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3회 변수는 사절이다.
“하아, 하아.”
땅바닥에 대자로 누운 서대룡의 거친 숨이 밤하늘을 향해 퍼져나갔다.
휘영청 떠 있던 달은 어디로 숨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일과 이후 저녁 전에 시작한 수련이었는데 지금은 자정이 훌쩍 지났다.
‘결국 해냈다!’
단 한 번도 못 휘두를 것 같은 상태에서 다시 천 번을 다 휘둘렀다. 이 무거운 도를 하루에 이천 번이나 휘두르다니.
서대룡은 자신이 해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물론 뒤에 가서는 자세도 다 무너졌겠지만, 이를 악물고 휘둘렀다.
이제 일어나서 집에 가야지 했지만, 서대룡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잠이 쏟아졌다.
서대룡은 꿈을 꿨다.
검무극이 적들에게 포위된 채 위기에 빠져 있었다. 부상당한 그에게 적들이 달려들던 바로 그때.
벼락처럼 뻗어 나간 도기가 적들을 휩쓸었다. 도기에 휩쓸린 적들은 피떡이 되어 사라졌다.
곧이어 한 송이 매화꽃이 도도히 떨어지듯 자신이 적들과 검무극 사이에 내려섰다. 도법의 최고수가 된 지금은 혈천도마처럼 커다란 대도를 들고 있었다.
검무극을 돌아보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각주님!”
자고 있던 서대룡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오른팔! 와주었구나!”
울컥한 감정이 실린 검무극의 말에 서대룡이 적들을 향해 돌아서며 멋있게 말했다.
“제가 왔으니 쉬십시오! 한숨 푹 주무세요!”
그때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익은 목소리.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
서대룡은 본능적으로 그 말을 흘려들으며 돌아누웠다. 이렇게 즐거운 꿈을 깨고 싶지 않았다. 고수가 되어 천하를 돌아다니는 꿈은, 자신의 진짜 꿈이기도 했으니까.
서대룡은 계속 잤다.
꿈속에서 위기에 빠진 미녀들을 구해준 후, 함께 배를 타고 떠났다. 여인들이 자신의 사랑을 독차지하기 위해 눈치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잠에서 깼다. 그녀들 중에는 후배인 조향도 있었다.
이렇게 웃으면서 잠에서 깬 것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너무 기분이 좋았다. 일어나기가 싫을 정도로…… 근데 여긴 어디지?
낯선 천장.
아니, 완전히 낯설지는 않았다.
‘설마?’
서대룡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비명을 질렀다.
“윽!”
좋았던 꿈과는 별개로 온몸이 부서질 듯 아팠다. 누가 밤새 온몸을 몽둥이로 두들겨 팬 것 같았다.
서대룡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긴?’
술을 마시고 잤던 바로 그 혈천도마의 침소였다.
‘맙소사! 내가 왜 여기서 자고 있지?’
두 번째 천 번을 다 휘두르고 바닥에 누웠던 것까진 기억나는데.
다행히 혈천도마는 방에 없었다.
그가 끙끙대며 일어나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창가로 걸어갔을 때, 서대룡은 흠칫 놀랐다.
어제 자신이 도를 휘둘렀던 마당에서 혈천도마가 도를 휘두르고 있었다. 바로 달려나가서 인사부터 하려던 서대룡이 멈춰 섰다.
도를 휘두르는 모습에 시선이 사로잡힌 것이다.
혈천도마는 어제 자신을 가르쳐줬던 바로 그 자세로 도를 휘둘렀다. 도를 쥐는 법도 똑같았고, 휘두르는 방법도 같았다.
그 순간 서대룡은 알 수 있었다. 자신에게 가르쳐준 수련은 혈천도마가 처음 무공을 배웠을 때, 그가 했던 수련이었음을.
‘나를 고생시키려고 아무렇게나 막 시킨 것이 아니었어.’
그때 등 뒤에 눈이 달렸는지 도를 휘두르던 혈천도마가 불쑥 말했다.
“각주 없다고 농땡이 쳐도 되는 거냐?”
“헛! 그러고 보니?”
해가 중천에 떠있었다.
“으악! 저 늦었습니다.”
서대룡이 후다닥 옷을 챙겨입고 밖으로 나왔다.
“저 가보겠습니다.”
서대룡이 꾸벅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다가 다시 돌아섰다.
“또 재워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혈천도마가 돈을 주거나, 보도를 주거나 했어도 이렇게 울컥하진 않았을 것이다. 아, 물론 기쁘겠지만, 지금의 감정과는 성격이 달랐다.
혈천도마에게는 누군가에게 돈을 주는 것보다 자기 침상에 재우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 아닐까? 자신을 귀하게 여겨주는 이 느낌은 다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다음에 혹시라도 비슷한 일이 있으면 아무 객방에나 던져두십시오. 죽이지만 마시고요. 그럼 이따 오후에 뵙겠습니다.”
그러자 혈천도마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오게?”
“와야죠.”
“아프다고 봐주지 않는다. 오늘도 이천 번이야.”
