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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58화 (58/214)

제58회 당분간은 죽이지 마.

혈천도마는 자리에 앉자마자 술부터 찾았다.

나는 집에 사둔 술을 가져와서 한 잔 가득 따라주었다.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술을 몇 잔이나 연거푸 마신 후에야 혈천도마가 분노한 이유를 밝혔다.

“병신 머저리들이 대놓고 나를 따돌리더군.”

“하하하.”

“웃자고 한 소리 아니네.”

“죄송합니다. 설마 따돌림당하는 마존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혈천도마가 장난 아니라는 듯 더욱 눈을 부라렸다.

“죄송합니다. 대체 어떻게 따돌렸기에요?”

“아무도 내게 말을 안 걸더군.”

“평소에도 그랬던 것은 아니고요?”

“뭐 말을 잘 걸진 않았지만, 오늘처럼은 아니지. 차라리 내게 대놓고 따졌으면 이렇게 화가 나진 않았겠지.”

“뭘 따진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 말이야, 자네!”

“네? 저요?”

“그들은 자네가 나와 작당해서 섭혼마존을 죽였다고 의심하고 있네. 그래서 나를 따돌리는 거지.”

“우리가 그랬습니까?”

“우린 안 그랬지.”

혈천도마가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자네가 그랬겠지. 자네가 죽였지?”

“왜 다들 저를 의심하는 겁니까?”

“요즘 손에 피를 가장 많이 묻힌 사람이 자네니까. 그 손에 섭혼의 피가 묻지 말란 법이 없지 않나? 자네지?”

나는 대답 대신 혈천도마를 응시했다. 내 눈빛에서 그는 읽었을 것이다. 내가 섭혼마존을 죽였다는 것을.

“왜 내게 진실을 말하는 것인가?”

“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 말로 안 했지. 눈빛으로 했지.”

딱 잡아떼려고 들었으면 잡아뗐을 것이다. 그러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내게 긴장감을 가지라는 의도였다. 친한 것은 친한 것이고, 나와 그는 주군의 관계로 이어질 것이다. 딴마음 품지 말고 나를 믿고 따르라는 의도다. 사람 관계에서 적당한 긴장감은 실수를 줄여줄 테니까.

두 번째 이유는 그를 믿어서였다. 진실을 말해주고 싶었고, 말해줘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란 믿음 때문에.

“자넨 정말 나를 믿는군.”

“믿지 않는다면 어르신을 좌사에 앉히지 않았겠지요.”

“나는 좌사이기 이전에 팔마존의 한 사람이라네.”

“팔마존이지만 제 좌사이십니다.”

“사람을 이렇게 쉽게 믿다간 언젠가는 등을 찔리게 될 거네.”

“쉽게 믿은 것 아닙니다. 어르신과 제게 있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혈천도마가 불쑥 물었다.

“겁나지 않나?”

“뭐가요?”

“팔마존의 적이 된다는 것.”

“정확히는 사마존이죠.”

“사마존?”

잠시 멍하게 날 쳐다보던 혈천도마가 술잔으로 탁자를 내리치면서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언제 셋이나 더 죽였나? 누구누구 죽였어?”

버럭 소리치는 그에게 나는 재빨리 말했다.

“고정하십시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 아닙니다.”

정말 짧은 순간이었지만 혈천도마가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이 놀랍다. 이 사람은 나를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하는 것일까?

“그럼 사마존은 뭔 소리냐?”

“제 계산을 들어보십시오. 섭혼마존이 죽었으니 이제 칠마존이죠? 어르신 빠지면 육마존, 검존은 절반만 제게 넘어왔으니 오마존 반. 일단 오마존 반이 제 적이라고 치죠. 이 상황에서 어르신과 검존 선배 두 분이 놀고 계시지는 않을 거잖아요? 두 분이 합쳐서 일마존 반을 맡아서 상대해 주시면, 정확히 사마존이 남습니다. 그래서 제 상대는 사마존이란 말씀이었습니다. 사실 더 적을 수도 있습니다. 칠마존 중에서 나와 손을 잡을 사람이 둘만 더 있어도, 저는 이마존만 상대하면 됩니다. 쉽죠?”

혈천도마는 만난 이래 가장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좋아, 자네가 이 정도 미친놈인 줄은 내가 익히 아니까 넘어가고. 자네가 하나 생각 못 하는 것이 있네.”

“뭡니까?”

“나나 검존은 절대 마존들과 싸우지 않을 거네.”

나도 알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내려온 마존들만의 철칙이니까.

“압니다. 싸움은 제가 할 테니, 저를 배신하지만 않으시면 됩니다.”

