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97화 (97/214)

제97회 왜 내 가면에 집착합니까?

극악소마는 다음 날 다시 나를 찾아왔다.

“이제 안 오실 줄 알았습니다.”

“제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쥐신 분인데 안 올 수가 있나요?”

어제 살려는 주겠다는 말에 대한 극악소마의 조롱에 나는 내 방식으로 대응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빨리 처리해야 되는 일이라서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천천히 하세요.”

일을 잠시 멈출 수도 있었지만, 기세상 그를 기다리게 했다.

창가로 걸어간 극악소마가 물었다.

“어제 그 꽃이 안 보이는군요.”

나는 서류에 도장을 찍으며 대답했다.

“서 조사관이 잠시 물 주러 내어갔나 봅니다.”

다음 서류를 검토하고 다시 도장을 찍고. 또 찍고. 또 찍고.

창밖을 바라보던 극악소마는 기다리기 지겨웠는지 내 책상에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날 기다리게 했으니 이 정도 무례는 감수해야지? 이런 느낌으로 내가 일하는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일을 뭘 이리 어렵게 합니까? 그냥 다 죽여버리세요.”

나는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소마님이 너무 쉽게 사시는 겁니다.”

내 말에 극악소마가 껄껄 웃었다. 이 격 없는 모습에 속으면 안 된다. 소마에 방심한 사람은 다 죽고, 극악에 긴장한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다 됐습니다.”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은 후 고개를 들자 극악소마는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정말 후계자가 되면 날 살려줄 겁니까?”

물론, 이 말에도 속으면 안 된다. 설마 그가 목숨을 구걸하러 왔겠는가?

그는 이 모든 과정을 즐기고 있다. 이렇게 교류하다가 언젠가 내가 무너지는 꼴을 보고 싶은 것이 극악소마의 마음이다. 그때 낄낄거리며 나를 조롱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내가 비수를 꺼내 탁자 위에 선을 쭉 그었다.

“살려줍니다. 대신에…….”

가운데에서 조금 오른쪽에 세로 선을 그었다.

“여기까지 와야 삽니다.”

소마가 흥미로운 눈빛을 발했다.

“이게 뭡니까?”

“내가 아끼는 마음의 정도입니다.”

“오호! 이런 것이?”

“절반은 넘어서야 삽니다. 친구라도 좋아하는 마음이 전혀 없는 친구라면 남과 다를 바 없지 않습니까? 말로만 친구는 죽습니다.”

“어렵군요, 살아남기가.”

“어떻게든 넘겨야 할 겁니다.”

“지금은 어디쯤 있을까요?”

나는 시작점에서 조금 지난 곳에 세로 선을 그었다.

“고작 거깁니까?”

“벌써 여기죠.”

극악소마가 선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나를 쳐다보고 다시 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이 관계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자신을 막 대하는 것도 모자라 나에게서는 본교에서는 절대 찾을 수 없는 정의나 협의의 맛이 느껴질 테니까. 그건 극악소마를 더 없이 자극하는 향신료가 될 것이다.

“이공자는 교주님을 어떻게 생각하시오?”

그가 묻는 이유는 내가 아버지를 믿고 이러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는 것이리라. 혹은 아버지의 밀명을 받았거나.

“아버지에 대해서는 생각 안 합니다. 그냥 그때그때 느끼려고 하죠. 아버지는 내가 머리로 생각해서 알 수 있는 분이 아니거든요. 괜히 나만 힘듭니다.”

내 말에 공감이 가는지 극악소마가 웃었다.

“하실 말씀 끝났으면 이만 일어나시죠. 저는 식사 시간이 되어서요.”

“식사 드셔야죠. 나가시죠.”

나는 극악소마와 함께 집무실을 나섰다. 건물을 나오는데 극악소마가 나를 졸졸 따라왔다.

“어디서 식사하십니까?”

“오늘은 마가촌에 나가서 식사할까 합니다.”

“함께 가시죠.”

나는 짐짓 놀란 듯 그에게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가면을 벗지 않는 그였기에 누군가와 함께 식사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

“괜찮습니다. 전 이공자 식사하시는데 앉아만 있겠습니다.”

“소마님 말고, 마가촌 말입니다. 괜찮겠죠?”

그제야 난동이나 살육을 벌이지 말라는 농담임을 알고는 극악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건너편에서 화분을 가슴에 안고 있는 서대룡이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우린 연무장을 갈로 질러 밖으로 향했다.

* * *

마가촌에 들어서기 직전에 극악소마가 말했다.

“그거 아십니까? 나는 마가촌에 나와 본 적이 없습니다. 외부로 나갈 일이 있으면 그냥 지나쳐 갔지, 여길 걸어본 적은 처음입니다.”

“마가촌 주민을 위해서 다행한 일 아니겠습니까?”

내 농담에 그가 웃었다.

“내가 길을 걸어도 되겠습니까?”

