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4회 악인을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난 비사인과 함께 사도맹 본단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그들의 안가에 도착했다.
그곳에 극악소마와 사도십삼랑이 기다리고 있었다.
일랑은 죽었던 사람이 돌아온 것처럼 기뻐했다.
“공자님! 무사하셨군요!”
“일랑, 미리 말하지 않고 가서 미안하오.”
“걱정 많이 했습니다. 다시는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알겠소.”
다른 사도십삼랑들도 기뻐했다. 그들이 자신을 반기는 모습을 보자 비사인의 마음이 풀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극악마존이 도련님의 안전을 보장하긴 했습니다만…….”
극악소마가 안전을 보장하면 더 위험해진 것 아닐까? 라고 고민했을 일랑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비사인과 사도십삼랑이 해후하는 동안, 극악소마가 나를 방으로 따로 불렀다.
하얀 가면 속 두 눈이 나를 샅샅이 살폈다.
“비사인은 자기가 뭘 빼앗겼는지도 모를 테고. 대체 뭘 얻은 겁니까?”
“그냥 저 사람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건 아닐 겁니다. 그 일은 나나, 사도십삼랑이 있어도 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요.”
그동안 함께 다니는 바람에 극악소마는 나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눈빛이 더 깊어진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무학에 진전이 있었습니까?”
“아주 조금 있었습니다.”
사실 비천검법 십이성 대성을 이룬 것은 대단히 큰 성취였지만 절반의 진실만 말했다. 극악소마를 완벽하게 속일 수 없다고 생각했고, 또 완전히 속이고 싶지 않았다.
“이공자 실력이 더 늘었다면 이제 붙으면 제가 지겠군요.”
“다른 마존은 몰라도 소마님은 이기지 못할 겁니다.”
“왜죠?”
“극악소마니까요.”
자신을 높여주는 말임을 알고는 극악소마가 웃었다.
그날 오후, 비사인이 나를 찾았다.
그는 한 가지 계획을 세웠고 그것은 아주 위험했다.
“나를 미끼로 쓸 작정이오.”
그는 이번 일에 목숨을 걸었다.
“내가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정보를 흘릴 거요. 그간 저지른 일들의 배후가 석관추임을 밝힐 증거가 있다고. 그걸 곧 맹주님께 보고할 거라고 하면 석관추는 반드시 우릴 죽이러 오겠지요.”
흑살주가 죽고, 백야곡을 찾아갔으며 육랑까지 죽었다. 이쪽에 증거가 있을법한 상황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우릴 죽여야 하는데, 외부의 고수를 급하게 구할 수는 없을 거고. 직접 오거나, 석관추와 깊이 관련된 고수가 오겠지요.”
“이게 얼마나 위험한 계획인지 알고 있소?”
“알고 있소. 그는 반드시 나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을 보내겠지요. 자신이 직접 올 수도 있고요.”
“그런데도 왜 이런 위험한 계획을 세운 거요?”
“저들이 한 가지 놓치고 있는 점이 있으니까.”
“뭡니까?”
“이공자 당신입니다. 이공자와 극악소마가 나를 도울 거라곤 절대 생각하지 못할 테니까요.”
그가 내게 물었다.
“나를 도와주시겠소?”
“도와주겠소.”
망설임 없는 대답에 오히려 비사인은 당황했다.
“왜 대가를 걸지 않소? 이번에야말로 어떤 조건을 걸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달라고 해도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
“나중에 당신과 악수 한번 제대로 하고 싶어서요.”
비사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원래 어려울 때 도움이 깊이 남는 법이다. 이번에 비사인의 마음을 얻는다면 그 어떤 영약이나 보물보다 더 큰 힘이 될 것이다.
그와 헤어진 후 극악소마를 만나 이번 계획에 대해 전해주었다.
“이공자는 빠지세요.”
“진심으로 하는 말씀입니까?”
“네.”
“저를 걱정해서요?”
“아뇨, 저를 걱정해서요. 이공자와 함께 나왔는데 사도맹 앞마당에서 이공자가 죽으면 제가 뭐가 되겠습니까? 그럼 교주님 볼 면목도 없습니다.”
사실 나도 똑같은 걱정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더는 마존을 죽이지 말라고 명령하셨는데, 혹시라도 극악소마가 죽으면 내가 뭐가 되겠는가?
“일단 상황 보면서 결정하시죠.”
“그러시지요.”
