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회 식구가 원수다.
일화검존이 모옥을 나왔을 때, 나는 쪼그리고 앉아 마당 한쪽에서 자라고 있는 꽃을 보고 있었다.
“신기하지?”
“벌써 이렇게나 자랐네요.”
“이 재미에 키우는 거지.”
“다음에는 저도 키워봐야겠습니다.”
“자넨 바빠서 쉽지 않을 거네.”
“역시 잡초밭 되겠죠? 제가 잘하는 것이나 해야겠습니다.”
쪼그려 있던 내가 몸을 일으켰다.
“오늘은 비무 친구로 왔습니다.”
“잘 왔네.”
일화검존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녀는 정말 이날을 오랫동안 기다린 듯 보였다.
“최근에 도움을 많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도움이랄 게 있나?”
사우종에게 정보를 흘릴 때도, 청선이 마존이 되는 데에도, 풍천교주를 찾아갈 때도. 말은 반만 넘어왔다고 하지만, 행동은 다 넘어온 사람 이상이었다.
“이건 감사의 마음으로 드리는 선물입니다.”
“뭔 선물씩이나?”
“제 성의니 받아주십시오.”
그녀가 내가 건넨 작은 상자를 열었다. 안에 든 것은 야명주였다. 예전에 황금장주 금아수에게 얻은 야명주 중 하나였다.
“이렇게 귀한 것을?”
“도마 어르신과 다른 겁니다.”
도마에게는 피독주를 줬었다. 내가 그 점을 강조하자 그게 우스웠는지 일화검존이 웃었다. 이렇게 혈천도마와 쌓인 악감정의 둑을 허물어뜨리는 거다. 돌을 하나씩 빼내다 보면 언젠가 상대가 보이게 되겠지.
“정말 아름답네.”
“생색을 좀 내자면 최상급 야명주입니다. 돈을 주고도 쉽게 구하기 어려운 물건이죠.”
“충분히 생색낼 만하네.”
“그래도 선배님의 아름다움에는 비할 바가 못 되죠.”
“늙은이 금칠이 너무 과하시네.”
일화검존이 손사래를 쳤지만, 얼굴은 활짝 웃고 있었다. 예전과 여러모로 많이 변하고 있지만, 외모 칭찬에 약한 이 부분만큼은 절대 변하지 않는 그녀였다.
“자넨 나중에 바람둥이가 될 소지가 충분해.”
“그렇게 살아보려고요. 신나게 놀러 다니면서 중원의 미녀들 다 만나면서 살 겁니다.”
“그런 인생이 되면야 좋겠지만…….”
천마가 되면 그럴 수 없다는 말이 생략되었다. 지금 돌아다니는 것과 천마가 되어 돌아다니는 것은 천지 차이일 테니까.
하긴, 아버지라고 안 답답해서 본교에만 계시겠는가? 한 걸음 한 걸음 행보에 무림의 운명이 달려 있기에 조심하시는 거겠지.
“차라리 지금 많이 놀러 다니게. 나중은 어려워.”
“그러겠습니다.”
“자, 그럼 오랜만에 몸 좀 풀어볼까?”
“고대했던 순간입니다.”
원래 아버지 다음 차례로 챙기고 싶은 사람은 혈천도마다.
하지만 아버지와 비무를 하고 나니, 몸이 근질거렸다. 한바탕 더 비무를 이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녀를 먼저 찾아온 것이다.
지난번 비무를 했을 때와 확실히 달랐다.
그녀의 미세한 움직임이 더 명확하게 느껴졌다. 감으로 느끼는 것에 앞서 일단 내 눈에 보였다.
아버지가 내게 그러했듯, 나는 예전 비무보다 더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내가 내 검을 제어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싸웠고 나 역시 최선을 다했다.
비무를 마쳤을 때, 일화검존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람을 드러냈다. 마지막 비장의 한 수를 제외하곤 모든 힘을 다 쏟았음에도, 그녀는 나를 제압하지 못한 것이다.
“지난번보다 실력이 더 늘었구나!”
“그사이 배움이 있었습니다.”
“정말 대단하네, 정말 대단해.”
그녀는 기뻐하면서도 한편으로 안타까워했다.
“이렇게 빨리 성장하면 조만간 내가 상대가 안 될 듯하네.”
“최선을 다한 것은 선배님과의 다음 비무를 위해서입니다.”
일화검존은 내 말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늙은 선배가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겠지?”
“감히 건방지게도 그렇습니다. 선배님과는 평생 비무 친구를 하고 싶습니다.”
내 솔직한 말에 일화검존의 눈빛에 감출 수 없는 감격이 스쳤다.