“사람들이 놀라 혼비백산할 걸 걱정하는 거면,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왜죠?”

“가보시면 압니다.”

그렇게 우린 마가촌으로 들어섰다. 우리가 길을 걸어도 다들 대수롭지 않게 지나쳐 갔다. 나를 알아본 몇몇 사람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지만, 그렇다고 옆에 있는 극악소마를 보며 기겁하는 사람은 없었다.

“왜 아무도 나를 무서워하지 않지요?”

“그야 아무도 극악소마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이 가면을 보면 나란 걸 알아야 할 텐데요?”

“저길 보세요.”

내가 길 건너편 행상을 가리켰다. 가판대에는 천마신교와 관련한 온갖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저기 소마님 가면도 있네요.”

“!”

극악소마는 깜짝 놀랐다.

정말 무면객들이 쓰는 가면이 걸려 있었다. 백색 가면은 물론이고 심지어 가면에 색이 칠해지거나 그림이 그려진 것도 있었다.

“이것들이!”

다 날려버리겠다는 듯 극악소마가 손을 들자 내가 그의 소맷자락을 끌어당겼다.

“이 손은 저기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침 길 맞은편에서 아버지 손을 잡고 무면객 가면을 쓰고 지나가던 아이가 같은 가면을 쓴 극악소마를 보며 열심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돈 드는 것도 아닌데, 손 좀 흔들어 주십시오.”

내가 살짝 소맷자락을 흔들자 극악소마가 못 이기는 척 손을 흔들어주었다.

어쩌면 극악소마가 손을 흔들어준 유일한 사람이 자신인 줄도 모른 채, 아이는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너무 놀라실 것 없습니다. 저것도 가능하니까요.”

그 옆의 행상은 목각인형을 팔고 있었는데, 팔마존을 본떠 만든 인형은 물론이고 천마를 본떠 만든 인형도 팔고 있었다.

천마 인형을 보자 극악소마는 정말 놀랐다.

“정말 이래도 됩니까?”

“이런 물건을 천마신교 근처 마을에 안 팔면 어디서 팔겠습니까? 무림맹 앞에서 팔 순 없잖습니까?”

“차라리 무림맹 앞에선 팔아도 여기선 못 팔죠.”

“아버지의 도량이 넓어서 그렇습니다. 얼마든지 만들어 팔아도 좋다고 허락하셨습니다. 그날 이후, 아버지나 마존들과 관련한 상품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찝찝해서 못 만들 것 같지만 돈벌이의 힘은 위대한 법입니다.”

“이거 정말 웃기는군요.”

이제야 극악소마는 크게 웃었다. 지나가던 행인들이 힐끗 그를 쳐다보았지만, 아무도 그가 극악소마라고 생각하지 않고 지나갔다.

“소마님이나 저나 이곳에 나오면 당연히 우리가 주인공 같지만, 이곳은 저 사람들이 주인공인 세상입니다. 우리를 알아보면 겁을 내고 고개를 숙이지만, 그들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니라 각자의 삶입니다. 하루하루 먹고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사람을 만나야 하고, 아이를 키워야 하고. 마가촌은 이런 곳입니다.”

“흥미롭군요. 이공자는 어찌 이리 잘 아십니까?”

“어려서부터 몰래 교를 나와 마가촌을 돌아다니곤 했습니다. 이곳 마가촌이 내 세상이었지요.”

그에게 이렇게 둘러댔다. 멀리 세상을 돌아다녔다면 믿지 않겠지만, 마가촌이라면 그럴듯했으니까.

극악소마의 시선이 다시 가면과 천마혼 인형을 파는 행상들을 향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자신의 독문마기인 소악심을 발출했다. 물건을 팔던 행상들이 속이 답답한지 인상을 찌푸리며 가슴을 매만졌다.

“이제 곧 저자는 자기가 팔던 가면을 쓰고 옆에 있던 자를 찔러 죽일 겁니다. 저들이 죽는다면 이공자 때문에 죽겠군요. 나를 이곳에 데려온 사람은 이공자니까요.”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밥 먹는다는데 따라나선 사람은 소마님입니다. 죽이는 사람도 소마님이고요. 그리고 한 가지는 꼭 아셔야 할 겁니다.”

“그게 뭡니까?”

“황천각주 앞에서 살인을 저지르면 참형입니다. 어디 한 번 바꿔 보십시오. 저들의 목숨과 소마님 목숨을요.”

나는 먼저 걸음을 옮기며 덧붙여 말했다.

“저기 놓인 아버지 인형은 건드려도, 먹고 사는 사람 밥줄은 건드리는 것 아닙니다.”

등 뒤로 극악소마가 소악심을 거둬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내 반응을 보려 한 것이지 애초에 죽일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나와 노는 것이 재미있다. 자신을 양보하면 양보할수록 나를 죽이는 순간, 더 짜릿한 쾌감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으리라.

