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66화 (66/214)

제66회 다 얻거나, 다 날리거나.

풍천교주의 표정에 아쉬움이 한가득했다.

정황상 족쇄 남자가 내가 고른 신물을 그냥 주라고 전음을 보낸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저 남자가 풍천교주의 결정에 끼어들었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자네가 고른 것이 뭔지 알고는 있나?”

“잘 모르겠지만 확 끌려서요.”

내가 고른 것은 쇠로 만들어진 계란형의 작은 구체였다.

물론 나는 이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있다. 무기도 아니고, 보석도 아니다. 이 알처럼 생긴 것 안에 든 것이 중요했다.

풍천교주가 구체를 들어서 아래쪽을 만졌다. 그러자 철컥하면서 알이 열렸다.

순간 강렬하면서도 묵직한 약향이 확 풍겨 나왔다. 안에 든 것은 붉은색의 영단이었다.

혈신단(血神丹).

풍천교는 물론이고 새외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알려진 영약이었다.

“혈신단이라네. 들어본 적 있나?”

“네, 정말 귀한 영약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귀하다는 말로는 부족하지.”

“이렇게 귀한 것을 왜 복용하지 않으셨습니까?”

“미래를 위해 아껴둔 것이네.”

“그 미래가 저였나 봅니다.”

설마 이 많은 신물 중에서 하필 이걸 고를 줄은 몰랐을 것이다.

풍천교주는 다시 족쇄 사내를 쳐다보았다. 그때 나는 고개 숙인 족쇄 사내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린다는 것을 보았다. 신안술로 시력이 좋아졌기에 눈으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전음을 보내는 것이 확실하구나.’

다시 말해서 풍천교주가 저 사내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틀림없었다. 아니, 적어도 의논은 하고 있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지만, 나는 모른 척했다. 일단 혈신단이 중요했으니까.

그들에게 시간을 줄 겸, 나는 모른 척 돌아서서 다른 신물을 구경했다. 혈신단 다음으로 가지고 싶은 것들이 보였다. 가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이후 풍천교주의 선택과 행보에 달려 있었다.

잠시 후, 의논을 끝낸 풍천교주가 십 년은 늙어 보이는 얼굴로 힘든 결정을 내렸다.

“좋네. 자네에게 혈신단을 주겠네.”

“감사합니다.”

풍천교주가 여전히 혈신단을 손에 든 채 내게 물었다.

“이번에는 먼저 줄 수 없겠네. 신교에 계속 남는 방법을 말해주게.”

혈신단만큼은 선뜻 줄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방법은 바로 이겁니다.”

나는 풍천교주가 제지할 틈도 없이 그가 들고 있던 혈신단을 내 입에 넣어버렸다. 설마 그것을 먹어버릴 줄 몰랐던 풍천교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자네! 뭐 하는 짓인가?”

뒤늦게 버럭 고함을 내질렀지만 나는 곧장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약을 녹일 동안 호법을 서 주십시오.”

그리고는 눈을 감은 채 혈신단의 약효를 녹이기 시작했다. 그랬기에 풍천교주가 얼마나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보지 못했다.

* * *

검무극의 운기조식은 한 시진째 계속되고 있었다.

풍천교주와 족쇄 사내는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장 죽이겠다고 펄쩍 뛰는 풍천교주를 족쇄 사내가 진정시켰다. 운기를 방해하지 말자며 대화도 무조건 전음으로 해야 한다고 한 것도 족쇄 사내였다.

―하하하하하.

―젠장! 망할!

족쇄 사내는 전음으로 계속 웃고 있었다. 반면 풍천교주는 쉬지 않고 분통을 터뜨렸다.

―빌어먹을! 이 자식 당장 죽여버릴까?

―죽이시오. 죽이고 천마신교와 전쟁 한번 시원하게 하시오. 당신이 천마에게 산산조각이 나는 모습을 보고 싶소.

―젠장! 망할! 대체 이게 무슨 짓이지?

정말 자신이 보는 앞에서 그것을 먹어버릴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가 제시할 방법이 말도 안 되는 방법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먼저 복용한 것 아니겠나?

―죽이라니까요! 죽여요! 일장에 머리통을 박살 내 버리십시오.

풍천교주가 검무극에게 다가가서 손을 번쩍 들었다. 하지만 차마 머리통을 내리칠 수는 없었다.

―어휴, 젠장!

손을 내린 후 풍천교주가 음뢰종 옆으로 와서 주저앉았다. 족쇄 사내는 그 모습을 재밌다는 듯 즐겼다.

―빌어먹을!

―교주가 죽을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왜? 겁쟁이라서? 그래서냐!

―아뇨, 이공자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명석한 자입니다.

