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회 네 삶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음 날 극악소마가 나를 찾아왔다.
백색 가면을 쓴 채 천천히 황천각 연무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정말 굉장한 압도감과 공포감을 조성했다.
조사관들이나 집행무인들은 멀리서 수군거리지도 못했다. 모두 숨죽이며 인사하고 지나갔다. 혈천도마나 일화검존이 왔을 때보다 훨씬 두려워했다.
난 집무실 창가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옆에 있던 서대룡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체 어제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 무서운 분이 본각으로 오는 겁니까?”
“서 조사관, 본교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 우리 황천각이야. 여길 오는 사람이 떨어야지 왜 자네가 떠나?”
“네, 그렇다고 치고요. 저 피신해야 하는 상황입니까, 아닙니까? 그간의 정을 생각해서 알려주십시오. 제발요!”
이런 농담할 여유도 있는 걸 보니, 도마에게 무공을 잘 배우고 있나 보다. 하긴, 죽을힘을 다하고 있으니 곧 탈바꿈한 모습을 보여주리라 기대한다.
“날 계속 걱정해 달라고 말한 게 불과 어제 일이다.”
“어제처럼 멀리서 걱정해드리겠습니다.”
“가서 모시고 와. 오른팔이 가야지.”
“제발 극악소마가 제가 각주님의 오른팔임을 모르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렇게 서대룡이 밖으로 나갔고 내 시선은 다시 극악소마를 향했다.
날 찾아올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그것도 대낮에 황천각을 직접 찾아올 줄이야.
본능에 따라 돌발적으로 행동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재미있는 상대고, 그래서 상대하기 어렵다.
잠시 후, 서대룡이 문밖에서 말했다.
“극악마존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곧이어 서대룡의 안내를 받으며 극악소마가 들어왔다.
“어서 오십시오, 어르신.”
“또 어르신이라 하는군요. 편하게 친구처럼 대하라니까요.”
“그럴 수야 없지요. 그럼 소마님으로 부르겠습니다.”
“좋습니다.”
극악소마가 소리 내어 웃었다. 어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극악소마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그를 안내한 서대룡이 나가려고 할 때, 내가 재빨리 말했다.
“참, 저기 저 친구가 제 오른팔인 서 조사관입니다.”
서대룡은 표정으로 비명을 지른 후, 극악소마가 돌아보자 차분한 얼굴로 인사했다.
“서대룡입니다. 존경하는 분을 뵈어서 영광입니다.”
“오, 기억해 두겠네.”
“감사합니다.”
서대룡이 세상이 끝난 표정으로 걸어 나갔다. 마음속으로 소리치고 있을 것이다. 제발 기억하지 마시라고요!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웃었다.
극악소마가 불쑥 물었다.
“보통 아끼는 사람은 숨기지 않습니까?”
“상대가 적이라면 그렇겠죠. 소마님은 적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아직 친구도 아니지요.”
“죽이려는 사람이 마음먹으면 아무리 꼭꼭 숨긴다고 숨겨지겠습니까? 소마님은 지금까지 죽이려고 한 자가 숨었다고 죽이지 못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그러니까요. 어차피 언제 죽을지 모를 인생인데, 제대로 오른팔 노릇하면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극악소마의 눈빛에 이채가 흘렀다.
“꽤 흥미로운 말씀이군요.”
극악소마가 자리에서 일어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책상에 가득 쌓인 서류며 벽장에 꽂힌 책자를 둘러보다 창가에 놓인 화분의 꽃향기를 맡았다. 일화검존이 선물로 준 그 화분이었다.
“향기가 좋습니다.”
“최근에 꽃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생겨서요.”
“꽃을 좋아하는 천마신교 후계자라…… 무림맹 놈들이 쳐들어오면 우린 꽃밭에서 죽게 되는 겁니까?”
조롱 섞인 그의 말에도 나는 담담히 대응했다.
“이름 모를 들판에서 쓸쓸히 죽는 것도 멋있겠지만, 이것도 괜찮지 않습니까? 숨이 넘어가는 마지막 순간에 맡는 냄새가 피 냄새가 아니라 꽃향기라면요.”
극악소마는 좋다, 안 좋다 대답 대신 습관적인 웃음을 터뜨렸다.
“한데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꽃을 향해 있던 극악소마가 내 쪽으로 돌아보았다.
“어제 이공자가 돌아가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우리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친구가 될 방법을 모색해 볼까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래서 방법은 찾으셨습니까?”
“제가 생각한 방법은 하나씩 양보하는 겁니다.”
“어떻게요?”
“선과 악을 바라보는 이공자의 관점은 제가 양보하도록 하죠. 이공자의 새로운 마도를 이해해 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럼 저는 뭘 양보하면 됩니까?”
“가면을 벗어야 친구가 될 수 있다고 하신 것, 양보할 수 있겠습니까?”
“그 전에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저와 친구가 되려는 이유가 뭡니까?”
