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95화 (95/214)

제95회 그럼 됐다.

나의 도발에 주위 공기가 무거워지면서 텁텁해졌다. 극악소마의 몸에서 흘러나온 마기가 주변을 장악한 것이다.

그의 마기는 특별했다. 극악이란 별호가 붙을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소악심(笑惡心)이라 불리는 마기 때문이었다.

소악심은 인간의 근원적인 폭력성을 깨웠다.

소악심에 노출되면 격렬하게 심장이 뛰면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진다. 실제로 공력이 약하면 검을 뽑아 옆에 있는 사람을 찔러 죽이기도 했다.

내공이 높은 고수 역시 소악심의 영향으로 정상적으로 싸움하기가 쉽지 않다.

“이 가면 속에는 두 개의 얼굴이 있습니다. 이공자가 지금까지 봤던 얼굴 말고 다른 얼굴이 깨어나면 나조차도 감당하기 어렵지요. 그래서 가면을 벗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봤던 얼굴이 소마라면 다른 얼굴은 극악을 말하는 것이리라.

“소마님께 무례하려고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제가 생각하는 친구란 그 얼굴이 두 개든, 세 개든 허물없이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객기 어린 치기에서 드린 말씀이니 무례했다면 용서해 주십시오.”

회귀 전에도 이 소악심에 노출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천마호신공을 배우지 않았기에, 정말 힘들게 버텨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자연스럽게 천마호신공이 발동하면서 그의 소악심을 막았다. 내 천마호신공은 아직 대성을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 발출되는 소악심은 무난히 막아내는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극악소마는 소악심을 더욱 키우는 대신 천천히 마기를 거둬들였다. 눈구멍 속 웃던 눈이 점차 차갑게 내려앉았다. 웃음기가 거둬진다는 것은 그가 분노를 가라앉혔다는 의미.

“과연 이공자는 대단하십니다. 제 소악심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군요.”

“악심과 독심에는 어려서부터 단련되었거든요. 아시잖습니까? 우리 형이 저에게만큼은 가혹했다는 것.”

극악소마가 소리 내어 웃었다. 언제 그런 긴장감을 조성했냐는 듯, 그는 처음 봤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역시 이공자는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친구가 되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극악소마가 말했다.

“역시 전 섭혼마존은 이공자가 죽였다고 생각합니다.”

“오해십니다.”

나는 극구 부인하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의 이 긴장감이야말로 그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였으니까.

문이 닫히는 사이로, 하얀 방에 홀로 남은 극악소마의 모습이 보였다.

* * *

악인곡 입구에 서대룡을 만났다.

“서 조사관, 여긴 웬일이야?”

“수련 중입니다. 체력훈련 삼아 달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필이면 악인곡 앞에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위험하면 뛰어들어 날 구하려고 했나?”

그는 수련할 때 쓰는 대도까지 들고 있었다.

“이거 감동인데?”

“아니라니까요. 제가 저길 어떻게 뚫겠습니까?”

“그래서 감동이란 거야. 뻔히 죽을 것 알면서도 날 구하러 온 거니까.”

“그냥 와본 겁니다. 저 안에서 싸우는 소리라도 들리면 사부님께 알려드리려고요.”

“역시 똑똑하다. 당연히 그래야지. 실력도 안 되는데 뛰어들어서 헛되게 죽을 게 아니라 그래야지. 오른팔이 이렇게 현명하니 내가 무슨 걱정이겠어?”

내가 무사히 나온 것이 그제야 안심이 되는지 서대룡이 뒤늦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다리가 아직도 후들거리네요. 아무리 각주님이라도 조금은 걱정했습니다.”

“서 조사관.”

“네.”

“앞으로도 계속 걱정해줘.”

“네?”

“걱정해 달라고. 나도 실수하고 헛다리 짚고, 멍청한 짓 할 수 있으니까. 계속 걱정하고 도와달라고.”

서대룡이 옅게 웃었다.

“그럼요, 오른팔이 안 하면 누가 하겠습니까?”

“왼팔이 하겠지.”

“이 좋은 분위기를 그렇게 망치시기입니까?”

그렇게 둘이 주거니 받거니 장난치며 걸어 나오다가 발걸음을 멈추고 머리 위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거기서 뭐 하십니까?”

놀랍게도 나뭇가지에 혈천도마가 걸터앉아 있었다.

“노을 구경하고 있다.”

“굳이 여기서요?”

“제자 놈 농땡이 치는지 감시도 할 겸.”