“이 싸움은 우리 싸움이 아닙니다. 너무 위험하게 뛰어들 필요는 없습니다.”
내 말에 오히려 극악소마의 눈빛이 빛났다. 상대가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불타오르는 그였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검 손잡이에 감아둔 극품천잠사를 심장과 목, 배와 팔다리 중요 부위에 감았다. 그 위에 혈천도마가 준 귀호의를 입었다.
그리고 조용히 운기조식하며 앞으로 있을 싸움에 대비했다.
늦은 밤, 나는 눈을 떴다.
천마호신공이 나를 깨웠다. 이렇게 격렬하고 강하게 나를 깨운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강적이다.’
강적이 오리란 것은 예상했지만, 천마호신공이 이렇게 강력하게 반응할 정도의 고수는 처음이었다.
같은 방에서 자고 있던 극악소마도 눈을 번쩍 떴다.
“느꼈습니까?”
“네.”
“나가시죠.”
나는 극악소마와 마찬가지로 가면을 썼다.
우리는 그 기운이 흘러나오는 곳을 향했다. 그곳은 비사인이 머물러 있던 건물이었다.
꽈직! 와장창!
창문과 벽을 부수며 무인들이 튀어나왔다. 바로 비사인과 사도십삼랑들이었다. 그들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리고 곧이어 느긋하게 걸어 나오며 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백의를 입은 그는 마치 신선처럼 흰 수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과 손에는 세월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주름이 있었는데, 그의 두 눈만큼은 맹수처럼 무서웠다.
노인은 한 사람을 질질 끌고 있었다. 이미 그는 시체가 되었는데 그가 끌리는 자리에 피가 흥건히 묻어나고 있었다.
휙.
노인이 시체를 던지자 마당 가운데로 시체가 날아와 굴렀다. 죽은 사람은 삼랑이었다.
동료의 죽음에 사도십삼랑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들의 눈에 복수의 살기가 담겼지만, 욕을 하거나 경거망동하며 나서는 이는 없었다.
삼랑을 죽일 때 노인이 보여준 검술에 기가 눌린 것이 틀림없었다.
“그대는 누구시오?”
일랑은 화를 누르며 노인에게 물었다.
그는 석관추가 아니었다. 전대 고수인 석관추보다 더 나이가 많았고 훨씬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는 자넨 누군가?”
노인의 목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나직하고 차분했지만,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사도십삼랑을 이끄는 일랑이오.”
“이리 가까이 와 보게.”
물론 일랑은 다가가지 않았다.
“겁쟁이가 어찌 사도십삼랑을 이끌고 있나?”
일랑은 인상을 굳혔지만, 노인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았다.
대신 비사인에게 나직이 말했다.
“여긴 우리가 맡을 테니, 빠져나가십시오.”
그들을 끌어들여서 잡겠다는 작전은 노인의 등장에 대번에 무너졌다.
비사인은 빠져나갈 생각도 없었지만, 설령 빠져나가려 해도 그 역시 여의치 않았다. 반대쪽 담벼락 위에서 또 다른 고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바로 이번 일의 배후인 석관추였다. 그 역시 전대고수다운 면모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직접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은 살인멸구로 모두를 죽이겠다는 의미.
석관추가 뒷짐을 쥔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달빛이 좋아 사부님 모시고 잠시 산책을 나왔다네.”
노인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 모두가 경악했다.
석관추의 사부.
검황(劍皇) 백망기(伯罔起).
쾌검술의 대가인 그는 전전대 고수로 나이는 이미 백삼십 세가 훌쩍 넘은 인물이었다.
수십 년간 무림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악인을 끌어들이려고 했는데 괴물이 끌려 나왔다.
“이보게, 비공자.”
석관추는 차분하고 침착했다.
“자네가 살 방법은 오직 하나일세.”
“뭡니까?”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자네도 알지 않나?”
“맹주께 바칠 증거 말씀이십니까? 우리 석 장로께서도 맹주님은 무서운가 봅니다.”
“좋게 말할 때 내놓으시게.”
“바보도 아니고 그걸 제가 가지고 있겠습니까? 저를 죽이면 그 즉시 증거는 맹주님께 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절 죽인 죄까지 석 장로께서 지셔야겠지요.”
바로 그때 석관추의 사부인 백망기가 훌쩍 몸을 날렸다. 천천히 허공을 걸어서 비사인 앞에 부드럽게 내려섰다. 마치 하늘에서 신장이 내려서는 그런 모습이었다.
