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회 만끽해라, 이안!
“저 시선들 느껴져?”
이안과 난 객잔에 와 있었다. 그녀를 기준으로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 앉아 있었다. 반대쪽 자리는 텅텅 비었는데, 우리가 있는 쪽으로 사람들이 앉았다.
다들 조금이라도 가까이서 그녀 얼굴을 보려고 슬금슬금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이다.
내가 이안에게 속삭였다.
“저기 왼쪽 남자는 널 여섯 번 쳐다봤고, 저기 오른쪽 저놈은 안 보는 척하면서 일곱 번 봤다. 그 옆에 녀석은 아예 대놓고 넋을 잃고 있다. 어어, 그만 봐! 옆에 있던 소저 좀 챙겨! 저런. 아프겠다.”
그때 손님이 한 명 들어왔다. 어디 앉을까 내부를 둘러보던 남자가 눈을 크게 뜨며 이안을 쳐다보았다. 그는 홀린 듯 그녀를 보면서 걸어오다 탁자에 걸려 자빠졌다.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고, 넘어진 남자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나마 이안을 잘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 그 옆자리 남자는 술을 따르다 술잔이 넘치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소감이 어때?”
“좋은데요?”
“좋다고? 안 부끄럽고?”
“제가 부끄러워하는 모습 보고 놀리시려고 가면도 못 쓰게 하고 절 여기 앉히셨겠지만, 작전은 실패하셨어요. 저 너무너무 좋아요.”
“의외인데?”
“제가 숨겨둔 꼬리가 여럿 있다는 것, 말씀드렸을 텐데요? 얼마든지 부끄러운 척 할 수 있지만, 이깟 시선쯤 얼마든지 즐기고 다닐 수도 있어요.”
이안이 구경하는 이들을 향해 살짝 미소를 지어주었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가 속삭였다.
“그리고 저 왼쪽 남자는 여섯 번이 아니라 여덟 번 봤어요.”
이안이 이래서 좋다. 그녀는 유연성이 있다. 똑똑함을 드러낼 줄도 알고, 그것을 감출 줄도 안다.
전신석화공의 부작용을 평생 안고서도,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왔던 그녀다. 상처도 있고 당당함도 있다.
“자, 이 객잔에선 즐길 만큼 즐겼으니 면사나 사러 가자.”
“면사요?”
“만날 가면을 쓰고 다닐 수는 없잖아? 그 가면은 꼭 필요할 때마다 쓰고, 평소에는 면사를 쓰고 다녀라.”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돈 굳었다.”
“네 돈으로 사!”
“아잉, 사주세요!”
그녀의 아잉에 몇 사람 쓰러졌고, 사주세요에 몇 사람은 전낭을 움켜쥐었다.
그녀와 내가 일어나자 실망과 탄식이 주위를 휩쓸었다. 나를 향한 부러움과 질투의 눈빛이 무섭게 날아들었다. 그중에는 면사 사주라는 질책의 눈빛도 있었다.
그녀와 객잔을 나와서 함께 걸었다. 백색 가면이 그녀의 허리춤에서 달랑거렸다.
“앞으로 네 아름다움을 노골적으로 탐하는 자들이 생길 거다. 온갖 놈들이 다 있겠지. 힘으로 얻으려는 놈도 있을 테고, 약을 타려는 놈도 있을 테고. 별의별 놈이 다 있을 거다.”
나는 인정한다. 그것이 내 의도든, 무의식이든 이런 이유로 그녀의 신독정화술을 미뤘음을. 내가 걱정하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고 신독정화술을 해준 지금, 그녀를 걱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다른 방식으로 나의 걱정을 떨쳐낼 거다.
“그런 것들로부터 널 지킬 힘이 있어야지. 나는 너를 마존들과 맞상대할 수 있는 실력으로 키울 작정이다.”
그녀에게 신독정화술을 펼쳐줄 때 이미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안은 괜한 겸손은 떨지 않았다. 다른 무공도 아니고 비천검법을 전수받으면서 마존을 능가해야 하는 당연한 목표도 딸려왔으니까.
