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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80화 (80/214)

제80회 언젠가 뻔한 사람이 되어도.

급결성된 삼인방은 풍류주점으로 향했다.

이안과 서대룡은 제법 취했었는데, 풍천교주가 술상을 뒤집는 순간 거짓말처럼 술이 다 깼다.

평생 살면서 풍천교주가 마존들 앞에서 술상을 뒤집는 모습을 언제 또 보겠는가? 손자들 무릎에 앉히고 이 할애비가 소싯적에 말이다로 시작하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가 하나 생긴 것이다.

이런 날 그냥 갈 수 없다는 것이 세 사람의 공통된 마음이었다.

마가촌으로 나가기 전에 장호는 만년한철을 본교 철방의 책임자이자 신수(神手)라 불리는 곽 방주에게 맡겼다.

곽 방주는 오랜만에 제대로 손 좀 풀겠다며 크게 기뻐했고, 평소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그였기에 세 사람은 자신들이 받는 선물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새삼 실감했다.

세 사람이 마가촌 풍류주점으로 들어섰다.

“오늘은 세 분만 오셨네요.”

조춘배가 반갑게 그들을 맞이했다.

“오늘부로 삼인방 결성되었습니다.”

서대룡의 농담에 이안이 덧붙여 말했다.

“조만간 사인방이 될 수도 있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조춘배에게 이안이 웃으며 말했다.

“술부터 주세요.”

세 사람이 항상 앉는 이 층 자리에 앉았다.

술자리는 장호의 농담 반 진담으로 시작되었다.

“저는 가끔 섭섭합니다.”

“왜요?”

“두 분은 심장이고 오른팔이지만, 저는 아직 아무것도 아니잖습니까?”

농담처럼 말했지만 섭섭함이 묻어났다.

그때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더 대단한 것 아닐까요?”

“무슨 말씀이시오?”

“말씀처럼 심장도 아니고, 오른팔도 아닌데 항상 도련님이 군주님을 부르잖아요?”

그런 관점에서는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는지 장호는 눈을 크게 떴다.

“오른팔이니 심장이니 하는 것은 장난이지만, 마군주님을 신뢰하는 도련님 마음은 진짜예요. 전 도련님 눈빛만 봐도 알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우리 이 무인께서는 사람 기분을 참 좋게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이안이 그런가요? 라고 물었고, 장호는 이안처럼 크게 네라고 대답했다. 세 사람이 함께 웃었다.

그러다 문득 이안은 족쇄 사내를 떠올렸다. 오늘 술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까 그분은 누굴까요?”

“범상치 않은 사람처럼 보였습니다.”

서대룡의 대답에 장호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아무리 중요하고 뛰어난 사람이라도, 함부로 굴게 두진 않을 겁니다.”

그는 족쇄 사내를 자신이 견제하겠다는 뜻을 명백히 밝혔다.

“아까 절 위해 나서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대룡이 고마움을 전했다. 아까 족쇄 사내가 누군가 오른팔을 차지하려고 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압박했을 때, 장호가 나서줬기 때문이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서 조사관을 위해서 나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저 진심입니다. 오른팔 후보로 줄 서 있다는 말.”

이안과 서대룡이 깜짝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장 군주님이시라…….”

서대룡이 뭔가 말을 하려는데 장호가 끊었다.

“양보할 수 있다는 말씀은 말아주십시오. 이공자님의 오른팔 자리는 그렇게 쉽게 양보할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뇨, 저는 장 군주님이시라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리려고 했었습니다.”

“네? 그럼 왜 아까는 양보한다고 했습니까?”

“거짓말이었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분위기가 제가 나설 상황이 아닌 것 같아서요. 솔직히는 양보 못 하죠. 절대 안 합니다.”

서대룡이 속마음을 드러냈다. 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안이나 장호에게 한 번쯤은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황천각의 제 선임이 전대 마군주에게 죽고 저는 복수할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마군들의 인적 사항을 다 외우면서 말이죠. 하지만 그뿐이었습니다. 나서서 재조사하자는 말을 하지 못하면서 그냥 마음으로만 복수심을 불태웠습니다.”

서대룡이 술을 마셨다. 장호가 말없이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한심하죠? 한데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었거든요. 아마 그때 임시조사관으로 각주님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전 평생 자책만 하면서 어둡고 우울하게 살아갔을 겁니다. 요즘 제가 각주님께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뭔지 아십니까? 왜 이리 밝아졌냐입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의 오른팔 자리를 쉽게 내놓겠습니까? 군주님이라도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저, 하루가 다르게 무공 실력도 늘고 있습니다.”

한풀이하듯 말을 쏟아낸 서대룡이 후하고 숨을 내쉬었다.

