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11화 (111/214)

제111회 몰랐으니까.

극악소마는 즐거워했다.

마존으로 온갖 경험을 하면서 살아왔겠지만, 사도맹 후계자 결정에 관여한 적은 없었을 것이다. 아니, 관여할 일이 있을 거라고 생각조차 못 했을 거다.

“정말 우리가 후계자를 정하자는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현 후계자인 비사인이 괜찮다 싶으면 그가 후계자 자리를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고, 다른 누군가 우리에게 이득일 것 같으면 그를 앉히는 거죠. 제가 오지랖이 넓지만 사도맹 후계자만큼은 그들 개개인의 인성과는 별개로 철저히 본교에 이득이 되는 사람을 앉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본교뿐만 아니라 내게도 이득이 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럼 가장 병신 같은 놈을 앉혀야지요.”

“아뇨, 그랬다간 오히려 무림 정세가 불안정해집니다. 적어도 어떤 짓을 저지를지는 예측되는 자를 앉혀야지요. 어쨌든 이번 일을 잘 처리하면 우린 본교에 큰 공을 세우게 될 겁니다.”

극악소마가 크게 웃었다. 석관추라는 강적을 상대하는 것만 해도 기쁜데, 그 일로 공을 세우면 그야말로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제 드디어 이공자의 세상을 보게 되는 겁니까?”

눈구멍 속 그의 눈빛에 기대감이 스쳤다.

“아닙니다. 이 세상은 여전히 소마님의 세상입니다.”

“제 세상이라고요?”

“소마님이 안 계신다면 애초에 이뤄지지 않을 일입니다. 저 혼자 사도맹의 대장로를 상대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또 아부신공을 발휘하는 겁니까?”

“신공이 왜 신공이겠습니까? 평생 갈고 닦아야지요.”

내 농담에 극악소마는 즐거워했다. 돌아가는 상황이 흥미로운 것이다.

이안과 청면은 천화루주가 있는 안가로 보냈다.

천화루주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지만 다른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은 위험해서다. 이제 주적이 사도맹 대장로 석관추라는 것이 밝혀졌으니, 앞으로 어떤 고수가 튀어나올지 모를 일이다.

두 번째는 이안과 청면이 시간을 보내기를 바라서다. 이안에게 말했다. 네 수하는 네가 얻으라고. 과연 그것을 해낼지는 이안에게 달렸다. 이안의 그릇이 청면을 담아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떠나기 전 이안은 내게 딱 한 마디만 했다.

“도련님이 잘못되면 저도 죽습니다.”

“오냐, 목숨 두 개라 생각하고 싸우마.”

청면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극악소마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극악소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하에게 무뚝뚝한 극악소마와 청면이 공적인 명령 이외에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두 사람을 안가로 보내고 극악소마와 나는 경공으로 내달렸다.

“우린 어디로 갑니까?”

“비사인을 만나러 백야곡으로 갑니다.”

일전에 비사인에게 극악소마를 죽이려 했던 자들이 백야곡의 혈수오영임을 알려주었다.

이후 비사인이나 백야곡에서 어떤 새 소식이 들리지 않았으니, 아직 비사인은 백야곡에서 배후를 찾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의미다.

* * *

비사인은 백야곡 인근의 한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붉었다. 술기운 때문이 아니라 열받아서 그런 것이다. 고민이 굳어질수록 얼굴의 흉터는 더욱 흉측해졌다.

그는 아직도 배후를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귀주에서 백계상단을 물리고 막대한 돈을 주는 조건으로 받은 귀한 정보였는데,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다.

이곳에 올 때까지만 해도 어떻게든 백야곡주를 압박해서 혈수오영을 시켜 극악소마를 죽이려 한 것을 실토받으려 했다.

정 안 되면 힘으로라도 밀어붙여서 강압적으로 자백을 받아내려 했다. 자신과 일곱 명의 사도십삼랑이라면 백야곡주나 백야곡의 고수들도 어쩔 수 없을 테니까.

하지만 자신들이 백야곡에 도착했을 때는 백야곡주는 어디론가 출타한 후였다. 도착하기 하루 전까지도 이곳에 있었는데, 수족들만 거느리고 급하게 곡을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수하들에게 겁을 줘가며 백야곡주의 행방을 알아내려 했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자신이 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 들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밀이 자꾸 새고 있다.

비사인이 다시 술을 한잔 비웠다. 문득 검무극이 떠올랐다. 궁지에 몰렸다는 생각이 들 때, 자신도 모르게 그가 떠오르곤 한다.

‘쓸데없이.’

비사인이 검무극을 떨쳐내려는 듯 다시 술을 마시려던 바로 그때였다.

죽립을 눌러쓴 남자가 그가 앉아 있던 자리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주위에 앉아 있던 일곱 명의 사도십삼랑이 벌떡 일어나서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다가온 남자가 죽립을 벗으며 자신을 드러냈다.

“오랜만이오.”

