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회 설령 좀 실없더라도.
나는 극악소마를 말리지 않았다.
“마음 가는 대로 하십시오.”
화가 나 있을 때는 화를 내야 한다. 지금 당장 누군가를 죽이러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지금 말릴 이유가 없다.
경험상 대부분의 실수는 마음이 급할 때 일어난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급할 필요가 없는데 나서서 말린다면 이건 내 마음이 급해서다.
이럴 때는 그냥 두는 거다. 저 솟구친 분노가 사그라들 때까지. 판단하지도 말고, 설득하려 들지도 말고, 그냥 가만히 있는 거다.
한발 늦게 나온 이안과 청면이 시체를 조사하는 동안 천화루주는 극악소마 앞에 섰다. 그녀의 얼굴에는 아직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
“어르신.”
오라버니란 호칭 대신 어르신으로 호칭이 바뀌었다.
“왜 그러느냐?”
“제대로 복수해 주십시오.”
그녀의 입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한 말이 나왔다.
“앞으로 두 다리 뻗고 편히 잘 수 있게 해주세요.”
“오냐. 천화루주를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무림에 보여주마.”
천화루주가 허리를 숙였다.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여인인 줄은 몰랐다.
나쁜 의미가 아니다. 나는 그녀에게 감탄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 역시 극악소마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럴 때 나서서 ‘저 때문에 오라버니가 위험해지실까 걱정됩니다.’ 이런 자존심 건드는 말을 했다간 극악소마는 더욱 미쳐 날뛰게 될 것이다.
정말 잘 어울리는 두 사람이 만났구나.
그때 시체에서 청면이 뭔가를 발견했다.
“저자들의 품속에서 이것이 나왔습니다.”
청면이 내민 것은 손바닥만 한 크기의 유엽비도(柳葉飛刀)였다.
“사도맹 귀주 지단에서 쓰는 비수입니다. 여길 보시면 그들만의 표시가 있습니다.”
“귀주 지단 놈들이란 말인가?”
“아닙니다. 그들 수준으론 이곳까지 잠입할 수 없습니다.”
청면은 확인을 바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확실히 천화루를 지키던 이들보다도 고수들이었습니다.”
내 대답을 들은 청면이 조심스럽게 한 가지를 추측했다.
“짐작하건대 루주님을 암살하고 이 유엽비도를 현장에 떨어뜨리고 가려 했던 모양입니다.”
“사도맹에게 뒤집어씌운다고? 날 멍청이로 아나? 이깟 얄팍한 수법이 통한다고 여겼단 말인가?”
원래의 분노에 무시당했다는 짜증까지 더해지자 주위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졌다.
“어쩌면 그 수법은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내 말에 극악소마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나는 차분히 할 말을 했다.
“지금은 루주님이 죽은 상황이 아니니까요. 만약 루주님 시체 옆에서 이걸 발견하게 됐다면, 지금 마음과는 완전히 달랐을 겁니다. 일단 사도맹 귀주 지단으로 달려가서 이 유엽비도의 주인부터 찾지 않았을까요?”
극악소마는 반박하지 못했다.
“아마 그쪽에도 뭔가가 준비되어 있었을 겁니다. 이 유엽비도의 주인이 소마님의 심기를 건드린다거나, 아니면 다른 뭔가가 준비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요.”
사람 미쳐 날뛰는 것 한순간이다. 자기가 아끼는 사람의 죽음이 가져오는 흥분과 분노를 결코 가볍게 여기면 안 된다.
“사도맹 놈들이 아니라면 이자들은 누군가?”
극악소마의 물음에 청면은 내게 질문했다.
“이자들이 어떤 무공을 사용했습니까?”
청면은 악인곡에서도 알아주는 똑똑한 사람이다. 셈과 계산이 빨라 장부를 볼 줄 아는 것은 물론이고, 무인과 무공, 무림 정세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었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자는 비수를 사용했습니다.”
나는 첫 번째 복면인이 천화루주를 찌르는 동작을 그대로 재현하며 설명했다.
“그리고 이자들은 은신술의 달인들이었습니다. 루주님을 공격하려고 몸을 드러낼 때까지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으니까요.”
그러자 청면은 누군가를 유추해냈다.
“이공자께서 보여주신 자세와 은신술의 고수라는 점, 그리고 다섯이라는 점으로 추측하건대 이자들은 혈수오영(血手五影)이 틀림없습니다.”
“혈수오영? 들어본 자들인데?”
극악소마의 물음에 청면이 대답했다.
“백야곡(白夜谷) 소속의 고수들입니다.”
백야곡은 사파에 속한 문파로 무림에 상당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곳이었다. 온갖 나쁜 짓이란 나쁜 짓은 다 하는 곳인데, 돈을 받고 사람을 죽여주는 일까지도 하고 있었다. 혈수오영은 백야곡을 대표하는 고수들이다.
