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0회 꼼꼼함의 차이가.
청선은 구배지례(九拜之禮)를 올리고 정식으로 풍천교주의 제자가 되었다.
그 소식은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서환진을 비롯한 교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그녀를 욕하는 이들보다 좋은 선택이었다며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명분이나 체면을 차리다 마공이 약한 상태로 마존 자리에 오르는 것보다, 차라리 풍천교주에게 제대로 배워 마존 자리에 오르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다. 역시 본교의 마인들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더 추구하는 이들이었다.
특히 반발이 심하리라 예상되었던 서환진의 귀술사들이 더욱 그녀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일제자 양도는 난감해졌다. 청선이 외부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으로 여론을 악화시키려던 계획이 틀어진 것이다.
이제 누가 후계자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자네가 보긴 어떻든가?”
풍천교주가 궁금해하는 대상은 청선이었다.
“사람은 교주가 잘 보지 않습니까? 자기 판단을 믿으십시오.”
“보기보단 강단이 있어 보이던데.”
“저도 비슷하게 봤습니다.”
“한번 키워볼 만하겠어.”
애초에 제자로 삼고 싶어서 삼은 것이 아니었다. 중원에 남을 빌미로 삼은 것인데, 막상 청선을 보자 그녀가 풍기는 묘한 악심이 마음에 끌렸다.
“나란 인간은 어쩔 수 없나 보네. 나쁜 년 보니까 끌려.”
“조심하십시오. 사부도 잡아먹을 야심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좋다는 거야.”
풍천교주가 씩 웃자 족쇄 사내도 옅게 웃었다.
“요즘 자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제가요?”
“욕도 잘 안 하고.”
무엇보다 시공이환술로 새로운 공간을 열어달라는 부탁을 며칠째 하지 않고 있었다.
“심심하시면 욕 좀 해드릴까요?”
“천만에! 지금이 좋아.”
하지만 내심 마음 한편에는 족쇄 사내의 욕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쪽 교주는 잠잠하네.”
아무래도 풍천교주는 천마가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이공자가 부친을 만나 이야기를 끝냈을 테니까요.”
“거기까지 신경 썼을까?”
“썼을 겁니다. 성공과 실패는 꼼꼼함의 차이에서 오는 법이죠.”
“자넨 왜 이리 이공자에게 호의적인가? 평가도 후하고. 돈이라도 받아 챙겼나?”
족쇄 사내가 고개를 들어 풍천교주를 쳐다보았다.
“그게 싫습니까?”
“싫네.”
“그럼 새외로 돌아가십시다. 이공자가 없는 곳으로 가면 호의를 보일 일도 없지 않겠습니까?”
풍천교주는 짜증을 내려다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얄밉긴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굳이 이곳까지 철그렁철그렁 족쇄에 묶어 데려온 사람도 자신이었으니까.
“말씀드렸죠? 교주님은 다 가질 만큼 복이 많은 분이 아니라고요.”
“젠장. 그 이야기 좀 그만! 박복하다는 얘길 왜 자꾸 하나?”
“진짜 박복한 길로 자꾸 방향을 틀려니 드리는 말씀이지요.”
“한마디를 안 지지.”
그때였다. 수하가 와서 새로운 사실을 보고했다.
“외원에 있는 우리 무인들에게 숙수들이 와서 요리를 해줬습니다.”
“숙수? 어느 숙수들이?”
“이공자가 보낸 숙수들이랍니다. 최고급 재료로 진수성찬을 차려주고 갔습니다.”
그 말에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를 쳐다보며 물었다.
“이건가? 자네가 말한 꼼꼼함의 차이란 것이?”
족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젊은 나이에 정말 대단합니다. 말은 했지만, 저도 이 정도까지 챙길 줄은 몰랐는데. 어쩌면…….”
“어쩌면?”
“마교에, 아니 무림에 불세출의 인물이 탄생하는 순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린 그 역사의 순간을 함께 하고 있고요.”
“고작 숙수를 보냈다고?”
“네. 도둑도 보내고 제자도 보내고 숙수도 보내고. 맞을 겁니다. 역사의 순간.”
격정적인 족쇄 사내와는 달리 풍천교주는 심드렁했다.
“그 역사의 순간에 난 신물을 다 빼앗기고 있지.”
이미 그런 이유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족쇄 사내는 담담하게 풍천교주를 위로했다.
“관점을 바꿔 보십시오. 교주님의 신물이 큰일을 하는 데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고요.”