뭐라 한마디 할 것 같았던 장호는 그냥 기분 좋게 웃었다. 서대룡은 이 거친 사내가 가끔 이렇게 씩 웃는 웃음이 굉장히 낯설면서도 멋지다는 느낌을 받았다. 자신도 저런 느낌으로 웃고 싶다는 생각이 매번 들었으니까.

서대룡이 두 사람에게 말했다.

“이 모임, 앞으로도 계속하죠. 제발요!”

그날 늦게까지 세 사람은 여러 이야기를 나눴다.

검무극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고, 족쇄 사내에 관해서도 나눴다. 마존들에 대해서도, 그리고 각자 자기 일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그래서 왠지 이 자리에서는 뭐든 다 말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믿음이 드는 그런 기분 좋은 술자리였다. 검무극이 없어서 더 자유롭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었다.

“오늘 모이길 정말 잘했어요.”

이안이 술잔을 높이 들자 두 사람이 힘차게 건배했다.

술자리가 끝나고 바깥으로 나온 세 사람은 주점 앞에 나란히 섰다.

저 멀리 보이는 본단 건물을 보며 서대룡이 말했다.

“오늘 밤 여러 사람의 운명이 바뀌고 있겠죠? 아니면 이미 바뀌었거나.”

이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받았다.

“우린 그 운명들을 이끄는 운명을 믿으면 될 거예요.”

끝까지 이공자라고? 끝까지 진심인 사람들, 여기에도 있었다.

* * *

새벽 여명이 밝아올 무렵, 족쇄 사내가 나를 찾아왔다.

항상 음뢰종 옆에 족쇄를 차고 있던 모습만 보다가 내 거처에서 그를 보니 너무나 새로웠다.

나는 인사도 하기 전에 그의 발목부터 살폈다.

“발목은 괜찮으시오?”

“이공자는 끝까지 제 예상을 빗나가시네요.”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면서도 차분했다.

무슨 뜻이냐는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첫인사에 제 발목을 살펴볼 줄은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인사보다 더 중요하니까요.”

“제 발목은 괜찮습니다. 대단한 무공은 아니더라도, 전 무인이니까요.”

“어떤 무공인지 알려주실 수 있으시오? 정확히 실력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어서요.”

“한때 명인권법(名人拳法)을 칠 성까지 익혔습니다.”

“아, 좋은 권법이죠.”

“명인권법을 아십니까?”

“새외십구강(塞外十九强) 중 권사(拳師) 양성(羊成)의 독문무공 아닙니까?”

“어떻게 그것까지 아십니까?”

“제가 잡다한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행히 남자의 발목은 괜찮았다. 허리를 펴고 일어나는데 남자가 말했다.

“제 이름은 고월(孤月)입니다.”

드디어 족쇄 사내의 이름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고월. 쓸쓸하고 외롭게 떠 있는 달이란 뜻이 그의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고월. 좋은 이름이군요.”

“감사합니다.”

나와 고월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다. 치렁치렁 내려온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맑은 눈빛이 보였다. 처음에도 이 눈빛이 마주치면서 시작되었듯, 그와는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다.

“앞으로 내 군사가 되어 주시오.”

갑작스러울 수도 있는 내 제안에 고월은 차분하게 되물었다.

“나중에 이공자께서 천마가 되시면 저는 천마신교의 총군사가 될 겁니다. 그런 중책을 제게 맡기실 수 있습니까?”

“제가 천마가 되는 일에 큰 역할을 해냈을 때 맡게 되겠죠. 제가 맡기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올라서야 할 겁니다.”

정확하게 짚은 후에 농담을 덧붙였다.

“그래도 제 오른팔보다는 마교 총군사가 되는 것이 더 쉬울 겁니다.”

고월이 옅게 웃었다.

“아까 보니 그렇더군요.”

내 제안이 그랬듯 고월 역시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무릎을 꿇고 정식으로 예를 갖췄다.

“부족한 사람이지만 저를 군사로 받아주신다면 충성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제 목숨과 명예를 걸고 천지신명께 맹세합니다.”

나 역시 정식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무인 고월, 이 순간부터 그대를 나의 총군사로 삼겠습니다. 부디 나를 잘 이끌어 주시오.”

말보다 그의 맑은 눈빛에 담긴 열의를 믿는다. 그를 내 앞으로 데려온 나의 운명을 믿는다.

“이제부터 말씀은 편하게 해주십시오.”

“그러겠네.”

고월을 맞이하는 이 순간은 특별했다. 모든 것을 혼자 다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에서 벗어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우선은 자네 건강 회복부터 하세.”

“저는 괜찮습니다.”

