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회 건방지고 예쁜 심장.
“자네가 훨씬 더 예뻤지.”
극악소마가 훌쩍 함정을 뛰어넘었다. 그의 말에 천화루주는 환하게 웃었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저 정도까진 아니었어요.”
“아니네. 내 눈에는 훨씬 더 나았어.”
산전수전 다 겪은 극악소마는 갑작스러운 기습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그래도 극악소마의 시선은 이안을 향해 있었다. 그래, 누구라도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에게서 눈을 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때까지도 극악소마는 함께 들어온 이안을 알아보지 못했다.
이안을 알아본 것은 천화루주였다.
“축하드려요, 이 무인님.”
마치 이렇게 되리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녀는 차분했다.
“감사해요, 루주님.”
이안의 목소리를 듣자 극악소마가 깜짝 놀랐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설마 그 못생긴 심장? 설마?”
얼마나 놀랐으면 설마란 말이 두 번이나 나왔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못났지만 웃긴 재주가 있던 그 심장입니다.”
극악소마가 벌떡 일어나서 이안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그녀의 얼굴을 뚫어질 듯 쳐다보았다. 백색 가면의 압박에 이안은 두려움에 떨었다.
극악소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좀 닮은 구석이 있어도 아닌데. 분명 아닌데?”
극악소마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 놀리려는 겁니까?”
“놀리려고 온 것도 맞고, 그 심장도 맞습니다.”
“맞다고요?”
극악소마가 다시 이안을 훑어보았다.
“그럴 리가요. 아니에요, 절대 아닙니다!”
강력하게 부정하던 그가 뒤쪽의 천화루주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맞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극악소마가 내게 물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원래 이 모습인데 호신공 부작용으로 그렇게 살이 쪄 있었습니다.”
“애초에 이 외모인데 호위를 했다고요? 본교 최대의 재능 낭비잖습니까?”
동시에 극악소마 최대의 극찬이었다.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그야 도련님을 지켜드리고 싶어서죠.”
물론 사실관계를 바로 잡은 것은 나였다.
“하고 싶어서 했겠습니까? 잘 아시잖습니까? 본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본교가 그렇게 비정하게 돌아가서 우리가 마존 노릇도 하고, 후계자 노릇도 하는 겁니다. 다만…….”
극악소마의 시선이 이안을 향했다.
“이번 경우는 예외로 둬야겠군요.”
그녀를 향한 극악소마의 시선에 새로운 감탄이 더해졌다.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그녀의 희생에 대한 감탄이었다.
천화루주가 이안에게 가서 두 손을 잡았다.
“너무 아름다워요. 축하해요.”
“감사해요.”
“자, 따라와요. 제가 이 무인을 완성해드리죠.”
“완성이라뇨?”
“화장할 줄 모르죠?”
“……네.”
호위 무인으로 살면서 평생 제대로 화장을 해본 적이 있었겠는가?
“살다 보면 칼 이외의 것으로 싸워야 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여자에게 화장은 검보다 더 강한 무기죠.”
천화루주가 그녀의 손을 끌고 방을 나갔다. 이안도 화장을 배워보고 싶었는지, 못 이기는 척 끌려 나갔다.
“답답한데 우리도 나갑시다.”
“좋습니다.”
극악소마와 함께 방을 나왔다. 천화루주의 거처 주변은 잘 꾸며져 있어서 산책하기에 좋았다.
“이공자와 함께 있으니 정말 놀라운 경험의 연속이군요.”
“놀라셨을 것 같습니다. 무공 부작용을 해소해준 저조차도 놀랐으니까요.”
하지만 방금 극악소마가 말한 놀라운 경험은 이안이 아니라 일전의 싸움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날 싸우면서 전 우리가 백망기에게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정말 그렇게나 강할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정작 놀라운 점은 백망기의 강함이 아니었다. 지금 극악소마가 솔직한 심정을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공자가 죽였지요.”
“소마님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죽은 것은 저였을 겁니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극악소마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지금 소마님이 무슨 생각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역시 섭혼마존을 죽인 것이 저놈이 확실하구나!”
극악소마가 큰소리로 웃었다.
“틀렸습니다. 전에 말씀드렸잖습니까? 이미 그렇게 믿고 있다고. 믿었으니까 백망기와 붙은 거죠. 아니었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곳을 빠져나왔을 겁니다.”
“절 믿으셨던 겁니까? 목숨까지 걸고요?”
잠시 사이를 두고 극악소마가 대답했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린 잠시 말없이 그곳을 거닐었다. 생사를 함께 넘긴 경험은 우리에게 큰 감정의 굴곡을 주었다. 극악소마의 가면이 잘릴 뻔했을 때, 나는 정말 화가 많이 났었다.