“전에도 말했듯 그 큰일의 주인공이 내가 아니지 않나? 나는 누군가의 성공에 도구가 되고 싶은 생각이 없네.”
“주인공이 되려면 이공자처럼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공자처럼 노력해야 하고요.”
“나도 노력하잖아?”
“제게 일일이 다 물어보는 노력요?”
풍천교주는 반박하지 못했다. 요즘은 대부분의 일을 족쇄 사내에게 맡겨서 처리했으니까.
끝내 번민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풍천교주의 모습에 족쇄 사내의 표정과 어조가 바뀌었다.
“교주야.”
풍천교주는 이 순간 그의 반말이 너무나 반가웠다. 이러다 영영 반말 안 해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들 정도로, 그의 하대가 듣기 좋았다.
“나도 너 노력하는 것 안다.”
“내가 무슨 노력을 한다고. 자네 말이 맞네.”
“아니다. 욕심을 참아가며 신물을 내주는 것도 네 노력이다. 신물을 모아 온 것도 네 노력이고 지켜온 것도 노력이다. 욕심부리는 것도 네 노력임을 나는 잘 안다. 누군가 피투성이가 된 채 천라지망(天羅地網)을 빠져나오는 노력만큼이나 네 노력도 힘들다는 것, 나는 안다.”
풍천교주의 마음이 울컥했다.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준다는 것이 사람에게 이렇게나 위로가 된다는 것을 요즘에 와서야 많이 느낀다.
그렇다고 족쇄 사내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에, 애써 속마음을 숨기며 풍천교주가 버럭버럭했다.
“싫다! 내 신물 내주기 싫다! 망할 이공자, 오기만 해봐라. 당장 꺼지라고 할 거다. 꺼져라, 이공자! 내 호통에 귀청 나갈 테니 귀 막아. 알겠어?”
그때 밖에서 수하가 말했다.
“이공자가 도착했습니다.”
풍천교주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미친 이공자 같으니라고! 정말 이런 순간에 등장한다고?”
족쇄 사내가 오랜만에 소리 내서 웃었다. 그가 귀를 막으며 정중히 말했다.
“자, 전 준비됐습니다.”
* * *
“잘 오셨네. 이공자.”
풍천교주가 기분 좋은 얼굴로 나를 맞이했다.
신물 주는 날이면 손이 떨리는 것이 보였는데, 오늘은 좀 편안해 보였다. 포기하면 편하다는 진리라도 터득한 것일까?
잠시 후 수하가 술상을 내왔다.
“오늘은 같이 한잔하세.”
“좋습니다.”
“한잔 받게.”
나는 술을 받았다.
“자, 마시세.”
그와 기분 좋게 건배한 후 술을 마셨다. 물론 내 입에는 피독주가 물려 있었다.
“나를 믿는 모습을 보니 기쁘네.”
굳이 피독주를 뱉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였다.
“혹시 자네 피독주를 물고 있나?”
나는 알 수 있었다. 족쇄 사내가 전음을 보내 피독주를 물고 있다는 것을 알려줬음을. 역시 범상치 않은 사내다.
“네, 그렇습니다.”
나는 입에서 피독주를 뱉어냈다.
“맙소사! 언제 그걸 물었나?”
“술상 나올 때 물었습니다.”
“표가 전혀 안 났는데?”
“연습 많이 했습니다.”
“내가 주는 술에 피독주라니…… 정말 너무하는군.”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직 우리에게 사이는 없다고요. 교주님과 저 사이란 말은, 세상에 없는 말입니다.”
“오늘도 내 귀중한 신물을 가져가기 위해서 와 놓고도 그런 소린가?”
“이 난장판 속에서 사이가 생기려면 신물을 몇 개 가져가느냐로 결정될 문제는 아닐 겁니다.”
“지금 우리 사이엔 피독주만 덩그러니 있는 것처럼 말이지?”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어설픈 사이보다 이렇게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는 확실한 관계가 더 나을 겁니다.”
“정말 말로는 못 당하겠군. 누구처럼.”
“네?”
“아니네.”
나는 그 대상이 족쇄 사내임을 짐작했다.
풍천교주가 일어났다.
“자, 술맛도 떨어졌으니 신물이나 고르자고. 자, 어서 고르게.”
“감사합니다.”
신물을 고르기 전에 음뢰종으로 갔다.
“음뢰종을 한 번 더 보겠습니다. 봐도 봐도 멋집니다.”
