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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62화 (62/214)

제62회 주기 싫은 걸 주십시오.

의외였다.

혈천도마가 자신도 죽일 거냐고 물어올 줄은 몰랐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잠시 고민하던 나의 대답은 이것이었다.

“제 마도는 객잔의 탁자를 부수지 않을뿐더러, 친구를 죽이지도 않습니다.”

순간 혈천도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잠시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가 나직이 물었다.

“내가 자네 친구인가?”

“네.”

굳이 부연하지 않아도 일반적인 친구의 뜻으로 한 말이 아님을 그는 알 것이다.

“그땐 어쩔 거냐고요? 저도 편하게 말씀드릴 겁니다. 눈치 보지 않고, 어르신 배려하지 않고, 그냥 말씀드릴 겁니다. 이러이러해서 마음에 안 듭니다. 너무 구태의연하십니다! 너무 지겹습니다. 예전 그 매력 다 어디 갔습니까? 찾아내십시오! 그렇게 머리 맞대고 어떻게 하면 서로 마음에 들지 방법을 찾을 겁니다.”

“방법을 못 찾으면? 그래도 내가 바뀌지 않으면?”

“노력했는데도 안 바뀌면 할 수 없죠. 지난 추억 뜯어먹으며 가야죠. 한데 노력조차 안 하신다? 그럼 한판 붙어야죠. 누가 잘못하든, 뭐가 불만이든 서로 두들겨 패면 속이 좀 풀리지 않겠습니까?”

잠시 나를 응시하던 혈천도마가 큰 소리로 웃었다.

“하하하하.”

그를 만난 이래 가장 통쾌한 웃음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웃다가 갑자기 웃음을 뚝 그친 그가 내게 말했다.

“전에 자네에게 했던 말 중에서 바꿔야 할 말이 있네.”

“뭡니까?”

“내 인생에 불운만이 가득했다는 말……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네.”

이 순간 나는 분명히 들었다.

그의 마음의 문이 조금 더 열리는 소리를.

나는 앞으로도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일 것이다. 이 문이 열리는 소리를 자주, 여러 사람에게서 듣는 것이 내가 성장하는 순간이고, 그것은 구화마공만큼이나 내게 중요한 무기가 될 것이다. 화무기여, 지금 너는 어떤 소리를 듣고 있느냐?

* * *

혈천도마도 떠난 늦은 밤, 뜻밖의 방문자가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풍천교주였다.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자네에게 할 말이 있어서 왔네.”

“들어오시지요.”

“긴히 할 말이니, 이리로 가세.”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서 우린 다른 공간에 와 있었다. 섭혼마존이 여러 번 썼던 바로 그 마공이었다. 혈교 계열의 이 마공을 그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풍천교주가 나를 쳐다보며 의미심장하게 물었다.

“어떤가? 이 무공, 낯익지 않은가?”

풍천교주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니 솔직히 말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처음 접하는 무공입니다.”

“아닐 텐데? 섭혼마존과 싸울 때 이 공간을 보지 않았나?”

“무슨 말씀이신지요.”

그러자 풍천교주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자넨 이 공간에서 섭혼마존을 죽였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딱 잡아뗐지만, 그는 확신에 찬 주장을 계속 펼쳤다.

“섭혼술을 펼친 공간에서 죽었기에 주화입마로 죽은 것처럼 보였지. 내 눈을 속일 순 없네.”

“증거라도 있으십니까?”

“증거는 없네. 어떻게 했는지 짐작도 안 되고. 한데 분명 자네가 죽인 것만은 확실해.”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자네가 읽히지 않아서.”

나는 내심 놀랐다. 결코 풍천교주를 무시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런 이유를 내가 섭혼마존을 죽였다고 믿을 줄은 몰랐다. 이 믿음은 자신의 감을 믿는 자신감에서 나온 것이다.

“섭혼마존은 자네가 죽였네. 나 역시 자네를 읽지 못하니, 나도 죽을 수 있겠지.”

“누구보다 현명하신 분께서 이런 오판을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정말 정확히 나를 파악하고 있었다.

“자넬 자극하려는 것 아니니 긴장 풀게. 난 섭혼마존처럼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으니까.”

게다가 자기 실력을 과신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오해십니다.”

그는 내 말을 무시한 채 자기 말을 계속했다.

“섭혼의 사술이 통하지 않은 이유는 한 가지겠지. 구화마공을 전수받았겠지.”

“만약 그렇게 확신하신다면 왜 마존들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가 마존들 몰래 나에게 구화마공을 전수했다고 알리면 난리가 났을 텐데요. 특히 마불과는 친분이 깊다고 들었습니다만.”

“무림에 친구가 어디 있나? 그때그때 필요해서 만나는 거지. 마불도 마찬가지일걸?”

“그럼 제게는 뭐가 필요하신 뭡니까?”