그녀를 오른쪽 날개로 만들려는 내 노력이기도 하다.
그곳을 떠나기 전에 비무와 관련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분명 내 실력이 앞서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녀에게 배울 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서 얻는 배움과는 또 다른 성격의 배움이 있었다.
무공 이야기로 시작해서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작별을 고할 때 그녀가 못내 아쉬워할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음으로 혈천도마의 거처로 갔다. 하지만 그는 집에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다 허탕을 치고 돌아왔을 때, 혈천도마는 내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밤에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나? 어디 여자라도 숨겨뒀어?”
보아하니 길이 엇갈린 모양이다.
“오셨으면 집안에 들어가서 기다리시지 왜 여기서 기다리십니까? 안에 고 군사도 있는데.”
“됐다.”
“이제 같은 식구인데 내외하십니까?”
“식구는 무슨. 식구가 제일 원수다.”
아직 고월과는 어색한 모양이다. 하긴 나에게나 편해졌지, 아직 이 까칠한 늙은이는 쉬이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어쩐 일이십니까?”
“소식을 알려주려고 왔다.”
“무슨 소식요?”
혈천도마가 심각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마불이 대공자를 데리러 떠났다.”
나는 놀라지 않았다. 예상한 행보였다. 풍천교주의 군사가 내게 왔다는 소식은 형을 지지하는 마존들에게도 들어갔을 테니까. 더는 그냥 볼 수 없겠다는 결정을 내렸을 것이다.
공교로운 일이지만 회귀 전 삶에서도 형은 이 무렵에 본교로 돌아왔었다. 일어날 일은 그대로 일어나는 것이다.
“마불은 항상 바쁘네요. 풍천교주 데리러 가랴, 형 데리러 가랴.”
“그 쪼그만 인간이 부지런하긴 엄청 부지런하거든. 대체 자네 형은 변방에서 뭘 하는 건가?”
“저도 모르죠.”
물론 나는 알고 있다. 형은 지금 자신의 인생을 바꿀 관문을 통과 중이다. 그 사실은 형이 오고 나서야 밝혀졌고, 그 이후 형은 완전히 후계자 자리를 굳히게 된다.
“어르신은 괜찮으십니까?”
“뭐가?”
“형을 지지하다가 제게 오신 거잖습니까? 형이 어르신을 원망할 수도 있습니다.”
“할 테면 하라지.”
이런 부분에서는 명확한 가치관을 지닌 혈천도마였다.
“더 나은 선택지가 있으면 그걸 선택해야지. 인간관계로 엮어 그걸 뭐라 하는 놈이 있으면 인생에 하등 도움 안 되는 것들이다.”
“옳으신 말씀입니다.”
“뭐가 옳아? 자넬 버릴 때도 똑같이 적용될 말인데.”
나는 혈천도마의 이 명쾌함이 참 좋다.
“자넨 괜찮나?”
“뭐가요?”
잠시 사이를 두고 혈천도마가 말했다.
“자네가 형을 죽여야 하는 상황이 오면 어쩔 텐가?”
“죽을 짓 하면 죽여야죠.”
“센 척하기는.”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래, 센 척 맞다. 혈육을 죽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내가 형보다 무공이 강하냐 마냐의 문제가 아니다. 형과의 싸움은 모든 심력을 다 쏟아야만 하는 싸움이다. 아까 혈천도마가 농담처럼 한 말이 맞다. 식구가 제일 원수다.
“맞습니다. 당연히 안 괜찮죠. 제가 냉혈한도 아니고, 형을 죽이는 일이 어찌 괜찮겠습니까? 쉽게 죽어줄 사람도 아니고요.”
나는 돌아서서 집안에다 소리쳤다.
“고 군사, 나와보게.”
고월이 집 밖으로 나왔다.
“오셨습니까?”
내게 인사한 후 고월은 혈천도마에게도 정중히 인사했다.
“마불이 형을 데리러 갔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나?”
고월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적이라면 모를까, 자기가 모시는 수장의 형이 적이 되었을 때는 군사는 신중할 수밖에 없으리라.
잠시 숙고하던 그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대공자의 생사는 공자님이 결정할 문제가 아닐 겁니다. 대공자가 스스로 결정하게 되겠죠.”
결국 형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그 운명이 결정될 거란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혈천도마는 아직 그를 신뢰하지 않았다.
“자네가 영입하고 싶어 해서 돕기는 했네만…….”
혈천도마가 천천히 다가가서 고월 앞에 섰다. 혈천도마가 고월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이자가 우릴 배신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우리’라는 표현이 귀에 들어왔다. 처음으로 혈천도마가 나에게 우리라는 표현을 썼다. 무심코 한 말이었겠지만, 내게는 의미가 컸다. 내 옆구리를 멍들 정도로 쿡쿡 찔러대며 협박하던 사람이 이제 우리가 된 것이다.