―뭘 보고?

―교주가 자신을 죽이지 못할 것까지 확신하고 있습니다. 이미 교주에 대한 파악이 끝났다는 거죠. 이런 자라면 제대로 된 답을 줄 겁니다.

―짐작 가는 바가 있나?

―원래는 몰랐는데, 혈신단을 먹는 것을 보니까 어떤 방법을 제시할지 알 것 같습니다.

―뭔데?

―나중에 운기조식을 마치면 직접 들으십시오.

―알려줘!

―교주님은 얼굴에 표가 나서 안 됩니다.

―소싯적에 도박해서 잃은 적이 없다!

―풍천교의 후계자 앞에서 실력을 발휘할 도박꾼은 없으니까요.

―흥!

풍천교주는 그나마 안도했다.

족쇄 사내가 친구에게 말하듯 편하게 풍천교주를 불렀다.

―교주야.

―어휴, 또 시작이네. 내가 네 친구냐!

―그냥 다 줘라. 다 줘도 되겠다.

―진심이냐?

―지금까지 이공자에 대해서는 날아든 정보만으로 판단했었지. 한데 오늘 직접 보니까 지금까지의 정보는 과소평가됐다.

―그게 네 눈에는 보이냐?

―보인다.

―난 왜 안 보이는데?

―욕심이 많아서 그렇다.

―젠장! 좋아, 그렇다고 치자. 욕심이 그득해서 내 눈을 다 가렸다고 치자. 그래서? 다 주면 나는?

―중원에서 살 수 있잖아. 그게 꿈이었잖아?

―날 중원에서 살게는 해준다더냐?

―살게 해줄 마음이 있으니 저렇게 덥석덥석 받아먹는 거잖아.

―약속을 안 지키면? 우린 거지처럼 깨진 쪽박이나 들고 동냥이나 다녀야 할 거다.

―걱정마라. 내가 먹여 살려주마.

―뭐?

―철그렁철그렁 이 족쇄 끌고 약이라도 팔 테니까.

―…….

풍천교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공자가 후계싸움에서 져서 죽으면?

―원래 운명을 걸고 누군가에게 투자한다는 게 그런 거잖아? 다 얻거나, 다 날리거나.

―너, 나를 파멸시키려고 이러는 거지?

―그걸 이제 알았어?

족쇄 사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기 어려운 표정이었다.

―교주야.

―반말하지 마라. 오늘 다섯 번 넘은 지 오래다.

―나는 너 이해한다.

―…….

―버려야 얻는다. 교주나 나나 버리지 않고도 다 가질 만큼 복이 많은 사람이 아니다. 그런 사람은 저기 앉아 있는 이공자 같은 사람이고.

―……젠장.

이윽고 검무극이 운기조식을 마쳤다.

눈을 뜬 검무극의 표정이 밝았다. 그러잖아도 맑은 그의 두 눈은 더욱 깊어져서 공력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내 깊은 두 눈은 보통 사람의 그것처럼 바뀌었다. 눈빛을 바꾸는 모습에 풍천교주가 흠칫 놀랐다.

‘대체 얼마나 공력이 깊으면?’

검무극은 자신 앞에서 감추는 것이 없었다. 마치 이러는 것 같았다.

내가 이렇게 강하니 믿고 따르시게나.

보여주는 강력함에 비해 검무극은 정중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포권하며 고마움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간도 크군. 영약을 훔치고 그 앞에서 운기조식을 하다니!”

“영약을 훔치다니요? 대가로 영약을 받은 거죠.”

“대가로? 무슨 뜻인가?”

“혈신단을 복용하기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교주님이 이곳에 머무르는 방법은 제가 이것을 먹는 거라고요.”

“그게 무슨 뜻인가?”

“내일 황천각에 오셔서 신고해 주십시오. 영약을 도둑맞았다고요.”

“!”

“영약을 찾을 때까지 이곳에 계셔도 될 겁니다.”

그제야 풍천교주는 검무극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한데 조사를 하면 도적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질 수도 있을 텐데.”

“그 조사를 하는 곳이 바로 제가 수장으로 있는 황천각입니다. 교주님이 목적을 이루실 때까지 최대한 천천히 수사를 진행할 겁니다.”

“아!”

풍천교주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천마신교의 내원에 도둑이 들었으니, 자신은 이곳을 떠나지 않아도 될 명분이 생긴 것이다.

또한, 사건조사를 검무극이 맡을 테니 자작극으로 들통날 일도 없었고 범인을 찾는 과정에서 일어날 불필요한 마찰도 없을 것이다.

“돌아가실 날짜를 정하는 것도 저와 교주님이 결정하게 될 겁니다.”