그 순간 서대룡은 깜짝 놀랐다. 멍하게 혈천도마를 올려다보던 두 눈에 글썽 눈물이 맺혔다. 혈천도마가 처음으로 자신을 제자라 칭한 것이다.

“사부님! 감사합니다, 사부님.”

서대룡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났다. 이런 분위기 질색하는 혈천도마가 버럭 호통쳤다.

“뭘 그리 쳐다보고 있냐? 수련하러 왔으면 달려야지!”

“네! 사부님!”

서대룡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내게 인사도 잊은 걸 보니 혈천도마가 제자라 말해준 것이 정말 감동이긴 감동이었나 보다.

내가 훌쩍 날아올라서 그가 앉아 있는 나뭇가지 옆에 앉았다.

“이놈아, 부러진다.”

“깃털처럼 가볍게 있겠습니다.”

두 사람이 앉았음에도 가느다란 나뭇가지는 부러지지 않았다.

“잘하셨습니다.”

“잘하긴.”

“저 좋아하는 모습 보셨죠? 그러니까 미루면 안 됩니다. 그냥 그때그때 다 말하고, 다 생색내고, 미우면 미워하고. 그래야 합니다.”

“어린놈이 늙은이 교육하는 게냐?”

“네. 배우셔야죠. 그래야 어린놈들이랑 어울리며 살죠.”

“말이나 못 하면.”

우린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제가 이렇게 걱정되셨으면 말씀을 하시죠.”

“그놈 열받게 할까 봐 왔다. 극악 그놈 열받으면 진짜 눈깔 뒤집히거든.”

“보신 적이 있습니까?”

“한 번 봤다. 정말 아무도 못 말리겠더군.”

그래, 그 모습은 나도 안다. 정말 아무도 못 말린다는 말이 딱 맞다.

“너라면 왠지 그가 미쳐 날뛰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제가 왜요?”

“넌 정말 사람을 열받게 하니까. 어디 극악소마라고 다르겠냐?”

“다행히 오늘은 그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네가 교주 아들이니까 피를 보지 않고 나올 수 있었다. 아니면 둘 중 하나는 죽었을 거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

“감사는 무슨. 가자.”

“저기 노을 집니다. 잠깐만 보고 가시죠.”

“늙는 것도 서러운데 노을은 무슨.”

혈천도마는 훌쩍 몸을 날려서 그곳을 떠나버렸다.

혼자 남은 나는 나뭇가지에 앉아서 잠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문득 회귀 전, 극악소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회광반조로 두 눈이 반짝이던 그의 모습이.

―……기억이 안 난다. 어렸을 때 친구들하고 뛰어놀 때도 난 술래를 죽이고 싶었을까? 난 언제부터 이랬을까?

―후회되나? 악하게 살아온 것이.

―후회는 무슨. 더 못 죽이고 가는 게 후회지. 막상 지옥에 가려니 겁나서 그래, 겁나서. 아! 답답하다. 가면 좀 벗겨줘…… 고맙다. 처음이지, 내 얼굴?

―젊었을 때 잘생겼다는 소리 들었겠다. 왜 평생 쓰고 살았냐?

―어려서 사부가 나를 선택하면서 묻더라. 자기를 따라가면 평생 이 가면을 벗을 수 없는데, 그럴 수 있겠냐고. 대신 마음껏 사람을 죽이는 삶을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망설이지 않고 그러겠다고 했지. 아! 그러고 보니 그때부터 난 그랬었구나. 그래서 사부가 날 알아본 거고.

―사부 죽고 적어도 가면만큼은 벗을 기회가 있었잖아?

―너도 써 보면 안다. 한 번 쓰면 못 벗는다. 마음이 편하거든. 가면 쓰고 죽이고 또 죽이고. 죽이고. 나중에는 가면이 사람을 죽이고 있더라.

―어디서 가면 핑계를 대고 자빠졌냐? 싹 다 네가 죽인 거다.

―눈치챘냐? 하하하, 쿨럭. 진짜로 웃으려니까 힘드네. 이 가면이 내 상징이 되었는데 어찌 벗냐? 극악소마 오늘부터 가면 벗습니다, 하고 무림에 전서라도 날릴까? 이봐, 무철. 아, 무철도 네 이름이 아니었겠구나. 네 진짜 이름이 뭐냐?

―…….

―너는 나를 친구라 생각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냐?

―…….

―나쁜 새끼. 지옥에 오면 그땐 내 손에 죽는다.

―그래, 그때 실컷 복수해라.

―아까부터 너무 아팠다. 이제 검 뽑아라, 친구야.

―잘 가라.

극악소마는 내 손에 죽었다.