“이번 건은 내 호의일세. 오늘 찾아온 것은 내 호의를 잊지 말라고 생색 내려고 왔고.”

이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풍천교주와 칠마존 사이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아니면 애초에 그들은 내가 생각한 것보다 그리 가깝지 않은 관계였거나.

“한 가지는 확실히 짚고 넘어가시죠. 아직까진 교주님은 제게 호의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뭐?”

“칠마존에게 말하지 않을 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한 것이겠죠. 증거가 없으니까요. 칠마존들에게 가서 이렇게 말할 겁니까? 내가 이공자를 읽어낼 수 없어서 흉수는 바로 이공자요! 자존심 때문에라도 그렇게 말씀 못 하시죠.”

“적어도 자네일지도 모르겠다는 심증은 전할 수 있겠지.”

“그럼 오히려 제게 유리하겠지요. 저놈 실력이 섭혼마존을 죽일 정도라고? 교주가 구화마공을 이미 전수했을 수도 있다고? 증거가 없어서 확신할 수는 없지만, 왠지 함부로 대할 수는 없고. 앞으로 제가 국면을 휘어잡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오히려 저를 방해하셨습니다.”

“뭣이?”

풍천교주는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는지 뭐라 반박하지 못했다.

“호의를 베푸시면 기꺼이 받겠습니다. 대신 진짜 호의를 베푸세요.”

잠깐 수세에 몰렸지만 그렇다고 풍천교주는 당황하지 않았다. 불리한 상황에서는 절대 어떤 결정도 내려선 안 된다는 인생의 가르침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보세.”

말이 끝나는 순간 주위가 바뀌었고 그는 곧장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그에게서 음모의 냄새보다는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으니까.

‘우리 교주님은 제 발로 찾아와서 이렇게 호의를 베푸시려 하는구나.’

* * *

천마신교에서 제공해준 화려하게 꾸며진 큰 방에는 풍천교주와 신물들, 그리고 족쇄 사내만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나?”

음뢰종 앞에서 석상처럼 앉아 있던 족쇄 사내가 풍천교주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 병신새끼야, 그걸 왜 내게 묻나?”

풍천교주에게 이런 욕을 한다는 것은 사지가 찢겨 죽을죄였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하나 폈다.

“이 방에 자네밖에 없는데, 그럼 누구에게 묻나?”

“네 뒤에 서 있는 사신에게 물어라. 네가 언제 뒈질지.”

풍천교주가 손가락을 하나 더 폈다.

“물어보니 사신이 이렇게 대답하네. 자네가 죽고 난 후에 내가 죽을 테니, 아쉽게도 자넨 내 죽음을 보지 못할 거라고.”

“오래 살아서 좋겠다, 돼지 새끼야.”

남자의 욕설에 세 번째 손가락을 펴며 풍천교주는 기분 좋게 웃었다.

“이제 두 번 남았네!”

남자가 풍천교주에게 할 수 있는 욕설이나 반말은 하루에 다섯 번으로 정해져 있었다.

물론 풍천교주가 욕을 들을 때 기뻐하는 이상 취향을 지녀서가 아니다. 이 족쇄를 찬 남자가 누구보다 뛰어난 후각을 지녀서도 아니었다.

풍천교주가 도를 넘은 무례에도 남자를 살려두는 이유는 그가 누구보다 총명한 머리를 지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몰랐다. 이 남자가 이렇게 머리가 좋은 사람일 줄은.

하지만 한 방에서 오래 지내면서 알게 되었다. 남자의 진가는 후각을 맡는 능력이 아니라, 그의 뛰어난 판단력과 총명함이라는 것을.

그가 풍천교의 군사보다 더 똑똑하다는 것을 알게 된 날, 그날부터 풍천교의 진짜 군사는 족쇄 남자가 되었다.

욕을 들어가며 조언을 들었다. 그의 조언은 대부분 정확했고, 시간이 지나 이득으로 돌아왔다.

풍천교주는 남자에게 고통을 줘서 고분고분하게 만들려 하지 않았다. 족쇄 남자는 삶에 큰 미련이 없었고, 그렇게 압박을 가한다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삶에 미련이 없는 남자였지만, 자결은 하지 않았다. 언젠가 풍천교주가 그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끝내 그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나?”

“너 같으면 좋겠냐?”

풍천교주가 네 번째 손가락을 펴는 것을 보며 남자는 족쇄를 손에 들고 흔들어댔다. 철렁거리는 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풍천교주가 손가락을 한 번 튕기자 주위가 어두워졌다가 밝아지면서 장소가 바뀌었다. 그곳은 푸른 들판이었다.

풍천교주는 그곳에서 남자의 만년한철 족쇄를 풀어주었다. 족쇄를 풀 수 있는 열쇠는 풍천교주가 목에 걸고 다녔다.

