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회 때론 속보다 껍데기가.
눈에 혈안정수를 넣은 것을 들키지 않을 방법은 내가 아는 한 두 가지다.
첫 번째 방법은 환골탈태(換骨奪胎)다. 신체가 완전히 바뀌면서 혈안정수를 넣은 것을 알아볼 수 없게 된다. 이 방법은 구화마공의 대성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라서 지금은 고려할 가치가 없다.
두 번째 방법은 몸 전체가 아니라 내 눈만 바꾸는 것이다.
눈을 바꿀 수 있느냐고?
있다. 당대에 딱 한 사람이 내 눈을 바꿔줄 수 있다. 심지어 그는 본교 내에 있다. 문제는 과연 그가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인가 하는 거다.
그 당사자는 피 냄새를 가득 풍기며 나를 맞았다.
“이공자, 어서 오게.”
“잘 지내셨습니까, 마의 어르신.”
그 사람은 바로 마의였다. 옷에 묻은 피는 환자의 피였다.
“나야 항상 같지.”
“쉬어가면서 일하십시오. 피곤해 보이십니다.”
“신경 써 줘서 고맙네.”
마의와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는데, 황천각주가 된 후 여러 차례 일로 마주치면서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우연히 들어온 약초가 있어 드리려고 찾아뵈었습니다.”
내가 준비해 온 선물을 그에게 주었다. 일반적으로 의방에 들어오는 약초가 아닌, 내가 특별히 외부에서 비싼 돈을 주고 사 온 것이다.
“오, 이렇게 귀한 약초를. 고맙네.”
“별말씀을요.”
“자, 차라도 한잔하세.”
“네.”
마의와 같이 차를 마셨다. 몇 마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마의가 넌지시 물었다.
“내게 볼일이 있어서 찾아온 것 같은데?”
“맞습니다. 사실은 부탁드릴 일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말씀하시게.”
“바쁘신 분이니 말 돌리지 않겠습니다. 제게 신안술을 시술해 주십시오.”
순간 마의는 깜짝 놀랐다.
신안술(新眼術).
무인의 눈을 강화시키는 시술로, 신안술을 시술받으면 일반 시력은 물론이고 동체시력까지 비약적으로 좋아진다. 또한 눈을 통해 들어오는 외부 영향에도 쉽사리 영향을 받지 않았다. 빛이나 어둠, 물 속이나 연기 속, 그 모든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름 그대로 새로운 눈으로 재탄생되는 것이다. 그 효과가 너무 뛰어나서 신안술(神眼術)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신안술을 시술받으면 풍천교주가 내 눈을 살펴도 혈안정수를 넣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신안술은 오래전에 실전된 비술로 알려져 있었다.
마의의 표정은 완전히 가라앉았다.
“내가 신안술을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는가?”
우연히라도 나올 수 있는 말이 아니었기에, 마의는 모른다고 잡아떼지 않았다. 그가 궁금한 것은 내가 어찌 알았느냐였다.
마의가 신안술은 익혔다는 것은 지금부터 먼 훗날 알게 된다.
대법 재료를 구하러 다시 교로 돌아왔을 때, 마의는 이미 죽은 후였다. 그의 수제자인 호백(湖伯)이 신의의 자리에 있었는데, 모든 사실은 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호백은 당시 교주였던 주백도에게 신안술을 바쳤다.
그 일로 인해서 마의가 신안술과 그에 필요한 약물을 제자인 호백에게 전해준 사실이 밝혀졌다.
나는 누구에게 들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지 않았을 때, 마의가 떠올리는 한 사람이 있을 테니까.
“아!”
그의 표정이 신중해졌다. 그는 아버지가 내게 알려줬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수제자 호백의 회고에 따르면, 아버지는 마의가 신안술을 펼쳐주겠다는 것을 거절했다고 했다. 그 덕분에 신안술의 재료가 자신에게 전해져서 당시의 교주에게 펼쳐줄 수 있었다고, 모든 게 사부 덕분이라고 회고한 것이다.
그랬기에 마의는 내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비록 아버지는 신안술을 거절했지만, 내게 그 사실을 알려줬다는 것은 신안술을 내게 시술해 주란 의도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안술에 필요한 재료 중 하나인 극락관음초(極樂觀音草)의 열매는 구하기가 극히 어려워 신안술은 당대에 딱 한 번만 펼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도 신안술을 원하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마의가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었다. 조용히 차를 마시며 기다렸는데, 이윽고 마의가 입을 열었다.