“걱정 끼쳐 드리지 않게 더 노력할게요.”
“더는 하지 마. 지금도 노력은 넘친다.”
그녀가 웃었고, 넋을 놓던 과일가게 노총각 점원의 마음만 설렜다.
포목점에 들러 그녀에게 면사가 달린 죽립을 사주었다. 얼굴을 완전히 가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죽립을 써보더니 그녀가 거절했다.
“이건 너무 불편하네요. 일단 시야가 너무 좁아서 기습에 너무 취약할 것 같아요. 좀 더 고수가 되어야 쓸 수 있겠어요.”
“그럼 일단 면사만 사자.”
복면처럼 눈 아래를 가리는 면사를 사주었다.
면사만으로는 그녀의 아름다움을 가릴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좀 나았다.
“나중에 귀영대 만들면 복면을 정말 멋있게 만들 거예요.”
특유의 귀신 문양이 들어간 복면을 쓴 그녀 모습을 떠올리면 정말 신비하고 멋있을 것 같았다. 그 모습을 청면이 보면, 못 버틸 것 같긴 한데?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수 있는 곳이면 발걸음을 멈췄다.
다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지금 얼마나 기분이 좋겠는가?
만끽해라, 이안!
“이제 우리 어디 가요?”
“산 좀 타냐?”
“산요?”
“몸이 가벼워졌으니 산 좀 타자고. 자, 뛰어.”
경공으로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기암절벽 아래였다.
“내가 밟는 곳을 따라 밟아!”
나를 따라 절벽을 경공으로 오르며 그녀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이런 깎아지는 절벽을 오른 적은 이번이 처음인 그녀였다.
정상까지 올라가서야 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올라오는 데 엄청 무서웠어요.”
검술은 경지에 이른 그녀였지만, 경공은 그 실력에 미치지 못했다.
“떨어지면 죽겠죠?”
“안 죽어야 고수지. 네 검술 실력이면 안 죽어야 마땅하고.”
“만약 떨어지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요?”
“정신 바짝 차리고 어떻게든 떨어지는 속도를 줄여야겠지.”
물론 나 같은 경우에야 바닥에 거의 다 다다랐을 때, 내력을 발출해서 가볍게 내려서겠지만, 이안의 실력으론 무리다. 내공 소모가 심하겠지만 위에서부터 최대한 속도를 죽이면서 떨어져야 한다.
“너도 알겠지만, 검술만 잘해선 살아남기 어렵다. 경공도 잘해야 하고, 간도 커야 하며, 판단력도 좋아야 하고 사람도 잘 봐야 해.”
“아! 온실 속이 따뜻했는데.”
나와 본교의 보호 아래 편하게 지냈다는 그녀의 농담이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한 번도 그녀는 온실에 있었던 적이 없다. 무공 부작용에 따른 마음의 상처에, 날 호위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그렇게 힘든 온실이 어디에 있겠나? 내가 회귀한 후에는 수련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잔 그녀다.
“온실 바깥은 봄인가요? 겨울인가요?”
“강호는 단 한 번도 봄인 적이 없지.”
“이 무서운 절벽처럼요.”
그녀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아까 내가 해준 말 기억해? 떨어질 때 어떻게 하라는지.”
“물론이에요. 정신 바짝 차리고, 떨어지는 속도를 줄여라.”
“그럼 됐어.”
다음 순간, 나는 그녀를 절벽 아래로 확 밀었다.
“아아아아아악!”
처절한 비명과 함께 그녀가 떨어졌다.
나도 그녀를 따라 뛰어내렸다.
엉망진창으로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이안은 허우적대며 어떻게든 중심을 잡고 속도를 줄이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경험이 없어서 몸에 힘이 너무 들어간 채 쓸데없이 내공만 소모하고 있었다.
난 순간적으로 속도를 올려서 허공에서 그녀를 안았다.
내게 안긴 이안이 그제야 안도했다.
“내게 매달려.”
“네.”
그리고 나는 그녀가 보라는 듯, 두 발과 팔을 이용해서 어떻게 속도를 줄이는지를 보여주었다. 그녀를 안고 있음에도 순식간에 속도가 줄어들었다.