따따당!
비사인을 지키려던 검은 모두 튕겨 나갔다.
백망기의 검은 다시 검집에 있었다. 어느새 검을 뽑아서 사도십삼랑의 검을 쳐내고 다시 회수한 것이다.
그 빠른 검술에 사도십삼랑은 기가 눌렸다.
백망기는 가만히 비사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거짓말할 줄 모르는 눈이군.”
백망기가 석관추를 쳐다보며 말했다.
“증거는 없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부의 말이라면 뭐든 믿는다는 듯 석관추가 차분한 얼굴로 비사인을 꾸짖었다.
“대체 뭘 믿고 이런 짓을 벌인 것인가? 설마 내가 자네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들어와 목을 내놓을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였나?”
비사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망기가 오는 순간 모든 계획은 엉망이 되어 버렸으니까.
석관추는 사도십삼랑이 합공해서 상대할 수 있지만, 백망기는 자신들의 실력을 훨씬 넘어선 존재였다.
그때 백망기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쳐다보았다.
“저기 귀신놀음 하는 것들을 믿었나 보군.”
당연히 백망기나 석관추는 처음부터 우리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다. 석관추는 정확히 우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
“팔마존 중 하나인 극악소마입니다.”
“마교에 탈바가지를 쓰고 신비한 척 행세하는 졸개들이 있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네. 한데 나인 줄 알면서도 저렇게 서 있는 건 뭐 때문인가? 내가 천마를 겁내서 죽이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건가?”
“그런 듯합니다.”
그러자 극악소마가 내게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튈까요?”
“이공자 뜻대로 하십시오.”
그때 비사인과 눈이 마주쳤다. 비사인의 표정에는 두려움 대신 의연함이 있었다. 내가 떠나도 좋다는, 원망하지 않겠다는 감정이었다.
“저 표정을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싶진 않군요. 이놈의 의리에 자존심에 약속에. 아! 무림인들의 평균수명이 이래서 팍팍 떨어집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극악소마가 웃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미친놈처럼 싸우다 죽는 것이 극악소마다.
싸움을 결정한 것은 그래서가 아니다. 저들이 우릴 그냥 보내줄 생각이 없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비밀을 외부에 흘릴 리가 없었으니까.
“이봐, 늙은이. 당신 상대는 이쪽이야.”
극악소마의 말에 백망기가 웃었다. 석관추도 웃었다.
“내가 천마를 신경이나 쓸 줄 알았더냐?”
백망기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가 우릴 향해 쇄도했다. 그는 정말 빨랐다. 온다고 공격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 코앞에서 검이 뽑혀 나오고 있었다.
쉬익! 쉬이익!
피잇! 팟!
순식간에 상황은 끝나 있었다.
백망기는 우리에게서 한걸음 물러나서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너?”
그의 긴 수염이 잘려서 우리 사이에서 흩날리고 있었다.
백망기는 극악소마부터 베려고 했고, 나는 백망기를 베었다. 그도 빨랐지만 나도 빨랐다. 백망기는 하마터면 내 검에 목이 잘릴 뻔한 것이다.
백망기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수십 년 동안 이런 위험한 순간은 겪어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이렇게 가슴이 철렁했던 적은 처음일 테니까.
백망기는 물론이고 석관추와 비사인, 그리고 사도십삼랑들도 모두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찌이익.
앞서 휘둘렀던 백망기의 검에 극악소마의 가면이 이마부터 턱까지 반으로 갈라지면서 아래로 흘러내렸다.
극악소마 역시 백망기의 공격을 완벽하게 피하지 못한 것이다.
가면이 흘러내리자 극악소마는 당황했다. 죽을래, 가면 벗을래 하면 죽음을 선택할 그였다.
그렇게 그의 얼굴이 드러나려던 바로 그 순간.
착.
새로운 가면이 그의 얼굴을 가렸다.
내가 쓰고 있던 가면을 벗어 그의 얼굴을 막은 것이다.
순간 그와 눈빛이 마주쳤다. 죽기보다 싫었을 수치심 대신 두 눈에는 날 향한 격정이 차오르고 있었다.
“가면은 오직 소마님이 원하실 때 벗으십시오.”
울컥 치미는 극악소마의 감정을 뒤로한 채 백망기를 향해 돌아섰다.
나는 몰랐다. 극악소마가 죽을 뻔했다는 사실이 날 이렇게 화나게 할 줄은. 정말 나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