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회 나도 죽일 건가?
풍천교주와 마불이 천마전으로 들어섰다.
풍천교주 능파소(凌派素)는 풍채와 혈색이 좋았고 벽이라도 뚫을 것 같은 강렬한 안광의 소유자였다. 그는 새외제일공으로 알려진 앙천대마기(殃天大魔氣)를 대성한 인물로 새외 무림을 지배하는 절대자였다.
한때 혈교가 천마신교와 힘을 나란히 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현재 풍천교로 넘어와서는 상대적으로 힘이 많이 약해져서 천마신교에 비할 수는 없었다.
이번에 그는 풍천교를 떠나오면서 교를 대표하는 열 명의 최고수들인 십대마인(十大魔人)과 일백의 정예 혈나군(血奈軍)을 함께 데려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음뢰종과 혈불을 비롯해 그의 권좌에 있던 모든 신물을 가지고 왔다. 그냥 만년한철 철창 안에 넣어두고 데려온 고수들로 지키게 하는 것이 더 안전하겠거니 싶지만, 그는 절대 신물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천마신교 내에서 그의 안전을 보장한 사람이 바로 함께 걸어들어온 마불 저라반(楮羅般)이었다. 그는 보통 어른의 반 정도 되는 작은 키의 소유자였다.
하지만 세상 사람 누구라도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게끔 하는 것은 키 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의 피부색 때문이었다.
그는 얼굴과 손은 물론이고 온몸이 황금색이었다. 그래서 마치 동자승처럼 작은 황금 불상이 움직이는 느낌을 주었는데, 바로 그가 익힌 황금대라마공(黃金大羅魔功) 때문으로 알려져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피의 길을 걸어 태사의 아래까지 도착했다.
먼저 풍천교주가 정중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신교의 주인이시자 천하무림의 종주를 뵙습니다. 이렇게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마 검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맞았다.
“어서 오시오, 이게 몇 년 만이오?”
차분한 인사였지만 한마디 한마디가 풍천교주의 귀에 박히 듯 날아들었다. 내공이 깃들지 않았음에도, 내공이 깃든 말보다 더 강렬하게 날아든다는 것은, 천마의 경지가 얼마나 높은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모습이었다.
세상 누구에게도 당당한 풍천교주였지만, 천마에게만큼은 주눅이 들었다.
“근 십 년은 족히 된 듯합니다.”
“잘 지내셨소?”
“걱정해 주신 덕분에 무탈합니다.”
풍천교주는 천마를 만나면 절대 기싸움에서 밀리지 않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이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기싸움, 그 쓸데없는 것을 왜 하나?
이번에는 검우진의 시선이 마불을 향했다.
“먼 길 다녀오느라 수고했네.”
“친우를 만나러 간 즐거운 여정이었습니다.”
풍천교주와의 친분을 과시하며 마불이 뭐라 말을 덧붙이려 할 때, 검우진이 딱 잘랐다.
“시간도 늦고 오시느라 힘드셨을 테니, 오늘은 이만 가셔서 쉬시고 밝은 날 다시 봅시다.”
“네, 그럼 물러가겠습니다.”
인사는 형식적이고 짧게 끝났다.
원래 천마와 풍천교주는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다. 풍천교는 대대로 천마전이 아니라 팔마존과 친분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역사적으로 천마신교와 혈교 사이에는 몇 번의 전쟁이 있었다. 태생적으로 친해질 수 없는 사이였기에, 천마전과 맞서는 팔마존들이 풍천교와 손을 잡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풍천교주가 마불과 함께 천마전을 걸어 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새외 지존이 왔는데 차 한잔 정도는 대접해야지. 너무하는군.”
“밤이 늦었잖소.”
“그럼 더 잘 대접해야지.”
마불의 불만에 풍천교주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그렇게 이간질하지 않아도 그쪽 교주와 친해질 일 없소. 그러니 그만하시오.”
“이간질이라니요? 이건 그대의 자존심과 명예와 관련된 일이오.”