“내가 신안술을 펼쳐주면 이공자는 내게 무엇을 해줄 텐가?”
“지금은 드릴 것이 없습니다. 대신…….”
마의를 바라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제가 교주가 되겠습니다.”
“!”
“교주가 되면 마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드릴 수 있을 겁니다.”
마의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의가 원하는 것이 뭔지 나는 안다.
마의는 죽을 때까지 그것을 원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신안술을 거절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신안술을 받으면 마의의 부탁을 들어줘야 해서.
하지만 나는 아버지와는 달리 거절할 생각이 없다. 마의의 부탁을 들어줄 작정이니까.
“그것이 무엇이든 들어줄 텐가?”
“네. 대신 딱 한 가지입니다.”
“한 가지 부탁이면 충분하네.”
“약속드립니다.”
이제 마의가 판단해야 할 마지막 하나가 남았다.
“후계자가 될 자신이 있는가?”
“있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어르신께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제가 후계자가 될 것 같습니까?”
최근 내 행보라면 분명 마의도 주목하고 있었을 터.
“자네의 능력은 충분하다고 생각하네. 오히려 넘친다고 볼 수 있지. 하나…… 자넨 너무 맑아. 과연 교주 자리에 어울릴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네.”
“오히려 잘됐습니다.”
“무슨 뜻인가?”
“신안술로 이 맑은 눈을 감춰주십시오. 새 눈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농담처럼 말했지만 마의는 웃지 않았다. 그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앞두고 있었고, 그 선택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결정이니 숙고하시고 연락주십시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공자, 끝으로 하나만 묻지.”
“네.”
“자네가 교주가 되면 무림맹은 어떻게 상대할 생각인가?”
“그때 정세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정파든 사파든, 개인이든 조직이든, 남자든 여자든 절대악이라 판단되면 반드시 처단할 겁니다.”
적어도 그에게는 모범답안임을 알았기에 나는 편한 마음으로 그곳을 나왔다.
* * *
사흘 후, 혈천도마가 의방을 찾았다.
마의는 진료하는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었는데, 며칠간의 고민이 피로가 되어 그의 얼굴에 쌓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서며 혈천도마가 말했다.
“죽을 때가 된 거냐? 왜 안 하던 짓을 하는 거냐?”
마의가 사람을 보내 은밀히 보자고 기별한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야심한 시간에 조용히 이곳을 찾은 것이고.
“우리야 죽을 때가 머지않았지.”
“재수 없는 소리 집어치워라. 우리라는 말을 집어치우든지.”
“너는 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아서 그러냐?”
“세상에 미련 없다 하는 놈들이 속은 더 지옥이더라.”
두 사람이 이렇게 허물없는 친구로 지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 날 부른 걸 보니, 사람 살리는 일이 이제 지겨워진 게냐? 같이 사람이나 죽이러 갈까?”
마의는 옅게 웃었다. 거르지 않고 말을 막 내뱉는 혈천도마와는 은근히 잘 맞았다. 성격이 달라서 친하다는 말, 혈천도마와의 관계를 보면 이해가 된다.
혈천도마처럼 하고 싶은 말 다 하면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뭐 하나 묻고 싶어서 불렀다.”
“뭔데?”
“이공자를 왜 선택한 거냐?”
순간 혈천도마가 빤히 마의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껄껄 웃었다.
“그놈은 정말 손을 미치지 않는 곳이 없구나. 의방 샌님까지 싸움터로 불러내는 걸 보니. 대체 그건 왜 묻는 거냐?”
마의는 잠시 사이를 두고 대답했다.
“네 말마따나 사람 살리는 일이 지겨워진 모양이다.”
혈천도마는 통쾌하게 웃었지만 마의는 여전히 진지했다.
“왜 이공자냐?”
“왜긴. 교주가 될 것 같으니까 선택했지.”
마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교주가 검무극에게 자신의 신안술을 알려줬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 사실로 봤을 때, 이공자가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마의는 그 이상이 필요했다. 평생 딱 한 번 쓸 기회를 쓰느냐 마느냐의 기로에 서 있었으니까. 그로 인해서 자신의 평생 숙원을 이루느냐 마느냐도 달려 있었고.