자신을 찾아온 남자는 바로 검무극이었다. 검무극 생각을 하고 있던 차에 그가 등장하자 비사인은 정말 깜짝 놀랐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소?”

비사인이 의심 가득한 얼굴로 검무극을 노려보았다.

반면 검무극은 차분했다.

“내가 준 정보니 백야곡에 왔으리란 것은 당연히 추측할 수 있는 일이고, 이렇게 몰려다니는데 어찌 못 찾겠소?”

검무극이 주위의 사도십삼랑을 쳐다보았다. 여덟 명의 무인이 몰려다니는데, 어디에 있는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는 말이었다.

“앉아도 되겠소?”

“그러시오.”

검무극이 비사인 앞에 앉았다.

비사인이 사도십삼랑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명령했다. 다들 긴장하며 제자리에 앉았다. 일랑 백철기는 비사인의 옆자리에 앉아 언제든 검을 뽑을 준비를 했다.

“여긴 왜 온 거요?”

무뚝뚝하게 물었지만 비사인은 내심 검무극이 반가웠다. 그런 감정이 들어선 안 되는데, 자꾸 의지하려는 마음이 든다.

“비공자 당신에게 알려줄 중요한 정보가 있어서 왔소.”

“뭐요?”

“이번 일을 꾸민 배후가 누군지 알아냈소.”

순간 비사인은 깜짝 놀랐다. 그뿐만 아니라 옆에 있던 백철기는 물론이고 다른 사도십삼랑들도 모두 놀랐다.

“그게 누굽니까?”

검무극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이렇게 중요한 정보를 그냥 알려줄 수는 없지요.”

다음 순간 비사인은 아차, 하는 마음으로 검무극을 쳐다보았다.

‘이공자, 당신은 큰 실수를 저질렀소.’

이 자리에서 그런 중요한 사실을 말했으면 안 되었다.

이유는 바로 사도십삼랑 때문이었다.

비사인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 일곱 명의 사도십삼랑 중에 자신을 죽이려는 자가 심어둔 첩자가 있다고 의심하고 있었다.

최근 여러 일이 잘 풀리지 않았는데, 그것도 첩자가 먼저 상대편에 정보를 빼돌리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이번에 백야곡에 도착했을 때, 백야곡주가 자리를 비운 것을 보자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누군가 정보를 저쪽에 전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런 중요한 정보가 누설되었으니, 이 사실이 배후자에게 들어가는 것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일전에 검무극에게 전음을 보내다 만 것도 이런 사실을 말하고 도움을 바랄까 했던 것이었는데, 차마 도움을 바라진 못했다.

그는 괜히 전음을 보냈다고 후회했다. 사도맹 후계자가 천마 혈육에게 도움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 했다고 얼마나 자책했는지 모른다.

“멀리서 왔더니 목이 마르군요.”

검무극이 잔을 내밀었다.

비사인이 검무극의 술잔에 술을 부어주었다.

바로 그때 검무극의 전음이 비사인에게 날아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쥐새끼부터 잡고 이야기합시다.

―!

술을 따르던 비사인의 손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마저 부었다.

비사인은 알 수 있었다. 검무극이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을. 어쩌면 내내 고민했던 일이 풀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비사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검무극을 만난 후의 변화다. 이자는 자꾸 자신의 심장을 빨리 뛰게 한다. 자꾸 비교하게 만들고 초라하게 만든다.

‘젠장!’

기대하게 만든다.

그날 밤. 한 복면인이 마을에서 가장 큰 객잔 지붕에 소리 없이 내려섰다.

그는 지붕 끝 기와 아래 뭔가를 숨겼다. 밀서를 보내는 정해진 규칙이 있었다. 어떤 마을에 가든 그 마을에서 가장 규모가 큰 객잔 지붕 모서리에 밀서를 숨겨두면 그걸 가져가서 전서로 보내는 사람이 있었다. 산속이라면 숨겨두는 나무가 정해져 있고, 들판이라면 묻어두는 장소가 정해져 있는 것이다.

밀서를 숨기고 서둘러 그곳을 벗어나려던 그때, 뒤에서 누군가 말했다.

“검무극이 배후의 정체를 알아냄.”

복면인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돌아보니 어느새 소리 없이 접근했던 검무극이 자신이 숨겨둔 밀서를 꺼내서 읽고 있었다.

검무극은 백야곡의 거처에서 비사인과 함께 술 마시다 잠든 것을 확인하고 나왔었는데.

“내가 잠귀가 밝거든. 자고 있는데 누가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라고.”

복면인은 순간 이 모든 일이 함정이었음을 깨달았다. 알려야 할 내용이 너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서두른 것이 화근이었다.

복면인이 그대로 달아나려고 하던 그때.

“널 따라 달려가서 모두에게 말할 거다. 사도십삼랑 중 지금 자리를 비운 사람이 배신자라고. 내가 경공만큼은 자신 있어서 나보다 빨리 돌아가지 못할 거야.”