“서두를 것 없어. 난 자네가 십 년 후, 이십 년 후, 삼십 년 후에도 계속 필요해. 그 기간 중 언젠가는 무림맹과 전쟁을 해야 할 수도 있고, 사도맹을 달래야 할 수도 있어. 반란이 일어날 수도 있고, 강적이 우릴 칠 수도 있지. 난 오늘 당장 내게 조언해줄 사람이 아니라 앞으로 그 모든 일을 함께해줄 사람을 구한 것이네.”

순간 고월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거기까지 생각하시다니. 정말 이공자님은 예측 불가하신 분입니다.”

“지금의 나는 예측 불가한 면이 있지만, 나중의 나는 너무나도 뻔한 사람이 될 수도 있어. 하지만 그때라고 수하들의 목숨이 귀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지금도 날 도와줘야 하지만, 그때도 날 도와줘야 하네. 우린 아주 먼 길을 가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이번에는 고월이 내게 물었다.

“제가 질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하게.”

“만약 앞으로 저보다 더 뛰어난 군사를 발견하시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의 부군사가 되어 나를 도와주게. 어떤가? 내 대답, 합격인가?”

“합격입니다.”

“섭섭하지 않겠나? 다른 사람을 데려와서 오늘부터 이 사람이 내 군사다, 이러면?”

“제가 이공자님을 찾아온 것은 친분을 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저와 친해지실 필요 없다는 뜻이죠. 그러니 그런 상황이 오면 무조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 당연한 선택도 못 한다? 그럼 군사로 있는 제가 병신이거나 나쁜 놈이겠지요. 단호하셔야 합니다. 공자님을 위해서도, 그리고 저를 위해서도요.”

고월은 확실히 통찰력이 남달랐다. 정에 사로잡히면 결국 관계를 더 크게 망치고 만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사실 이공자께서 워낙 똑똑하신 분이라, 과연 제가 필요할까 싶습니다.”

“사람이 언제나 똑똑할 수는 없잖아? 나도, 자네도 실수하겠지. 그래도 둘 다 동시에 실수할 가능성은 작지 않겠나? 그러니 같이 의논하면서 가자고.”

“대체 이공자께서는 어떤 인생을 살아오신 겁니까?”

그 인생을 어찌 그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나는 내 인생 대신 사마명이 내게 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

“내가 존경하는 군사님이 그러더군. 좋은 군사란 상대방 군사보다 더 똑똑한 군사다.”

“제 상대방은 무림맹 군사입니까? 아니면 그 존경하는 군사입니까?”

“둘 다.”

고월은 짐작할 것이다. 내가 말한 존경하는 군사가 본교 총군사 사마명이란 사실을. 그를 능가하는 군사가 되란 의미임을.

“앞으로 자네가 할 일이 있네. 정보 조직을 만들고, 중원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게. 통천각보다 뛰어난 조직을 목표로 한다.”

“네!”

“그 일이 이렇게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일인가?”

고월이 자신 있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래서 힘들게 절 데려오신 것 아닙니까?”

* * *

며칠이 지났다.

고월은 며칠 동안 몸을 추스르는 데 집중했다. 거처는 따로 마련하지 않았다. 당분간 내 거처의 객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첫날부터 쭉 그랬듯 오늘도 그는 일찍 일어나 있었다.

“일어났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잘 잤네.”

“아침부터 어떤 일이십니까?”

“자, 여기 이 돈부터 받게.”

내가 전장에서 찾은 전표 뭉치를 그에게 건넸다.

“조직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할 테니 이 돈을 쓰게.”

백만 냥이나 되는 거액임을 확인했음에도 그는 놀라지 않았다.

“제가 이 돈을 들고 달아나면 어쩌시려고요?”

“사람 풀어서 잡아 와야지.”

“그리고는요?”

“지금 만들고 있을 부채랑 비수 다시 녹여서 족쇄부터 채우고. 그리고는 가장 미운 사람에게 자넬 보여줘야지. 그때도 신비로운 느낌으로 잘 연기해야 해.”

이 농담만은 참기 어려웠는지 그가 살짝 소리 내서 웃었다.

“가세, 오늘은 나가서 밥 먹자고.”

그렇게 마가촌으로 나왔는데 풍류주점 이 층에 풍천교주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풍천교주가 벌써 두 번이나 혼자 왔다고 이곳 주인장이 기별해줬다네. 자넬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어떤가? 만나보겠나?”

그렇지 않다면 풍천교주가 이곳에 두 번이나 와서 밥을 먹을 리가 없다.

“네, 그러잖아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내 문제는 풀었지만, 아직 이들에게는 풀어야 할 문제가 남아 있었다. 그래, 등짐은 지고 싸워도 마음의 짐은 놓고 싸워야지.

우린 천천히 이 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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