내가 도착한 곳은 풍류주점이었다.

“자, 여기가 내 단골집입니다.”

“허름하군요. 왜 하필 여깁니까?”

“만날 오는 곳이라 식상하긴 합니다만, 제가 여기 주인장을 좋아합니다. 소마님이 진짜 소마님이란 것을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죠.”

그 사람 조춘배가 나와서 언제나처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각주님.”

그의 시선이 극악소마를 향했다.

순간 흠칫한 조춘배가 두려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이 사람만은 내가 누군지 아는군요.”

“나와 함께 왔으니까요. 진짜가 왔다는 걸 아는 거죠.”

내가 웃으면서 조춘배에게 말했다.

“생각하는 그분이 맞습니다. 다행히 저만 식사하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

그럼에도 극악소마가 주는 압박감은 아버지보다 더한 듯 보였다. 소문 속 극악소마는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죽이는 악인이었으니까.

“제가 모시고 온 역대 손님 중 소마님을 제일 무서워하는 것 같습니다. 아버지보다도 더요.”

“교주님도 오셨습니까?”

“네.”

“뜻밖이군요.”

“누구에게나 처음은 있는 법이니까요.”

“다들 그 처음을 이공자와 하는군요.”

나는 옅게 웃었고 그가 습관적으로 따라 웃었다.

이번에는 내가 물었다.

“이런 주점에서 밥 먹어본 적 있습니까?”

“어려서 있었습니다.”

“누구와 먹었습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소마의 제자가 되기 전, 아버지와 같이 저잣거리에 밥을 먹은 적이 있었다고 했다. 그의 기억 속에 그림처럼 남아 있는 한 장의 추억이었다.

나는 문득 그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주점에 들어온 꼬마 아이를.

극악소마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살생에 물들어서 태어났다고 했지만, 과연 그랬을까? 주점에 들어선 그 꼬마의 눈에는 살심이 가득했을까?

그러는 사이 식사가 나왔다.

조춘배는 실수라도 했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정말 숨 쉬는 것까지 조심스러웠다.

무사히 요리를 두고 돌아가는 그의 눈빛이 이랬다. 덕분에 저는 오늘 주점 주인장으로 대성을 이뤘습니다.

내가 눈빛으로 말했다. 그건 모를 일입니다, 주인장. 또 어떤 자리가 만들어질지는.

나는 젓가락을 들며 극악소마에게 예의상 물었다.

“같이 드시겠습니까?”

“가면에 입이 뚫리지 않았는데 음식을 먹을 방법이 있습니까?”

“가면을 살짝 들어서 아래로 먹는 것은 어떻습니까?”

“없어 보이잖습니까?”

“그럼 방법이 없네요.”

“난 시장하지 않으니 개의치 말고 드세요.”

“네, 그럼 먼저 먹겠습니다.”

정말 나는 혼자서 밥을 먹었다. 극악소마는 그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누가 보면 미친 짓이라 하겠지만, 나는 극악소마 앞에서 혼자 밥 먹기라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내고 있었다.

“가면을 계속 쓰고 있으면 안 힘드십니까?”

“저보단 이공자가 힘들겠지요.”

“제가요?”

“가면이 없으니 하루에도 여러 표정을 지어야 하잖아요?”

“아,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으로 그에게 여러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곳에 혈천도마나 일화검존, 마불이 왔던 이야기도 했고, 날씨 이야기도 했으며, 무림맹 앞에서 백의 가면을 팔면 잘 팔리겠다는 이야기도 했다. 그는 말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친 내가 젓가락을 놓자 극악소마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이공자, 부탁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지요.”

“교주님께 말씀드려서 제 금제를 풀어주십시오.”

나는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부탁이란 말이 나왔을 때, 나는 이 부탁을 하리라 예상했다. 원래라면 형에게 했던 부탁인데, 이제 그와 나의 운명이 바뀌어서 그 부탁을 내게 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니까 이공자에게 부탁하는 겁니다. 왠지 이공자라면 풀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금제를 풀어주면 무엇을 해주실 겁니까?”

“말씀만 하십시오. 무엇을 원하십니까? 전폭적인 제 지지를 원하십니까?”

형은 그것을 원했다. 하지만 나는 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 지지를 바라지 않는다고요?”

“억지 지지는 원하지 않습니다. 저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단합만 깰 뿐이지요.”

“그럼 뭘 원하십니까?”

가면 속 두 눈을 응시하며 내가 말했다.

“나와 단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가면을 벗어주십시오.”

“!”

순간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대체 왜 내 가면에 집착하는 겁니까?”

“가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요?”

“기왕 친구가 된다면 진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

잠시 말이 없던 극악소마가 차갑게 물었다.

“가면을 벗은 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뻥 뚫린 구멍 속에서 원초적인 악심을 빛내는 그의 두 눈을 응시하며 나는 담담히 되물었다.

“그 가면 없이 나를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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