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75화 (75/214)

제75회 한잔 받겠습니다.

조춘배와 함께 내원의 마지막 경계선을 넘었다.

앞서 두 번이나 했던 신분 확인과 몸수색, 그리고 조춘배가 챙겨온 여러 식자재를 다시 검사했다.

조춘배는 바짝 얼어붙어 있었다. 내원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지키는 무인들의 기세가 강해지고 무서워졌기에 그는 제대로 숨도 쉬지 못했다.

그렇게 경계선을 벗어난 후에야 조춘배는 긴장을 풀었다.

“휴우, 살면서 이렇게 떨어본 적은 처음입니다.”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되오. 내가 있잖소?”

“그럼요, 각주님 아니시면 제가 여기까지 올 수나 있었겠습니까? 처음입니다, 내원은.”

우리가 향하고 있는 곳은 풍천교주가 기거하는 거처였다.

“내원의 첫인상이 어떻소?”

“무서워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습니다.”

“무서워할 것 없소. 이 넓은 곳에 주인장만큼 열심히 사는 사람 몇 안 됩니다.”

“어휴, 그런 말씀 마십시오.”

조춘배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기분 좋은 입꼬리는 손을 흔들 때마다 올라갔다.

“제가 무슨 복이 이리 많은지 이공자님이 제 주점을 찾아주시고, 그 덕분에 꿈에서도 못 뵐 분들에게 요리를 대접하고, 이렇게 내원까지 오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오늘 조춘배를 데려온 이유는 풍천교주와 술을 마실 때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기 위해서였는데, 사실은 그에게 내원 구경을 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언젠가 흘러가는 이야기로 천마신교 내원을 구경해 보고 싶다고 했는데, 오늘 그 바람을 이뤄주려는 것이다.

요즘 내 전속 숙수인 임 숙수는 다른 숙수들을 데리고 외원에서 대기 중인 풍천교 마인들에게 식사를 제공하고 있었기에, 조춘배를 데려올 명분은 충분했다.

“제가 전생에 공덕을 많이 쌓았나 봅니다.”

“우리 주인장께서 전생에 무림을 구하셨나 보오.”

“무림까진 못 구했어도 본교에 쳐들어온 무림맹 장로 하나쯤은 제가 쇠국자로 때려잡은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의 농담에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때 지나가던 내원의 무인들이 나를 보며 정중히 인사했다. 그 우락부락 무서운 무인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조춘배였다.

“막상 오니 좋으면서도 두렵습니다.”

“그래서 마가촌에 소지부를 세운 것이오. 다들 쉽게 오기가 어려운 곳이니. 그러니 주인장께서는 마가촌 사람들과 소지부를 잘 살펴보시다가 제게 전할 말이 있으면 꼭 전해주시오.”

“네, 그러겠습니다.”

그렇게 우린 풍천교주가 기거하는 거처에 도착했다.

“왔는가?”

풍천교주가 반갑게 맞았다. 섭혼마존이 결정되면 내가 술을 대접하기로 약속했었다. 청선이 되어서 기분이 좋은 데다가 내가 신물까지 거절한 터라, 풍천교주의 기분은 아주 좋아 보였다.

“여긴 지난번 보셨던 풍류객잔 주인장입니다. 식은 요리를 가져와서 대접하는 것보단, 주인장이 해주는 따뜻한 요리를 먹고 싶어서 함께 왔습니다. 주인장, 부탁하오.”

“제 혼을 담아서 요리를 내놓겠습니다.”

“주인장 혼은 별로 먹고 싶지 않으니, 평소대로 만들어주시면 됩니다.”

“네!”

조춘배가 요리를 준비하는 사이 풍천교주와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마존을 제자로 삼으신 것 감축드립니다.”

“이공자가 아니었다면 결코 해낼 수 없는 일이었네. 고맙네.”

“교주님이 제자를 잘 가르친 덕분이지요.”

“우리 승리라고 하세.”

우린 이렇게 서로에게 덕담하며 승리를 즐겼다. 난 청선이 이길 줄 알았다. 풍천교주 정도 되는 고수가 손을 댄 이상,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승리를 얻어냈을 테니까. 일제자 양도가 변수를 만들어내기에는 상대가 너무 거물이었다.

잠시 후 조춘배가 만든 요리와 술이 나왔다.

음식을 맛본 풍천교주는 만족했다.

“숙수 실력이 괜찮네.”

“제가 그대로 전하겠습니다. 주인장이 좋아할 겁니다.”

우린 술과 요리를 즐겼다. 작정을 했는지 오늘 조춘배의 요리는 훌륭했다.

“아버지는 만나보셨습니까?”

“일간 뵙기로 했네.”

