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2회 말의 힘이 무섭다.
무공수련을 마치고 거처로 돌아왔을 때, 고월은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고 풍천교주는 마당에 서서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달라진 그였다. 그는 확실히 어딘지 모르게 차분해졌다.
“언제 오셨습니까?”
“자네의 그 귀하디귀한 군사 보러 왔으니, 많이 기다렸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네.”
“귀하디귀한 군사 보셔서 좋으셨습니까?”
“혼만 났다네.”
“저런. 안 되겠군요. 감히 교주님을 혼내다니요. 제가 그 군사 혼쭐을 내주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말게. 자네 그 말이 더 얄미우니까.”
내가 씩 웃었고 그 역시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자네 보고 가려고 일부러 기다렸네.”
“무슨 일이십니까?”
“대공자가 날 찾아왔네. 나는 절대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자네에게 직접 말해주고 싶어서 기다렸다네.”
“아, 정말 감동입니다.”
“그래, 감동해야지. 대공자가 얼마나 좋은 조건을 제시했는데. 나는 그걸 다 거부했네.”
“감사합니다, 교주님.”
어떤 조건을 제시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럼 나, 가네. 이럴 땐 미적거리면 안 된다고 하더군. 감동이 반감된다고.”
“네. 맞습니다. 이런 말씀까지 안 하셔야 완벽했는데.”
“그런가?”
풍천교주가 멋쩍게 웃었다. 나는 이 사람과 참 인연이 깊었다. 우린 앞으로도 더 깊은 인연을 맺어가리란 생각이 든다.
딱!
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나와 풍천교주는 푸른 들판 가운데에 서 있었다.
풍천교주는 깜짝 놀랐다.
“시공이환술을 완성했구나!”
풍천교주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곧게 솟은 나무며 바람에 흔들리는 풀이며, 저 멀리 산으로 이어진 구불구불한 시골길까지.
“완벽하네.”
“훌륭한 무공을 전수해주신 덕분입니다.”
“아마 시공이환술이란 무공이 생긴 이래, 이렇게 빨리 완성한 사람은 자네가 처음일 걸세. 자넨 모를 거야. 내가 이 공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얼마나 오랜 세월을 수련했는지…….”
“제가 운이 좋았습니다.”
“겸손하지 말게. 이 일 만큼은 정말 겸손할 필요가 없네.”
풍천교주는 최근의 풍파를 겪으면서 자신이 성장했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내 손을 덥석 붙잡은 것이다.
“축하하네.”
진심 어린 축하에 나도 진심을 전했다.
“감사합니다. 적어도 이 공간 내에서는 교주님이 제 스승이십니다.”
“자넨 정말…….”
풍천교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
“말씀하시게.”
“시공이환술에서 흐르는 시간과 현실의 시간을 다르게 할 수 있습니까? 바깥 시간보다 천천히 흐르게 할 수 있냐는 말씀입니다.”
풍천교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예전이라면 난 틀림없이 이랬을 거야. 에끼 이놈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지금은요?”
“에끼 이놈아,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나는 웃었고, 풍천교주도 따라 웃으며 그에 대해 말해주었다.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다네. 실제로 연구도 해 보고. 한데 불가능했네. 공간을 완성하고도 몇 년은 지나서 생각했었는데, 자넨 완성하자마자 그런 생각을 하는군.”
일단 전해져오는 비법 같은 것은 없다는 의미였다. 이 일을 이루려면 내 무학의 경지가 더 상승했을 때, 다시 연구하고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말씀 잘 알겠습니다. 자, 그럼 공간을 풀겠습니다.”
“그 전에 잠깐! 아까 그 말 진심인가? 이곳에서만큼은 나를 스승으로 생각한다는 말.”
“진심입니다.”
“그럼 이 공간 가끔 열어주시게. 살면서 언제 자네 스승 노릇을 해 볼 기회가 있겠나?”
“네, 그러겠습니다.”
풍천교주의 얼굴이 밝아지는 것을 보며 딱! 손가락을 튕겼고 우린 현실로 돌아왔다.
“그럼 조심히 가십시오.”
저만치 걸어가던 풍천교주가 갑자기 돌아서며 소리쳤다.
“난 끝까지 이공자네!”
그리고는 부끄럽다는 듯 어둠 속으로 총총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풍천교주에게 저런 귀여운 면이 있다니? 하긴 저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니,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이겠지.
* * *
마불은 화가 많이 났다.
앞서 검무양이 혈천도마를 찾아간 것까진 이해가 되었다. 어쨌든 그와는 풀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한데 풍천교주까지 찾아간 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분명 자신과 풍천교주가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똑똑히 봤으면서도 그를 찾아간 것이다.