“전 이공자와 허물없이 지내고 싶습니다.”
사실 나는 극악소마가 왜 이러는지 알고 있다. 우선은 섭혼마존을 어떻게 죽였는지 알아내고 싶어서다. 내가 본교로 돌아왔을 때, 섭혼마존과 더불어 극악소마도 살아있었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이것이었다. 악할수록 더 오래 살아남는구나.
극악소마 역시 제 목숨을 중히 여기는 사람이니 어떻게든 내가 어떻게 섭혼마존을 죽였는지 알아내고 싶을 것이다. 섭혼마존이 당했다면 자신도 당할 수 있다고 여길 테니까.
또 다른 이유는 그의 성격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도발하고 흥미롭게 하는 사람에게 집착한다. 접근해서 친구로 삼고, 질리면 곧장 죽여버린다. 사람들은 모르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는 그의 병적인 취향이었다.
그래서 그가 친구하자는 말에 그 어떤 좋은 의미도 두면 안 된다. 친구하자는 말은 널 가지고 놀다 죽이겠다는 뜻이다.
이 두 가지 이유가 극악소마를 친히 내 집무실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내 마도를 이해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하게 하는 이유였다.
“이공자와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래, 이번 생에서도 나는 그와 친구가 될 것이다.
친구가 되면 그때야 비로소 그는 적도 아군도 아닌 지점에 서게 될 것이다.
그게 바로 극악소마라는 사람이다. 친구가 되어야만 간신히 적에서 벗어나게 되는 사람.
“좋습니다. 서로 양보해보죠.”
내 대답에 극악소마가 큰 소리로 웃었다. 누가 들어도 기뻐서 호탕하게 웃는 웃음이었지만, 나는 신안술로 그의 눈을 보고 있었다. 그는 더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소마야, 네 삶의 끝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거짓말이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그 순간, 이미 그는 후회하고 있었으니까.
혈천도마도 바뀌고 일화검존도 바뀌고 풍천교주도 바뀌고 있지만, 이 극악소마는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악한 심성을 타고 난 데다 어려서부터 제 사부에게 세뇌까지 당하며 키워졌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밖에서 서대룡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자께서 오셨습니다.”
“모셔라.”
극악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내가 불렀습니다.”
나를 찾아오면서 형을 이곳으로 부른다? 정말 극악소마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거 해볼까? 란 생각이 들면 뒷일 가리지 않고 무조건 실행해 버리는 그였다. 이런 돌발적인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살아남은 마존 중 하나였으니, 그의 악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검무양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극악소마에게 먼저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마님.”
“어서 오십시오, 대공자. 자, 두 사람은 소개 안 해도 되겠지요?”
장난스러운 그의 말에 내가 장단을 맞춰주었다.
“어쩌면 우리 형제야말로 서로 소개를 해야 할 사이일지도 모릅니다. 생각보다 아는 게 없어서요.”
내가 극악소마를 편하게 대하자 검무양의 얼굴에 살짝 긴장감이 스쳤다.
거기에 한 발 더 나가서.
극악소마가 검무양에게 말했다.
“제가 이공자에게 친구하자고 조르던 중입니다.”
극악소마는 어떻게 나오나 보자는 눈빛으로 검무양의 반응을 살폈다.
형은 형답게 반응했다.
“가끔은 이런 여흥도 필요한 법이지요.”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는 검무양의 반응에 극악소마가 웃으며 말했다.
“이래서 여흥은 동생분과 즐길 작정입니다. 우리 대공자께선 너무 반듯하셔서 재미가 없거든요.”
“무극이는 재치가 넘쳐서 친구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형도 참 고생이 많다. 누가 오란다고 와서 저런 말이나 듣고 있을 성격이 아닌데. 후계자가 되려는 집념으로 다 참아 내고 있는 것이다.
그래, 잘한다. 형.
여기서 신경이 곤두서면 그 순간에 지는 거다. 잘하고 있어.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극악소마는 검무양을 자극했다.
“이공자가 어제 절 찾아왔었습니다. 형 대신 자신을 지지해 달라고 하더군요.”
내가 있는 자리임에도 그는 거침이 없었다.
“소마님, 친구가 되자고 하셔놓고 왜 형제를 이간질하십니까? 이래선 좋은 친구가 될 수 없을 겁니다.”
내 말에 극악소마는 킬킬 웃으며 말했다.
“세상에 이간질만큼 재미난 것이 없는데 어찌 참으라는 겁니까? 똥 싸는 건 참아도 그건 못 참지요.”
“이간질하려면 우리 말고, 저기 무림맹과 사도맹을 하십시오.”
“그러고 싶어도 요즘 제가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서요.”
검무양은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그는 내가 선 넘는 말실수하기만을 바라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두 분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평소 궁금했던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극악소마의 물음에 형은 순순히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럼 대공자에게 먼저 여쭙겠습니다. 내가 대공자를 도와 후계자로 만들어주면 내게 무엇을 해줄 겁니까?”