이천 번이란 말에 온몸이 질색하며 안된다며 아우성을 질렀지만, 입은 네! 라고 말했다. 어차피 입은 안 힘드니까.
힘차게 대답한 후 서대룡이 달려나갔다.
“지각이다! 지각!”
정말 피곤해서 죽을 것 같았다. 오늘 또 수련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싫지만, 이상하게 기분이 좋았다.
혈천도마에게 계속 배우고 싶었다. 솔직히 그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 * *
며칠에 걸쳐 달인 약이 완성되었다.
나는 그 제조한 약을 손바닥 크기의 약병에 넣었다. 아직 혈신제까지 오 일의 시간이 남았다.
약이 만들어졌으니 오늘은 비밀통로가 잘 작동하는지 확인할 겸, 풍신교주의 권좌까지 정찰을 가볼 작정이다.
하산한 후 내가 도착한 곳은 풍천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무지였다.
그곳은 말라비틀어진 몇 그루의 나무와 바위들, 버글대는 독충과 독사들, 그리고 바람에 날아온 쓰레기들이 굴러다니는 곳이었다. 종일 있어도 아무도 오지 않는 그런 곳.
그곳에 커다란 바위가 하나 있었는데 나는 바위 양쪽 아래에 숨겨진 장치를 연속해서 조작했다.
스르륵.
그러자 바위가 열리며 통로가 나왔다. 그때도 감탄했지만, 지금 봐도 정말 잘 만든 기관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표가 나지 않는 통로를 만들 수 있는지.
바위 안으로 들어가자 문은 자동으로 닫혔다.
내부에서 다시 숨겨진 장치를 조작하자 바닥에서 문이 열렸다.
나는 야명주를 꺼내 들고 지하 통로로 내려갔다. 통로는 넓었다. 위급 시에 음뢰종을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 통로 같았다. 덕분에 이곳을 통해 음뢰종을 빼돌릴 수 있었지만.
나는 약병을 꺼내 약을 얼굴과 손에 발랐다.
이 약을 바르면 후각이 뛰어난 고수가 내 냄새를 맡지 못한다.
나는 천천히 통로를 걸어갔다.
권좌가 있는 방의 비밀통로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멈춰 섰다. 예전에는 더 가까이 가서 살폈는데,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안전하게 살펴볼 방법이 생겼으니까.
나는 눈을 감고 기를 발출했다. 한 줄기 기가 통로를 따라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아 한참을 더 간 기가 비밀통로에 닿았다.
이렇게 가늘고 길게 기를 발출해서 실전에서 탐색용으로 사용할 수 있을 줄, 아버지에게 처음 이 비법을 배울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통로의 작은 빈틈 사이로 기가 빠져나갔다.
내 기가 새로운 공간에 들어서던 그 순간.
한쪽 편에서 굉장한 존재감이 느껴졌다.
‘풍천교주다!’
과연 교주답게 느껴지는 기세가 보통이 아니었다. 나는 재빨리 기를 그와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다시 내가 찾은 것은 그 후각에 민감한 고수였다.
과연 그는 음뢰종 근처에 있었다.
두 사람을 모두 확인하자 내 기는 사라졌다. 어차피 한 번 겪었던 일이니, 굳이 발각의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무사히 정찰을 끝낸 나는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육포로 식사를 마치고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천마호신공을 연마했다.
남은 오 일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산속에만 틀어박혀 지낼 것이다. 괜히 돌아다니다 운명에 떠밀려 이상한 사건에라도 얽히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으니까.
변수를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은 내 지난 노력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 * *
혈신제가 열리는 날이 밝았다.
출발 전 나는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며 오늘 일이 성공하기를 기원했다.
아버지가 섭혼술을 막을 수 있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 말씀하셨을 때, 나는 그보다 백배는 더 쉬운 방법이 있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다.
부디 내 생각이 맞아떨어져서 무사히 이번 일을 마무리 지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산을 내려갔다.
풍천교로 향하는 길은 예식에 참여하려는 이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들은 여러 부류였다. 풍천교와 교류가 있는 대문파의 수장부터, 눈도장이라도 찍고 싶어 하는 소문파의 무인들, 참석자들을 상대로 물건을 팔려는 장사치들까지.
혈신제가 열리는 날에는 모든 사람이 지위고하와 관계없이 이렇게 걸어서 풍천교로 가야 한다. 이것이 혈신제의 권위였다.
나는 그들이 걸어가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비밀통로가 있는 황무지로 향했다.
그곳을 가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문이 열리지 않으면 어쩌지? 갑자기 행사가 취소되면 어쩌지? 풍천교주가 직접 종을 치는 것으로 바뀌면? 그것을 얻는 방식을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면?
이렇듯 불안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려고 덤벼든다.
이럴 땐 자신을 믿는 수밖에 없다. 그런 불운이 찾아오지 않을 거라는 믿음, 설령 찾아오더라도 잘 이겨낼 거라는 믿음. 불안에 맞서는 가장 좋은 무기는 자신에 대한 믿음이니까.
