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79화 (79/214)

제79회 나도 그렇다.

술상을 엎으려 할 때 한 줄기 내력이 흘러와서 술상을 눌렀다.

고개를 들어보니 혈천도마였다.

그가 풍천교주에게 전음을 보냈다.

-참으시오. 상이 뒤집히면 보이는 건 상 바닥이 아니라 교주 바닥일 거요.

호의에서 나온 만류임을 느꼈기에 풍천교주는 상에서 손을 뗐다. 혈천도마의 눈빛이 말했다. 나도 어느 정도는 당신 이해한다고.

검무극이 족쇄 사내에게 다시 말했다.

“여기에 오래 묶여 계셨으니, 이 족쇄로 만든 물건을 가지고 싶을 것 같아서요.”

족쇄 사내는 사양하지 않고 한 가지 물건을 요구했다.

“그럼 부채 한 자루를 만들어주십시오.”

“그거면 됩니까?”

“충분합니다.”

나는 족쇄를 장호에게 맡겼다.

“이것을 본교 철방의 곽 장인에게 가져가서 만년한철 부챗살로 만들어진 부채를 만들고, 나머지로는 오늘 모인 사람 숫자만큼 비수 여덟 자루를 만들어 달라고 하게. 오늘 이 자리에 모인 것도 기념인데 한 자루씩 나눠 가지자.”

여덟 자루면 풍천교주와 족쇄 사내 것도 포함이었다.

그러자 서대룡이 말했다.

“다른 분들은 몰라도 이렇게 귀한 비수를 제가 받아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저도요.”

“저도 마찬가지 생각입니다.”

이안과 장호도 함께 나섰다.

“겸손 떨 시간에 죽도록 일해서 갚아라!”

내 농담에 모두 고개를 숙이며 황송해했다.

“정말 감사합니다.”

반면 풍천교주의 반응은 차가웠다.

“왜 내 것까지 챙겨주는 건가?”

“오늘을 기념하고 싶어섭니다.”

“나는 기념하고 싶지 않은데?”

그때 족쇄 사내가 전음을 보냈다.

-좋게 받아라. 나 때문에 흥분해 있지만, 교주는 중원진출이라는 대업도 이뤄야 하잖아?

풍천교주는 족쇄 사내가 너무나 고마웠다. 마지막까지 그는 노력하고 있었다.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일 뿐.

“농담이네, 나도 한 자루 주게. 저 족쇄는 내게도 의미 있는 것이니.”

“네, 그러지요.”

“그나저나 자넨 정말 대단하군. 만년한철로 만든 비수라면 중원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그걸 모두에게 나눠주다니.”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그 소중한 사람들이 나중에도 소중하다는 보장은 없지 않나?”

“나중을 보고 주는 선물이 아닙니다.”

“그럼?”

“지금까지 제게 해준 고마움으로 주는 선물입니다.”

검무극의 말에 풍천교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의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혈천도마가 그에게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아까 우리가 말하지 않았소? 승천하는 용들을 우리가 다룰 수 없다고. 그냥 마음 편히 놓아주는 게 상책일 거요.”

풍천교주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다.

터질 듯 말 듯 아슬아슬한 술자리는 계속 이어졌다.

한두 잔씩 주거니 받거니 마시다 보니 다들 취했다.

“서 조사관님. 그만 드세요. 이러다간 오늘도 사부님 바짓가랑이를 잡으시겠어요.”

이안의 만류에 서대룡이 큰소리를 쳤다.

“저는 멀쩡합니다!”

“벌써 혀 꼬부라진 소리가 나는데?”

“걱정 마시라니까요! 저 안 취했습니다.”

요즘 쌓인 게 많은지 서대룡이 술을 달리기 시작했고, 말리던 이안 역시 수련 내내 참았던 술을 홀짝홀짝 마시고 있었다.

검무극이 장호를 쳐다보았다. 장호가 두 사람은 자신이 잘 챙길 테니 걱정하지 말라는 눈빛을 보냈다.