내 마음속에 극악소마에 대한 감정이 그렇게나 큰 줄 그때 처음 알았다. 그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극악소마가 문득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선을 쭉 그었다.
“우린 이제 어디까지 왔습니까?”
난 그가 내민 나뭇가지를 받아서 예전에 우리가 생존선이라 말했던 부분에 쭉 그었다.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합니다.”
이곳까지 와야 살려주겠다고 한 바로 그곳이었다.
그 순간 나는 보았다.
백색 가면의 눈구멍 속으로 그가 웃는 모습을. 그가 진짜로 웃는 모습을.
그는 소리 내지 않고 웃었는데, 이건 화가 나서 웃는 웃음이 아니었다. 순수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는 그냥 웃었다.
회귀 전 인생에서도 저 웃음을 보지 못했는데, 놀랍게도 이번 여행의 끝자락에서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소마님과 제가 앞으로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선은 움직일 겁니다. 이리로 더 갈 수도 있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올 수도 있겠지요.”
“저 끝까지 가면 어떻게 됩니까?”
“우린 진짜 친구가 되겠지요. 같이 밥을 먹고, 술도 마시고. 같이 즐거워도 하고 싸우기도 하고. 위험에 빠지면 구하러도 가고. 그러다 누군가 먼저 죽으면 무덤가에 술도 뿌려주겠지요.”
“전부 불필요하고 가식적이며 부담스러운 일들이군요.”
“막상 해보면 별것 아닌 일들이기도 하죠.”
극악소마에게 거기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처음 목표는 적도 아군도 아닌 지점까지 가는 것이었다. 적어도 이번 여행을 통해 충분히 목표는 달성한 것 같다.
그때 우리가 있는 곳으로 청면이 모습을 보였다.
그가 가져온 것을 극악소마에게 주었다. 그것은 바로 백색 가면이었다.
“자, 약속대로.”
극악소마는 청면이 가져온 가면을 내게 주었다.
백망기와 싸웠던 날, 내게 새 가면을 주겠다고 말했었는데 그 약속을 잊지 않은 것이다.
“감사합니다.”
새 가면을 써보았다. 확실히 더 가볍고 편했다.
“좋은데요? 땀도 잘 안 찰 것 같고.”
“청면이 직접 만든 겁니다. 내 가면도 청면이 만든 것이지요.”
“손재주가 대단합니다.”
내 칭찬에 청면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때 그곳으로 두 사람이 걸어들어왔다.
화장하러 갔던 이안과 천화루주였다. 나는 물론이고 극악소마와 청면까지 깜짝 놀랐다.
화장한 이안은 완전히 다른 여인 같았다. 매혹적이었고, 관능적이었다. 강렬하고 화려했다.
“이 무인이 워낙 품위가 있어서 다른 분위기를 연출해 봤어요.”
그야말로 또 다른 절세미녀를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화장이 여자의 무기라고? 그렇다면 우린 천하제일검을 보는 중이리라.
“앞으로 못생긴 심장이 아니라 예쁜 심장이라 불러주마.”
극악소마도 은근히 이안의 변신이 좋은 모양이다.
그때 천화루주가 넌지시 말했다.
“역시 저 젊었을 때보다 예쁘죠?”
그러자 극악소마가 이안에게 차갑게 말했다.
“마차 값은 꼭 갚도록!”
한편 이들의 대화로 눈앞의 미녀가 이안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청면은 정말 깜짝 놀랐다.
“이분이 이 무인이라고요?”
놀란 그에게 이안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청면님. 저예요.”
“정말 이 무인입니까?”
그가 얼마나 놀랐는지 가면 속 표정이 짐작될 정도였다. 극악소마 앞에서는 극도로 행동을 조심하고 말을 아끼는 그였는데, 그는 극악소마 앞이라는 상황조차 잊었다.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청면이 뒤로 물러났다.
그때 이안이 조심스럽게 내게 말했다.
“그 가면 제가 써도 될까요?”
이곳까지 오면서 그녀가 겪은 시선을 생각하면 이안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시선을 즐길 성격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괜찮다만, 소마님께 허락을 구해야지. 소마님이 주신 거니까.”
이안이 극악소마에게 말했다.
“저 가면 제가 써도 되겠습니까?”
“안 돼!”
그럼 그 예쁜 얼굴을 볼 수 없잖아? 분명 이런 마음이었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왜요?”
“공들여 한 화장이 지워지잖아. 누가 해준 화장인데?”
