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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회귀-89화 (89/214)

제89회 난 잡은 물고기가 아니다.

형과 헤어진 후 이안을 만나러 갔다.

왜 갑자기 이안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을 보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이안은 오늘도 열심히 수련 중이었다.

만날 수련만 하는 이안이다.

그녀의 모습이 회귀 전 대법 재료를 모으던 나와 겹쳐 보였다. 오직 하나의 목표만을 향해 쉬지 않았던 내 모습이.

한참을 수련하던 그녀가 뒤늦게 내가 온 것을 알아차렸다.

“도련님! 언제 오셨어요?”

“아까.”

“만약 도련님이 자객이었다면?”

“한 이십 번은 죽었겠지?”

“아아!”

나는 검을 뽑아 들고 그녀 앞으로 나섰다.

“그 이십 번, 열아홉 번으로 줄여보자.”

내가 비천검법 시범을 보일 거라는 것을 알아차린 이안의 눈빛이 반짝였다.

“감사합니다!”

오랜만에 보이는 시범이었다. 나는 굳이 경지를 낮춰서 보여주지 않고 십일성의 경지 그대로 펼쳐 보였다.

십성 대성일 때와 지금과는 큰 차이가 있다. 물론 그녀는 나처럼 크게 느끼지는 못할 것이다. 그 차이를 얼마나 느끼느냐에 그녀의 성취가 달려 있었다.

내가 초식을 처음부터 끝까지 마쳤을 때 이안은 그 자리에 서서 골똘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이안이 어느 순간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는 것을.

나는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숨소리조차 죽이고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언제 무아지경에서 벗어날지 모를 일이니, 마냥 그냥 기다릴 수는 없는 일.

나는 천마호신공 수련을 시작했다. 그녀와 수련 궁합이 잘 맞는지 전에는 내가 무아지경에 빠졌었는데 오늘은 그녀가 빠졌다.

장장 여섯 시진이 지났을 때, 그녀가 무아지경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축하한다, 이안.

나는 마음속으로 그녀에게 축하를 보냈다. 여섯 시진이나 무아지경에 빠지는 일은 무인의 인생에서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캄캄해진 주위를 보자 이안은 어리둥절했다.

“도련님?”

“어땠냐? 첫 무아지경 소감이.”

“무아지경요? 설마 제가 무아지경에 빠졌었나요?”

“그래.”

“잠깐 멍하게 있었던 것 같은데요?”

“하긴 우리 인생 생각하면 여섯 시진, 잠깐이지.”

“여섯 시진이나 지났다고요?”

이안은 깜짝 놀랐다. 무아지경에서는 언제나 막 깨어났을 때가 제일 중요하다.

“당장 비천검법을 펼쳐봐라.”

“네.”

이안이 내 앞에서 비천검법을 펼쳤다.

과연 효과가 있었다.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그녀의 비천검법이 팔성의 경지에 올라선 것이다.

“도련님이 초식을 펼치는 것을 봤을 뿐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죠?”

“어떻게 긴. 네가 평소에 곰처럼 수련만 했으니 가능하지. 설마 내 시범만 봤다고 가능했겠느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네가 쌓아둔 그간의 노력이 이번 무아지경에서 싹 다 녹았다.”

“아!”

내가 가르치고, 무공 재능이 뛰어난 그녀가 죽도록 노력하고. 십일성에 이른 경지가 그녀에게 더 깊은 영감을 준 데다, 결정적으로 여섯 시진의 무아지경까지. 이 모든 것이 합쳐져서 만들어낸 기적 같은 성취였다.

“너무 좋아할 것 없다. 너도 알다시피 무공의 성취는 초반은 빠르다가 갈수록 더뎌지기 마련이다. 비천검법은 이제부터라 생각해라. 대성은 고사하고 팔성에서 구성까지 가는데도 평생 걸릴 수 있어.”

“평생 걸려서라도 꼭 대성 이룰 겁니다. 하늘이 제게 이렇게 귀한 인연을 내려주셨는데, 못 가면 너무 한심하고 억울할 거예요.”

동시에 그녀에게 신독정화술을 펼쳐줄 시점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부작용 없이 안전하게 신독정화술을 펼쳐주려면 내 무학의 경지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후는 그녀 경지가 중요하다. 무공이 약한 천하제일미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내가 생각한 적기는 그녀가 구성에 이르렀을 때 신독정화술을 펼쳐주려 했다. 비천검법 구성이면 어딜 가더라도 충분히 제 한 몸은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한데 오늘 그녀의 성취로 내가 생각했던 시기보다 훨씬 더 빨라질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십 번 죽을 거, 이제 두 번쯤 죽겠다.”

이안은 감격해서 그 자리에서 넙죽 절을 올렸다.