“그러니까 그 이유가 뭐냐고.”
혈천도마의 솔직한 대답은 이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놈에게 말려들었다. 정신 차리고 보니 천외신단을 녀석의 입에 넣어 주고 있더라.
차마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으니.
“이공자가 그러더군. 자기 마도에서는 객잔의 탁자를 부수지 않는다고. 그래서 선택했다.”
마의는 잠시 멍하게 혈천도마를 쳐다보았다. 이런 황당한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는데, 이상하게도 그게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았다. 검무극의 마음도, 혈천도마의 마음도.
“하긴, 넌 그만 부술 때도 되었지.”
마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람 불러놓고 어디 가? 한잔해야지.”
“다음에. 그땐 내가 살게.”
“늙은이들에게 다음이 어디에 있나? 오늘 사!”
하지만 마의는 이미 그곳을 나간 후였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며 혈천도마는 헛웃음을 지었다.
“부지런해서 쉽게 죽진 않겠다.”
물론 마의가 아니라 검무극을 두고 한 말이었다.
* * *
자다가 눈을 떴다.
천마호신공이 방문자의 존재를 알린 것이다.
침상에서 일어나 검을 차고 밖으로 나가보니 마당에 마의가 서 있었다.
“어르신, 오셨습니까?”
“나는 마기를 전혀 발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내가 온 것을 알았는가?”
“잠을 자다 눈을 딱 떴습니다. 마치 운명처럼요.”
굳이 운명이란 통속적인 말을 덧붙인 이유는 나이 든 사람에게 너무나 잘 먹히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다 운명이었겠거니 하지 않으면 정리하기 힘든 일들이 많은 나이였으니까.
“나는 평생 사람을 살려왔네.”
“훌륭하신 일입니다.”
마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희생적인 사람이 아니라네. 내가 사람을 구한 것은 한 사람을 죽이고 싶어서지.”
“무슨 말씀이신지요?”
모른 척 물었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마의가 본교에 투신한 것도 그 이유 때문이다.
“의원으로서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천의(天意)를 거스르는 일. 그래서네. 그 죄를 조금이라도 씻기 위해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려고 애썼지.”
긴 한숨을 내쉰 마의가 내게 물었다.
“자네가 교주가 되면 그 사람을 죽여줄 텐가?”
“네.”
“왜 누군지 묻지 않나?”
“어르신이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악인일 테니까요. 저는 어르신을 믿습니다.”
“내 속에 뭐가 들었을 줄 알고?”
“때론 속보다 껍데기가 중요할 때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의라는 껍데기는 쉽게 얻을 수 있는 껍데기가 아니죠. 마의라는 이름이 만들어지기까지 들인 노력을 저는 믿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믿음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의 삶과 죽음, 그가 죽이려는 사람까지, 그에 대해서 전부 다 알고 있기에 믿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결코 내 눈을 그에게 맡기지 않을 것이다.
“그를 죽이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네. 잘못하다간 여러 사람이 휘말려 죽게 될 걸세. 그래서 내 바람은 다른 희생 없이 그자만 죽이는 거지.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할 수 있는가?”
아버지가 거절한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의 부탁을 들어주려면 아버지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데, 한 개인의 원한을 위해 움직이기에는 천마라는 자리는 지극히 무거웠으니까.
“제가 더 강해져서 불필요한 희생 없이 그자만 죽이겠습니다.”
“약속해주겠나?”
“네.”
“만약 내가 먼저 죽게 되더라도, 이 약속을 지켜주겠나?”
“약속하겠습니다. 놈의 심장에 검을 찔러넣을 때 그자에게 속삭여주겠습니다. 마의께서 보낸 검이라고.”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는지 마의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윽고 마의는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좋네, 자네에게 신안술을 시술해 주겠네.”
“정말 감사합니다.”
나는 그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취했다.
“감사는 신안술이 끝나고 난 후에 하게. 자, 가세.”
“지금 하시려는 겁니까?”
“마음을 먹었으면 바로 해야지. 내일 내 마음이 어떻게 될지 알고? 왜? 싫은가?”
“그럴 리가요. 가시죠.”
난 성큼성큼 걸어가는 마의를 뒤따랐다.
그러면서 주위를 유심히 둘러보았다. 이 눈으로 보는 마지막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