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5회 내가 너를 안다.
자색의 광채는 한 가지 금지된 마공의 사용을 알렸다.
상대에게서 진실의 대답을 듣는 독심탈혼술(讀心奪魂術)이 발휘된 것이다.
독심탈혼술은 교주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교도를 대상으로 사용할 수 없는 금지된 무공이었다.
무공 자체가 상대의 마음을 읽고 대답까지 끌어낼 수 있기에, 여러모로 악용될 소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한데 섭혼마존은 금기를 어기고 독심탈혼술을 시전한 것이다.
상위 실력의 귀술사들도 모두 독심탈혼술을 펼칠 수 있었는데, 각자의 실력과 내공에 따라 그 성공률이 달랐다. 실력이 높아질수록 자색이 짙어졌다.
섭혼마존의 독심탈혼술은 그야말로 기억조차 못 하는 내용까지 끌어낼 수 있음을 저 휘황찬란한 자색이 말해주고 있었다.
“너는 누구냐?”
“검무극이오.”
“어떻게 나에 대해서 알고 있지?”
“당신을 조사했소. 성격부터 모든 것을 다.”
눈을 통해서 침투하는 독심탈혼술은 혈안정수를 넣은 내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독심탈혼술에 걸린 것처럼 대답했다. 그가 무엇을 묻는지를 보면 나 역시 그에 대해서 알게 되는 바가 있을 테니까.
“이번 일의 배후에 교주가 있느냐?”
“없소.”
섭혼마존의 얼굴에 안도감이 스쳤다. 역시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버지였다.
“너는 왜 온 것이냐?”
“당신을 죽이러 왔소.”
“이곳에 온다고 누구에게 말했나?”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소.”
섭혼마존이 독심탈혼술을 풀었다. 교주가 시킨 것이 아니라면, 더는 내공을 소모해가며 독심탈혼술을 펼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독심탈혼술에 드는 내공과 심력 소모는 그 어떤 사술보다도 심했다.
이곳에 온 것을 누구에게 알렸느냐는 물음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나를 죽이기로 마음먹었음을.
“이공자, 그대는 오늘부로 그대의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네.”
“나도 나지만, 당신은 나를 죽이고 뒷감당을 할 수 있겠소?”
“뒷감당을 왜 내가 하나? 혈천도마가 해야지. 자네를 죽이는 것은 내가 아니야. 자넨 혈천도마를 죽이려다가 놈의 손에 죽게 될 거다.”
내게 섭혼술을 걸어서 혈천도마를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겠다는 의미였다. 내가 혈천도마를 이길 수 없을 거라 여기니, 결국 혈천도마에게 죽을 거라는 결론.
“당신다운 생각이군.”
“나답다는 것이 뭐냐? 왜 자꾸 나를 잘 안다는 듯 말하는 거지? 날 조사했다고? 날 죽일 수 있다고 여기는 것부터 엉터리 조사야.”
말이 끝나는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강렬한 빛들이 날아들더니, 이내 나는 어두운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누군가 내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혈천도마를 죽여라!
그 말이 계속 반복되었다.
처음에는 섭혼마존의 목소리로, 다음에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이안의 목소리로, 서대룡의 목소리로. 내가 아는 모든 목소리로 그 말을 반복했다. 심지어 나는 물론이고 혈천도마의 목소리까지 들렸다.
귀를 막아도 그 말이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그 명령을 뇌에다가 망치로 박아넣는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터질 것같이 아팠다.
천마호신공이 발동한 상황에서도 이 정도니,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미 섭혼마존의 섭혼술에 걸려들었을 것이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저 멀리 푸르스름한 빛이 보였다. 저 빛이 이 섭혼술의 파훼법임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나는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빛은 커졌고, 그것은 사람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바깥에 섭혼마존이 서 있었다. 그가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스스로 눈을 뜬 거지?”
빛으로 걸어 나온 행위 자체가 현실에서는 눈을 뜨는 행위였던 모양이다.
“섭혼술이 끝나기 전에는 절대 눈을 뜨지 못하는데?”
“혈천도마와 정이 많이 들었나 보오. 그를 죽이고 싶진 않아서.”
다시 한번 주위가 빙글빙글 돌면서 강렬한 빛이 날아들었다. 다시 어둠 속이다.
―혈천도마를 죽여라!
더 많은 내공을 투입한 더욱 강력한 섭혼술이었다. 처음의 섭혼술이 작은 망치로 뇌에 박아넣었다면, 이제는 커다란 망치로 두들겼다.
하지만 여전히 푸르스름한 빛은 존재했고, 나는 그곳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나오고 나서도 머리가 빠개질 듯 어지러웠으니, 섭혼마존의 섭혼술이 얼마나 강력한지 알 수 있었다.
“대체 왜 섭혼술에 걸리지 않는 거지?”
“도마 어르신과 끈끈한 정 때문이라니까.”
“헛소리!”
“당신답지 않게 초조해하고 있군.”
“그럼 정 없는 내가 직접 나서야겠군.”
다음 순간 주위가 어두워졌다.