혈천도마의 압박에도 고월은 겁을 내지 않았다.
“마존께서는 어떻습니까? 공자님을 배신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으십니까?”
너도 배신할 수 있지 않냐는 물음에 혈천도마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보장 없지. 난 배신하고 싶을 때 배신할 거다.”
“그걸 막기 위해 제가 있는 겁니다.”
“그럼 넌! 너는 누가 막지?”
“저는 배신하지 않습니다.”
“그걸 어떻게 믿으라고?”
“공자님만 믿어주시면 됩니다.”
“내가 지켜보고 있다는 것, 잊지 마라.”
두 사람의 신경전을 말리지 않았다. 내 인생관이지 않나? 상처와 갈등을 키우지 말고, 드러내고 파헤치고 싸워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
혈천도마가 말을 해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교주는 자네와 대공자가 싸우지 않길 바랄 거다. 대공자의 죽음도, 자네의 죽음도 바라지 않지.”
혈천도마가 아버지에 대해서 잘 안다는 것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선을 긋고 아버지가 이만큼 자신을 생각한다고 자신할 만큼, 그는 아버지와 특별한 관계였던 것이 분명하다.
“저도 느끼고 있었습니다.”
회귀한 후, 아버지와 사냥을 하러 갔을 때 아버지는 지나가는 말로 형을 안고 갈 수 없느냐고 물었다. 그 물음에 속마음이 담겨 있었다.
“교주는 절대 돌아보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딱 하나 후회하는 게 그거다.”
만년한철 같은 마음에도 상처는 남는다.
“교주의 마음, 알고 있었다고 했나?”
“네.”
“그럼 됐다.”
그럼 됐다, 비무를 하고 나서 아버지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아버지의 그 말씀도, 혈천도마의 이 말도 묘하게 힘이 된다.
“내가 준비할 거라도 있나?”
“어르신께 드리는 부탁은 항상 한 가지죠.”
“뭔가?”
“화해하시는 거요.”
“무슨 화해? 자네 설마?”
혈천도마는 자신과 일화검존과의 화해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대공자가 오고 있는데 화해 타령이라니. 자넨 정말 미친놈이 틀림없어.”
혈천도마가 오죽 기가 막혔으면 고월에게 동의를 구했겠는가?
“자네 주인이 이런 미친놈이다.”
그러자 고월이 대답했다.
“저도 정상은 아니라서요.”
혈천도마가 쌍으로 미친 것들이라며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다시 혈천도마를 설득했다.
“형이 돌아오면 다른 마존들도 본격적으로 나설 텐데, 한쪽 날개로 싸울 수는 없잖습니까?”
“나도 그럼 좋겠네만, 지금까지 충분히 보지 않았나? 검존이 나만 보면 앙칼지게 쏴붙이는걸.”
“네, 충분히 봤습니다. 가면 갈수록 앙칼짐이 잦아드는걸요. 어르신을 노려보는 눈빛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있는 것을요.”
그런데도 혈천도마는 고개를 내저었다.
“우리의 화해는 무림일통보다 더 어려운 일이야. 나, 가네.”
돌아서 가는 혈천도마에게 내가 소리쳤다.
“무림일통은 안 해도 화해는 꼭 하셔야 합니다.”
혈천도마는 대답 없이 천천히 걸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난 바로 고월부터 챙겼다.
“자넨 괜찮나?”
“네. 괜찮습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게. 원래 성격이 고약한 늙은이라서.”
“신경은 써야지요. 공자님의 왼쪽 날개이신데. 제 걱정은 마십시오. 아시다시피 저도 쉬운 인생을 살아온 사람은 아니라서요.”
하지만 나는 안다. 그런 사람이라고 상처받지 않는 것은 아님을.
“알겠네. 그래도 내게 할 말이 있으면 꼭 해주게. 나도 속상한 일 있으면 자네에게 말할 테니까.”
“네. 꼭 그러겠습니다.”
“참, 오른쪽 날개 후보는 일화검존이라네. 참고하라고.”
“알겠습니다. 그럼 편히 주무십시오.”
그날은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지난 삶에서 형이 어떻게 나왔느냐는 생각할 필요가 없다.
형이 돌아오면 난 형을 볼 것이다. 지난 삶에서 난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이젠 똑똑히 그를 볼 것이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내 눈으로 볼 것이다. 내 기억 속의 그 모든 것들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 똑똑히 볼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이럴 때는 화무기가 도움이 된다.
형을 극복하지 못할 그릇이면 어차피 난 화무기에게 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