“배신은 사람이 하는 게 아니야. 상황이 하는 거지. 그러니까 날 믿어선 안 돼.”

“네, 배신당할 상황을 만들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도와주십시오, 어르신.”

나는 믿음으로 혈천도마를 대했다. 그게 그를 내 사람으로 만드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술을 마신 후 그가 쏟아내듯 말했다.

“까닥 잘못하면 죽는다고, 이 자식아!”

순간 내 가슴이 격동했다. 버럭 내지른 말에서 진심 어린 걱정을 느낀 것이다.

“네, 조심하겠습니다.”

우린 말 없이 술을 마셨다. 술잔이 비면 따라주었고, 또 술을 마셨다. 술병이 다 비어갈 때 그가 한 가지 사실을 말해주었다.

내가 전에 그랬다. 혈천도마가 나보다 더 감정적이라고. 그때 그는 부정했지만, 그는 분명 감정적인 사람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이 말을 해주진 않았을 테니까.

“마존들이 이번 사건을 밝히기 위해 한 사람을 불러들였네.”

“누굽니까?”

그의 입에서 생각지 못한 사람이 흘러나왔다.

“풍천교주.”

나는 깜짝 놀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풍천교주라니? 내가 음뢰종을 구하고, 혈안정수를 구했던 바로 그 풍천교다.

“풍천교주는 왜요?”

“섭혼마의 사술은 혈교의 마공을 바탕으로 하거든. 자네도 잘 알겠지만 혈교는 바로 풍천교의 전신이었고. 그러니 풍천교주가 섭혼마의 시체를 보면, 사인을 정확히 알 수 있을 거라는 판단이지.”

“풍천교주는 절대 자신의 권좌를 비우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그는 반드시 올 거네.”

“그렇게 확신하시는 이유는요?”

“어떻게든 오게 만들 테니까. 팔마존의 힘을 무시하지 말게. 그들은 어떻게든 풍천교주가 이곳에 오게끔 할 거야. 협박하든, 보물을 안기든, 어떻게라도 말일세.”

과거 혈교 시절이었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본교와 여러 차례 전쟁이 있었고,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세력이었으니까.

하지만 이후 풍천교로 바뀌면서 관계는 달라졌다. 팔마존들이 그들과 손을 잡으면서 우방 아닌 우방으로 자리 잡은 풍천교였다.

“풍천교의 신물은 어쩌고요?”

“알아서 하겠지. 정 불안하면 다 싸 들고서라도 오겠지.”

“차라리 시체를 그곳으로 보내면 되지 않습니까?”

부패하지 않게 처리해서 마차로 보내는 방법도 있었다.

“풍천교주가 이곳에 오는 것은 비단 검시 때문만은 아닐세.”

“다른 이유가 있습니까?”

“세 가지 이유가 더 있지. 첫 번째는 마존들이 반드시 흉수를 찾아내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거지. 팔마존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본교는 물론이고 무림맹이나 사도맹에게까지 보이려는 거다. 이게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

“풍천교주까지 움직인다고 보여주려는 거군요. 마존을 건들면 반드시 복수한다고.”

“그렇지.”

“두 번째 이유는요?”

“교주님 때문이네.”

“아버지요?”

“교주님에게 보이려는 거다. 현재 풍천교와 천마신교가 우방인 이유는 교주 때문이 아니라 팔마존 때문이란 것을 과시하려는 거다.”

팔마존은 끝없이 아버지를 견제해 왔다. 어쩌면 아버지가 나를 끌어들인 것 역시 그 갈등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세 번째 이유는요?”

“자네지.”

“저요?”

“만약 자네가 섭혼마존을 죽였다면, 풍천교주는 자넬 통해서 그 사실을 반드시 알아낼 거야. 자네란 사람을 파악해서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죽였는지 알아내겠지.”

맞는 말이었다. 풍천교주라면 내 눈에 혈안정수를 넣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내가 섭혼마존을 죽였다는 사실만큼은 반드시 숨겨야 한다. 만약 밝혀지면 팔마존이 해오는 복수는 둘째치고, 그들의 필사적인 반대로 후계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한데 괜찮으십니까?”

“나? 내가 왜?”

“저와 공범이 되셨잖습니까? 저와 밤새 술을 마셨으니, 함께 움직였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요.”

“술 마시다 잠깐 졸았는지도 모르지.”

여차하면 그렇게 빠져나가겠다는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그를 데리러 팔마존 중 누가 갔습니까?”

“팔마존이 간 것은 어찌 알았나?”

“당연히 중요한 사람이 갔겠지요. 전부가 다 몰려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아닙니까?”