비밀통로를 통해 풍천교주의 권좌가 있는 방 근처까지 도착한 나는 그곳에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물론 냄새를 못 맡게 하는 약물을 얼굴과 손, 몸에까지 다 바른 상태.
언제 움직일 것인가는 정해져 있었다. 음뢰종을 치기 시작해서 서른여섯 번을 쳤을 때가 내가 작전을 개시할 시간이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얼마나 기다렸을까?
희미하게 종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나는 소리를 세며 기다렸다.
종을 서른세 번 쳤을 때 천천히 움직여서 비밀통로 아래로 갔다.
서른다섯 번째 종소리가 났을 때 나는 조용히 권좌 옆 바닥의 비밀통로를 열고 밖으로 나갔다.
족쇄에 묶인 고수가 마지막 종을 치려는 중이었다. 풍천교주는 신물이 있는 이곳에 다른 사람은 일절 들이지 않았기에, 이곳에는 오직 족쇄를 찬 남자뿐이었다.
그가 마지막 서른여섯 번째 종을 치는 순간.
나는 풍신사보를 발휘했다. 족쇄 무인을 향해 암영보를 발휘해서 다가갔다. 귀신처럼 소리없이 다가가서는 그의 마혈과 수혈을 동시에 찍었다. 그는 자신이 당한 것도 깨닫지 못한 채 선 채로 잠이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최고의 기량이 연이어 발휘된 수법이었다.
그렇게 그를 제압한 후 나는 음뢰종 뒤에 세워진 혈불(血佛)로 갔다.
이제 내게 주어진 시간은 풍천교주가 이곳까지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 일다경.
감고 있던 혈불의 눈을 꾹 누르자 혈불이 눈을 번쩍 떴다.
눈을 뜬 혈불은 무서웠다.
다시 한번 더 누르자 눈동자가 앞으로 쑥 튀어나왔다.
튀어나온 눈동자 안에 하얀 액체가 삼분지 일쯤 들어있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먼 길을 달려온 이유다.
섭혼마존이 익힌 섭혼술의 뿌리는 혈교 마공이었다.
그 혈교의 후신이 바로 이 풍천교다.
여기까진 아버지도 알고 계신 사실인데, 딱 하나 모르시는 것이 있었다.
혈안정수(血眼淨水).
풍천교의 교주들에게만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는 성수였다.
이 혈안정수를 눈에 넣으면, 혈교 사술의 파훼법이 보인다. 사술의 본질을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듣기로는 교내의 반란을 막기 위해 예로부터 만들어져 전수되었다고 하는데, 제조법이나 관리법은 오직 교주와 그 후계자에게만 이어졌기 때문에 외부 사람들은 절대 그 존재에 대해 알지 못했다.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준 사람은 바로 풍천교주의 아들 능백군(凌白郡)이었다.
예전에 왔을 때는 음뢰종을 들고 달아나느라 이것을 넣을 시간이 없었다.
이제 드디어 혈안정수를 얻는 순간이었다.
나는 혈불의 눈동자를 꺼냈다. 눈동자 위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었다.
똑!
오른쪽 눈동자에 담긴 혈안정수는 오른쪽 눈에 한 방울.
똑!
왼쪽 눈동자에 담긴 혈안정수는 왼쪽 눈에 한 방울.
혈안정수가 눈에 들어가자 눈이 불타오르는 것처럼 화끈거리고 뜨거웠다. 고통은 있었지만 다행히 앞이 보이지 않거나 하진 않았다.
눈동자를 원래 자리에 놓자 안으로 들어갔고 혈불이 다시 눈을 감았다.
눈동자 속에 남은 정수는 충분했기에 다음 후계자에게는 문제없이 넣어 줄 수 있을 것이고, 이 혈안정수 두 방울이 사라진 사실조차 그들은 알지 못할 것이다.
나는 지하 통로로 들어가 문을 완전히 닫기 전에 두 줄기 지풍을 날렸다.
쉭.
족쇄 고수가 잠에서 깼다.
그는 순간 어리둥절했지만 이내 주위에 아무 일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나 정도 되는 고수가 아니었다면 절대 해낼 수 없는 한 수였다.
저 남자는 무슨 사연이 있어 저렇게 묶여있을까 궁금했지만, 그렇다고 누군지도 모를 그를 구해줄 상황은 아니었다. 그는 내 회귀로 바뀌는 운명에 속한 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조용히 비밀통로를 빠져나왔다.
때가 되면 대법 재료들과 관련된 기연들을 하나씩 거둬들이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섭혼마존 때문에 생각보다 빨리 혈안정수를 얻었다.
이유야 어쨌든 큰일을 해냈을 때의 기쁨은 있는 법. 특히 이번처럼 이전에는 가져보지 못한 능력을 얻게 되니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단지 섭혼마존을 죽일 수 있게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화무기를 향한 나의 여정에 이 새로운 힘이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리라 믿기 때문이다.
비밀통로를 나온 후 승자의 여유를 부리며 혈신제를 즐길 수도 있었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본교를 향해 내달렸다.
마지막까지 변수는 사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