“대공자.”
“네, 어르신.”
“풍천교주를 만나셨다고요?”
“네. 저희 쪽으로 끌어들이려고 만났습니다.”
너무나 태연하게 대답해서 뭐라 화를 낼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게다가 이유까지 확실히 있었다.
“풍천교주를 끌어들이면 섭혼마존까지 자연스럽게 우리 편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만났습니다.”
“풍천교주가 뭐라고 하던가요?”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검무양은 더는 그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마불은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검무양의 기분이 상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전할지 고민했다. 결국, 한발 양보해서 사과로 시작했다.
“운남쌍괴를 부른 것은 제 실수였습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무래도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 자들을 대공자 일에 끌어들여선 안 되었는데.”
“저를 위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시 공자께선 마음이 넓으십니다.”
“대신 한 가지는 바로 잡아야겠지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운남쌍괴를 제 일에 끌어들이셨다고 하셨는데, 엄밀히 따지자면 제 일이 아니라 어르신 일이죠.”
검무양은 명확히 선을 그었다. 후계자가 되기 위한 길을 걸어가는 자신이었다. 운남쌍괴와 같은 쓰레기들과는 털끝만큼의 연관도 남기고 싶지 않았다.
마불은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그런 기색을 감추었다.
“아, 잠시 실언했습니다. 맞습니다, 운남쌍괴 일은 어디까지나 제 일이죠.”
“물론 절 위해 그들을 불렀다는 것은 잘 압니다. 그러니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검무양이 먼저 미소를 지었고 마불도 함께 웃었다.
웃으며 대화가 마무리되었지만, 마불의 마음은 개운하지 않았다. 뭔가 문제가 있는데, 그것이 자신의 문제인지 검무양의 문제인지 알 수 없어서 더 그랬다.
마불이 검무양의 처소를 떠나 자신의 거처로 돌아오는데, 누군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검무극이었다.
“이공자?”
“어르신을 뵙고 싶어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를? 왜?”
마불은 내심 긴장했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것은 아닐까 싶어 은밀히 내력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검무극이 찾아온 이유는 아주 뜻밖이었다.
“저자에 가서 저와 한잔하시겠습니까?”
“나와 술을? 그것도 저자에서?”
다른 날이었다면 둘이 쑥덕댄다고 소문낼 일 있나 싶어 단박에 거절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마불은 평소의 마불이 아니었다.
“그러지. 못할 것도 없지.”
검무양이 혈천도마와 풍천교주를 만나고 다닌다면, 자신도 얼마든지 검무극을 만날 수 있는 것 아닌가? 오히려 이 일이 검무양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랐다.
‘이공자, 그대는 정말 운이 좋은 사람이구나.’
찾아와도 이런 날 찾아오다니.
“어르신과 이렇게 나란히 걸어본 적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괜히 친한 척하지 말게.”
보통 사람이라면 무안해서라도 조용히 걸었을 터인데, 검무극은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어르신과 함께 걸을 기회가 없을 텐데, 이럴 때 친한 척 안 하면 언제 하겠습니까? 오늘만큼은 제가 들뜬 행동을 해도 이해해 주십시오.”
“도마도 이런 식으로 꾀었군.”
“네, 맞습니다. 끝도 없이 문을 두드렸죠.”
“문?”
“마음의 문 말입니다.”
마불은 코웃음을 치다가 문득 검무양이 자신의 문을 두드린 적이 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이내 냉철하게 마음을 다스렸다.
‘이공자, 자네가 아무리 그래봤자, 난 도마처럼 흔들어댄다고 나무에서 떨어지는 원숭이가 아니다.’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마가촌의 풍류주점이었다.
검무극이 소개하지 않더라도 조춘배는 마불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천마를 손님으로 받은 이후 그는 달라졌다. 무림맹주와 사도맹주가 한꺼번에 와도, 이 정도쯤이야 하며 기꺼이 받아낼 자신이 있는 그였다.
“어서 오십시오, 각주님.”
“귀한 분이 오셨으니, 오늘도 잘 부탁합니다.”
“네,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그렇게 검무극과 마불은 이 층 자리에 마주 앉았다.
“여기가 제 단골집입니다.”
“알고 싶지 않고. 왜 나를 보자고 한 건가?”
“여러 이유가 있지만 다 안 믿으실 테고, 믿을만한 이유를 들자면 일종의 견제죠.”
“견제라고?”
“형이 제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저도 형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요. 그 첫 번째 분이 어르신입니다.”
“만난다고 변할 것이 있겠나?”
“형에 대한 마음이 굳건하신 것 알고 있습니다.”