“마불이 갔네.”

팔마존 중 일인인 마불은 풍천교주와 친분이 깊었다. 그를 보냈다는 것은 풍천교주를 반드시 데려오겠다는 의지.

내가 웃으면서 혈천도마에게 물었다.

“쫓아가서 마불을 죽일까요? 아님 출발하는 풍천교주를 죽일까요? 아니면…… 둘 다 죽일까요?”

“그랬다간 새외 무림과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우리가 분열되면 병신 같은 무림맹 놈들은 잘 있다 갑자기 마교 타도를 외칠 테고. 사도맹은 뭐 주워 먹을 것 없나 눈이 시뻘게지겠지.”

“저와 시원하게 피 한 번 뒤집어쓰시죠.”

혈천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죽으려면 혼자 죽으시게.”

“어르신과 저, 공생공사(共生共死) 아니었습니까?”

“이공자, 태어날 때부터 우리 인생은 각자도생(各自圖生)이라네. 나, 가네.”

혈천도마가 내 방을 나갔다.

나는 마지막 남은 술을 털어 넣었다.

‘풍천교주가 온단 말이지?’

* * *

다음 날 아침 아버지의 부름을 받고 천마전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태사의에 앉아 있지 않고 창가에 서 계셨다.

“부르셨습니까, 아버님.”

“이리 오너라.”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서 아버지가 서 계시는 곳까지 걸어갔다.

“벌써 서환진이 시끄럽다고 들었다.”

“귀신들이라고 다르겠습니까? 권력 싸움 시작이겠지요.”

하루아침에 주인을 잃은 서환진은 혼란스러웠다.

그 혼란의 중심에 슬픔은 없었다. 평소 오직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있던 섭혼마존이었기에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았다. 귀술사들은 오직 다음 섭혼마존이 누가 될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다.

“잠시 나갔다 오너라.”

“어딜 말씀이십니까?”

“중원에 있는 황천각 지부를 한 번 돌아볼 때가 되지 않았느냐?”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 또한 팔마존이 풍천교주를 불렀다는 것을 알고 계신다는 것을. 나를 걱정해서 외부로 내보내려 하신다는 것을.

“절 내보내는 일은 재고해 주십시오.”

“이유는?”

“팔마존이 섭혼마존의 죽음을 조사하기 위해 풍천교주를 불렀습니다.”

과연 아버지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알고 계신 거다. 어쩌면 마존들 중 누군가 아버지의 수족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실력 좋은 세작(細作)이 팔마존의 동태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전하고 있거나.

“이런 시기에 교를 나가면 저를 의심할 겁니다.”

“이미 의심하고 있다. 그래서 풍천교주를 부른 거고. 풍천교주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네가 어떤 수법으로 섭혼을 죽였는지는 모르겠다만, 반드시 네 짓임을 밝혀낼 거다.”

“저 아닙니다, 아버지. 무림맹에서 자객을 보냈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은 저들이 우리와 전쟁을 하자는 건데, 그들은 지금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

무림맹과는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속속들이 잘 알고 있었다. 만약 전쟁이 발발한다면, 아무리 비밀리에 진행해도 적어도 사흘 전에는 그 징후를 포착해낼 것이다.

“정말 이번 일을 무탈하게 넘길 자신 있느냐?”

“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냐?”

예전에도 같은 질문을 하셨다. 같은 대답을 다른 식으로 했다.

“아버지가 저였다면, 교를 나가셨겠습니까?”

“아니.”

“전 아버지 아들입니다.”

“그래, 넌 내 아들이지, 내가 아니지.”

“대신 아버지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습니다. 흉내의 대상이 아버지라면, 흉내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아버지는 더는 내 의지를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좋아, 그럼 한 가지는 명심해라.”

나보고 조심하라고 하실 줄 알았다.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아버지가 돌아서 걸어가며 말했다.

“풍천교주는 죽이면 안 돼.”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설마? 지금까지 절 걱정한 것이 아니라, 풍천교주를 걱정한 겁니까?”

아버지가 성큼성큼 걸어 나가며 덧붙였다.

“다른 마존도 안 돼! 당분간은 아무도 죽이지 마.”

“제가 죽인 것 아니라니까요!”

끝까지 잡아뗐지만 이미 아버지는 문을 닫고 나간 후였다.

천천히 계단을 내려와 피의 길을 걸어 천마전을 나왔다.

풍천교주를 죽이다니요? 제가 풍천교와 풍천교주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아는데요. 제겐 보물창고처럼 고마운 사람입니다. 다만 이곳까지 와서 저를 압박한다면…… 그는 제게 더 고마운 사람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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