역시 극악소마는 극악소마다. 우리 두 사람을 앞에 두고 이런 악취미를 발휘하다니.
검무양은 마치 준비라도 해온 것처럼 차분히 대답했다.
“악인곡에 대한 지원을 세 배로 늘리고, 무면객들의 숫자 제한을 풀겠습니다. 그리고 현재 소마님에게 걸린 출교 금지 금제를 풀겠습니다.”
극악소마에게는 출교 금지의 금제가 걸려 있었다. 재작년에 사도맹 무인들을 학살하는 사건을 저지르는 바람에 전쟁으로 번질 뻔한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는 놈들이 먼저 덤벼서 그랬지요.”
시작은 그랬지만, 끝은 학살로 끝이 났다. 그 이후 아버지는 당분간 중원에 나가는 것을 금지했다. 그게 벌써 이 년이 다 돼 가고 있으니 몸이 근질근질해서 죽을 지경일 거다.
“오호, 아주 매력적인 조건입니다.”
“별말씀을요. 그 외에도 소마님이 원하시는 것이 있으면 전적으로 밀어드릴 겁니다.”
극악소마가 크게 웃었다. 형은 알까? 저렇게 기뻐하며 웃으면서도 가면 속 눈빛은 더없이 차갑게 식어 있다는 것을.
“자, 이번에는 이공자에게 묻겠습니다. 이공자를 도와 천마로 만들어주면 내게 무엇을 해줄 겁니까?”
두 사람 모두 내 대답이 무엇일지 궁금해했다.
나는 극악소마를 응시하며 나직이 말했다.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농담입니다란 말이 나와야 했지만 내가 덧붙인 말은 이것이었다.
“어제 이야기를 나눴잖습니까? 제가 지향하는 새로운 마도가 어떤 것인지. 한데 극악을 내세우는 소마님을 제가 어떻게 할 줄 알았습니까? 좋다고 지원이라도 해주리라 생각했습니까? 정치적인 부담을 안고서라도 살려는 드리겠습니다.”
형은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을지 모르겠다. 젊은 혈기에 이 좋은 기회를 다 망치는구나 하고.
하지만 형이 모르는 것이 있다. 이 극악소마는 상대가 이렇게 나올 때 더 상대에게 매료되는 자라는 것을.
그걸 증명하듯 신안술로 본 뻥 뚫린 구멍 속 그의 두 눈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난 앞서보다 더 차갑게 그에게 말했다.
“갑자기 친구 놀이 재미없어졌지요? 과도하게 격식을 깨는 놀이는 결국 끝이 좋지 않은 법입니다. 그러니 다시는 친구하자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썰렁한 분위기 속에서 극악소마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구가 아닌데 한자리에 있다 보면 싸움만 날 뿐이지요.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
극악소마가 검무양에게도 작별을 고한 후 집무실을 나갔다.
둘만 남자 검무양이 내게 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냐?”
내가 이렇게 경솔하게 극악소마를 화나게 할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형은 알고 있었다.
“그냥 열 받잖아? 너희 후계자들은 우리 팔마존에게 잘 보여야 해. 자, 어서 꼬리를 흔들어 봐. 그럼 내가 후계자 자리에 앉혀줄게. 형은 열 안 받아?”
뭐라 말을 할지 잠시 고민하던 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열은 항상 네게 받지.”
그 말을 남기고는 검무양도 집무실을 나가버렸다.
곧이어 서대룡이 들어왔다.
“나 걱정돼서 밖에서 기다린 거야?”
“각주님 말고요. 혹시 마기라도 발출해서 시들었을까 봐 걱정했습니다.”
그가 화분의 꽃을 보며 안도했다.
나는 웃으며 그의 옆에 나란히 섰다.
건물 밖으로 극악소마가 걸어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화나신 것 같던데 괜찮을까요?”
“화 안 났다. 신나는 저 발걸음 안 보여?”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누군가를 밟아 죽이고 싶은 걸음 같기도 하고.”
“그렇게 걱정되면 내일은 화분 미리 내놔라.”
“그래야죠. 네? 내일 또 극악소마가 온다고요?”
하지 말자고 도망가면 끝까지 쫓아오는 사람이 극악소마였으니까.
“어떤 식으로든 결판을 내야 하는 사람이다. 저 사람은.”
잠시 사이를 두고 서대룡이 물었다.
“각주님은 이 압박감을 다 어떻게 견디십니까?”
“난 오른팔도 있고, 오른팔을 노리는 왼팔도 있고, 심장도 있고, 날개도 있고, 심지어 이젠 뇌도 있다. 내가 뭐가 힘들겠냐?”
나는 저 멀리 홀로 걸어가는 극악소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직이 덧붙였다.
“힘든 건 저 사악하고 외로운 영혼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