풍천교주는 천마가 그의 말을 딱 자른 것을 이해했다. 마불은 때때로 사람의 감정을 건드는 말을 잘 내뱉었다. 굳이 할 필요 없는 말을 해서 상대의 속을 뒤집는 악취미가 있다.
“가서 시체부터 봅시다.”
“내일 보지 않으시고요? 피곤할 텐데, 주무시고 내일 봅시다.”
“잠은 죽어서 잡시다.”
“그럼 그럽시다. 다들 뭔 고집들이 이리 센지.”
마불이 그를 데리고 시체가 있는 장소로 갔다. 섭혼마존의 시체는 썩지 않도록 얼음창고처럼 추운 곳에 약물까지 발라서 보관하고 있었다.
풍천교주는 곧장 시체를 검시했다.
마불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다.
풍천교주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시체 내부를 샅샅이 살폈다. 일일이 그의 장기와 혈맥을 손으로 만져보면서 냄새를 맡기도 했고, 식어버린 시체에 내력을 주입하기도 했다.
이윽고 꽤 오랜 시간의 검시가 끝났다.
“기경팔맥(奇經八脈)이 손상을 입었고 심장에 큰 무리가 갔소. 이건 섭혼술을 연속해서 발출하다가 벌어진 일이오.”
“주화입마란 말씀이시오? 아니란 말씀이시오?”
“사인은 주화입마가 맞소. 하지만 섭혼마존은 자신이 개방한 세상에서 누군가 싸우다 죽은 것이 확실하오.”
마불의 표정이 굳어졌다.
“역시 누군가의 손에 의해 살해당한 것이구려.”
“확실하오. 문제는 섭혼술을 썼음에도 죽었다는 점이겠지요.”
마불이 고개를 내저었다.
“믿기 어렵소. 서환진을 침입해서 섭혼을 살해하고 빠져나갈 정도의 고수가 누가 있을지.”
그러자 풍천교주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천마가 죽인 것이 아니냐는 물음이었다.
그러자 마불이 고개를 내저었다.
“우린 그렇지 않다고 판단했소. 섭혼은 정파 놈들을 상대할 때 가장 큰 전력을 차지하는 인물이오. 평소 교주가 섭혼을 싫어하지도 않았고. 교주가 죽였을 리 없소.”
조심스러운 풍천교주에 비해 마불은 편하게 교주를 언급했다. 교주는 아니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그럼 흉수로 여겨지는 다른 자가 있소?”
“한 사람 있긴 하오.”
“그게 누구요?”
“교주의 둘째 아들이오.”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어졌다. 설마 교주의 아들을 흉수로 의심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돌려 생각하면 교주의 아들쯤 되니까 이런 짓을 저지를 능력도 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오는 내내 이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안 하더니. 이런 위험한 상황으로 자신을 끌어들인 것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풍천교주는 아무런 감정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누군가 발을 걸어 넘어뜨리면, 짱돌이라도 하나 주워서 일어나는 것이 그였고, 돌로 머리통을 갈길 때까진 웃어주는 것도 그였으니까.
“내일 당장 이공자부터 봅시다.”
* * *
서대룡이 아침 보고를 마치고 돌아서려다 내게 말했다.
“괜찮으십니까?”
“무슨 뜻이야?”
“이제 새외까지 각주님에게 덤벼들잖아요?”
“다 덤비라고 해.”
“그러겠습니다. 그 싸우는 자리에 저만 없으면 되죠.”
“미안하지만 그 자리에 항상 있어서 오른팔이라 불릴걸?”
서대룡은 짐짓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롭다는 시늉을 했다.
“자네, 무공을 배우면 어두워질 거라더니, 여전히 밝은데?”
“그게…… 저도 어두워질 줄 알았는데 솔직히 말씀드리면 무공 배우는 것이 즐겁습니다.”
“무공 배우는 것이 좋은 게 아니라 혈천도마가 좋은 것은 아니고?”
