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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52화 (52/214)

제52회 너처럼 널 싫어하면.

내가 가장 먼저 들른 곳은 홍산 아랫마을 객잔이었다.

객잔은 사람들로 북적였고 일하는 이들도 정신없이 바빴다.

입구에 한참을 서 있었지만 아무도 내게 오지 않았다.

그때 내 눈에 주방과 손님을 오가며 요리를 나르는 꼬마가 보였다. 그 아이를 보는 순간 내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회귀 전 삶에서 음뢰종을 구하러 내가 이곳에 왔을 때, 저 꼬마가 다 큰 어른이 되어 나를 맞이했었다. 어려서 얼굴 그대로였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서 나를 응대했다.

“안녕하세요, 무사님, 보시다시피 지금 자리가 없습니다.”

“방은 있느냐?”

“아뇨, 방도 없습니다. 혈신제(血神祭) 때문에 손님이 몰려서요.”

“혈신제는 언제 열리느냐?”

“정확히 십 일 후입니다. 저 길 끝에 다른 객잔이 있는데 아마 거기도 사정이 다르지 않을 거예요.”

정신없이 바쁜 아이는 그 말을 남기고, 또 다른 손님의 부름을 받고 달려갔다.

혈신제 열흘 전, 적절한 시간에 잘 도착했다.

혈신제는 일 년에 한 번 풍천교에서 혈신을 모시는 가장 큰 의식이다.

섭혼마존의 사술을 막기 위한 세 번째 방법으로 두 달의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혈신제.

오직 이 혈신제가 열리는 날, 섭혼마존을 제압할 방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혈신제 날이 두 달 후였기에 망정이지, 시기가 안 맞았으면 섭혼마존을 죽이는 일이 일 년 후가 될 수도 있었다.

과거에 음뢰종이 보관된 풍천교주의 권좌로 잠입하는 데 수년의 시간이 걸렸다.

풍천교주가 위급시 탈출하는 비밀통로를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었다.

정작 잠입해서 신물을 빼내 온 것은 채 반 각도 걸리지 않았지만, 그 통로를 알아내는 데 걸린 시간이 그렇게 길었다.

어렵게 비밀통로를 알아냈지만, 여전히 음뢰종을 훔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문제는 풍천교주였다.

그는 대부분 시간을 권좌가 있는 그곳에서 보냈다.

밥도 거기서 먹었고, 심지어 잠도 그곳에서 잤다. 그가 생리현상을 해결하는 짧은 시간을 이용할 수도 없었다.

음뢰종을 비롯한 신물들이 보관된 곳에 만년한철로 된 철창이 내려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풍천교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물을 지키는 사람이 또 있었다.

그는 만년한철로 된 족쇄를 차고, 음뢰종 주위에서 지박령(地縛靈)처럼 살고 있었다. 그는 무공이 뛰어날뿐더러, 선천적으로 뛰어난 후각을 타고 난 사람이었다. 누군가 접근해오면 바로 알아차려서 풍천교주에게 경고해줬다.

따라서 풍천교주의 눈을 피해서 신물을 훔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음뢰종을 가져올 수 있었을까?

일 년에 딱 한 번, 철창이 올라가고 풍천교주가 잠시 자리를 비우는 순간이 있다.

바로 혈신제가 열리는 날이다.

이날은 정해진 의례에 따라 풍천교주가 권좌를 나가서 대연무장에서 예법을 치른다.

그때 이곳에서는 음뢰종을 지키는 족쇄 고수가 법도에 따라 서른여섯 번 종을 치게 되는데, 내가 노린 것이 바로 마지막 서른여섯 번째 종을 치던 그 순간이었다.

마지막 종소리 이후, 풍신교주가 대연무장에서 권좌까지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일다경(一茶頃).

차 한잔 마실 그 짧은 사이에 나는 기적을 이뤄냈다.

나는 수십 번에 걸쳐 도주 연습까지 했기에, 풍천교도들의 추적을 피해 달아날 수 있었다.

