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절대회귀-113화 (113/214)

제113회 연자는 부디.

천천히 만사동으로 걸어 들어갔다.

사도맹에서 성지로 만들었기에 내부는 잘 꾸며져 있었다. 공기도 잘 통했고, 곳곳에 박힌 야명주 덕분에 내부는 밝았다.

어느 정도 걸어 들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이곳이 바로 만사동이었다. 새로 만들어 붙인 벽면에 만사종주의 인생이 글과 그림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출생에서부터 불우했던 어린 시절,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던 무공수련 시절, 젊은 시절의 무용담, 이후 사파의 대종사가 되기까지의 일대기가 모두 적혀 있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비사인이 나를 넣어준 이유가 여기 있었다. 삼백 년 전 전설이라 불렸던 사파고수의 일대기가 기록된 곳에 불과했으니까.

그의 인생에서 절정은 천마와의 싸움이었다.

비록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 싸움에서 살아남은 것으로 그는 지금도 회자되는 인물이 되었다.

벽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상을 치료하며 이곳에서 열흘간 있다가 나갔다. 다행히 이곳에 물이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고 했다.

이후 은거한 후 무림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적혀 있었다.

그가 죽기 전 자신의 무학에 대한 강론을 이곳에 남겼다는 사실은 적혀 있지 않았다.

그럼 그것이 어떻게 알려졌느냐?

지금부터 십 년 후, 이곳에 지진이 나면서 벽이 무너졌고 새로운 공간이 발견된 것이다.

나는 흑마검을 뽑았다.

지이잉.

흑마검에 하늘빛 검강이 서렸다.

검강이 서린 검을 서쪽 벽 아래쪽에 박아넣었다. 글과 그림을 위해 만들어 붙인 벽 아래쪽 구분선을 따라 사람 하나가 통과할 수 있는 크기로 반듯하게 잘라냈다.

무너진 벽이 바로 이 서쪽 벽이었다. 벽은 두껍지 않았는데, 난 벽을 관통할 정도로 깊숙이 자른 후 내공을 이용해서 돌덩이를 밀자 안으로 밀려들어 갔다.

그곳을 기어서 안으로 들어갔다. 이 안쪽 공간이 바로 만사종주가 죽기 전에 자신의 무학에 대해 남겨둔 공간이었다.

벽에 그가 남긴 무학에 대한 강론이 적혀 있었다. 비밀스러운 공간에 따로 남긴 것으로 볼 때, 인연이 닿지 않는 사람이 이 내용을 보기를 바라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그것을 읽었다.

천마와의 싸움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기반으로 한 무학 전체에 대한 강론이었다.

만사종주의 무학이 너무나 높고 고절했다. 일반 고수들은 백 번 봐야 아무 소용없는 뜬구름 잡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나는 일반 고수가 아니었다.

나는 읽고 또 읽었다. 근래 삼백 년 이래 사도 최고수가 남긴 무리. 외울 필요가 없었다. 이해의 영역이었다.

처음에는 다름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본교 마공과는 전혀 다른 사파 무공이 주는 새로운 배움.

하지만 읽고 반복해서 읽을수록 결국 모든 무공은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되었음을, 그 같음에서 주는 깨달음을 얻었다.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하다. 어떤 부분이 다르고, 어떤 부분이 같은지. 이 미묘한 차이가 주는 현묘함을 아는 것이 절세의 고수가 되느냐 마느냐의 차이였다.

나는 검을 뽑아서 휘둘러 보다가 다시 글을 읽었고, 다시 미친놈처럼 초식을 구사했다. 이 경험은 신선하면서도 강렬했다.

내가 오직 마공만 익혔다면, 혹은 내가 오직 사파의 무공만 익혔다면, 만약 그랬다면 그의 가르침이 이렇게 크게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마공을 기반으로 뒀지만, 평생 계파를 초월한 삶을 살았다. 그랬기에 만사종주의 마지막 깨달음은 나에게 큰 울림을 주었다.

그렇게 비천검법의 초식을 구사하던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어느새 내가 비천검법이 십이성 대성을 이뤘다는 것을.

마치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듯, 만사종주의 가르침은 자연스럽게 나를 다음 단계로 이끌어 준 것이다.

십성 대성과 십이성 대성은 또 다른 차원의 경지. 하나의 무공이 궁극의 경지에 이르러 드디어 완성된 것이다.

“아!”

나는 기뻤다. 지난 생애에서도 나는 그 어떤 무공도 십이성 대성을 이룬 바 없다. 이제 비천검법이라는 고절한 무공의 십이성 대성을 이루자 날아갈 듯이 기뻤다.