어둠 속에서 뭔가가 꿈틀거렸다.
바닥이 꿀렁거리면서 시커먼 그림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눈과 입이 길게 찢어지고 팔다리가 기다랗게 붙은, 그야말로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한 그런 괴물들이었다.
그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것들이 나를 향해 덮쳤다.
나는 그것들을 흑마검으로 베었다.
시커먼 괴물들의 몸에 푸르스름한 빛이 점처럼 찍혀 있었다. 어떤 것은 머리에, 어떤 것은 배에, 또 어떤 것은 팔에. 혈안정수는 정확히 이 사술의 파훼법을 보여주었다.
내가 정확히 빛을 찌르자, 놈들은 하얀 빛무리가 되면서 사라졌다. 정확히 급소를 찌르지 않으면 절대 죽지 않고 끝까지 상대를 공격하는 악령들이었을 것이다. 단순히 무공이 뛰어난 것으로는 결코 막지 못할 적이었다.
모든 괴물을 베어버리자 어두웠던 주위가 밝아지며 섭혼마존이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음 사술을 발휘했다.
어두워졌다가 다시 밝아졌을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 커다란 통나무 위에 서 있었다.
진짜 바닷물이었다. 분명 인간의 정신을 조종해서 만들어낸 환상일 텐데, 빠지면 죽는 진짜 바다였다.
그때 멀리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서 뭔가가 이쪽을 덮쳐오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거대한 해일이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막을 수 없는 대자연의 분노.
정파인들이 왜 섭혼마존을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대체 이 거대한 환상을 일개 인간이 어떻게 이겨낼 수가 있겠는가?
가까이 밀려든 해일은 절벽처럼 높았다. 너무 높아서 끝이 아득할 정도의 해일이었다.
하지만 해일 어디에도 파훼법은 보이지 않았다.
피할 곳이 없었기에 그대로 파도에 휩쓸렸다.
엄청난 충격을 받으며 짓눌리듯 물속으로 잠겨 들었다. 천마호신공이 발휘되지 않았다면 이 충격에 정신을 잃었을 것이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물속을 휩쓸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푸아!”
나는 수면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다고 생각하던 바로 그때.
저 멀리서 또 다시 해일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 해일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 어떤 고수도 결국 탈진해서 죽고 말 것이다. 그 전에 반드시 파훼법을 찾아서 나가야 했다.
나는 주위를 살폈고, 물속으로 잠수해 들어가서 푸르스름한 빛이 있는지를 찾았다. 하지만 바닷속은 캄캄할 뿐이었다.
두 번째 해일에도 휩쓸렸다. 천마호신공으로 충격을 최소화한 후 다시 물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주위는 망망대해였다.
이 넓은 바다를 뒤져서 파훼법을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갈매기도 없고, 바위섬도 없고, 그야말로 망망대해에 바닷물과 나밖에 없는데.
‘뭐라도 있어야 찾을 텐데.’
바로 그때 내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생각. 생각해보니 뭐가 하나 있었다.
‘설마?’
나는 물 밖으로 몸을 날렸다. 바닷물을 박차고 날아올라서 한 가지를 찾았다. 하지만 내가 찾는 것을 찾지 못하고 세 번째 해일에 휩쓸렸다.
다시 네 번째 해일이 오기 전, 또다시 바다 위를 날아올라 열심히 한 가지를 찾았다.
그리고 결국 찾으려던 것을 찾아냈다.
‘제발! 이것이길!’
내가 찾은 것은 맨 처음 이곳에 들어왔을 때 서 있었던 통나무였다.
통나무를 돌려보니 아래에 푸르스름한 빛이 나 있었다.
혈안정수는 언제나 정확하고 빠르게 파훼법을 알려주었는데, 이번에는 등잔 밑이 어두웠다. 망망대해에서 오직 나를 지켜주는 그것이 파훼법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니면 원래는 위쪽에서 빛나고 있었는데, 통나무가 파도에 돌아가면서 빛이 아래쪽을 향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네 번째 해일이 덮치기 직전, 통나무를 흑마검으로 베었다.
바로 그 순간!
거짓말처럼 밀려들던 해일은 사라졌고, 동시에 바다도 사라졌다.
비장의 한 수였을 텐데, 섭혼마존은 자신이 절망하는 모습을 내게 보이지 않았다.
곧장 새로운 공간이 펼쳐졌다. 섭혼마존은 그가 가진 필살의 비술을 쏟아붓고 있었다.
내 주변으로 삼십여 개의 거울이 서 있었다.
거울에 내 인생이 담겨 있었다.
어릴 때의 모습도 있었고, 지금의 모습도 있었으며 중년의 모습, 그리고 노인이 된 나의 모습도 있었다. 마치 삼사 년의 시간을 두고 나의 평생을 거울이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거울 속 나를 보았다. 대부분 회귀 전에 한 번은 겪었던 나이였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겪어보지 못한 나이를 보여주었다. 특히 마지막 거울에 비친 나는 너무 늙어서 나라는 것조차 알아보기 힘들었다.