“반대로 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자네가 취하고, 저 둘이 말리고.”

“그러게 말입니다.”

“주사 부릴 기미라도 보이면 그 큰 주먹으로 한 방씩 때려주게.”

“그러기도 쉽지 않습니다. 두 사람 다 요즘 기세가 보통이 아니라서요.”

물론 서대룡은 아직 멀었지만, 이안 같은 경우는 장호에게 무조건 진다고 볼 수만은 없었다. 방심하면 장호도 죽을 수 있는 무공이 비천검법이었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풍천교주가 마존들에게 말했다.

“세상이 거꾸로 되었소. 아랫것들 비위를 맞춰야 하는 세상이 되었으니.”

이안과 서대룡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 족쇄 사내를 두고 한 한탄이었다. 그러면서 검무극에게 물었다.

“이공자는 어떻게 생각하나? 자네가 교주가 되어도 수하들 눈치를 보면서 교를 운영할 작정인가?”

검무극은 대답 대신 풍천교주에게 물었다.

“일 못하는 사람들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그야 무능력하고 게을러서 아닌가?”

“그럴 수 있죠. 한데 더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뭔가?”

“눈치가 없는 겁니다.”

순간 풍천교주의 표정이 굳었다. 명백히 그의 말에 반하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다.

“수하들 눈치를 보라는 건가? 그래서 교가 제대로 굴러가겠는가? 그러다 정파 놈들에게 잡아먹히면?”

“눈치를 봐야 수하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지요. 눈치를 봐야 어떤 마음인지를 알지요. 전 억지 충성은 사절입니다.”

“그만!”

결국 풍천교주는 술상을 뒤집었다.

와장창 엎어진 술상에 모두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옷에 술과 요리가 옷에 묻었지만,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풍천교주가 소리쳤다.

“가식이다. 네게 잘 보이려고 하는 가식이라고. 말만 저러지 말 안 듣는 수하 있으면 몰래 끌고 가서 죽일 거다. 지금 수하 눈치 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네 눈치를 보고 있다. 널 데려가고 싶은 마음에 가식을 떨고 있다고.”

그의 말이 쩌렁쩌렁 울렸다. 남들 눈에는 급출수지만, 그에게는 쌓이고 쌓인 폭발이었다.

풍천교주는 몇 번이나 술상을 엎고 싶은 것을 참았다. 한데 검무극의 마지막 말 중에 억지 충성이란 말을 듣는 순간, 참았던 둑이 무너졌다.

족쇄 사내도, 혹은 다른 수하들도 모두 자신에게 억지 충성을 하고 있다고 자책하며 피해의식까지 느끼고 있던 요즘이었으니까.

그곳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뒤집힌 상 바닥을 보며 풍천교주는 이를 악물었다.

‘젠장! 어쩌라고? 이게 난데? 저딴 말 듣기 싫은 걸 어쩌라고! 젠장!’

엎어진 술상이 오늘의 길고 긴 결전의 끝을 알렸다.

“제가 무례했던 것 같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다시 찾아뵙고 사죄드리겠습니다.”

검무극의 사과와 함께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이 작별을 고했다.

마존들 앞에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다. 두 사람은 화를 내도 될 상황이었지만, 검무극을 생각해서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장호가 족쇄와 서대룡, 이안을 챙겨서 뒤따라 나왔다.

검무극은 미소로 모두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성립되지 않았을 자리였다.

그들은 입구에서 헤어졌다. 아무도 풍천교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장호와 서대룡, 이안은 셋이 한잔 더 하겠다고 풍류주점으로 갔다. 혈천도마와 일화검존은 피곤하다고 거처로 돌아갔고 검무극 역시 자신의 거처로 향했다.

* * *

족쇄 사내가 일어났다.