마지막까지 정답만을 말한 극악소마였다. 천화루주가 기분 좋게 극악소마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세상에 유일하게 극악소마를 꼬집을 수 있는 사람이 그녀일 거다.
“네가 원한다면 쓰도록.”
“감사합니다.”
극악소마의 허락에 이안은 크게 기뻐했다. 그녀는 내게서 가면을 받아 얼굴에 썼다.
그가 나를 보며 물었다.
“어때요?”
“어떻긴. 이건 아름다움에 대한 기만이고 세상 남자들에게는 절망이지.”
“저보고 행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이게 있으면 더 행복해질 것 같아요.”
내가 가서 이안의 가면을 머리 위로 올려주었다.
“우리끼리 있을 때는 이렇게 편하게 써라. 이때 네 가면은 하늘을 보고 있을 거다.”
“좋은데요?”
기왕 내친 김이었는지 이안이 청면에게 물었다.
“혹시 미인계 통하나요?”
청면은 무슨 뜻인지 몰라 잠시 대답을 못 했다.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고 꺼낸 말인지 짐작했다.
“너라면 다 통한다. 백 년 면벽하고 내려온 중도 파계시킬 거다.”
“너무 과장이세요!”
“나중에 봐. 안 그런지.”
이안이 다시 청면에게 말했다.
“앞서 드린 말씀은 농담이었고. 청면님을 제가 만들 조직의 제일조장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청면은 깜짝 놀랐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던 그때, 극악소마가 말했다.
“기껏 선물로 가면을 줬더니, 가면을 쓰고 첫 번째로 하는 짓이 내 사람을 빼가려고 하는군.”
“오해는 말아주세요. 가면을 받기 전부터 청면님이 첫 번째 후보셨습니다.”
“마존 자리를 포기하고 조장 자리로 오라는 거다. 그건 알고 말하는 거냐?”
“네!”
“청면이 그렇게 바보처럼 보이나?”
“아뇨. 한 번쯤은 새로운 인생에 몸을 던질 용기가 있는 분이라 여겼습니다.”
“용기는 건방진 심장, 네가 제일이다!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걸 보면.”
“도련님 믿고 막 질렀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녀가 극악소마에게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나는 보았다.
청면의 눈빛에 깃든 갈등을. 그래, 이렇게 아름다운 수장이 청하면 남자라면 갈등 되겠지.
하지만 이 아름다움이 방해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술 전 이안이었으면 갔을 수도 있는데, 아름다워졌기 때문에 가는 속물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을 테니까.
“꼭 한 번 생각해 주세요.”
청면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 모습을 보고도 극악소마는 별다른 말을 더하진 않았다. 설령 청면이 가겠다고 하더라도, 멍청이, 이 한마디하고 보낼 사람처럼 보였다. 만약 그런 모습을 보인다면, 내 마음에 그어둔 선은 더 오른쪽으로 이동할 거다.
극악소마가 내게 말했다.
“이공자. 이제 돌아갑시다.”
“먼저 돌아가십시오. 저는 예쁜 심장과 조금만 놀다가 들어가겠습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안을 위해서였다. 허물을 벗고 나왔는데, 훨훨 날아보다가 들어가야지.
천화루주는 그런 내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다.
“이공자는 참 좋은 분이세요.”
그러자 극악소마가 대답했다.
“속지 말게. 이공자는 악당 중의 악당이야. 자넨 저 가면이 안 보이나? 태생부터 가면을 쓰고 나온 사람이라네. 지금 저기 가면 쓴 사람 둘이 서 있는 거라고.”
그러자 천화루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서 잘 어울려요.”
이안과 돌아서 나가려다 나는 다시 극악소마에게 돌아섰다.
“멋진 세상 보여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다음에 또 보여주십시오.”
헤어지기 전 천화루주가 말했다.
“이공자님, 앞으로 우리 오라버니 잘 부탁드려요.”
원래라면 이안이 우리 도련님 잘 부탁드린다고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천화루주는 장난스럽게, 하지만 진지하게 극악소마를 부탁하고 있었다.
그녀는 극악소마와 나의 관계에서 뭔가를 본 것일까?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오직 이 세상에 단 한 사람, 천화루주만이 진정으로 그를 위하고 이해하고 있음을.
난 웃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네, 루주님 봐서 소마님은 앞으로 제가 잘 돌보겠습니다.”
어이없어하는 극악소마를 뒤로한 채 나는 이안의 손을 끌고 돌아섰다.
“가자 이안아. 중원 구경하러.”
이제부터 네 세상은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펼쳐질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