“감사합니다, 도련님.”

“우리 사이에 새삼스럽게.”

“대체 우리 사이가 뭔데요? 저는 일개 호위무인일 뿐이었는데. 대체 제게 왜 이렇게 잘해주시는 겁니까?”

네가 날 지키기 위해 몸을 날렸기에, 이 모든 이야기가 시작될 수 있었으니까.

“이안아.”

“네.”

“형을 만나고 돌아오는데 마음이 심란하더라. 그때 누구 생각이 난 줄 아느냐? 너다. 그래서 잘해준다.”

그녀는 감격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너 질문 다섯 번 중에 두 번 썼다.”

왜 잘해주시냐는 질문은 딱 다섯 번만 하기로 했었다.

“이제 세 번 남았다.”

“아껴 쓰겠습니다.”

“비천검법이 팔성에 이르렀으니 조심해서 사용해야 한다. 위력이 예전과는 완전히 다를 거다.”

“네, 도련님.”

“이안아. 미치도록 신나는 네게 이런 말 어울리지 않지만…… 너무 무공수련만 하는 인생을 살지는 마라.”

“네!”

이안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아, 이래서다.

이렇게 옆에서 고개를 끄덕여 주는 사람이니까.

똑똑하고 영리해서 자기 생각이 다 있을 텐데도, 너는 이렇게 웃으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사람이니까.

삶에서 꼭 한 명은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그런 사람이니까.

네 번이 아니라 백 번을 물어도 각기 다른 대답을 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니까.

힘내라, 이안. 구성까지 가자!

* * *

이안을 만나고 돌아왔을 때 혈천도마는 내 거처 주위에 멸천대도를 땅에 박아넣고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여기 계십니까?”

“여기서 처음 자넬 만났던 날을 떠올렸네.”

“형이 돌아오니 다 되돌리고 싶으세요?”

“내가 잡은 물고기가 아니란 것쯤은 알려줘야 할 것 같아서.”

그가 박혀 있던 멸천대도를 뽑더니 땅바닥에 길게 줄을 그었다.

“처음 자네를 만났을 때가 여기.”

혈천도마가 줄의 맨 처음 부분에 선을 그었다. 처음 나를 찾아온 그날도 이렇게 바닥에 줄을 그었다. 내 옆구리를 쿡쿡 찔러대면서.

“그리고 지금은 여기.”

그가 줄의 반 조금 넘은 부분에 새롭게 줄을 그었다.

“오! 절반이 넘었습니다!”

“간신히 넘었는데.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이 정도면 충분하죠.”

“충분해?”

“친구냐 적이냐에서도 친구고, 생(生)이냐 사(死)냐에서도 생일 테고. 누군가와 너무 가까우면 오히려 부담되지 않습니까? 저는 그 사람 끝까지 챙겨줄 자신이 없는데, 그 사람은 선을 넘어서 내 쪽으로 자꾸 들어오면요.”

내가 흑마검을 뽑아서 줄의 마지막 부근에 줄을 그었다.

“여기까지 오려면 자식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우리 아버지는 여기쯤이겠지만요.”

이번에는 혈천도마보다도 미치지 않는 곳에 다시 선이 그어졌다.

“넌 어찌 이렇게 말을 잘하냐? 밤새 준비해서 나오지? 오늘은 어떤 말을 어떻게 해야지, 밤새 외우지?”

“그런 말씀은 제가 찾아뵈었을 때 해주십시오. 이렇게 어르신께서 불쑥 찾아온 날 말고요.”

혈천도마는 못 이기겠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그가 날 찾아온 것은 형 때문이었다.

“대공자에 대해 알려줄 것이 있어서 왔네.”

“말씀하십시오.”

“아마 대공자가 처음으로 만나는 마존은 극악소마일 걸세. 알아서 대비하라고.”

실제로 그의 판단은 정확했다. 과거에 형을 가장 강력하게 지지했던 세 마존이 마불, 혈천도마, 그리고 극악소마였으니까.

회귀 전 인생에서 형은 후계자로 결정되는 미래 시점에 여러 잔인한 일을 저지른다. 형의 결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형에게 붙었던 마불이나 혈천도마, 그리고 극악소마까지. 그들의 영향이 컸다.

과연 형 역시 혈천도마나 일화검존처럼 운명이 바뀌게 될까? 그러려면 마불이나 극악소마의 운명까지 바뀌어야겠지?

“마불 다음으로 가까운 사람이 극악소마가 되겠군요.”

“원래는 나였는데, 이제 그 자리를 극악소마가 차지하게 되겠지. 아마 대공자는 날 빼고 다른 마존들을 모두 만날 거라 예상하네. 만나는 순서만 차이가 나겠지.”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극악소마도 보통 인물이 아니라네.”