나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그가 비록 사파의 대종사였지만 진심으로 감사를 전했다.

“큰 가르침을 남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비록 사도인이 이 귀한 인연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대의 후손을 도와주려는 사람이 받았으니 너무 아쉬워하진 마십시오.”

그렇게 절을 하고 일어나려 했을 때, 내 눈에 뭔가가 띄었다.

엎드려야 보이는 곳에서 뭔가가 숨겨져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서찰이었다. 만사종주가 남긴 서찰이었다. 그중 마지막 구결이 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 만년흑영지(萬年黑靈芝)를 복용하더라도 천마를 죽일 수 없음을 깨달았다. 따라서 이것을 취하지 않고 후대에 남기니, 연자는 부디 이 인연을 귀히 여기도록 하라.”

“만년흑영지?”

나는 깜짝 놀라서 서찰이 놓여 있던 주위를 살폈다. 서찰이 놓여 있던 뒤쪽에 작은 구멍이 있었다. 안을 쳐다보니 정말 그곳에 만년흑영지가 자라고 있었다.

살짝 내공을 주입해서 밀자 흙벽이 무너지며 작은 공간이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곳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바로 만년흑영지였다. 지금까지 복용했던 그 어떤 영약보다 효험이 좋은 영약이었다.

내가 만사종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올리지 않았다면 서찰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고, 만년흑영지도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만사종주가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우연인지 몰라도 나는 두 번째 기연을 얻은 것이다.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나는 신중하게 만년흑영지를 캤다. 만년흑영지는 오히려 일반 영지보다 크기가 작았다. 오랜 세월 동안 쌓이고 쌓인 영험한 기운이 이 작은 버섯에 담겨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만년흑영지를 복용했다.

엄청난 기운이 온몸 가득 퍼져나갔다. 이 기운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먹었다간 오히려 혈맥이 터져버릴 수도 있는 막대한 기운이었다.

하지만 나는 천맥강화술로 강화된 튼튼한 혈맥에 앞서 복용한 영약으로 쌓인 정순한 내공을 바탕으로 만년흑영지를 아무런 부작용 없이 녹여낼 수 있었다.

진기를 일주천하고 이주천하고 삼주천하고, 나는 정성껏 기운을 녹여내는 데 집중했다. 그 기운이 단전에 갈무리한 후 눈을 떴다.

아버지나 무림맹주, 사도맹주가 각각 얼마나 심후한 내공을 지녔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내공만 따지면 세 사람 못지않은 내공이 되었다고 자신할 수 있었다.

서찰이나 벽에 남겨진 만사종주의 가르침은 그대로 두었다. 지진이 나서 벽이 무너질 때, 대부분이 다 훼손되기에 굳이 만사종주의 가르침을 내 손으로 지울 필요는 없었다.

나는 그곳을 기어 나와 파내었던 돌덩이를 원래대로 채워 넣었다.

아직 약속한 두 시진이 되려면 시간이 남았기에 나는 천마와 만사종주의 마지막 싸움 부분을 읽어보았다.

만사종주와 천마와의 싸움에 천마혼이 발현되어 있었다. 사파인들이 그린 그림이니 천마혼을 마치 악마처럼 묘사해 두었다.

나는 천마혼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구화마공의 대성을 이루면 천마혼을 발현할 수 있다.

과연 나도 언젠가는 천마혼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 내 천마혼은 어떤 모습을 한 채 발현할까? 저렇게 거대한 모습 말고 작은 모습으로도 나타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바로 그때.

스윽. 그림 속 천마혼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서 천마혼을 다시 쳐다보았지만, 천마혼은 그림 속 모습 그대로였다.

사실 두 번째 경험하는 일이었다.

예전에 아버지가 마기로 나를 압박할 때, 심연 속에서 거대한 무엇인가가 나를 쳐다보는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딱 그 느낌이었다.

구화마공에 대한 간절한 마음 때문에 자꾸 환상을 보는 것일까?

“다음에는 그림이 아니라 내가 발현했을 때 봅시다.”

그렇게 천마혼에게 인사한 후 나는 만사동을 나왔다.

밖에서 비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살폈다. 하지만 그의 수준으로는 어떤 변화도 알아볼 수 없었다.

“잘 읽었소. 정말 성지라 할만한 곳이오. 만사종주는 정말 대단한 분이오.”

“두 번 다시 올 생각 마시오.”

“당신들에게나 성지지, 내겐 답답한 지하동굴일 뿐이오. 한번 봤으면 됐소. 자, 나갑시다.”