조사하고, 잠입하고, 포섭하고, 싸우고, 연습하고…… 그때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이번에 내가 목표로 하는 것은 음뢰종과 같은 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부피가 큰 음뢰종을 훔쳐 나오는 것보다 더 간단한 일이었으니, 이번 풍천교행은 고생한 지난 삶이 내게 주는 선물이라 볼 수 있겠다.

나는 잠시 객잔 앞에 서서 오가는 인파들을 구경했다.

혈신제가 열리면 풍천교와 교류하는 수많은 방파에서 축하 사절을 보내기 때문에, 객잔은 물론이고 길에도 사람들이 가득했다.

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사람이 이렇게 많기에 나라는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도 죽립까지 눌러쓰고 내 정체를 철저히 감추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왔다가 소리 없이 사라질 것이다.

저잣거리의 여러 상회에서 야영에 필요한 몇 가지 물품들과 기본적인 식량, 그리고 약을 달이는데 필요한 약탕기를 샀다.

그리고 마지막 도착한 곳은 약방(藥房)이었다.

“기화초를 달라고?”

약방 늙은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기화초는 비싼데.”

기화초는 오직 이곳 새외에서만 나는 약초로, 중원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한 근에 얼마나 합니까?”

“얼마나 필요한데?”

“두 근 필요합니다.”

“한 근당 팔십 냥은 줘야 하네. 아는지 모르겠지만 아주 귀한 약초라.”

“알겠습니다. 그 가격에 두 근 사겠습니다.”

“한데 기화초는 어디에 쓰려고 그러나?”

기화초는 평소 잘 사용되지 않는 약초였기에 노인이 다시 한번 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곳에 들어올 때부터 죽립을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내 얼굴을 볼 수는 없었다. 목소리 역시 내 목소리와 다른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저도 모릅니다. 위에서 시켜서 사는 거라서.”

노인이 더는 묻지 않고 기화초를 가져왔다. 내게 약초를 확인시켜 준 후 노인은 기화초를 잘 포장해서 주었다. 나는 노인에게 돈을 지불하고 그곳을 나왔다.

약방을 나선 나는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또 다른 약방을 찾아갔다. 이번엔 찾은 것은 귀룡나무와 규화였다.

그곳에서 두 약재를 구한 후, 이번에는 멀리 떨어진 다른 마을의 약방을 찾아서 독말풀과 백단향을 구입했다.

이렇게 여러 곳에서 약초를 구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이 약초를 모아서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다른 사람은 모르게 하기 위해서였다. 한 곳에서 다 산다고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하는 것이었다.

조심해서 나쁠 것 없다. 삶에서의 귀찮음은 금전적인 손해로 돌아오지만, 무림에서의 귀찮음은 목숨을 요구하는 법이니까.

필요한 약초를 모두 구한 나는 그길로 산으로 올랐다.

인적 드문 깊은 산속에 예전에 기거했던 동굴이 그대로 있었다. 그곳을 깨끗이 치우고 약부터 달였다.

재료에 따라 각각 달여야 하는 약재도 있고, 함께 달여야 하는 것도 있었다. 적어도 며칠은 달여야 했다.

이 약은 바로 족쇄를 찬 고수의 후각을 마비시킬 수 있는 비약이었다. 젊어서부터 평생을 붙잡혀 있다고 했으니, 지금도 분명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당시에 이 비법을 알아내는데 걸린 시간과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약을 달이는 동안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다.

처음 배울 때 죽을 뻔했지만, 이제는 없으면 안 될 죽마고우가 돼버린 천마호신공이다. 연마하면 연마할수록 천마호신공만의 특별함을 느낀다.

천마호신공의 특성 때문일까? 위기가 오면 나를 깨우고, 스스로 발동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천마호신공이 살아 있는 무공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구화마공과 어울려지면 더욱 강력해진다고 알고 있으니, 어서 그날이 오기를 바랄 뿐이다.

밤늦도록 수련하다 동굴을 나와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았다.

회귀 전에도 이곳에 서서 밤하늘을 보았었는데, 그때와 결정적으로 다른 마음이 하나 있다.

그때는 오직 돌아가겠다는 일념뿐이었는데, 이제는 돌아가겠다는 그 자리에 보고 싶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대신하고 있다. 특히 서대룡이 혈천도마에게 무공을 잘 배우고 있는지 궁금했다.