“아마도 천화루와 우리와의 관계를 모르고 청부를 받아들였을 겁니다.”
청면은 그들의 정체는 물론이고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른 배경까지 추측했다.
정확히 봤다. 회귀 전 삶에서도 혈수오영은 극악소마와 깊은 연관이 있었다. 결국 극악소마의 손에 죽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오늘 이곳에서 천화루주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다시 말해서 극악소마가 나와 움직이면서 그들의 운명이 바뀐 것이다. 죽음이라는 결과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지만, 시기와 장소가 달라졌다.
극악소마는 망설이지 않았다.
“백야곡으로 간다.”
“네.”
청면이 두말없이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극악소마는 천화루주의 안위까지 챙겼다.
“자네도 당분간 나와 함께 움직이세.”
한 번 목표가 된 이상,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함께 움직이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어요.”
천화루주는 순순히 극악소마의 말에 따랐다.
그녀가 슬쩍 나를 쳐다보았다. 눈빛에 담긴 그녀의 감정이 느껴진다. 극악소마를 말리는 것은 당신에게 맡기겠어요, 라는.
떠날 준비가 끝나고 모두 마차에 올랐다. 마지막까지 타지 않는 나를 보며 극악소마가 마차 안에서 물었다.
“안 타실 겁니까?”
“어떻게 하면 소마님을 마차에서 내리게 할까 고민 중이었습니다.”
“말리려는 이유나 들어봅시다.”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우린 누구 소행인지 알았습니다. 지금 쳐들어간다면 벌어질 일은 싸움뿐이겠죠. 소마님과 제가 힘을 합친다면 그들을 몰살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몰살의 소마란 새 별호가 생길 수도 있겠네요.”
“비꼬는 겁니까?”
“아닙니다. 저는 백야곡을 싫어합니다. 온갖 더러운 짓에 돈 받고 사람까지 죽이는 자들이니 죽어 마땅합니다. 다만 우리 손에 피를 묻히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그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겁니다.”
“누구에게 맡기자는 겁니까?”
“지금 소마님은 흥분하셔서 한 가지 사실을 잊고 계십니다. 우린 비사인과 약속을 했습니다. 배후에 관한 실마리를 주면, 그들은 귀주에서 물러나고 지난 이 년간의 손해도 보상한다고 했지요. 지금 우린 그 실마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를 위한 조언이었음에도 극악소마는 나를 비꼬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주판을 두드리다니, 역시 우리 이공자님 비범합니다, 비범해요.”
나는 발끈하지 않고 차분히 그를 설득했다.
“제가 진짜 비범하다면 어떻게든 소마님을 말릴 수 있겠지요. 말릴 기회를 조금만 더 주시겠습니까?”
“해보십시오.”
어디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눈빛을 바라보며 나는 설득을 시작했다.
“아무리 강압해도 백야곡주는 절대 청부한 사람을 밝히지 않을 겁니다. 아니, 밝힐 수 없습니다. 배후를 밝히는 순간, 앞으로 아무도 백야곡에게 돈을 주고 일을 맡기지는 않을 테니까요.”
극악소마 역시 그런 사실쯤은 알고 있을 것이다. 악인들에 관해서는 나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결정적으로 백야곡을 몰살시키는 것은 사도맹 귀주 지단을 몰살시키는 것보다 더 문제가 될 겁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삼 년 전에 백야곡주의 딸과 사도맹 부맹주의 아들이 혼례를 맺었습니다. 두 사람은 사돈지간입니다.”
그 사실은 모르고 있었던 극악소마는 흠칫 놀라 청면에게 물었다.
“사실인가?”
그의 물음에 마부석에 있던 청면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맞습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나?”
“저도 이제야 생각났습니다.”
극악소마가 놀랍다는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이공자는 어떻게 알고 있었소?”
“강호에는 살수 조직도 많은데 왜 하필 백야곡에 일을 맡겼을까에 대해 의심하다 보니 그 일이 기억났습니다.”
내 머리가 비상한 것이야 극악소마도 여러 차례 겪었으니 그걸 기억한 것을 이상하게 여기진 않을 것이다.
그를 설득할 중요한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이중 계략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번 일을 꾸민 배후는 두 가지를 모두 안배했습니다. 유엽비도를 남겨 사도맹 귀주지단에게 뒤집어씌워도 좋고, 만약 지금처럼 암습이 실패해서 백야곡이 뒤집어써도 상관없고. 소마님과 사도맹의 충돌이라는 계략은 무조건 성공입니다.”
극악소마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눈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는 것은 어느 정도 분노가 가라앉았다는 의미.