“압니다.”

오죽하면 별호에 극악(極惡)이 붙었을까?

“대비해야지. 이대로 그냥 있을 생각인가?”

“네.”

“그냥 두겠다고?”

“저는 어르신과 검존 선배만 있으면 됩니다.”

“듣기 좋은 말이지만, 마존 다섯이 대공자 편이 되면 상대하기 어려울 거야.”

“왜 여섯이 아니고 다섯입니까?”

“풍천교주가 왔으니 섭혼마존도 자연스럽게 우리 편이 된 것 아닌가?”

“청선은 아직 젊고 야망이 커서 꼭 그렇다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오히려 형이 포섭하면 가장 포섭되기 쉬운 사람이죠.”

같은 편처럼 굴다가 등을 돌릴 수도 있었다. 형이 그녀를 세작으로 이용할 수도 있고. 가능성은 여러 가지다.

“섭혼마존은 저쪽 편이라도 상관없습니다. 만약 형에게 포섭되면 오히려 결정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역이용할 수도 있으니까요.”

“거기까지 생각하고 있었나?”

“해야죠. 물론 되도록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할 작정입니다.”

청선 때문이 아니라 풍천교주 때문이었다. 섭혼마존이 무난하게 그의 제자가 되어 잘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해서였다.

“그럼 상대가 여섯인데. 아무리 자네라도 이래선 힘들어. 아니, 내가 힘들어서 안 돼. 최소한 마존 중 한 명은 확실하게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야 하네.”

“누굴 말입니까?”

혈천도마는 누군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달싹거리려다 말았다.

“그건 똑똑한 자네가 결정해야지.”

그가 생각하는 우리 편이 있을 텐데, 자신이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내 판단을 믿는다는 것이기도 했고.

“대공자가 마존들을 전부 포섭하기 전에 어서 움직이게.”

“형은 극악소마 말고 다른 사람을 먼저 만날 겁니다.”

“딴 사람 누구?”

나는 혈천도마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

혈천도마는 그게 뭔 소리냐는 표정으로 눈을 껌벅였다.

“나라고?”

“네, 형은 어르신부터 찾아갈 겁니다.”

“그럴 리가? 내가 자네 편이 되었다는 걸 알고 있지 않나? 다른 마존에게는 다 가도 내게는 오지 않을 거네.”

“아뇨, 다른 마존에게는 안 가도 어르신에게는 꼭 갈 겁니다. 어르신 다음은 풍천교주일 테고요.”

내 확신에도 믿기지 않는지 혈천도마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가?”

“형은 아버지에게 보여주고 싶을 겁니다. 어르신이 제게 온 이유가 단지 자신이 부재했기 때문이란 것을요. 다른 마존들을 모두 거느리는 것보다 어르신 한 사람을 도로 빼앗아 가는 것이 아버지에게 더 큰 점수를 딸 것으로 생각할 겁니다.”

혈천도마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아니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은 모양이다.

혈천도마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렇다면 자넨 불안하지 않나? 내가 다시 대공자에게 가버릴까 봐.”

잠시 사이를 두고 내가 말했다.

“불안합니다.”

“정말?”

나는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럼요. 그날 형 보셨잖습니까? 일화검존께 선물 주는 것요. 선물이 대단한 게 아니라 그 꼼꼼함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어르신께는 더 대단한 것을 드리려 할 겁니다.”

혈천도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형에 대해서는 알 만큼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저는 어르신께서 안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형이 어떤 좋은 제안을 해오든, 제게 꼭 말씀해 주십시오. 더 나은 제안으로 붙잡을 겁니다.”

“의리로 남으라고 하지는 않네?”

“우리가 스무 살 애들은 아니잖습니까?”

“자넨 맞잖아?”

“아, 그렇죠. 대신에 저는 애늙은이니까요.”

나는 멋쩍게 웃었다.

“적어도 어르신은 못 데리고 갈 겁니다.”

“왜?”

“제 모든 것을 다 걸어서라도, 더 나은 제안을 할 테니까요. 만에 하나라도 어떤 약점을 잡아서 협박이 들어오면 그것도 알려주셔야 합니다.”

“그건 또 왜?”

“제가 반드시 해결해 드릴 테니까요. 할 수 있냐고 물으신다면, 지금까지 충분히 보여드렸다고 생각합니다. 그 약점을 제게 보이기 싫다는 생각이 드시면, 우린 볼 것 못 볼 것 다 본 사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잠시 말없이 나를 응시하던 혈천도마가 깊이 박혀 있던 멸천대도를 거두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두고 보세. 자네 말처럼 나부터 찾아오는지.”

떠나려던 그가 바닥에 그어진 선을 힐끗 내려다보았다.

“이 선은 어디로 움직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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