당시 대법 재료를 구하는 과정에서 그를 제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죽어 마땅한 악인이었지만 죽는 그 순간만큼은 나를 친구로 여기며 죽었다.

나는 그에게 끝내 친구란 말을 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순간만큼은 내가 더 악당이었을지도 모르겠다.

* * *

아버지는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기꺼이 대국을 허락하셨다.

평소에는 조용히 바둑만 뒀는데, 나는 오늘 말이 많았다.

“……일전에 마불을 만났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도 하고, 그 사람을 떠보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인지 진지하게 알아보려고 노력도 하고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런 대답 없이 바둑에만 집중했다. 원래라면 왜 이리 시끄럽냐며 호통을 치셨을 텐데, 오늘은 가만히 계셨다.

아버지는 눈치채신 거다. 아들이 심란한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다는 것을.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은 또 극악소마를 만났습니다. 저는 그 사람 싫어합니다. 형을 지지해서가 아니라, 실실 웃으면서 사람 죽이는 것이 미친놈 같아서요.”

아버지가 바둑돌을 따내며 말했다.

“사석(死石)은 여기서만 만들어라.”

더는 마존을 죽이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섭혼마존이 죽었을 때, 더는 죽이지 말라고 하셨는데 또 강조하신 것이다.

극악소마를 또 죽여야 한다면? 또 그런 운명이라면? 그와 나도 참으로 질긴 인연으로 엮여 있겠구나 싶었다.

이번 생에서는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가 극악소마를 죽일 실력이 되나요? 암튼 제가 마존들을 만나러 다니는 이유는…….”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이렇게 순순히 들어주실 때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려는 거다.

“저를 위한 일이기도 했고, 형을 위한 일이기도 합니다. 처음에 사냥 갔을 때는 기세 좋게 마존들 다 꿇려서 줄 세우겠다고 큰소리쳤습니다만, 막상 부닥치니까 그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니네요.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사람 상대하는 일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입니다.”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바둑만 두셨다. 오늘은 듣기만 하기로 마음을 먹으신 모양이다.

“제가 이런 모습 보인다고 후계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오해는 말아주십시오. 미리 이런 고민 다 하면 나중에는 오히려 더 강한 모습을 보일 겁니다.”

“모처럼 기회인데, 네 형 욕도 하지 그러냐?”

“당분간 형 욕은 안 하려고요. 백조처럼 고상하게 떠다닌다고 고생 많거든요. 물 아래서는 쉴 새 없이 발을 놀리느라 너무 힘들다! 저처럼 이렇게 와서 고백할 성격이 아니잖아요?”

나는 순간 아버지가 피식 웃으시는 것을 보았다. 아주 미세하고 빠른 변화였지만 내 신안술에는 이제 다 걸렸다.

“역시 수다를 떠니 바둑이 점점 불리해지는군요. 이제 집중하겠습니다.”

그렇게 바둑에 열중했다. 끝내기하면서 내가 물었다.

“가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돌을 놓으려던 아버지의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

“반칙 아니냐? 심판에게 답을 구하면?”

“심판이라 생각 마시고 그냥 훈수 둔다 생각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바둑돌을 내려놓았다.

“훈수가 재밌긴 하지.”

된다, 안 된다, 직접적으로 말씀은 안 했지만 허락한다는 말씀이었다.

나는 안다. 이렇게 나를 좋게 대해도 후계자를 뽑는 것과는 별개라는 것을. 내일이라도 ‘후계자는 네 형이다.’하실 수 있는 분이신 것을.

바둑 결과는 내가 간신히 두 집을 이겼다.

“갈수록 실력이 느시는데요? 사마 군사를 안 재우시는 것 아닙니까? 이거야말로 반칙입니다.”

“군사는 너도 있지 않으냐?”

“바둑 못 둔답니다.”

“바둑 못 두는 군사가 세상에 어디에 있느냐?”

“생각해 보니 그러네요. 바둑 못 두는 군사는 이야기책에서도 못 봤습니다. 제가 속았나 봅니다, 바둑도 못 두는 군사에게.”

내 너스레에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그럼 내달에 뵙겠습니다.”

아버지에게 인사드리고 나오는데 뒤에서 아버지가 물었다.

“짐이 무거우냐?”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울컥했다. 아버지의 위로가 담긴 말은 처음이었다.

“깃털처럼 가볍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렇다고 못 버틸 정도로 무겁지는 않습니다.”

“그럼 됐다.”

그럼 됐다. 요즘 이 말이 왜 이리 듣기 좋은지.

누군가 내 노력을 알아준다면…… 그래, 그럼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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