“굳이 놈의 의도대로 움직여줄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시죠.”
극악소마의 옆자리에 앉은 천화루주와 마부석의 이안과 청면 모두 말없이 우리의 대화를 듣고만 있었다.
다행히 극악소마는 누가 지켜본다고 한번 세운 고집을 끝까지 고수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럼 내가 너무 실없는 사람이 되잖습니까? 이공자에게 피바다가 된 내 세상을 보여줄 것처럼 굴었는데.”
이미 양보하겠다는 뜻이 담긴 그의 말에 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무도 실없다 생각 안 하겠지만, 설령 그렇더라도 실없는 사람 좀 되면 어떻습니까?”
극악소마가 웃었다. 습관적 웃음에 피식하는 감정이 담겼다.
“저도 그렇고 여기 누구도 피바다를 보고 싶지는 않을 겁니다. 특히 우리 루주님은 이미 피를 한 바가지 뒤집어쓰셨거든요.”
극악소마가 천화루주를 쳐다보았다.
그녀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복수해 주세요! 가서 다 죽여주세요!”
극악소마가 다시 웃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는군.”
그제야 천화루주는 솔직한 심정을 밝혔다.
“네. 맞아요. 오늘은 피곤해서 그만 쉬고 싶어요. 오라버니 옆에서요.”
다시 호칭이 오라버니가 되었다. 극악소마의 분노가 다 가라앉았다는 것을 그녀도 느낀 것이다.
극악소마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그가 청면에게 말했다.
“가서 비사인에게 만나자고 해라.”
“네.”
마차에서 뛰어내린 청면은 휙 몸을 날려서 사라졌다.
극악소마와 천화루주가 마차에서 내렸다.
나는 천화루주에게 말했다.
“피곤하시겠지만, 일이 마무리될 때까진 소마님 옆에 딱 붙어 계십시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니까요.”
그녀의 안전도 챙기고 극악소마의 기분도 챙겼지만, 극악소마는 그냥 넘어가지 않았다.
“이공자의 아부신공은 고금제일인 것 같습니다.”
비웃음과 진심이 반쯤 섞인 감탄 아닌 감탄이었다.
“요즘 제가 자주 쓰는 가장 강력한 초식이죠. 대신 평범한 아부는 아닙니다. 끈질기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거기에 목숨까지 걸고 하는 아부신공이죠. 그리고 상대가 소마님인데 아부 좀 하면 어떻습니까?”
나의 당당함에 듣고 있던 천화루주가 참지 못하고 웃었다.
“웃어서 죄송해요. 이 정도면 신공이라 붙여도 될 것 같아서요.”
나를 향한 천화루주의 눈빛에는 고마움 이상의 호의가 담겨 있었다.
내가 아는 그녀는 은원이 확실한 여인이고, 오늘 그녀를 구해준 이 일은 앞으로의 내 길에 큰 도움이 될 것을 나는 확신했다.
두 사람이 들어가자 마부석에 망부석처럼 앉아 있던 이안이 참았던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런 압박감을 어떻게 버티시죠?”
일전에 서대룡이 했던 질문을 이제 그녀가 하고 있다.
“안 버티면? 극악소마가 치는 사고는 다 내가 책임지기로 약속하고 나왔잖아?”
“화가 머리끝까지 난 극악소마를 설득해야 한다? 저는 뒤도 안 보고 달아났을 거예요.”
“너는 나보다 더 잘 설득했을 거다.”
“과대평가세요.”
“내가 하는 과대평가가 아니야.”
“그럼요?”
“천화루주가 그러더라. 너 큰일 할 사람 같다고.”
“큰일 낼 사람 아니고요? 그냥 도련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겠죠.”
“나 듣기 좋으라면 내가 그런 큰일을 할 사람이라고 해야지.”
“그렇긴 하네요.”
이안이 마차에서 내렸다.
“술 생각나지?”
“네.”
“들어가서 한 잔 더 하자. 아까 들으려던 노래도 불러 달라고 하고.”
“다 갔죠. 그녀들이 아직 기다리고 있겠어요?”
“하긴 그렇겠네.”
“……저라도 불러드려요?”
“사양합니다. 그러잖아도 힘들었는데.”
“저 잘 불러요. 제 노래 한 번도 안 들어보셨잖아요?”
“상대가 검을 뽑아야 고수인 걸 아는 건 아니니까.”
“이거 또 숨은 고수를 몰라주시네. 나중에 듣고 놀라지나 마시라고요.”
이안을 뒤따라 건물로 들어가려다 문득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총총한 별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본교에 있을 내 사람들이 보고 싶었다. 시공이환술로 해변에 홀로 누워 따스한 햇볕을 쬐고 싶었다. 이안의 노래가 듣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