족쇄가 풀리자 남자의 표정도 풀어졌다.

자유가 된 남자는 눈 내리는 날의 강아지처럼, 여기저기 정신없이 뛰어다니다가 하늘을 보고 벌러덩 드러누웠다.

풍천교주가 와서 누워있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이 대가리만 큰 교주 놈아, 저리 안 비켜? 하늘 가리잖아!”

“가짜 하늘이다.”

풍천교주가 마지막 다섯 번째 손가락을 폈다.

다섯 번의 기회를 다 쓰자 남자의 말투가 공손하게 바뀌었다.

“교주님, 저는 그 가짜가 너무 그립습니다. 비켜주시지요.”

마치 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일순간 태도가 바뀌었다.

풍천교주가 옆으로 비켜서며 물었다.

“자네 조언대로 이공자에게 호의를 표했네. 한데 더 구체적인 호의를 요구하더군.”

남자는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치렁치렁 흘러내린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그의 눈빛은 더없이 맑았다.

“정말 이공자가 후계자가 될까?”

“이공자가 섭혼마존을 죽였다면서요?”

“확실해.”

“그런 사람이 후계자가 안 되면 누가 되겠습니까? 이제 고작 스무 살 남짓한 청년이 섭혼마존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대단한 실력이긴 한데…….”

“두렵습니까? 이공자가 교주님도 죽일까 봐?”

다른 누군가가 이 말을 했다면 그 자리에서 목이 날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 무섭다면 거짓말이고. 마존을 죽이는 놈이 누군들 못 죽이겠나?”

언젠가부터 풍천교주는 족쇄 남자와는 허심탄회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공자를 잡아야 할 이유는 또 있습니다.”

“뭔가?”

“과연 천마신교 교주가 섭혼마존을 죽인 것이 이공자임을 모르고 있을까요?”

“알고 있다?”

“당연히 알고 있을 겁니다. 당대 천마는 비범한 사람입니다. 꿈도 큰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지금까지 왜 조용히 있는 것 같습니까?”

“왜 그런데?”

“생각을 하십시오! 밥만 축내지 마시고!”

“방금 욕 아니었나?”

“아니었습니다. 목청이 컸을 뿐.”

“조심하게.”

“그러지요. 생각하시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싫네. 생각은 자네가 하게. 내가 생각까지 한다면 자네가 살아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남자는 풍천교주를 바라보며 노골적으로 짜증이 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나오는 말은 정중했다.

“비범한 사람이 침묵할 때는 뭔가 한방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중원일통?”

“거기까진 모르지요. 어쨌든 이번 일은 천마가 시킨 일이거나, 혹은 알고서도 모른 척한 일이 틀림없습니다. 섭혼마존은 팔마존 중 무림맹에서 가장 까다롭게 여기는 인물이었습니다. 중원인들이 교주님을 겁내듯이 말이죠. 한데도 아들이 섭혼마존을 죽이도록 허락했다? 이건 천마가 팔마존을 하나씩 교체하려고 마음먹은 겁니다. 팔마존을 자기 수족으로 바꾼 후, 천마가 어딜 칠 것 같습니까?”

“우리다?”

“당대 천마는 우릴 등 뒤에 두고 무림맹과 전쟁을 하진 않을 겁니다. 우릴 선봉으로 내몰거나, 아니면 없애고 전쟁을 시작하겠죠.”

“젠장!”

“천마신교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 바람을 못 느끼면 뒈지는 겁니다. 섭혼마존은 다른 세상에만 처박혀 있다 이 바람을 못 느껴서 죽은 거죠. 우린 팔마존이란 벽 뒤에 숨어서 바람을 피하느냐, 천마라는 벽 뒤로 숨느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자네 생각은 천마다?”

“천마 쪽이 이깁니다.”

“이유는?”

“검우진, 그 대단한 사람이 승산 없는 싸움을 시작했을 리 없으니까요. 그러니 무조건 이공자에게 붙으십시오. 우선 선물부터 안겨서 그의 환심을 사십시오.”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뭘 줘야 할까?”

“제일 주기 싫은 걸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가 삽니다. 자, 조언은 이제 그만!”

누워있던 사내가 소리쳤다.

“그만 방해하고 물러나십시오!”

이 공간만이 남자가 유일하게 자유를 느끼는 곳이었기에 가짜로 만들어진 하늘을 바라보면서 고함을 질렀다.

“아아아아아아!”

답답했던 마음을 이렇게라도 풀려는 남자와는 달리 풍천교주는 뒷짐을 진 채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잠시 후 뭘 줄지를 결정한 풍천교주가 남자에게 말했다.

“여기까지!”

만들어진 공간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당황한 남자가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안 됩니다! 제발! 조금만 더! 이 빌어먹을 새끼야! 안 된다고!”

규칙까지 어긴 애타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푸른 들판과 함께 남자의 자유도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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