“만나시면 그걸 강조하십시오. 청선을 제자로 삼아서 이전 섭혼마존보다 더 강한 섭혼마존으로 키우겠다고요. 아버지에게는 그 점이 가장 중요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겠네. 말해줘서 고맙네.”

“별말씀을요.”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 나는 대수롭지 않게 풍천교주에게 말했다.

“저기 족쇄를 찬 분에게 한 잔 드려도 되겠습니까?”

순간 풍천교주가 흠칫 놀랐다.

“왜 저 사람에게 술을 주려는 건가?”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교주님 뵈러 올 때마다 여러 번 뵈었는데, 이런 기분 좋은 날 한 잔 주고 싶어서요.”

풍천교주가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은 아예 술을 입에 대지 못하네.”

“그렇습니까?”

그때였다. 족쇄 사내가 입을 열었다.

“한잔 받겠습니다.”

나도 깜짝 놀랐지만, 풍천교주는 더 놀랐다. 풍천교주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졌다. 그 감추지 못한 표정 변화로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족쇄 사내는 지금껏 한 번도 풍천교주의 술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그럼 한잔 드리죠.”

나는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풍천교주를 못 본 척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술잔과 술병을 들고 족쇄 사내에게로 갔다.

그의 앞에 앉아서 잔을 내밀었다.

그러자 고개를 숙이고 있던 족쇄 사내가 고개를 들더니 내 잔을 받았다.

나는 천천히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전음도 하지 않았다. 그저 술만 한잔 따라주었을 뿐이다.

족쇄 사내는 고개를 숙인 채 술을 받은 후, 그대로 술을 마셨다.

그리고 내게 술잔을 돌려주더니 이번에는 그가 술을 따라주었다.

나도 술을 받아서 시원하게 비웠다.

눈빛만 교환하던 우리가 드디어 술을 나눴다. 대화 한마디 없이 오직 술만 마신 것이었지만, 난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풍천교주는 정말 화가 난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말을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

“저 친구 장기가 뭔지 아나? 개처럼 냄새를 잘 맡는다네. 신물을 훔치러 오는 자의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지. 어떤가? 저 족쇄가 개 목줄 같아 보이지 않나? 하하하하.”

농담보다는 멸시에 가까운 말을 내뱉고는 풍천교주가 크게 웃었다.

방에는 그의 웃음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이어진 정적.

조금 전 그 말은 족쇄 사내를 무시하는 명백한 실언이었다. 나는 그 말을 재치 있게 받아서 실언을 만회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이건 그의 경솔함이 내게 준 일종의 선물이었으니까.

난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 그새 비어있는 그의 잔에도 술을 따라주었다.

“자, 한잔 드시지요.”

풍천교주가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족쇄 사내는 평소 모습처럼 고개를 숙인 채 화석처럼 굳었다.

그 모습을 쳐다보는 풍천교주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적어도 족쇄 사내와 관련해서 풍천교주는 감정을 숨기거나 다스리지 못했다. 혈천도마가 일화검존과 관련한 일에 그러듯이 말이다.

처음 예정했던 시간보다 일찍 나는 작별을 고하고 그곳을 나왔다.

족쇄 사내에게 술을 줬고, 그의 술을 마셨으니 나는 오늘 방문의 목적을 이뤘다.

* * *

검무극이 돌아간 후 분위기는 썰렁했다.

풍천교주는 자신이 잘못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빴다. 사과하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사과했다.

“아깐 미안했네.”

풍천교주의 사과에도 족쇄 사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다니까.”

다시 사과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자, 풍천교주는 결국 폭발했다.

“젠장!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난 네 주인이다. 넌 내 수하고. 내가 그런 말도 못 해? 지금껏 오냐 오냐 해줬더니 기고만장해졌지? 죽고 싶어? 그런 거야?”

풍천교주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의 마음의 소리는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너 지금 뭐 하는 거냐? 뭘 잘했다고 소리까지 질러대는 거냐?’

자책이 클수록 그의 목소리도 커졌다.

“지금껏 내가 얼마나 참아줬어? 반말 다섯 번? 어떤 미친놈이 수하에게 그딴 기회를 준단 말이야? 나니까! 나나 되니까 그랬던 것 아니냐? 그런 고마움도 모르고. 술 못 마신다면서? 죽어도 싫다면서? 그런데 이공자 술을 받아? 그것도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한다고 말을 한 상황에서?”

아무리 화가 났어도 여기까지만 냈어야 했다.

하지만 풍천교주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다.

다음 순간 그들이 있던 공간이 바뀌었다.