풍천교주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족쇄 사내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족쇄 사내가 방바닥에 쓰러진 술병 중 하나를 들어서 병 채로 마셨다. 그리고는 그 술병을 풍천교주에게 내밀었다. 풍천교주가 술병을 받아서 술을 마셨다.

어쩌면 진작부터 이렇게 나란히 마주 앉아서 술을 마셨어도 되었을 거다.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족쇄를 채워둔 것은 자네가 날 죽일까 두려웠네. 아니,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자넬 죽일까 봐 두려웠던 거지.”

“아닐 거다.”

“아니라고?”

“그냥 교주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뭐?”

“조금 전에 든 이유는 요즘에서야 한 생각들이지. 그전에는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잖아? 그냥 처음에 묶어 뒀으니까 계속 묶어 둔 거지. 타성에 젖어서.”

풍천교주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의 말처럼 아무 생각 없이 살아왔으니까. 이 족쇄가 이렇게 큰 문제였다는 것은 최근 이공자와 얽히고 나서부터 실감한 일이다.

그럼에도 족쇄 사내는 풍천교주를 위로했다.

“괜찮다. 다들 이렇게 산다.”

“괜찮긴 뭐가 괜찮나? 이것 때문에 네가 떠나려 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은 그래서가 아니야. 나를 족쇄에 묶어둬서가 아니다.”

“그럼 왜? 이공자와 함께라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나?”

“세상을 바꿀 꿈 같은 것 내겐 없다.”

“하면 왜? 도대체 왜!”

그 이유는 풍천교주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아무것도 못 맞춰서 간다.”

“뭐?”

“난 교주와 함께 새외에서 무림정세에 관련한 모든 것들을 처리했다.”

“그랬지.”

“그 과정에서 이공자와 관련해서는 하나도 못 맞췄다.”

“맞췄잖아? 그가 온다고 하니 오고. 신물을 요구할 것도 맞추고.”

족쇄 사내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아무 의미 없는 것들이고. 새외에서 천마신교와 관련한 보고가 많이 날아들었지. 그중 상당수가 이공자였어. 그때마다 이공자는 내 예상을 다 벗어났다. 마군주를 죽일 줄도 몰랐고, 섭혼마존을 죽일지도 몰랐지. 혈천도마를 끌어들일 줄은 더욱 몰랐고. 오늘 자신이 거느린 사람을 모두 데리고 올지도 몰랐어. 심지어 족쇄를 요구할지도 몰랐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그래, 맞아. 어쩌면 이공자가 나보다 더 똑똑해서 가면 박대받을 수도 있어. 뭐야? 군사라고 데려왔는데 보기보다 별로잖아? 하며 실망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래도 가서 봐야겠다. 대체 내가 왜 못 맞췄는지, 대체 어떤 인간이기에 이런 행보를 할 수 있는지 가서 봐야겠다. 난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족쇄 사내가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것은 처음이었다.

풍천교주는 알 수 있었다. 더는 그를 잡을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물었다.

“정말 나와는 안 되겠냐?”

“된다. 같이 가자.”

“이 미친놈아, 어딜 자꾸 같이 간단 말이냐! 수하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나? 새파란 이공자 밑으로 들어가는 나를 따르기나 하겠냐고!”

“그럼 다 버리고 가자.”

“뭐?”

“후계자에게 교주 자리 물려주고 나와 같이 가자. 새로운 삶을 사는 거다.”

풍천교주는 온갖 욕이 다 떠올랐다. 하지만 분노보다 앞서는 패배감이 있었다.

“풍천교주란 직함을 빼면 날 어디에 쓸까?”

“그 직함을 빼면 당신은 꽤 멋있는 사람이 될 거다. 평생 그 직함에 묶여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았지. 족쇄에 묶여 살아온 사람은 나만이 아니다.”

“뭐라는 거야.”

풍천교주가 들고 있던 술병을 던져 깨뜨렸다.