“자네가 뭘 알아?”
“형이 돌아오던 날 보여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형을 위하는 마음을 크게 느꼈습니다.”
검무극이 술을 따라 주려 하자, 마불이 술병을 뺏어서 직접 따라 마셨다.
“날 안다고 함부로 말하지 말게.”
마불이 술잔을 비웠고 검무극이 뒤이어 술을 마셨다.
이번에도 검무극이 술을 따라 주려 했지만, 마불은 직접 자기 술잔을 채웠다.
“형이 이기적이라서 힘드실 때가 있으실 겁니다. 마존께서 잘 타일러가며 보살펴주십시오.”
“자넨 정말 가식적인 사람이군. 그런 말을 한다고 내가 감동이라도 할 줄 알았나?”
“그래서가 아니라 형을 뒤에서 욕한 겁니다.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마불이 이간질은 통하지 않는다는 듯 검무양을 칭찬했다.
“자네 형은 명석한 사람이라네.”
“인간미는 좀 떨어지죠.”
“괜찮네. 큰일을 할 사람은 사사로운 정에 이끌려선 안 되니까.”
“가끔 어르신을 무시하기도 할 겁니다.”
“괜찮네. 언젠가 천마가 될 분인데 날 무시하는 것이 뭔 대수겠는가?”
“중요한 약속을 어기기도 할 겁니다.”
“천마가 하는 말과 행동이 곧 법이네.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고, 약속이고 아니고. 그 모든 것은 천마가 결정하는 것이지.”
“정말 난공불락이십니다. 어르신을 같은 편으로 둔 형이 부럽네요. 이 술은 어르신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마시겠습니다.”
검무극이 술잔을 비웠다.
마불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었다.
“이공자가 사람을 다루는 수완이 좋다는 것은 인정하네. 그래도 나를 회유할 수는 없을 걸세. 나는 도마나 풍천교주와는 다른 사람일세.”
“알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어르신을 제 사람으로 만들 생각은 애초에 없습니다.”
“하면 왜 이러나?”
“어떤 분인지 알고 싶어섭니다. 어떤 분이 형을 옆에서 지켜주고 있나 궁금해서요.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어떻게?”
마불은 이공자가 자신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다.
“만약 형이 어르신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형은 본교 제일의 멍청이일 겁니다.”
마불은 코웃음을 친 후 술잔을 비웠다.
검무극이 다시 술을 따라주려 했다. 이번에는 술병을 뺏지 않았다.
술을 따라주며 검무극이 말했다.
“어르신을 보면 작은 거인이란 생각이 듭니다. 누구보다 크신 분입니다.”
말의 힘이 참 무섭다. 뻔히 아부를 떨려고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특히 작은 거인이란 표현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스스로 자신을 그렇게 생각했던 적이 있었지만, 아무도 자신을 그렇게 불러준 사람은 없었다.
속마음을 행여나 들킬세라 마불은 더욱 못마땅한 표정으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무극이 생각지 못한 말을 던졌다.
“우리 형 잘 부탁드립니다.”
“대공자를 부탁한다고? 그건 또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가?”
“후계 싸움에서 서로 죽이는 일은 이번 대에서 끊어낼 작정입니다. 그러려면 감정적으로 서로를 대하면 안 되는데, 형은 자존심이 강해 그 조절이 힘들 겁니다. 어르신이 옆에서 도와주십시오. 어르신이라면 형이 폭주하더라도 말리실 수 있을 겁니다.”
검무극을 노려보던 마불이 차갑게 말했다.
“자넨 나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군. 대공자가 폭주하면 나는 거기에 기름을 부을 걸세. 작은 폭발로는 후계자가 될 수 없으니,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라고 부추길 걸세. 그러니 자네가 날 통해서 살길을 찾는 거라면 꿈 깨시라 말해주겠네.”
마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대로 가려던 마불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만약 평화롭게 후계자를 선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자넨 바보이거나 미친놈이네.”
“저를 아는 어르신들이 다들 미친놈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니, 아마 미친놈일 겁니다.”
검무극을 응시하던 마불이 단호히 말했다.
“난 미친놈 싫어하네.”
마불이 그대로 일 층으로 내려갔다.
검무극은 계산대에서 앉아 있는 조춘배를 내려다보았다.
나중에 얼마나 기겁을 하려고, 자기 옆을 마불이 지나가는데도 그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하긴 마불이 아니라 마불 할아비가 와도 피곤해서 졸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조춘배를 바라보던 검무극의 시선이 주점 밖을 향했다.
저 멀리 황금빛 광채가 지평선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키는 보통 사람들의 반이었지만 노을빛에 늘어진 그림자는 크고 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