나는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거울 속의 나에게 물었다.
“뭘 그리 후회하고 있나?”
거울 속의 나는 말라비틀어진 채 큰 방에 홀로 누워 허망한 눈빛으로 천장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죽음을 함께 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야말로 외롭고도 쓸쓸한 죽음이었다.
이건 내 미래가 아니다. 섭혼마존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아마 성질 급한 누군가는 이 거울을 깨버렸을지도 모른다. 아마 그랬다면 상황은 더욱 나빠졌겠지.
나는 손을 뻗어 거울 속 노인의 모습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손에 그렇게 피를 많이 묻히고 살았는데, 행복한 죽음을 바랐더냐? 욕심이다, 무극아. 화무기를 죽이고 살려야 할 사람들을 살려냈다면, 이런 죽음도 괜찮다.”
나는 나를 위로했다. 실제 나의 죽음은 어떠할까? 저렇게 홀로 쓸쓸히 죽을까? 아니면 남은 이들을 위로하며 웃으면서 죽을까?
“괜찮으니까 잘 가라. 내가 너를 알고 있다.”
거울 속 나를 어루만져 주었지만, 어쩌면 지금의 나를 위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다시 앞쪽으로 돌아와서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한 거울 앞에 섰다. 몇 년 후의 내 모습이었는데, 거울 주위에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자, 그럼 나가볼까?”
쨍강!
흑마검을 휘둘러 거울을 깼다.
박살 난 거울 너머 놀란 섭혼마존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이 거울인지 알았지?”
수십 개의 거울 중 단 하나의 거울만이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거울이었다.
“만약 다른 것을 잘못 깨면 거울의 숫자는 두 배로 불어난다. 또 잘못 깨면 두 배로 불어나고. 영원히 그곳에서 나오지 못하지.”
“나는 운이 좋소.”
“운이 좋아서 나왔다고? 운이 좋다고 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섭혼마존의 표정은 완전히 굳어 있었다. 이제 놀람은 충격으로 바뀌었고 공격이 실패하던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구화마공을 익힌 것인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그는 그렇다고 단정했다.
“미친 교주 같으니라고! 우리들 몰래 이미 후계자를 정했어?”
그는 그렇게 오해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사술이 통하지 않는 경우는 단 하나였으니까.
섭혼마존이 울화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날 죽이는 칼로 자식을 이용해? 더러운 새끼! 교주는 단 한 번도 속마음을 보인 적이 없었지. 언제나 뒤통수나 치고.”
“잠깐! 한가지는 짚고 가자. 이 일 말고 아버지가 뒤통수친 적이 뭐가 있지?”
“뭐?”
“언제나 뒤통수를 친다면서? 다른 뒤통수에 대해 말해보라고.”
섭혼마존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파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을 당신이라고 했어. 당신을 높이 산다는 뜻이지. 그런 당신에게 뒤통수를 쳤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화난다고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아버지는 끝까지 당신 죽이는 것, 망설이셨어. 어쩌면 이 일로 내가 점수를 잃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왜 이러지?”
“곰곰이 생각해봤어. 농사짓고, 장사하고, 학관도 다니고 무관도 다니고. 그냥 평범하게 잘살고 있었어. 한데 어느 날 이유도 모른 채 끌려와서 산채로 심장이 뜯긴다? 너무 억울하지 않겠어?”
“원래 인생은 불공평한 거다. 억울하면 고수가 되든지.”
“그 억울함, 오늘은 당신이 다 가져라.”
내가 구화마공을 익혔다고 오해하고 있었음에도 섭혼마존은 기가 죽지 않았다.
“날 조사했다고 했나? 그래, 잘 조사했다. 나는 오래 살고 싶은 열망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런 내가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예상 못 했을까? 교주가 날 배신하고 죽이러 드는 날을?”
여전히 그는 이 상황을 아버지가 꾸민 것이라 믿고 있었다.
“내가 왜 심혼대법에 빠져들었는지 아느냐? 고작 조금의 내공을 얻기 위해서?”
“아니었소?”
“당연히 아니지.”
섭혼마존의 몸 주위로 시커먼 연기 같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날더라 괴물이 되었다고 했나? 진짜 괴물을 보기나 했고?”
검은 기운 속에서 그가 변하기 시작했다. 말 그대로 변신이었다. 몸집이 더 커졌고 피부가 검게 변했다. 길게 찢어진 두 눈에서는 새하얀 광채가 흘러나왔고 귀는 악귀처럼 솟았다. 그의 가슴 속에서 커다랗고 붉은 심장이 펄떡거리며 뛰는 모습이 비쳤다.
저것은 환영인가, 실제인가?
변신한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기도를 보였다. 차갑고도 견고했다. 나는 긴장했다. 이 마공은 구화마공을 대비한 필살의 한 수였다. 그만큼 강하다는 의미.
“너희의 그 잘난 구화마공을 찢어 발겨주마!”
그가 뿜어낸 마기가 주위를 휩쓸었다. 그냥 마기가 아니라 암흑마기(暗黑魔氣)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