“교주직에서 스스로 물러나라고? 죽이고 싶은 사람을 말 한마디에 죽이고, 먹고 싶은 것 있으면 뭐든 먹을 수 있고, 온갖 미녀들을 불러올 수 있는 이 자리를?”

“그래서 행복하냐?”

“당연히 행복하지! 아니,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다고 치자. 그래서?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나면 행복해지나? 교주일 때도 없던 행복이 제 발로 걸어오냔 말이다.”

“그건 나도 모르지. 네가 찾아야지.”

“넌 날 파멸시키려 하고 있어. 날 불행하게 하려고 지랄발광을 하는 거다.”

“그럴지도 모르고.”

“젠장! 그냥 널 죽이고 끝내련다.”

“그건 늦었다.”

“뭐?”

“죽이려면 이공자가 오기 전에 죽였어야 했어. 이공자가 족쇄를 풀어줬는데 나를 죽여버린다면 당신에 대한 감정이 어떻게 되겠나? 자기 때문에 내가 죽었다고 자책할 거고, 그건 교주에 대한 미움으로 번질 거다. 그렇게 되면 교주는 영원히 새외에서 나오지 못해. 교주 당신을 위해서도 날 죽이면 안 돼.”

“젠장!”

“운명으로 받아들여라.”

“운명 같은 소리 하지 마라! 이렇게 사람 차별하는 운명이 어디에 있나?”

“교주, 당신은 풍천교주다. 새외의 모든 사람을 차별하며 군림하던 사람이다. 당신 입에서 어찌 차별이란 말이 나오나?”

한참을 말없이 있던 풍천교주가 툭 내뱉었다.

“내가 졌다. 그래, 말 잘하고 똑똑한 너희들에게 내가 졌다. 가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그가 족쇄 사내를 포기하는 순간이었다.

“가서 죽도록 고생해라. 날 떠난 오늘을 죽도록 후회해라. 가라, 가. 더러워서 보낸다.”

드디어 풍천교주는 진정으로 족쇄를 풀었다.

그때 족쇄 사내가 뭔가를 풍천교주 앞에 내려놓았다. 놀랍게도 그것은 족쇄를 풀 수 있는 열쇠와 똑같이 생긴 열쇠였다.

“이게 뭐야? 설마? 족쇄 열쇠냐?”

족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풍천교주는 경악했다. 앞서 목걸이에 달려 있던 열쇠는 검무극의 수하가 족쇄와 함께 챙겨갔는데, 같은 열쇠가 또 나온 것이다.

“몇 년 전에 위조해둔 거다.”

“대체 어떻게? 아니, 그럼 왜 달아나지 않았나?”

족쇄 사내는 그에 대해서 말해주지 않았다.

“족쇄를 풀 수 있었다면 나를 죽일 기회도 있었을 텐데? 왜 죽이지 않았지?”

“내가 당신에게 욕을 해대도 나를 죽이지 않은 이유와 비슷하겠지. 교주가 그랬지? 당신을 가장 많이 이해하고 알아주는 사람이 나라고. 나도 그렇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풍천교주의 마음이 울컥하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래서다. 이 이별이 이리 어렵고 아쉬운 이유가.

풍천교주는 열쇠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걸 이 순간에 내놓다니. 난 마지막까지 패배자군.”

그러자 족쇄 사내는 그 자리에서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가장 정중한 표정과 말로 인사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나를 죽이지 않은 것도, 이렇게 순순히 가라고 하는 것도. 적어도 내게 교주님은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달아날 수 있었는데도, 몇 번이나 죽고 싶었는데도 이렇게 살아온 것은, 어쩌면 교주님과 정이 들었기 때문일 겁니다. 오늘 나를 풀어준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다시 함께할 날을 고대하겠습니다, 교주님.”

족쇄 사내는 그렇게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풍천교주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꽝꽝 내리쳤다.

속이 후련하면서도 아쉽고, 그러면서도 허탈하고, 또 그러면서 기뻤다. 그리고 슬펐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