서도 방금까지 혈천도마와 대화를 한 것이 맞나, 정말 여기서 잔 것이 맞나 싶었다.

‘아직 꿈속일지도…….’

그는 그렇게 손에 든 도만큼이나 무겁게 온몸을 짓누르는 숙취를 느끼며 그곳을 걸어 나왔다.

* * *

내 집무실로 서대룡이 들어섰다.

그는 아직 술이 덜 깬 부스스한 모습이었는데 허리에 처음 보는 대도를 차고 있었다. 그 대도만 봐도 혈천도마와의 일이 잘 풀렸음을 알 수 있었다.

“오른팔 왔어?”

“사지로 보낸 오른팔이겠죠.”

“다행히 안 잘리고 왔네.”

“아니 어떻게 저를 혈천도마에게 딸려 보내실 수가 있습니까? 각주님이 챙겼어야죠!”

“어제 일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는 모양이군.”

그 말에 서대룡이 움찔했다.

“네가 죽어도 혈천도마와 가겠다고 우겼어. 심지어 나보고 뭐랬는지 아느냐?”

“제가 뭐랬는데요?”

“왜 사부와 제자를 갈라놓으려 하느냐고! 정말 한 오십 년 함께한 사제지간인 줄 알았지.”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나도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잠들기 전까진 죽어도 무공 안 배우겠다더니, 갑자기 수제자가 되어서 벌떡 깼어. 정 의심스러우면 장 군주에게 물어봐. 장 군주가 자넬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라.”

“으으으. 정말 제 속에서 그런 미친 주정뱅이가 살고 있다고요?”

서대룡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타까워.”

“뭐가요?”

“자넨 우울하고 음침할 때가 개성 있고 좋은데, 요즘 너무 밝아지고 있거든. 심지어 어제처럼 웃기기까지 해.”

“걱정마십시오. 내일 되면 다시 어두워질 겁니다.”

“무슨 뜻이야?”

“오늘 일과 후부터 첫 수련이니까요. 아마 절 반쯤 죽여놓으시겠지요. 아! 영원히 일이 안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아쉽네. 그 모습을 못 봐서.”

“네?”

“오늘 출교할 거다. 두 달쯤 걸릴 예정이니 나 없는 사이에 황천각 잘 지키도록.”

서대룡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혹시 그 일 때문에 나가시는 겁니까?”

“그 일이라니?”

그러자 서대룡이 손가락으로 자기 눈을 가리켰다. 그제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제 술 마시러 가기 전에 섭혼마존의 거처 앞에서 서대룡이 말했다. 내 눈을 보면서 불가능을 해내기 전에 보여줬던 눈빛이라고.

“맞다, 그 일이다.”

“위험한 일이겠군요.”

“다행히 이번 일은 그리 위험하지는 않을 거다. 예전에 저축해둔 위험을 쓸 작정이거든.”

“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서대룡이었지만 더는 설명하지 않았다.

서대룡이 장난기가 사라진 얼굴로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항상 이렇게 말로만 걱정해서 죄송합니다.”

“나중에 한 수라도 거들려면 도마께 열심히 배워둬.”

나오려는데 서대룡이 나를 불렀다.

“각주님.”

“왜?”

“각주님이 아니었다면 평생 마존께 무공을 배울 기회는 없었을 겁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거다. 나 아니었으면 우리 아버지에게 무공 배울 기회가 있었을지도. 그럼 수고.”

“네! 여긴 걱정마시고 다녀오십시오.”

그길로 이안을 찾아가서 앞으로 두 달 동안 해야 할 수련에 대해 알려준 후, 난 조용히 교를 나섰다.

* * *

계속 서북쪽으로 내달렸다.

풍신사보의 경지가 점점 올라가면서 쾌속보 역시 속도가 올라갔다.

경공에 특화된 고수가 아니라면, 이제 어지간한 고수는 내 발끝에도 미치지 못할 속도였다.

미친 듯이 달리다 내공이 떨어지면 숲속 인적이 없는 곳에서 운기조식하며 쉬었다. 내공이 차면 다시 달렸고, 내공이 떨어지면 또 운기조식했다.

달리다 배가 고프면 아버지가 알려준 기발출을 이용해서 사냥했다.

이젠 저 멀리 숲속에 있는 멧돼지가 금방 느껴졌다.

그렇게 멧돼지를 잡아 모닥불에 굽고 있으면, 지나가던 사냥꾼이나 약초꾼이 합류해서 술을 마시기도 했다. 회귀 전 그들과는 워낙 많이 만나고 가깝게 지내던 터라, 그들이 편하고 좋았다.

목적지를 절반쯤 남기고부터는 그때부터는 속도 조절을 했다.

어차피 너무 일찍 도착해도 소용없었기에 나는 이번 여정 자체를 즐겼다.

오를만한 산이 있으면 올랐다. 물론 그냥 걸어서 오르지 않고, 절벽을 타고 올랐다. 내공 없이 육체적인 능력으로만 오르며, 몸 상태를 살폈다.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근육이 부족한 곳은 어딘지.

내공을 주로 쓰다 보면 본연의 육체에 소홀하기 마련인데, 거기에서 진짜 고수와 어중간한 고수의 차이가 나게 된다. 진짜들은 아주 작은 부분들을 놓치지 않는다. 작은 것의 차이가 결국 전부라는 것을 알기에, 몸 구석구석 하나하나까지 놓치는 법이 없다.

절벽을 오르다 저 멀리 노을이라도 지면 절벽 중간에 튀어나온 바위나 나무에 걸터앉아서 경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으면 가슴 속에 막혀 있던 뭔가가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안과 중원유람을 떠나자고 약속을 했지만, 절벽 끝에 이렇게 걸터앉아서 석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이안보다 아버지 생각이 먼저 난다.

아버지와 같이 여행하고 싶었다. 함께 이런 경치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고 싶다.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과연 내게 그럴 기회가 있을까? 우리에게 그런 순간이 찾아올까?

이렇게 아버지에게 친밀한 감정이 생길 줄은 회귀 전에는 정말 꿈에도 생각 못 했다. 어쩌면 나는 대화조차 제대로 나눠보지 못했던 아버지를……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여정을 즐기다가도 달려야 할 때는 숨이 터지도록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에는 쾌속보의 경지가 한 단계 올랐다. 달리는 속도는 더 빨라졌고, 들어가는 내공은 줄어들었다.

“하하하하하하!”

나는 미친놈처럼 웃으며 길을 내달렸다.

풍신사보의 경지가 올라가면서 느끼는 건데, 쾌속보는 사람의 본성을 건드는 무공이었다. 달렸을 때의 쾌감을 극한으로 끌어올려 주는 무공이었기에, 계속 달리고 싶은 중독성까지 있었다.

이제 길 가던 사람이 나를 보아도 내 모습을 알아차리지 못할 속도로 지나갔다. 그야말로 쌩하고 스쳐 지나가 버리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런 대화를 여러 번 들었다.

“방금 사람이 지나가지 않았나?”

“뭐가? 난 못 봤는데?”

딴생각하고 걷다간 내가 스쳐 지나간 것조차 모르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한 단계 더 오르면 눈을 부릅뜨고 보아도 모를 것이다. 사람이 지나간 건지 새가 지나갔는지.

대성을 이룬 쾌속보는 어떨까?

어쩌면 지나가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내가 도착한 곳은 본교의 그 누구도 내 목적지가 이곳일 거라 상상하지 못할 곳이었다.

이곳은 바로 새외 풍천교의 본단이 있는 홍산(紅山)이었다.

회귀대법의 첫 번째 재료인 음뢰종을 구한 곳.

나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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