내게 매달린 채 이안은 한 동작도 놓치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떨어지다가 절벽 쪽으로 몸을 날렸다. 절벽 중간에 작은 동굴이 있었다.
그곳에 내려서자 비로소 이안이 소리쳤다.
“저 정말 죽는 줄 알았다고요!”
“거짓말. 내가 구해줄 거라 믿었잖아?”
“그야 그렇지만요. 한데 정말 놀랐어요. 떨어지는 속도가 제 생각보다 너무 빨라서 균형이 안 잡혔어요.”
“자꾸 떨어지다 보면 익숙해지고, 점차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거다.”
“네. 어떻게 하셨는지 잘 기억해뒀어요.”
“그럼 됐다.”
“한데 이런 곳에 동굴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위치를 기억해뒀다가 혹시라도 이 지역에서 쫓기게 되면 이곳으로 피해라.”
“여긴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아는 것이 어디 이 동굴뿐이겠냐?”
“그럼요. 그래서 이제는 안 물어보려고요. 한데 여긴 왜 오신 거죠?”
“지금부터 네 임독양맥을 타통하겠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겠다는 분위기도 잡지 않고 한 말이었기에 처음에 그녀는 눈만 껌벅였다. 그러다 점차 눈이 커지면서 놀랐는데, 이 놀람의 최종 크기는 신독정화술을 펼쳐주겠다고 했을 때보다 더 컸다. 차라리 그건 예고라도 했었지, 지금은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임독양맥 타통.
진짜 고수가 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일이지만, 무림인 중 정말 극소수만이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연이다.
이 과정은 굉장히 위험하고 힘든 일이어서, 함부로 임독양맥을 타통하려다 죽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게다가 타통해주는 사람 역시 기혈이 역류해 죽는 경우가 있었다.
멀리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천마의 혈육인 우린 어려서 임독양맥을 타통했는데, 내가 할 무렵에 형이 날 얼마나 겁줬는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형은 내가 공포심을 이기지 못해 주화입마에 빠지길 바랐겠지만, 난 무사히 임독양맥을 타통하는데 성공했었다.
어쨌든 임독양맥의 타통은 결코 함부로 해서도, 받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문정파의 노고수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문파의 정통 후계자에게만 해주는 것이다.
“정말 제게 임독양맥을 타통해 주시려고요?”
“응.”
“도대체 왜 이렇게 제게 잘해주시는…… 아, 그래서 묻지 말라고 하셨군요. 조만간에 또 해야 할 질문이라고.”
신독정화술을 마쳤을 때 그녀에게 질문하지 말라고 했었다.
“선물이다. 네 새로운 인생을 축하하는 선물.”
이안은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다시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저 우는 것 질색인 사람인데, 도련님은 자꾸 절 울게 만드시네요.”
“울 일 아니다.”
“맞아요, 저 기뻐요. 정말 날아갈 듯 기뻐요.”
“자, 그럼 시작해볼까? 혹시라도 잘못될 수도 있으니 마지막 말 남기고.”
“저희 도련님에게 전해주세요. 끝까지 모시지 못해 죄송하다고요.”
“너희 도련님은 내가 혼내줄 거야. 널 너무 독차지하고 있어서.”
“혼내기 쉽지 않을 거예요.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계시거든요.”
그녀의 말에 나는 웃고 말았다.
“자, 운기조식부터 시작하자.”
그녀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심법을 운용했다. 진기를 일주천했을 때, 나는 그녀의 등에 웅혼한 내공을 주입했다.
천천히 그녀의 혈맥을 따라 내 내공을 함께 움직였다.
“지금부터 내 말에 대답할 필요 없다. 어떤 일이 있어도 소리를 지르거나 운기를 멈추면 안 돼. 정신을 잃어도 안 되고.”
