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회 내가 살고자 마음먹으면.
나는 분명 혈천도마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있다.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있다면, 혈천도마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따로 있다.
“자네가 제일 잘하는 거로 해결해.”
“뭐죠?”
“풍천교주를 죽여버려.”
나는 농담이라 여겨 크게 웃었지만, 혈천도마는 진지했다.
“왜 웃어? 일거양득일 텐데. 풍천교주를 죽이면 감히 누구도 자네가 후계자가 되는 것에 반대하지 못할 거네. 덤으로 자네가 원하는 수하도 얻고.”
“풍천교주는 안 죽일 겁니다.”
“왜?”
“좋은 사람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죽여야 할 정도의 악인도 아니니까요.”
“그래서가 아니겠지. 자네의 보물창고라서 못 죽이는 것 아닌가?”
“뭐, 그 점도 있습니다만.”
“악당은 자네야.”
“인정합니다.”
“뭘 이리 쉽게 인정해?”
“착해 빠져서 악인들을 어찌 잡겠습니까? 제대로 된 악당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업보는 제가 지고 지옥으로 가겠습니다.”
“지옥은 나 같은 사람이 가야지. 자넨 꽃길을 걷게.”
진심으로 한 말임을 느꼈기에 내심 감격했다.
“자넨 이미 결정을 내렸지?”
“네.”
나는 총군사 사마명과의 대화를 끝으로 족쇄 사내를 내 사람으로 만들겠다 결심했다.
“풍천교주의 사람이니 함부로 뺏어올 수도 없는 일이고.”
“그렇죠.”
“그럼 그쪽에 맡겨야지. 그가 직접 자네에게 오게끔 하게.”
“족쇄까지 묶여 있는 사람인데요?”
“그 족쇄는 스스로 풀어야지. 그 정도 능력은 보여줘야 데려올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 아닌가?”
“맞는 말씀입니다만, 제가 그 사람에게 그 정도 확신을 줬는지 자신이 없습니다. 우린 아직 말 한마디 나눠보지 않았으니까요.”
그랬기에 혈천도마를 찾아왔다.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혈천도마만은 이런 내 마음을 이해해 주리라 믿었기 때문에.
과연 그는 미친놈이라 욕하는 대신 내가 생각지도 못한 답을 내놓았다.
“그럼 그에게 확신을 주게.”
“어떻게요?”
“그 사람에게 자네 사람들을 보여주게.”
“!”
“자네 사람들을 보여주면 자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겠지. 자네가 영입하려는 사람이 똑똑한 사람이라면, 자네 사람들만 봐도 자네에 대해 확신하게 될 거네. 아마 오지 않고서는 못 배길 거야.”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이런 조언을 해줄 줄이야. 그의 경험이 깃들어 있는 말이었기에 더욱 값진 조언이었다.
“왜 그렇게 보나?”
“최고의 조언이십니다.”
“솔직히 그 정도까진 아니잖아?”
“제 사람 중 일 번이 어르신이거든요. 그러니까 최고의 조언입니다.”
“그럼 최악의 조언인데?”
이번에는 내가 먼저 웃었고, 혈천도마가 따라 웃었다.
“날 보면 올 사람도 달아날 테니, 다른 사람들을 보여주게. 날 염두에 두고 한 말도 아니었고.”
나는 그에게 단호히 말했다.
“어르신도 가셔야 합니다.”
“싫다.”
“그 사람에게 어르신을 보여주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럼?”
“어르신께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누굴 골랐는지요.”
“왜?”
“그럼 제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왜?”
“저에 대한 확신을 드리고 싶어서요. 어르신과 더 친해지고 싶어서죠. 이것이야말로 일거양득이네요.”
혈천도마의 눈가가 꿈틀했다. 보통 화가 났을 때의 표정인데, 지금은 어색해서 보인 반응이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면전에서 잘도 하는구나.”
“가시죠.”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어차피 가실 것 미룰 것 있습니까? 시간 되는 사람 다 데리고 가죠. 서로에게 보여주겠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을 골랐는지. 그래서 제가 어떤 사람인지도.”
“역시 넌…… 미친놈이다.”
“하하하.”