우린 같이 들어왔던 연못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폭포 아래로 나온 우리는 절벽 위로 날아올랐다. 단번에 올라온 나에 비해 그는 중간에 절벽을 한 번 박차고 올라섰다.

사도맹 본단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쉼 없이 달리다가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언덕에 나란히 앉아 쉬던 중에 비사인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지금쯤 한바탕 난리가 났을 거요. 사도맹의 후계자가 실종 상태니 말이오. 그것도 천마의 자식과 함께.”

“생각보다 별일 없을 수도 있소.”

그러자 비사인이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오?”

“소마께서 일랑에게 언질을 줬을 거요. 위험한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테니 굳이 소란 떨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하라고 극악소마에게 시켰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때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지 않겠소?”

“후계자가 되고 사도십삼랑과 떨어져 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오. 그런데도 난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전혀 예측할 수 없소.”

그는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난 그들의 분열을 유도했기에 그에게 약간의 미안함이 있었다.

“혼자가 된 소감이 어떻소?”

“아직은 잘 모르겠소. 많이 불편할 줄 알았는데, 그리 불편하거나 불안하지 않소.”

“나와 있어서 그럴 거요. 내가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소.”

뻔뻔한 내 말에 비사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와 함께 있다 보니 미세한 표정 변화를 읽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다 그 표정이 그 표정인 뭉개진 얼굴이었는데, 자세히 보면 차이가 있었다.

“이제 비공자 표정을 읽을 수 있겠소.”

내가 표정 이야기를 꺼내자 그가 흠칫했다. 극악소마에게 가면처럼, 비사인에게는 얼굴 흉터가 역린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부분을 건드렸다.

“나중에 믿을만한 수하가 생기면 그 사람에게는 표정을 자세히 보여주시오. 그래야 그가 비공자의 감정을 읽을 수 있을 거요. 오히려 가까운 관계일수록, 비공자를 존경하면 할수록 표정을 못 읽을 수가 있소. 그런 우는 범하지 마시오.”

“왜 내게 이런 조언을 해주는 거요?”

“사도맹이 잘 돌아가기를 바라서요. 본교와 귀맹, 그리고 무림맹이 균형을 이루기를 바라서요. 그 균형이 무너지면…… 아시잖소?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정말 그것뿐이오?”

“나라고 어디 사람 믿으라고 배웠겠소? 그래도 믿어야 할 때는 믿소.”

“당신이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는 이유가 이해가 안 돼서 그렇소.”

“이유야 간단하지. 놈은 우릴 죽이려 했소. 소마님을 이용하려 했고. 죽여야 할 이유는 충분하오. 그렇다고 끝까지 도울 거라 믿진 마시오. 우리가 복수심에 미친 강호초출도 아니고 상황 봐서 아니다 싶으면 곧장 발을 뺄 거요. 이번 일은 어디까지나 비공자 당신 문제니까.”

비사인은 마음이 복잡한 듯 보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솔직히 좀 혼란스럽소.”

처음 만난 비사인과 지금의 비사인은 확실히 달랐다. 상처 입은 자존심은 사람의 눈을 가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지금의 비사인은 분명 자존심보다는 현실을 이겨내려는 의지가 강했다.

“간단한 일 아니오?”

“무슨 말이오?”

“저쪽이 한 그대로 갚아주면 되는 일 아니겠소? 그가 당신을 죽이려 했으니 당신도 그를 죽이시오. 사도맹주를 죽여 권력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후계자인 비공자를 죽이려 했으니 당신도 똑같이 그 손자를 죽이시오. 석관추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 따윈 버리시오. 그는 권력을 탐하는 추악한 늙은이일 뿐이니까. 증거고 나발이고 다 집어치우고 그냥 죽여버리시오.”

비사인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소. 이 문제는 정말 간단한 문제였소.”

꽉 막혀 있던 뭔가가 뚫린 모양이다.

“놈들을 모두 죽이겠소. 막아서는 자들도 모두 죽이겠소.”

“당연히 그래야지요. 간단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지 마시오.”

잠시 나를 쳐다보던 비사인이 물었다.

“지금도 내 표정이 읽히오?”

“읽히오.”

“어떻소?”

“기뻐하고 있소.”

“정말 내게도 표정이 있었구려.”

“몰랐소?”

“몰랐소. 다들 내 얼굴 피하기 바빠서.”

“다들이 아니라 당신이었겠지. 이제 거울은 그만 부수시오.”

원래라면 발끈했을 그 얼굴에 더 짙은 미소가 지어졌다. 그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달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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