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02화 (102/214)

제102회 차라리 당신이 살아남아라.

내가 천마의 아들이라는 말에 비사인은 물론이고 서정태와 일곱 명의 사도십삼랑들도 놀랐다.

“정말 그대가 검무극이오?”

비사인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고 목소리는 더욱 가라앉았다.

“그렇소.”

비사인은 극악소마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마존께 묻겠소? 사실이오?”

“세상에 어떤 놈이 본인 앞에서 감히 교주의 혈육을 사칭하겠소?”

그 말로 끝이었다. 극악소마가 미치지 않고서야 가짜를 진짜라 말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대가 왜 여기 있소?”

사도맹에서는 극악소마가 출교한 사실까지는 알았어도 내가 동행한 사실까지는 알아내지 못한 것이다.

“그대가 여기 있는 이유와 마찬가지일 거요. 이번 일을 유혈사태 없이 해결하기 위해서요. 그대도 그 이유로 나온 것 아니오?”

비사인은 대답 대신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나인 줄 알았소?”

그야 과거에 있었던 일이니까.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사도십삼랑 두 명은 한 명의 마존을 상대할 실력자라 알려져 있소. 한데 마존 한 명을 상대하는데 여덟 명의 사도십삼랑이 왔다? 아무리 이번 일이 중요하다지만 그대가 생각해도 너무 많이 온 것 같지 않소?”

“그렇다고 그 이유가 나를 찾아낼 근거는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렇소. 그래서 당신들을 살펴봤소. 보통 중요한 사람을 가운데 두기 마련이니 가운데 있는 사람을 살폈소. 그러니 확실히 다른 점들이 있더군.”

“무엇이오?”

“옷은 똑같이 입었어도 신발은 신경 쓰지 못했더군. 당신 신발은 중원에서 구하기 힘든 아주 고급스러운 것이오. 차고 있는 검 역시 보통 검이 아니었고. 그뿐만이 아니라 앞서 기도를 발출할 때도 다른 사람들과 어우러지는 것이 달랐소. 아무래도 함께 기도를 발출한 적이 드물다 보니, 표가 날 수밖에 없었겠지.”

“정말 그 차이를 느꼈단 말이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비사인의 표정은 굳어졌다. 단지 기도를 읽힌 것만으로 명백한 실력 차이가 난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기분이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모른 척 계속 말을 이어갔다.

“이유는 또 있소. 상단주가 전음을 보내는 것을 눈치챘었소. 이런 중요한 순간에 전음을 보낸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결정을 묻고 있다는 의미겠지요. 사도십삼랑 일곱이 호위를 하고 귀한 검과 신발을 신은 채 이곳 상단주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 이 정도면 당신이란 것을 추측해야 하지 않겠소?”

여전히 굳은 얼굴로 비사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극악소마와 이안이 거의 동시에 같은 전음을 보냈다.

―이공자는 천재시오.

―도련님은 천재세요.

나는 이안에게 전음을 보냈다.

―너, 방금 극악소마와 같은 전음을 보냈어.

―도련님을 선과 악이 모두 인정한 셈이네요.

―네가 어느 쪽이지?

―도련님!

둘만 있었다면 껄껄 웃으며 농담을 이어갔겠지만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차분하게 서 있었다.

두 사람이 기분 좋게 놀랐다면 비사인의 기분은 반대로 가라앉았다.

비사인아, 너는 지금 기분 나빠할 때가 아니다. 넌 지금 네 운명을 바꿀 유일한 기회를 만났으니까.

“부럽습니다.”

“뭐가 말이오?”

“이미 후계자로 확정되었지 않습니까? 저는 아직 분투 중이거든요.”

비사인의 입매가 비틀렸다. 그는 약간만 씁쓸한 웃음을 지어도 입 전체가 틀리면서 굉장히 자극적인 표정이 되었다.

자랑스러워할 상황에서 그가 왜 이런 표정을 짓는지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다.

이미 후계자로 결정되었지만 사도맹 내부에서는 여전히 치열한 암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미 세 번의 암습을 당했고, 그중 한 번은 정말 위험했다. 워낙 많은 자가 후계자 자리를 노렸기에 누구 소행인지 밝혀내지 못한 상황.

그가 지금 사도십삼랑을 일곱이나 데리고 다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회귀 전 인생에서 그는 끝내 암살당하고 만다.

과연 나를 만나면서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될까?

그건 나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될지, 아니면 그가 새로운 운명을 살아가게 될지.

그때 비사인의 주위를 지키던 사도십삼랑 중 한 사람이 죽립을 벗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는 백발의 노고수였다.

“노부는 사도십삼랑을 이끄는 사람이오.”

일랑(一狼) 백철기(白鐵期).

그는 사도십삼랑의 수장이자 사도맹주의 심복이었다.