두 사람 다 부정하겠지만 은근히 닮은 그들인데.

‘잘하고 있겠지?’

* * *

수련 첫날, 서대룡은 마당에서 혈천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에 맞춰 왔는데 혈천도마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었다.

혈천도마에게 무공을 배우다니, 정말이지 그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혼자서 도를 휘둘러보았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으면 역시 너무 무겁다.

괜히 힘 빼지 말자는 생각에 그는 혈천도마를 기다렸다.

한참을 기다려도 안 나와서 서대룡은 혈천도마의 거처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닫힌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흠칫하고 돌아보니 어느새 나타난 혈천도마가 함께 창문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뭘 그리 훔쳐보냐?”

“으헉!”

깜짝 놀란 서대룡이 비명을 질렀다.

“죄, 죄송합니다! 기다리다가 혹시 안에 계신가 해서요.”

“이공자가 출교했다지?”

“네.”

“두 달쯤 걸린다지?”

“들으셨군요.”

“누군가 실종되거나, 혹은 사고를 당해 죽을 수도 있는 충분한 시간이겠군.”

서대룡이 재빨리 말했다.

“각주님은 워낙 총명하신 분이시라, 겨우 두 달 사이에 그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리라곤 믿지 않으실 겁니다.”

“총명한 사람이니 이미 벌어진 비극도 금세 잊겠지.”

혈천도마는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눈알을 파내는 시늉을 했다.

“앞으론 절대 훔쳐보지 않겠습니다!”

“그럼 여기서 뭐해?”

“아, 네. 갑니다!”

서대룡이 후다닥 마당 가운데로 달려갔다.

혈천도마가 서대룡에게 도를 쥐는 법과 휘두르는 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천 번!”

서대룡은 온몸이 땀으로 젖은 채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팔백오십삼, 팔백오십사…….”

도는 천근만근 무거워서 팔이 빠질 것만 같았다.

‘어휴, 더는 못해!’

서대룡이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설령 혈천도마가 보고 있어도 할 수 없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할 힘도 없었다.

원래라면 집에서 간식 먹으면서 침상에 누워 책을 보고 있을 시간인데.

‘괜한 짓을 했나?’

막상 몸이 힘드니까 후회가 밀려들었다.

‘아니지, 아니지. 기왕 마음을 먹었는데!’

첫날부터 수련을 못 채우고 쫓겨나면 검무극 볼 면목이 없다.

서대룡이 벌떡 일어나서 도를 휘둘렀다. 그렇게 간신히 천 개를 채웠다.

“해냈다!”

바닥에 주저앉은 채 서대룡은 손에 든 도를 내려다보았다.

차갑고 묵직한 도의 이 느낌! 그래, 이 느낌을 따라가다 보면 분명 뒹굴뒹굴하는 인생보다는 더 괜찮은 삶으로 안내해주겠지.

그때 창문이 열리며 혈천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힘들면 그만둬라. 안 말린다.”

서대룡이 벌떡 일어났다.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만두지 않을 겁니다.”

“왜?”

“평생 이런 기회는 안 올 테니까요.”

“나는 절대 내 독문무공을 전수하지 않을 건데?”

“그건 바라지도 않습니다. 제가 말한 기회는 마존님께 무공을 배울 기회를 말하는 겁니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말해줄 겁니다. 이 아버지가 말이다, 소싯적에 혈천도마님께 무공을 배웠단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무인으로 살면서 그 정도 추억 있으면 된 거죠.”

“혼인할 생각은 있구나.”

“네, 저는 하고 싶습니다.”

“왜?”

“자식을 키워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주지 않았던 부성애(父性愛)를 주고 싶습니다.”

그의 말에서 느껴지는 사연과 비애가 있었다.

“네 아이가 너처럼 널 싫어하면?”

“그러면…… 이 훈련 제 자식에게도 좀 시켜주시겠습니까?”

서대룡의 말에 혈천도마가 피식 웃었다.

혈천도마를 웃겼다는 생각에 서대룡도 괜히 기분이 좋아 활짝 웃었다.

혈천도마가 창문을 닫으며 말했다.

“천 번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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