“아! 그런 뜻이 있었군.”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혈신단은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검무극이 그곳을 떠나자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에게 물었다.

“알고 있었나?”

“이공자가 혈신단을 먹는 순간 알았습니다.”

다시 족쇄 사내의 태도는 정중해졌다.

풍천교주가 혈신단을 보관했던 빈 껍데기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한데 이공자는 이게 혈신단이란 것을 미리 알았을까?”

“당연하지요.”

“알았다고?”

“설마 용기가 예쁘게 생겼다고 그것을 집어 들었겠습니까? 정말 그렇게 믿은 겁니까?”

“아니.”

하지만 풍천교주는 순간 그렇게 믿었다. 자신의 신물을 이공자가 속속들이 알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떻게 알았지?”

“이 정도 되는 인물이니까, 교주님이 선물을 주고 있는 것이지요.”

풍천교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족쇄 사내가 있어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또 한편으론 족쇄 사내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있었기에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혈신단은 너무 아까운데.”

또다시 아까워하기 시작하는 풍천교주였다. 오늘 밤 잠은 다 잤다.

“그가 방법을 제시해줘서 준 것이 아니라고 백번째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 퍼주고도 일이 잘 안 풀리면, 너 죽고 나도 죽는 거다.”

치렁치렁한 머리카락 사이에서 남자가 씩 웃었다.

“나 죽이고 꼭 죽는다고 약속한 겁니다.”

“닥쳐!”

풍천교주는 빈 용기에, 족쇄 사내는 음뢰종에, 그렇게 두 사람은 각자의 번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충격적인 소식이 교내를 강타했다.

풍천교주의 처소에 도적이 들어 신물을 도둑맞았다는 소식이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를 했다. 내원에 도둑이 들었다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지만, 모두가 궁금해한 것은 대체 어떤 신물을 도난당했느냐였다. 하지만 도난된 신물이 무엇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교내는 그 일로 떠들썩했지만, 정작 천마전의 분위기는 차분했다.

총군사 사마명이 이 사태를 꿰뚫어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풍천교주가 자작극을 벌이는 듯 보입니다. 본 각의 감시망에 따르면 풍천교주의 거처에 침입한 자가 없을뿐더러, 신물을 훔치려면 적어도 마존급 실력은 되어야 하는데, 제가 파악하기로 지금 그만한 실력자 중 풍천교주의 신물을 노릴만한 사람은 없습니다.”

사마명의 보고에 천마 검우진은 그의 말을 모두 믿었다.

“자작극을 벌이는 이유는?”

“아무래도 본교에 더 머물려는 것이겠지요. 신물을 찾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고집부릴 겁니다.”

“대체 왜 안 가겠다는 건가? 혹시 그 일 때문인가?”

“맞습니다. 이번 기회에 풍천교의 중원진출에 대해 담판을 짓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번 일 둘째가 개입했지?”

“네. 풍천교주가 이공자에게 남을 방법을 부탁한 것 같습니다. 이번 사건의 조사는 황천각에서 할 테니, 풍천교주는 한동안 본교에 머무를 수 있을 테고요.”

“제법 잔머리를 굴렸군.”

검우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풍천교주와 마존들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못합니다. 도착한 후 마존들과의 첫 회동 이후, 서로 만난 적이 단 한 차례도 없습니다. 그나마 친하다는 마불과 만난 것이 전부입니다.”

“이번 일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사마명이 차분히 대답했다.

“당분간은 모른 척 지켜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검우진은 잠시 숙고했고 사마명은 그가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사마명은 교주의 마음을 짐작했다.

결정이 곧장 떨어지지 않는 것은 역시 풍천교와의 일이기 때문이다. 교주는 풍천교의 중원진출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저렇게 고민하는 이유는 이공자가 개입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윽고 검우진이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하세.”

“네.”

정중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 나오려다가 사마명이 검우진에게 말했다.

“만약 풍천교주와 이공자가 손을 잡게 된다면, 마불은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아마 본격적으로 대공자를 끌어들이겠지요.”

사마명이 판단하기에 최근 이공자의 부각에도 대공자가 참고 있는 것은 교주의 눈치를 본 것이기도 하겠지만, 아직까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무극이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에 이어 풍천교주까지 손을 잡는다면, 더는 지켜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검우진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생각에 잠긴 검우진을 뒤로 한 채 사마명은 천천히 피의 길을 걸어 나갔다.

그는 궁금했다.

과연 교주는 어떤 결정을 내릴까? 대공자가 돌아와서 싸움판으로 뛰어드는 것을 과연 허락할까? 형제의 싸움을 어떻게든 말릴까?

모든 것은 천마의 뜻에 달려 있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