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회 네 수하니까 네가 얻어라.
극악소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흑살주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악인이 악인을 알아본다고 얼마나 섬뜩하고 두려웠는지 죽을 것같이 아팠던 어깨의 고통조차 잊을 정도였다.
“너냐고 물었다.”
흑살주는 질문이 뭔지도 잊었고 극악소마는 대답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피잉! 퍼억!
극악소마가 혈앙지를 발출하자 반대쪽 어깨가 꿰뚫렸다.
“으아아아아악!”
흑살주가 고통에 찬 비명을 내질렀다. 아무리 무인이라지만 생살이 뚫리는 고통은 참기 어려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난 담벼락에서 훌쩍 뛰어내려 극악소마에게로 걸어갔다.
“죽이지 마십시오.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나는 흑살주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네게 사도맹에 자리를 제안한 사람이 누구냐?”
물론 나는 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극악소마가 있는 데서 그 이름을 들어야 했기에 묻는 것이다.
흑살주는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저기 발 좀 치워주십시오.”
아직도 발로 그의 어깨를 짓밟고 있던 극악소마였다.
발을 치우자 구멍 나고 으스러진 어깨가 보였다. 무공은 고사하고 젓가락질도 못 하게 되었다.
나는 그의 양쪽 어깨의 혈도를 눌러 지혈해주고 고통을 줄여주었다. 호의로 치료를 해주는 것이 아님을 그에게 알렸다.
“말하지 않고 여기서 그냥 죽어도 돼. 대신 우릴 귀찮게 했으니 괴롭게 죽게 되겠지. 알려주면 살려준다.”
흑살주는 고통과 불신이 뒤섞인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상대가 나와 극악소마였으니 이런 신세가 된 거지, 이자도 산전수전 다 겪은 자다. 쉽게 입을 열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그가 발출하려다 떨어뜨린 암기를 들었다. 그의 독문암기 풍륜이었다.
주인은 형편없을지 몰라도 이 풍륜만큼은 훌륭한 암기였다.
내가 담을 향해 풍륜을 날렸다.
촤르르르르르륵!
빠르게 회전하며 날아간 풍륜이 담벼락을 따라 긁은 후 다시 내 손으로 돌아왔다. 마치 괴조(怪鳥)가 발톱으로 그은 것 같은 흔적이 담벼락에 깊게 남았다.
내가 단번에 풍륜을 다루자 흑살주는 경악했다. 풍륜은 다룰 줄 모르는 사람이 함부로 만졌다가는 손가락이 잘리는 위험한 암기였던 것이다.
흑살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누구야?”
“이제 좀 살만한가 보지? 이름도 물을 여유가 되고.”
“누구냐고!”
흑살주가 버럭했다. 그는 어차피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검무극.”
내 이름을 듣자 흑살주는 경악했다. 극악소마와 함께 왔으니 내 신분을 믿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극악소마에게 풍륜을 보이며 물었다.
“이거 저 가져도 됩니까?”
“그딴 암기는 줘도 안 가집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풍륜을 챙겨 두었다. 검을 뽑기 귀찮은 놈들 상대할 때 쓰거나, 암기 사용하는 수하를 만나면 선물로 주거나. 어쨌든 챙겨둘 가치가 있는 무기였다.
난 다시 흑살주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흑살주의 얼굴에는 절망과 허망함이 가득했다. 조금 전만 해도 찬란한 미래를 꿈꾸다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추락했으니 그 상실감이 오죽하겠는가?
“살아만 있으면 기회는 또 오는 법이다. 네가 내일 환골탈태를 해서 절대고수가 될지, 아니면 절세미녀를 만나 인생이 바뀔지 어떻게 알겠나? 이름만 대라.”
그라고 어찌 살고 싶지 않겠는가? 어깨가 박살 났어도 어떻게든 재기할 방법이 있겠지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인데.
“이름을 대면 그가 날 죽일 거다.”
“이름을 대면 우리가 그를 죽일 거다.”
“날 살려준다고 어떻게 믿지?”
“네겐 미안한 말이지만, 넌 내게 아무런 가치도 없어. 죽든 살든 무슨 상관이냐?”
오히려 이 말이 좀 더 설득력 있게 들렸나 보다. 흑살주가 고민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다 그가 한 사람의 이름을 댔다.
“냉엽(冷葉).”
사도맹 최정예 부대 귀수단(鬼手團)을 이끄는 귀수단주 냉엽. 그는 사도맹에서 가장 잘나가는 고수였다.
거짓말이었다. 우리가 냉엽을 죽이려다 죽기를 바라는 복수심에서 나온 흑살주의 거짓말.
“그래, 거짓말하는 것은 네 자유고, 네 팔을 뽑는 것은 내 자유고.”
나는 벌떡 일어나서 발로 그의 어깨를 밟고 팔을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악!”
진짜 뜯겠다는 마음으로 당겼다.
두두두둑.