어려서 비사인이 얼굴을 다쳤을 때, 그것을 막아주지 못한 죄책감을 평생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백철기는 비사인이 암중 세력에게 암살당해 죽을 때, 그를 지키려다 함께 죽는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그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수장을 지키려다 죽은 그에게서 이안이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근래 신교의 이공자가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과연 명불허전이시오.”

“눈썰미로 맞췄을 뿐입니다.”

“무인에게 눈썰미는 그 어떤 재주보다 중요한 재능이지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렇게 좋은 말로 인사를 나눈 후 일랑이 본론을 꺼냈다.

“오늘 소맹주께서 친히 나온 이유는 단지 상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오.”

“그럼 무엇 때문입니까?”

“누군가 극악소마께서 다시 한번 혈사를 일으키길 바라고 있소.”

자신이 언급되자 극악소마가 나서며 물었다.

“그들이 누구요?”

일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도 모르오.”

그러자 극악소마는 마치 답을 구하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사도맹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자들이겠지요.”

“나와 그들이 무슨 관계가 있어서요?”

“만약 오늘 소마님이 백계상단을 몰살시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또 한바탕 난리가 나겠지요? 아마 이번 일의 배후자들은 본교와 사도맹 사이의 갈등과 분쟁을 이용해서 뭔가 일을 꾸미려나 봅니다.”

내가 대번에 알아맞히자 대화를 나누던 일랑은 물론 비사인까지 놀랐다. 자신들이 알고 있던 바를 한 번에 파악했기 때문이다.

다시 비사인이 대화에 나섰다.

“그걸 어떻게 아셨소?”

“말씀하셨듯 오늘 비 공자가 직접 나섰으니까요. 자기 문제와 직결된 일이 아니라면 다른 사람을 보냈지 이렇게 직접 나서지 않았겠지요.”

“이렇게 총명하시니 왜 돌아가셔야 하는지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이만 귀교로 돌아가 주시오. 그게 서로가 좋은 일일 거요.”

“우리도 비 공자에게 요구할 것이 있소.”

“무슨 요구?”

“지금 당장 귀주에서 백계상단을 물려주시오. 그리고 지난 이 년간 소마님이 손해 본 것을 모두 보상해 주시오.”

생각지도 못한 말에 모두 깜짝 놀랐다. 아마 모르긴 해도 극악소마조차 내 제안에는 놀랐을 것이다.

가장 먼저 발끈하고 나선 사람은 백계상단의 상단주 서정태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요? 당장 물리라니? 게다가 보상까지?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나는 차갑게 서정태를 쳐다보았다.

“여긴 위계가 없나 보군요. 소맹주가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에 수하가 함부로 끼어들고.”

그런 말 하기 좀 미안했다. 본교도 엉망이긴 했으니까.

비사인이 울컥한 서정태를 대신해 차갑게 말했다.

“오히려 경고를 해줬으니 고마워하며 기간을 더 늘려야지, 그 무슨 망언이오?”

“망언은 비 공자께서 하고 계시오.”

“내가?”

“공식적인 후계자가 되신지 얼마나 되었소?”

“이 년 됐소.”

“이번 일을 꾸민 자들은 비 공자가 후계자가 되었을 시기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후계자가 되기 위해 노력했을 거요. 그렇지 않소?”

“그렇다고 칩시다.”

“그럼 이 년 전 소마님이 일으킨 혈사에 그들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증거 있소?”

“뭐요?”

비사인이 당혹해했다. 아마 그 부분은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소마님의 일 처리를 보셨을 거요. 화가 나는 상황에서도 애써 자신을 조절하시는 모습을요. 한데 이 년 전에는 왜 그랬을까요?”

나는 극악소마를 쳐다보았다. 극악소마가 설마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그때 그 일에도 모종의 배후가 있었다는 말씀이시오? 그들이 날 이용했다? 이 극악소마를? 그 당시 놈들이 죽고 싶어서 환장한 것처럼 덤빈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한마디 한마디 나올 때마다 차가운 마기가 짙어졌다.

이내 극악소마가 미친놈처럼 실실 웃었다. 그가 정말 화가 났을 때의 웃음이었다.

“이공자, 내가 농담처럼 다 쓸어버리고 한 십 년 갇혀 지내자고 했었는데, 이거 한 이십 년 갇혀 지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극악소마의 반응이 진짜임을 느낀 비사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이 년 전 혈사가 놈들의 음모였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드는 중일 것이다.

“그렇다고 백계상단을 물릴 생각은 없소.”

“좋소. 그럼 한 가지 조건을 추가하죠.”

“무슨 조건이오?”

“소마님과 내가 이번 일의 배후를 밝히는 일을 돕겠소.”

놀람의 연속이었다. 비사인은 하루에 이렇게 여러 번 놀란 적은 처음일 것이다.