사실 족쇄 사내를 가까이서 다시 싶어서였다.
음뢰종을 보다가 힐끗 남자를 쳐다보았다. 족쇄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화석처럼 앉아 있었다.
‘나를 도와주는 이유가 뭐요?’
나에게 전음을 보낼 수도 있는데, 그러지 않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가볍지 않은 사내다.
과연 이 사내와 대화를 나누게 될 날이 오게 될까? 그와 나의 운명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겨서 신물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것저것 둘러보는 것처럼 굴었지만, 이미 나는 가져갈 것을 정해두고 있었다.
“이것으로 고르겠습니다.”
이번에 내가 고른 신물은 두툼하게 말려 있던 붕대였다.
풍천교주가 인상을 굳혔다. 말 대신에 표정이 이렇게 욕했다.
젠장! 망할! 너는 어떻게 귀한 것들만 이렇게 빼가는 거냐?
“그게 뭔지는 알고 고른 것인가?”
물론 너무나 잘 알지만.
“모르겠습니다. 천이 감겨 있는 것이 뭔가 신비해 보였습니다.”
“그건…….”
풍천교주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치미는 화를 애써 가라앉힌 후 그것을 설명했다.
“극품천잠사(極品天蠶絲)라네. 검으로 내리쳐도 잘리지 않고 여러 겹을 감으면 검기나 검강조차 막는다고 알려진 천고의 보물이지. 팔이나 다리에 감아서 사용하거나 심장에 감아서 보호할 수도 있지. 그뿐만 아니네. 추위를 막아주는 효과에, 불에도 타지 않는다네. 무림에서 이 극품천잠사를 검기나 검강 없이 자를 수 있는 무기는 한 손에 꼽을 정도라네.”
그 손에 꼽을 병장기에 내가 차고 있는 흑마검도 포함되었다.
“제가 식견이 짧아 이렇게 귀한 것인지 미처 못 알아보았습니다.”
“못 알아보는데 왜 하필 이것을 골라? 대체 왜!”
“죄송합니다.”
풍천교주는 아까워하는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몇 번이나 한숨을 내쉬고는 그것을 내게 건넸다. 그의 손이 떨렸다.
“부디 잘 쓰게.”
“네, 감사합니다.”
놓지 않으려는 것을 억지로 빼앗듯 가져왔다.
나는 풍천교주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속마음이야 쓰리겠지만, 그는 항상 약속을 지키며 아낌없이 신물을 주었다.
내가 해준 일보다 과한 보상이지만, 이렇게 스스럼없이 받는 이유는 그의 꿈을 이뤄줄 생각이 있어서였다.
“교주님의 호의를 저는 절대 잊지 않을 겁니다.”
이럴 때는 배포 있는 모습을 보여도 좋으련만, 풍천교주는 못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어깨너머로 족쇄 사내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아까워하는데 교주가 신물을 순순히 내놨을 리는 없다. 앞서 혈신단도 그렇고, 이 극품천잠사도 그렇고. 족쇄 사내 덕분에 순조롭게 받은 것이 틀림없다.
내가 눈빛에 담아 보낸 마음은 이것이었다.
고맙소. 잊지 않겠소.
마치 알았다는 듯, 족쇄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화석으로 돌아갔다.
* * *
거처로 돌아온 나는 극품천잠사를 꺼냈다.
그것을 손목에 세 번 정도 감을 수 있을 길이로 풀어서 흑마검으로 잘랐다.
그냥도 잘리겠지만 깨끗하게 자르려고 내력을 주입해서 정성껏 잘랐다.
아버지의 천마검이나 내 흑마검과 같은 천고의 보검 앞에서야 천이지만, 다른 병장기들에게는 괴물이 되는 녀석이다.
나는 그것을 왼쪽 팔목에 세 겹으로 감았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것을 차고 있는 한 상대의 공격에 손이 잘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지금은 왼쪽 손목에만 감아둔 것으로 충분했다. 오른손은 흑마검이 막아줄 테니까. 이렇게 필요한 부분에만 집중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 그 어떤 보의나 호신구보다 좋은 점이다.
나는 나머지 극품천잠사를 흑마검의 손잡이에 감았다. 다음에 쓸 일이 있을 때 사용할 것이다.
이걸 내 몸에 칭칭 감고 어디론가 뛰어들 일이 없길 바랄 뿐이다. 그곳엔 지옥이 펼쳐질 테니까. 아니면 애초에 그곳이 지옥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