복면인이 흠칫 신형을 멈췄고 검무극은 그를 도발했다.

“차라리 지금 여기서 날 죽이는 게 나을 거다. 그럼 적어도 네 정체는 드러나지 않겠지.”

복면인은 검무극을 향해 돌아서며 검을 뽑아 들었다.

복면인은 여전히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일이 어찌 될지 모르는데, 굳이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된 것,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살인멸구하고 조용히 돌아가서 모른 척하는 것.

복면인은 곧장 검무극을 향해 쇄도했다.

쉬익!

둘이 모이면 마존보다 강하다고 알려진 실력자답게 복면인의 움직임은 대단했다.

쉬이이익.

복면인의 신형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며 검무극에게 날아들었다.

챙!

처음 검과 검이 부딪치는 순간, 복면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한 그 순간, 그는 알았다. 검무극이 자신보다 월등한 내공을 지녔다고.

뛰어난 것은 내공만이 아니었다.

챙! 챙!

지금까지 적들을 수월하게 죽였던 자신의 초식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급소를 노리는 그의 공격은 어김없이 검무극의 검에 막혔다. 자신은 온 힘을 다하는데, 상대는 대충 막는 것처럼 느껴졌다.

명백한 실력 차를 느낀 복면인은 십여 수만에 반대 방향을 향해 몸을 날렸다. 이대로 멀리 달아나버려야 살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바로 그때!

피잉!

퍽!

날아든 지풍에 그의 허벅지가 꿰뚫렸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그가 바닥을 뒹굴었다가 벌떡 일어났다. 앞을 막고 내려선 사람은 바로 극악소마였다.

“남자가 싸우다 등을 돌리다니? 부끄럽지도 않나?”

수치심에 복면인의 눈가가 붉어졌다.

뒤쪽에 어느새 검무극이 와 있었다. 문제는 이곳에 등장한 사람이 이들 두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육랑!”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복면인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비사인과 나머지 사도십삼랑이 모습을 보였다.

복면인은 바로 여섯 번째 사도십삼랑인 육랑이었다. 이들의 수장인 일랑 백철기는 정말 화가 난 상태였다.

“정말 네가 배신을 한 것이냐?”

눈으로 보고도 백철기는 믿을 수 없었다. 누군가 자신에게 열세 명의 사도십삼랑 중에서 가장 배신 안 할 것 같은 순서대로 뽑으라면 첫 번째로 뽑을 사람이 육랑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왜 이런 거냐? 사도십삼랑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몰랐더냐?”

육랑이 복면을 벗었다.

“왜 안 됩니까?”

“뭐?”

“왜 우린 누가 정한지도 모를 그딴 규칙에 매여 살아야 합니까?”

“이놈아, 그럼 무인으로 살면서 뭘 더 바랐더냐? 이런 삶을 살기 싫었으면 애초에 충성을 맹세하지 말았어야지!”

“몰랐으니까. 평생 갈고 닦은 무공으로 이렇게 한심한 인생을 살게 될 줄 몰랐으니까! 대공자 하나 지키려고 이렇게 몰려다니는 인생이 될 줄 몰랐으니까요!”

순간 비사인의 표정이 굳어졌다. 육랑이 저런 마음으로 자신을 따라다니는 줄 몰랐다. 다른 이들도 같은 마음일까?

일랑이 그에게 소리쳤다.

“변명은 집어치워라! 그쪽에서 뭘 준다더냐? 대체 무엇으로 이 한심한 인생을 벗어나게 뭘 준다더냐?”

육랑은 대답하지 못했다. 일랑에게, 그리고 다른 동료에게 할 말이 아니었다. 막대한 돈과 높은 직위를 약속받았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나는 배신자가 아닙니다. 내 인생을 찾으려 했을 뿐입니다!”

버럭 소리를 내지른 육랑은 동귀어진(同歸於盡)할 상대를 골랐다. 그가 선택한 사람은 검무극이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다!”

육랑이 검무극을 향해 몸을 날렸다.

흥분하지 않았을 때도 상대가 안 되었는데, 지금은 상처까지 입은 상태였다.

검무극을 향해 초식을 쏟아내던 바로 그때.

푸욱!

그의 등을 뚫고 가슴으로 검날이 튀어나왔다.

육랑이 천천히 고개를 돌리자 비사인이 뒤에 서 있었다.

“……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육랑의 원망에 비사인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깐 이공자 때문이라더니.”

더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듯 비사인이 검을 뽑았다.

달빛 아래 육랑의 몸에서 피 분수가 뿜어졌다. 가만히 서 있었으면 검무극이 피를 뒤집어썼겠지만, 그는 옆으로 피했다. 이 싸움은 어디까지나 사도맹의 집안싸움이었으니까.

비사인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검을 손에 쥔 채 검무극에게 물었다.

“자, 이제 말해주시오. 배후가 누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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