잠시 사이를 두고 서대룡이 말했다.
“…… 싫지는 않습니다. 아직까진.”
“아직까진? 점점 좋아질 거란 예고 같은데?”
“만약 그렇게 되면…… 오른팔 잘라내시고 어두운 사람으로 한 명 구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자네처럼 어둡고 삐딱하고 재밌는 사람을 어디서 구해? 내게서 달아날 생각은 꿈도 꾸지 마.”
“저야 좋지만요.”
그때 황천각 수하가 보고했다.
“풍천교주가 오셨습니다.”
“모셔라.”
서대룡이 재빨리 집무실을 나가며 말했다.
“지지 마십시오!”
“함께 있어 줘.”
“인생은 각자도생입니다!”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다! 벌써 닮아가냐?”
서대룡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갔다.
잠시 후 풍천교주가 안으로 들어왔다.
“새외지존을 뵙습니다.”
내가 정중히 인사하자 풍천교주가 미소를 지었다.
“이공자, 오랜만이네. 어릴 때 봤는데 이제 어른이 되었군.”
“교주님은 여전히 정정하십니다.”
사람 좋은 얼굴로 웃고 있었지만 풍천교주는 들어서는 순간부터 나를 탐색하고 있었다.
“오셨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일정이 바쁘실 터인데 어찌 저를 찾아오셨는지요?”
“멀리서도 듣는 귀가 있네. 근래 이공자의 명성이 본교에까지 들리더군.”
“허명에 불과합니다.”
“겸손하기까지.”
그렇게 형식적인 인사를 나눈 후에 그와 마주 앉았다.
“섭혼마존의 죽음에 교주께서 크게 상심하신 것 같았네.”
그가 슬쩍 아버지를 언급하며 섭혼마존에 관해 이야기를 꺼냈다. 내 대답 한마디 한마디에서 뭔가를 파악하려 하고 있을 것이다.
“가장 아꼈던 마존 중 한 분이셨지요.”
“대체 누가 죽였을까?”
“살해당하신 겁니까? 주화입마에 빠져 돌아가셨다고 들었는데.”
바로 그때 풍천교주의 눈에서 한 줄기 기운이 흘러나왔다. 원래라면 표가 나지 않은 은밀한 기운이었을 텐데, 내게 그 기운이 눈에 보였다.
그 순간 나는 특별한 능력이 생겼음을 알 수 있었다.
무형의 기운이 내 눈에 보이는 것이다. 원래라면 그냥 느껴지기만 했을 기운인데, 이제는 그것이 아지랑이처럼 보였다.
단지 신안술 때문만도 아니고, 혈안정수 때문만도 아니었다. 이 두 가지가 합쳐지면서 내게 새로운 능력이 생긴 것이다. 혈교 무공에만 통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인의 기운에도 통하는 것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왜 웃나?”
“오랜만에 뵈니 기분이 좋습니다.”
“나 또한 기분이 좋네.”
이 와중에도 그의 기운은 내 몸을 구석구석 살폈다. 온몸 구석구석을 다 살핀 후 마지막으로 내 눈을 살폈다. 혹시라도 혈안정수와 같은 신수를 눈에 넣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신안술로 새롭게 변한 내 눈에서 뭔가를 찾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가 발출한 기운이 다시 눈으로 회수되었다.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은 정말 너무나 신기한 일이었다.
“이만 가보겠네.”
“아쉽네요. 좀 더 있다 가십시오.”
“얼굴 봤으니 됐네. 바쁜 사람 붙잡고 있으면 안 되지.”
풍천교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에 또 뵙지요.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신 덕분에 생긴 능력, 고맙소.
회귀 전부터 지금까지 풍천교주는 내게 아낌없이 주고 있다. 물론 그가 원해서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운명적으로 자꾸 뭔가를 받게 된다. 그래서 그가 싫지만은 않다.
* * *
검무극의 집무실을 나선 풍천교주를 마불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소?”