그러니까요. 내 사람 하나 만들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혈천도마도, 족쇄 사내도, 다 해당하는 말이었다.
* * *
방 공기가 차가웠다.
풍천교주는 창밖을 쳐다보고 있었고, 족쇄 사내는 음뢰종을 쳐다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단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먼저 말하나 보자, 이 대결의 승자는 애초에 정해져 있었다. 족쇄 사내는 일 년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결국 풍천교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어렵게 한 사과였다. 그래서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기를 바랐는데, 족쇄 사내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괜찮습니다.”
자신은 고민하고 고민해서 한 사과였는데 너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서 풍천교주는 다시 발끈 화가 났다.
하지만 앞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자신이 화를 낼 상황이 아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시체가 쌓인 공간까지 연 것은 정말 큰 실수였다. 족쇄 사내가 푸른 하늘과 들판이 있는 공간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잘 알면서 말이다.
“최근에 신물을 이공자에게 주면서 나도 모르게 화가 많이 쌓였던 모양이야. 미안하네.”
풍천교주가 다시 사과했다.
“괜찮습니다.”
한결같은 어조의 대답에 풍천교주가 인상을 굳혔다. 이 표정을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그는 창밖을 계속 쳐다보았다.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온갖 잡념이 그를 괴롭혔다.
‘이게 다 속이 좁고 욕심이 많아서 이런 건가? 내가 소인배라서? 빌어먹을! 수하 마음 하나 못 얻는데, 무슨 중원진출을 하겠다고? 다른 수하들은 더 하겠지? 겉으론 충성을 맹세하지만, 속으론 나를 비웃고 있을지도 모르지.’
정말 이럴 때 운기조식이라도 했다간 주화입마에 걸릴 것이다.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한 마디.
“교주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풍천교주는 울컥 격동했다. 화를 내고 자책하고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선 두 번 다시 저 말을 듣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던 그였다.
“왜?”
“교주는 나를 족쇄로 붙잡아 두면서, 내 마음까지 붙잡으려고 하고 있다. 내가 전에 말했지? 교주나 나나 버리지 않고도 다 가질 만큼 복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고.”
“나는 새외 무림을 지배하는 사람이다! 내가 복이 없다면 누가 복이 있나?”
“새외 무림을 네 힘으로 차지했나? 교주야, 넌 그냥 물려받았을 뿐이다. 하긴, 그것도 복이라면 큰 복이지만, 내가 말하는 복은 그런 탯줄 타고 내려온 복을 말하는 게 아니다.”
“깐족깐족! 또 나를 열받게 하는구나!”
그러자 족쇄 사내는 입을 다물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말을 해도 열 받고, 말을 안 해도 열 받고.
풍천교주는 오늘 자신의 분노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공자 술은 왜 받은 거냐?”
“그냥.”
“그냥이 어디 있어? 이유를 말해라. 난 들을 자격이 있다.”
족쇄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풍천교주가 불쑥 물었다. 정말 이 질문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설마 이공자에게 가고 싶은 것은 아니지?”
족쇄 사내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순간 풍천교주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가겠다고? 정말?”
“아직 결정 내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이 그 말이지!”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풍천교주의 두 눈이 길게 찢어졌다.
“언제 작당한 거냐? 나 몰래 전음이라도 나눈 거냐?”
차라리 그랬다는 대답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전음은 한 번도 나누지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마음을 읽었다. 이공자는 나를 원하고 있다.”
“개소리 집어치워! 개소리 집어치우라고! 어디서 섭혼마존 흉내질이야? 마음을 읽긴 너희가 뭔 마음을 읽어?”
풍천교주는 앞서 검무극이 족쇄 사내에게 술을 따를 때 왜 그렇게 빈정이 상하고 화가 났는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자기 술은 안 받고 이공자 술을 받아서가 아니었다.
바로 이런 일을 예감한 것이다. 자신의 운명이, 자신의 본능이, 자신의 예감이 이런 개 같은 일을 읽은 것이다.
“내가 널 보낼 것 같아? 죽이면 죽였지 절대 안 보내!”
“그럼 지금 죽여야 할 거다.”
“뭐?”