“우리에게 돌아가라고 하셨지만 우린 돌아가지 않을 거요. 소마님은 당신들이 가란다고 돌아갈 분이 아니지 않소?”

극악소마가 나를 거들며 한마디 했다.

“난 가라면 굳이 남는 사람이지.”

내가 옅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저런 분이시오. 그러니 우리가 돕겠소. 놈들이 소마님을 끌어들인다면 우리도 참을 수는 없으니까.”

“배후를 밝혀낼 자신이 있으시오?”

“몇 년이나 암약한 그들을 완전히 밝히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그들을 밝힐 수 있는 확실한 실마리는 찾아드리겠소. 만약 그 실마리를 제공하면 앞서 내가 제안한 요구사항을 들어주시겠소?”

이런 제안을 한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배후가 누군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비사인은 결국 받아들일 것이다.

오늘 내가 보여준 모습에서 비범함을 보았을 테고, 무엇보다 귀주에서의 이익이나 극악소마에 대한 응징은 자신을 죽이려는 배후를 찾아내 없애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비사인과 일랑, 비사인과 서정태가 서로 전음을 주고받았다.

나는 그들에게 시간을 주었다.

그때 극악소마가 전음을 보냈다.

―저들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손해 보는 금액이 막대할 텐데요.

―반드시 받아들일 겁니다. 내기할까요? 밥 사기! 어떻습니까?

―또 밥과 내 가면에 집착하는군요. 싫습니다.

나는 전음으로 웃었고, 그는 웃지 않았다.

이윽고 비사인이 전음으로 주고받은 회합을 마쳤다.

“좋습니다. 받아들이지요. 대신 실마리를 줬을 때, 물러나겠소.”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나는 흑마검을 뽑아 그에게 내밀었다. 비사인이 검을 뽑아서 내 검에 살짝 부딪쳤다.

챙.

검과 검이 부딪치는 이 맑은 소리가 약속의 도장이었다.

교차한 검 사이로 우린 서로를 바라보았다.

뭉개지고 일그러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 내 눈빛은 더없이 담담했다.

그에 대한 특별한 호감은 없어도, 다음 후계자에 대한 악감정은 있었다. 정말 쓰레기 같은 놈이 그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니까.

물론 이번 삶이 과거처럼 흘러간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그놈 역시 화무기에게 죽게 되니까.

하지만 우리가 모두 살아남게 된다면?

그럼 의미는 있다.

차라리 당신이 살아남아라.

뺀질거리던 그 쓰레기의 잘생긴 얼굴보다 당신의 이 상처 입은 얼굴이 훨씬 무림에 도움이 될 테니까.

“그럼 또 봅시다.”

“그럽시다.”

그렇게 우린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백계상단을 떠났다.

돌아오는 마차에서 극악소마가 내게 물었다.

“시시했죠?”

“사도십삼랑 일곱 사이에 있는 사도맹 후계자를 만난 일이오? 그를 죽이려는 배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것이오? 대체 어느 지점이 시시합니까?”

극악소마가 웃었다. 습관적 웃음이지만, 나는 좀 달라졌다고 느꼈다.

“그가 받아들일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자기 목숨과 사도맹주 자리가 걸린 일입니다. 어떤 조건이라도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들을 잡아낼 자신은 있습니까?”

“그건 소마님께 드릴 질문입니다. 자신 있으십니까? 제가 아니라 소마님을 공격할 자들이라서.”

극악소마가 더 크게 웃었다.

“내 시시한 세상이 재밌어지는군요.”

“처음부터 시시하지 않았습니다. 무림은 이렇게 흥미진진한데 저나 소마님이 너무 본교에만 있었나 봅니다.”

“한데 놈들을 어디서 찾습니까?”

“우리가 찾을 필요 없을 겁니다. 그들이 찾아올 테니까요. 우린 그냥 우리 할 일만 하면 됩니다.”

극악소마는 진심으로 내게 감탄한 눈빛을 보냈다. 어차피 공격은 당할 상황이고, 그 과정에서 실마리를 얻어낼 수만 있다면 귀주의 골치 아픈 문제가 한 번에 다 풀리는 것이다. 그것도 지난 손해까지 다 만회하면서.

그의 감탄에 감격 하나를 더했다.

“사도맹 후계자가 죽을지 살지 나는 관심 없습니다. 내가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소마님의 세상입니다. 그 세상을 구경하는 일입니다.”

이번 여정은 극악소마의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고, 그 구경이 끝날 때쯤이면 우린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 것이다.

가만히 나를 응시하던 극악소마가 두 눈에 흥미로운 빛을 발하며 말했다.

“이번에는 못생긴 심장이 왜 못생겼는지 확인시켜 드리려 가야겠군요.”

그렇게 마차는 또다시 그의 세상 어딘가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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