항상 열었던 푸른 하늘과 들판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핏물이 흐르고 시체가 널려 있는 전장의 한가운데였다.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들어와서 잠시도 있기 힘든 곳이었다.

“네게 딱 어울리는 곳이지. 앞으로 네가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될 거다!”

결정적으로 풍천교주가 분노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실수하고, 자신이 화내고.

족쇄 사내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술을 받았을 뿐인데.

‘아니, 잘못은 저놈이 먼저 했어. 그 술을 받지 말았어야지. 나더러 그랬지? 속 좁고 욕심 많다고? 알면서 왜 이러냐고.’

그때 자신의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족쇄 사내가 정중히 입을 열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합니다.”

너무나 정중해서 풍천교주의 가슴이 철렁했다.

두 번 다시 족쇄 사내의 허심탄회한 말을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풍천교주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거 아니다. 어서 사과해. 어서!’

마음속에서 소리쳤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도 쌓인 것이 많았다.

‘왜 내가 사과를 해? 내가 저놈 주인인데. 내가 풍천교주인데!’

그와 여러 번 다투기는 했지만 이렇게 큰 갈등을 겪은 적은 없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다른 누군가를 상대했다면 훨씬 냉철하게 대처했을 텐데. 마불이 상대였다면 겉으론 소리를 내지르면서도 속으로는 주판알을 튕겼을 텐데.

하지만 족쇄 사내에게는 그게 되지 않았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시산혈해가 풍천교주의 마음이었다. 고민하고 또 고민했지만 끝내 풍천교주는 사과하지 못했다.

그런 마음도 모르고 피 냄새를 맡은 늑대들의 울음소리만 야속하게 들려올 뿐이었다.

* * *

나는 혈천도마의 거처 마당 구석에서 서대룡의 수련을 지켜보았다.

기본기 수련을 지나 이제 초식을 연마하고 있었는데, 도를 휘두르는 솜씨가 예전과 달랐다.

내가 과거 풍류객잔에서 서대룡에게 말했다. 늦었지만 더 정성껏 배울 것이라고. 그래서 괜찮다고. 내 말은 현실이 되어 있었다.

그는 단 한 번의 움직임도 소홀히 넘기지 않았다. 게다가 똑똑한 사람이 무공도 잘 배운다고, 서대룡은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그때 혈천도마가 내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수하 고생하는 것 구경하러 왔나?”

“낮에도 고생 많이 하는 친구라서, 제게 그런 악취미는 없습니다.”

“그럼 이 시간에 웬일인가?”

“상의드릴 일이 있어 찾아뵈었습니다.”

“들어오게.”

수련하는 서대룡을 두고 나는 혈천도마의 거처로 들어갔다.

나는 벽장을 가득 채운 책들을 보며 감탄했다.

“책이 정말 많으십니다.”

“하고 싶은 뒷말 붙이게.”

“어울리지 않게요.”

“읽을 책이 아니라 장식용 책이다.”

“장식조차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놈아! 소싯적에 읽은 책을 다하면 교주가 죽인 사람만큼은 될 거다.”

“그럼 대학사가 되셨을 겁니다.”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고서 우린 본론을 이야기했다.

“상의할 내용이 뭔가?”

“족쇄를 풀어주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다.”

뜻밖의 말에 깜짝 놀란 혈천도마는 이렇게 오해했다.

“지하 뇌옥에서 풀어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긴 건가?”

“아닙니다. 제 주변에 한 명 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였다.

“그래, 다들 족쇄 하나씩은 차고 살지.”

“어르신 족쇄는 어떤 겁니까?”

“나야…….”

뭔가 나올 듯하다가 쏙 들어가며 혈천도마가 물었다.

“그 사람이 누군데?”

“풍천교주 수하입니다.”

“저런.”

벌써 난관이 느껴지는 표정이다.

“자네가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 괜찮은 사람일 테고. 그렇다는 말은 풍천교주도 그를 아끼고 있을 가능성이 크겠군.”

“정확하십니다.”

“자네가 그 사람을 원하는 걸 풍천교주도 아는가?”

“모릅니다.”

“그 수하와는 이야기가 됐나?”

“아뇨, 아직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마음은 통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음? 믿고 있다고? 이거야말로 첩첩산중이로군.”

족쇄 사내 일을 누구와 상의할까 떠올렸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른 사람이 바로 혈천도마였다. 그가 답을 주지 못하더라도 그와 대화하다 보면 내가 스스로 답을 찾아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혈천도마는 내게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어르신을 찾아뵌 것 아닙니까? 제게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방법 맡겨놨냐?”

나는 활짝 웃으며 당당하게 말했다.

“네! 맡겨둔 것 주십시오. 이 첩첩산중을 빠져나갈 길을 알려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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