흑살주가 제아무리 독심을 품었어도 팔이 생으로 뜯겨나가는 고통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만! 제발 그만! 으으으윽! 석관추(席官秋), 석관추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대답이 나왔다. 이번 일의 배후는 사도맹 대장로(大長老) 석관추였다.
“정말 석관추인가?”
흑살주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관추는 사도맹에서 존경받는 전대 고수로 오랫동안 원로원에 있어서 거의 잊힌 존재였다. 그가 권력다툼에 나섰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다.
흑살주 역시 석관추 정도 되는 인물의 회유가 아니었다면 결코 조직을 접고 사도맹에 투신할 결심을 하진 않았을 것이다.
“살려준다는 약속은 지켜라.”
“당연히…….”
그 순간!
퍼억!
흑살주의 머리통이 땅바닥에 수박을 내리친 것처럼 박살 났다
극악소마의 손바닥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마극광폭장을 발출해서 죽여버린 것이다.
내가 흑살주에게 하려던 말을 마저 했다.
“당연히 못 지키지. 널 밟고 있는 사람이 극악소마인데.”
극악소마는 뭐라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죽은 흑살주는 안중에도 없었다.
흑살주의 품을 뒤지자 두툼한 봉투가 나왔다. 안에는 고액의 전표들이 가득 들어있었는데 세어보니 백만 냥이었다. 미리 전액을 다 받은 것을 보니, 어차피 암살의 성공 여부는 상관이 없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 돈을 극악소마에게 주었다.
“소마님을 죽이라는 청부를 받고 받은 돈이니 소마님 것입니다.”
그러자 극악소마는 그중에서 오십만 냥만 빼서 자신이 가진 후, 나머지 오십만 냥이 든 봉투를 내게 주었다.
“함께 죽을 뻔했으니, 반씩 나눠야지요. 사양 말고 받으시오.”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극악소마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과한 사람은 아니었다. 만약 그가 탐욕까지 더해진 인물이었다면, 그는 또 다른 사람으로 내 앞에 서 있을 것이다.
흑살주가 가지고 떠나려던 짐에는 보물들이 가득했다. 하는 일이 일이다 보니, 전장에 돈을 맡겨둔 것이 아니라 귀한 보물로 바꿔서 직접 보관해 둔 모양이다.
“팔면 돈이 좀 되겠습니다. 나중에 청면이 오면 팔게 하시죠.”
“그건 이공자가 가지세요.”
“이것은 소마님이 가지십시오.”
“경공에 졌으니 상금이라 생각하세요.”
“너무 큰 상금입니다. 술 한잔을 하시는 것이 훨씬 싸게 먹히실 텐데요.”
“제 술 한 잔은 그것보다 비쌉니다.”
나는 기분 좋게 웃었다. 준다는 것은 억지로 사양하지 않았다.
예전에 고월이 내게 말했다. 돈에는 이름표가 없다고. 그때그때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 가치가 정해진다고.
극악소마가 내게 물었다.
“석관추 짓이 확실하다고 믿습니까?”
“그래서 더 묻지 않고 죽여버리신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그냥 꼴 보기 싫어서 죽였습니다.”
정말 그랬을 거란 생각에 나는 피식 웃었다.
“제가 봤을 때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석관추라. 정말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군요. 나이가 구십은 된 것 같은데. 다 늙은 그가 사도맹주 자리를 욕심내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군요.”
“석관추가 총애하는 손자가 한 명 있습니다. 제가 듣기로 야망이 무척 크다고 들었습니다.”
“혈육의 정 때문이다?”
“죽음이 멀지 않은 노고수의 혈육에 대한 애정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닐 겁니다. 어쨌든 석관추가 배후라면 놈을 족치기 쉽지 않을 겁니다.”
공감한다는 듯 극악소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대가 강적이란 사실에 오히려 그는 기뻐하고 있었다. 작은 눈구멍 속에서 큰 기쁨을 읽을 수 있었다.
반 시진 후, 이안과 청면이 그곳에 도착했다.
“오느라 힘들었겠지만, 이것부터 처리하고 쉬자.”
나는 이안을 데리고 저자로 나갔다.
그곳에서 몇 군데를 돌며 흑살주의 보물을 모두 팔았다.
시세보다 싸게 팔았음에도 자그마치 사십만 냥에 달했다.
“그냥 이 돈으로 평생 잘살았으면 되었을 것을, 무슨 욕심을 그리 부렸나? 이 돈만 해도 다 쓰고 죽지도 못할 돈인데.”
“사람 욕심이 끝이 없잖아요?”
“이안아. 나중에 내가 욕심부린다 싶으면 꼭 말려라. 이럴 거면 그때 흑살주는 왜 욕하셨어요, 팍팍 비웃으면서.”
“제가 욕심부린다고 정신없을지도 몰라요.”
“네가?”