“죽일 수 있을 때 죽이라고. 나중에는 못 죽일 거야.”
풍천교주의 온몸이 분노로 파르르 떨렸다.
족쇄 사내는 유일하게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죽인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빼앗긴다고?
“내가 못 죽인다 생각해서 이러는 거지? 날 개무시해서!”
풍천교주가 성큼성큼 족쇄 사내에게 걸어갔다.
그가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일장을 내리치면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족쇄 사내가 자신의 얼굴을 올려다봤다면, 어쩌면 내리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족쇄 사내는 그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도록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있었다.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 풍천교주는 일장을 내리치지 못했다.
“지금 못 죽이면 영원히 못 죽일 거다. 내가 살고자 마음먹으면 누구에게도 죽지 않을 거다. 그러니 죽일 거면 지금 죽여야 한다.”
허공에 치켜든 풍천교주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결국 그는 내리치지 못했다.
풍천교주가 천천히 손을 내렸다. 용암처럼 분출했던 분노는 어느새 차분히 가라앉았다.
“이 난장판 같은 세상에서 혼자만 달아나겠다고? 이렇게 쉽게? 천만에! 그렇게 두진 않을 거다.”
족쇄 사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잡한 감정으로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풍천교주는 아직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아직 가겠다고 결정 내린 것 아니라고 했지?”
“그래. 아직은 아니다.”
“널 안 빼앗기면 되잖아? 내가 이공자보다 더 뛰어난 사람이 되면 되잖아?”
족쇄 사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억지웃음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미소였다.
“그래, 앞으로도 이렇게 사는 거다.”
“이별할 것처럼 말하지 말라니까!”
“내게 집착하지 마라. 남이 가지려 하니까 더 커 보이는 거다.”
“닥치고! 내가 설득할 기회는 주고 누굴 모실지 결정해. 미운 정도 정이라는데, 그래도 한방에서 지낸 세월이 있으니 발버둥은 쳐볼 수 있겠지. 악착같이 널 잡아볼 거다.”
“그래도 안 될 거다. 네 상대가 아니다.”
풍천교주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이미 비어버린 신물이 말해주고 있었다.
“그냥은 못 보낸다. 가려면 나도 데리고 가라.”
족쇄 사내가 피식 웃었다. 둘이 다투고 난 후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그래. 나와 함께 이공자에게 가자.”
“뭐?”
설마 함께 가자고 할 줄은 몰랐기에 풍천교주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
“미친놈이냐?”
하지만 이어진 족쇄 사내의 말은 더 놀라웠다.
“이공자를 천마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면서? 나와 함께 가서 이공자를 천마로 만들어주자. 그럼 교주 꿈도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지금의 이공자라면 천마신교 옆에 풍천교 본단도 만들어줄 사람이다.”
“미친놈! 그걸 말이라고.”
그때 밖에서 수하가 말했다.
“이공자와 손님들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들?”
“네. 함께 온 일행이 다섯 명이나 있습니다.”
풍천교주가 탄식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 정말 무섭게 밀어붙이는구나.”
원래라면 짜증을 확 냈을 텐데, 풍천교주는 마음을 내려놓은 편한 얼굴이었다.
“자네 말이 맞아. 우린 이공자에 대한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해. 그러니 만날 이렇게 제 말 들은 호랑이처럼 나를 찾아오지.”
풍천교주가 수하에게 말했다.
“어서 모셔라. 그리고 술과 안주를 거하게 준비해라.”
“네!”
풍천교주가 족쇄 사내를 쳐다보았다. 평소와 다른 눈빛이었다.
“운명이 널 두고 담판 지으라는 가보다. 그래, 오늘 결정하자. 이공자가 죽든, 내가 죽든. 이공자에게 가든지, 내게 남든지. 오늘 다 결정하자. 대신 공평하게 판단해라.”
“그런 점에서는 오히려 이공자가 불리하다. 교주 말대로 정은 당신과 더 들었으니까.”
“좋아. 그럼 됐어.”
곧이어 검무극 일행이 안으로 들어섰다.
풍천교주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손님을 맞았다.
“하하하, 어서들 오시오!”
그렇게 그들의 운명을 바꿀 결전의 술자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