그녀가 운기하며 마음을 다스리는 사이, 혈맥을 따라 움직이는 내 내력의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임맥은 입술부터 시작해 가슴과 복부를 따라 내려가 회음혈에 이르고, 독맥은 회음혈에서 시작해서 꼬리뼈와 척추를 따라 올라가 백회혈을 지나 다시 입술까지 이어진다. 이때 가장 중요한 순간이 백회혈을 뚫어내는 순간인데, 정수리에 위치한 백회혈이 잘못되는 순간 폐인이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시간을 끄는 것보다 한순간에 해치우는 것이 최고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나의 정순하고 심후한 내공이 그녀의 혈맥을 과감하게 밀어붙였다.
걱정할 것 없었다. 딴 사람도 아닌 내가 해주는 타통이었다.
승장, 염천, 선기, 옥당, 중완……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혈맥을 뚫어나갔다. 폭우에 온갖 쓰레기들이 쓸려 내려가듯, 혈관을 막고 있던 노폐물이 뚫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생소한 고통에 힘들어했지만, 고통을 참는 것에는 이골이 난 그녀였다.
이렇게 팍팍 뚫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나는 거침없었다. 이건 오히려 망설이면 사고 난다. 한 번에 안 뚫리면 돌아서 다시 오고, 또다시 오고. 그러다 세차게 부딪치고.
양관, 영도, 신주, 아문, 뇌호, 후정까지. 그렇게 다른 혈맥을 모두 뚫고 중요한 고비에 도달했다.
‘나를 믿어라, 이안.’
‘믿고 있어요.’
‘지금이다!’
콰콰콰콰콰! 꽝!
가장 어려운 백회혈까지 시원하게 뚫렸고 나머지 남은 혈맥까지 다 뚫리면서 그녀의 임독양맥이 타통되었다.
옆으로 천천히 쓰러지는 이안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잘했다, 이안.’
이안은 한나절을 자고 나서야 일어났다.
“도련님? 어떻게 됐어요?”
“자, 운기조식 해봐라.”
이안이 긴장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일주천을 마친 그녀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달라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요. 내공은 훨씬 정순해졌고, 기의 움직임이 거침없어요.”
“축하한다, 이안.”
이안이 벌떡 일어나 내게 절을 하려는 것을 내력을 발출해서 막았다.
“전에도 말했지? 너 부려 먹으려고 해준 거니까 고마워할 필요 없다고.”
“대체 얼마나 부려먹으시려고요? 무림일통을 해와라, 해도 될 만큼의 고마움이라고요.”
“무림일통도 밥부터 먹고 하자. 배고프지?”
“무림맹 주방을 뒤지러 갈 정도로요.”
동굴 앞에 서서 그녀가 소리쳤다.
“나 임독양맥 타통했다아아…… 아아아아아악!”
뒤에서 다시 이안을 밀었다. 아까보다는 덜 허우적대며 떨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도 절벽에서 뛰어내렸다.
한 시진 후 나와 이안은 다시 저잣거리의 객잔에서 식사했다.
온갖 맛있는 것들을 시켜놓고 둘이서 먹었다. 다른 손님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정말 맛있어요.”
“중원의 유명하다는 유명한 요리는 다 돌아다니면서 먹자.”
“그러다 다시 뚱뚱해지면 어쩌죠?”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는 없을 거다. 본교로 돌아가면 비천검법 대성을 이룰 때까지 수련 지옥에 빠져야 할 테니까.”
“아, 우리 영원히 돌아가지 말아요!”
마음에도 없는 소릴 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지금, 이 순간을 너무나 즐거워했다.
그때 젊은 남자 하나가 사람들 사이를 헤집듯 지나며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
제법 훤칠하게 생긴 그는 비싸고 화려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뒤쪽에는 호위 무인으로 보이는 무인들이 네 명이나 있었다.
이안이 주문을 외듯 속삭였다.
“오지마라, 오지마라. 그냥 편하게 밥 좀 먹자.”
그런 그녀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앞으로 네가 수없이 겪을 일들이다. 자, 너는 어떻게 대처할래?
남자는 이안 앞으로 와서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정중히 말했다.
“소저, 제가 술 한잔 대접해도 되겠습니까?”
자, 이안아. 이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