“이공자는 전혀 섭혼술과 관련이 없었소. 섭혼이 만들어낸 공간에서 그를 제압하려면, 불문이나 도가의 무공을 극한으로 익히거나, 비슷한 수준의 사공을 익혀야 하는데 그런 흔적이 전혀 없었소.”
“그 말씀은 검무극이 흉수가 아니란 뜻이오?”
“그렇소.”
“확신하시오?”
“나를 믿지 못한다면 왜 이 먼 곳까지 부른 거요?”
“중요한 일이라 재차 확인한 것이니 기분 나빠 하지 마시오.”
말은 그러했지만 마불은 완전히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확실하오.”
“갑시다. 칠마존을 소집할 테니, 그 앞에서 이야기를 해주시오.”
“됐소. 당신이 가서 내 말을 전하시오. 어차피 같은 말이니.”
“그래도 되겠소?”
“알 될 것은 또 뭐겠소?”
마불은 풍천교주가 이번 중원행에 불만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굳이 더는 권하지 않았다.
“그럼 그럽시다.”
마불이 작별을 고하고 그곳을 떠나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는 풍천교주의 눈빛은 곱지 않았다.
그가 칠마존의 회합에 가지 않은 이유는 따로 있었다. 마불 하나 앞이 아니라 일곱 명 앞에서 거짓말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풍천교주가 다시 검무극이 있던 처소를 돌아보며 나직이 되뇌었다.
“이공자 대체 어떻게 섭혼마존을 죽였나?”
놀랍게도 그는 검무극이 섭혼마존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무슨 생각에서인지 풍천교주는 마불에게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오기 싫은 사람을 억지로 데려왔으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지를 넘어선,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선택이었다.
풍천교주는 마불이 사라진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그날 밤 혈천도마가 나를 찾아왔다. 칠마존 회합을 마치고 곧장 나를 찾은 것이다.
“일단은 자네 섭혼마존을 죽인 혐의에서 벗어났네.”
그가 놀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대체 어떻게 풍천교주의 눈을 피한 것인가?”
“저는 그날 밤새 어르신과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까? 제가 저지른 일이 아니니까요.”
혈천도마가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자네는…… 승천하는 용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틀림없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일들이 가능할 리가 없지.”
“용은 아직 멀었습니다. 이제 미꾸라지에서 뱀 정도 되었지요.”
“그럼 자네가 될 용은 대체 어떤 용이기에 뱀이 이 정도인가?”
내가 피식 웃자 혈천도마가 경고하듯 말했다.
“하나 긴장을 풀긴 일러. 칠마존 중에는 풍천교주의 말을 믿지 않는 이들도 있으니까. 특히 가장 친하다는 마불이 가장 믿지 않는 눈치더군. 친하다는 말을 말지.”
“어르신.”
“왜?”
“혹시라도 마불처럼 딴마음이 생기시면 제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러자 혈천도마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가?”
“그냥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웃고 있다가 서로 칼을 겨누는 순간이 오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싶어서요. 그러니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있거나, 아니다 싶은 것 있으면 바로 말씀해 주십시오. 괜히 참아서 화를 쌓지 마시고요. 지금까지 보신 거로 봐선, 제가 부족한 부분들은 제법 현명하게 대처하지 않았습니까? 절대 제가 어떻게 나올 거라 단정 짓지 마시고 꼭 말씀해 주십시오.”
잠시 나를 빤히 쳐다보던 혈천도마가 입을 열었다.
“이공자.”
“네.”
생각지도 못한 말이 혈천도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반대되는 경우가 생기면 어쩔 텐가? 자네가 봐서 내가 너무 못마땅하고 부족해 보이면? 내가 자네의 그 새로운 마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면? 지금은 괜찮고 좋아 보이는데, 볼수록 낡고 구태의연하고 지겨운 사람처럼 느껴지면? 그때 가서 매력이 하나도 없어지면 그땐 어찌할 텐가?”
혈천도마가 뜨거운 눈빛으로 덧붙여 물었다.
“나도 제거할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