“무공수련하면서 느껴져요. 제가 욕심이 정말 많은 사람이란 걸요. 어서 대성을 이뤄서 강적들과 싸우고 싶은 욕망에 매일 시달리고 있거든요.”
“그건 네 욕심 때문이 아니라 비천검법 때문이다.”
“검법때문이라고요?”
“비천검법과 같은 극상승의 무공은, 무공이 사람을 유혹하고 자극한다. 거기에 잡아먹히면 어떻게 될지 알지?”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똑똑하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알아들었을 것이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대륙전장으로 갔다.
이번에 얻은 총 구십만 냥 중 내 앞으로 육십만 냥을 맡겼고, 이안에게 삼십만 냥을 줘서 맡기게 했다. 삼백 냥도 큰돈인데 삼십만 냥을 주자 그녀는 기겁하며 놀랐다.
“도련님, 이 돈은 절대 받을 수가 없어요!”
“너 술 사 먹으라고 주는 돈 아니다.”
“그럼요?”
“나중에 귀영대를 운영하다 보면 수하들을 위해 돈을 써야 할 때가 있을 거다. 그때 써라.”
“너무 큰 돈이잖아요?”
“큰돈도 다룰 줄 알아야 한다.”
“제 평생에 이렇게 큰돈은 처음이에요.”
“이제 널 매수하려면 적어도 삼십만 냥 이상은 있어야 하지 않느냐?”
“제가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 돈에는 안 넘어갑니다.”
“그럼 얼마면 넘어갈 것 같아?”
이안이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삼백만 냥?”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 삼천만 냥?”
그래도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삼만 냥? 설마 삼천 냥?”
그제야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삼억 냥입니다. 구해오세요. 저를 돈으로 사려면 삼억 냥만 주면 됩니다.”
“이 세상 돈을 다 모아도 그 돈은 안 돼.”
“그게 접니다.”
우린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솔직히 기분이 좋았다. 돈으로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었으니까.
“돈 남으면 맛있는 것도 좀 사 먹고.”
“많이 남길 겁니다.”
“다 남겨도 된다.”
그렇게 돌아오는 길에 이안에게 넌지시 물었다.
“청면은 어때?”
“좋은 분인 것 같아요.”
“아니, 네 수하로 어떻겠냐고.”
“네?”
이안은 깜짝 놀랐다.
“제 수하라니요?”
“귀영대 제일조 조장 청면. 든든하니 어울릴 것 같은데. 조직 이름이 귀신 그림자인데 푸른 가면을 쓴 청면이라. 잘 어울리잖아?”
청면의 충성심이 어떤지 알기 때문에 하는 말이었다.
“어울리고 말고 문제가 아니잖아요? 청면님은 차기 마존을 노리는 분이라고요. 실제로도 가장 유력하고요.”
하지만 그는 평생 마존이 되지 못한다. 극악소마가 너무 오래 살아남기 때문이다.
평생 저 고약한 성격의 극악소마를 뒷바라지하는 인생보다, 귀영대 조장부터 시작하는 인생이 훨씬 더 낫지 않을까?
조장되고, 나중에 대주되고, 또 뭐가 될지 모를 일이다.
지금 삶은 답답한 결말로 정해져 있지만, 새 삶은 결말이 열려 있으니까.
“정 부담스러우면 초창기에 귀영대가 자리 잡을 때까지만 조장을 맡아달라고 하면 되지.”
“해주겠어요?”
“안 해줄 이유도 없지.”
“에이. 그래도.”
“이안아. 너는 귀영대 조장이 마존의 후계자보다 낮다고 생각하냐?”
“……당연히 낮잖아요?”
“이안!”
“네!”
“내 직속 수하이자 귀영대주인 너는 마존의 후계자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다. 나는 천마가 될 몸이니까.”
진심으로 한 말임을 느끼고 이안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절대 도련님을 무시해서 드린 말씀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마존 하면 왠지 아직은 너무 어려워서요.”
“안다. 이제부터 기준을 바꾸는 거다. 그럼 청면을 조장으로 삼는 일이 그리 부담스러운 일은 아닐 거다.”
“네.”
“그리고 지금은 청면이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 억지로 시킬 수는 없는 일이니. 극악소마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거고. 천천히 공을 들여야지.”
사람 마음 하나 얻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지 너는 아직 모를 것이다.
“네 수하니까 네가 노력해서 얻어라.”
“네.”
그렇게 우린 흑살주의 은신처로 돌아왔다.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극악소마가 이후 일을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작정입니까?”
“석관추를 바로 상대하다간 본교와 사도맹간에 전쟁이 발발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한 사람을 앞세워서 싸울까 합니다.”
“그게 누굽니까?”
“비사인입니다.”
사도맹의 후계자 비사인이라면 석관추를 상대할 때 앞세울 최적의 인물이었다.
나는 극악소마를 응시하며 나직하게 말했다.
“소마님과 제가 사도맹 후계자 결정에 개입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