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회 제가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귀령자가 혼인한 여인이 악녀라고 생각했다.
한데 지금 보이는 그녀 모습은 악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귀문의 비술을 연구한다고 고생 많으시다고 들었어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소.”
임향의 걱정에 귀령자는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시장하지 않으시오?”
“저, 배고파요.”
“식사하고 갑시다.”
귀령자와 임향, 그리고 그녀를 따라온 무인들이 우리가 있던 객잔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가 앉은 곳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대화가 고스란히 들렸다.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사실 이번 혼사를 저희 부모님은 반대했어요. 귀문의 후계자들은 대대로 연구에만 몰두하는 이들이라 여인을 외롭게 할 거라고요.”
“아, 오해이시오.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약속하겠소. 절대 소저를 외롭게 하는 일 없을 거라고.”
나는 귀령자의 혼인 생활이 왜 파탄 났는지 자세히 듣지 못했다. 마지막 헤어질 때, 귀령자는 자신의 혼인 생활이 더욱 지옥이라 했으니 그때까지 함께 살았던 것 같은데.
만약 그가 회귀대법을 연구한다고 그녀를 외롭게 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면? 만약 그런 거라면?
‘귀령자야, 당신은 지금 이 약속 못 지켜.’
물론 그런 이유가 아닐 수도 있다. 지금 임향을 바라보는 표정만 보면 그녀가 도망가자면 가업도 버린다는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다. 이렇게 좋아했는데 왜 혼인 생활이 지옥이 돼버린 걸까?
이안이 내게 전음을 보냈다.
―혼례 말리려는 사람이 저 두 사람이죠?
―맞아.
―저렇게 좋아하는데 어떻게 말려요? 지금 말렸다간 원수가 될 것 같은데요?
그냥 원수도 아니다. 철천지원수가 될 거다.
우린 다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아버지가 공자님을 섭섭하게 대할 수도 있어요. 만약 그렇더라도 공자님이 이해해 주세요.”
“물론이오. 문주께서 임 소저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고 있소.”
혹시 부모들 때문에 두 사람이 갈라진 것일까? 그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 과제였다.
그들이 식사를 주문했다.
“저는 볶음 요리는 좋아하지 않아서요.”
임향의 확실한 취향에 귀령자가 재빨리 말했다.
“잘됐소. 나도 싫어하오.”
“정말요?”
“우린 천생연분인 것 같소!”
하지만 나는 보았다. 귀령자가 보였던 그 찰나의 망설임을. 나는 좋아하는데 하는 그 아쉬움을.
불쌍한 귀령자. 앞으로 볶음 요리는 다 먹었구나. 하긴, 지금의 그는 평생 벽곡단만 먹고 살자고 해도, 좋다고 할 것 같았다.
그들이 식사를 시작했을 때 이제는 우리가 대화를 나눴다. 그들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너는 혼인하고 싶어?”
혼인을 앞둔 사람들에게 가장 큰 화제는 역시 혼인 이야기겠지. 과연 귀령자와 임향이 귀를 기울이는 것이 느껴졌다.
“저는 안 할 거예요.”
“왜?”
“혼인은 큰 책임이 동반되는 일이잖아요? 저는 누군가를 책임질 자신이 없어요. 저만해도 벅차요.”
진짜 그녀 생각인지, 아니면 내가 두 사람의 혼인을 말리려는 것을 알았기에 하는 대답인지 알 수 없었다.
이번에는 이안이 내게 물었다.
“혼인하고 싶으세요?”
“아니.”
“왜요?”
“나는 그냥 자유롭게 살고 싶다.”
“아이는요? 아이를 가지고 싶지 않으세요?”
“아이라…….”
이 질문을 딱 한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귀령자의 동생인 서진에게. 당시의 대답은 뻔했다. 그땐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과 분노에 휩싸였던 시기였는데 자식은 무슨 자식.
“잘 키울 자신 없다.”
“하긴. 모든 부모가 자식을 잘 키우는 것은 아니니까요.”
이안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지금 귀령자의 일과는 별개로 그녀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이 원망스러워?”
“어려서는 원망했어요.”
아주 어렸을 적에 그녀는 부모에게 버려졌다.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본교까지 흘러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지금은 별생각이 없어요. 미워해봤자 저만 손해죠.”
일부러 부모에 관해 물었다. 마음의 상처를 가슴에 묻지 말라고.
오히려 묻어둔 것을 파내서 말하고, 괜히 말했다며 이불을 차면서 후회하고, 어차피 말했으니 또 말하지 뭐. 이렇게 별것 아닌 것으로 만들려고.
이 과정을 여러 번 거쳐야만 비로소 조금 옅어지는 것이 마음의 상처인데 그냥 마음에 묻고 잊겠다고? 어림없다. 아무리 깊게 묻어도 안 썩는다. 안 없어진다.
이안이 날 보며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부모님, 어디선가 잘 먹고 잘살고 있겠죠, 뭐.”
바로 그때였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참지 못하고 끼어든 사람은 임향이었다.
“어떤 사연인지는 몰라도 여협의 부모님은 가슴 아파하고 계실 거예요.”
그녀는 음식 취향도 확실했고, 이런 일에는 확실히 자기 의견을 말하는 성격이었다.
이안이 그녀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모든 부모가 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겠죠. 낳아줬으니 자식을 돈 벌어오는 존재로 생각하는 부모도 있고, 때리고 학대하고 심지어 자식을 팔아버리는 부모도 있잖아요?”
마지막 말이 내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이안은 부모가 자신을 팔아버렸다고 생각하며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극소수 부모들의 이야기겠죠. 소저 부모님은 다른 사정이 있으셨을 거예요.”
이안을 안타깝게 쳐다보는 임향의 눈빛에 연민과 동정이 담겼다. 그녀가 순박해 보이는 생김새와는 달리 초면인 상대에게도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불쾌하다고 생각하면 불쾌할 수도 있었지만 이안은 부드럽게 반응했다.
“위로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뇨, 제가 괜한 참견을 했어요. 죄송해요.”
임향은 사과했고, 이안 역시 정중히 말했다.
“아뇨. 호의로 말씀하신 건데, 제가 민감하게 반응했어요.”
그렇게 두 사람이 서로에게 사과했다.
뒤늦게 임향이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임씨검가의 여식인 임향이에요.”
임향이 귀령자를 소개했고, 이안이 나를 소개했다.
“여긴 제 사형이에요.”
주로 새로운 사람에게 우릴 소개할 때면 이렇게 소개했다. 같은 무공을 배웠으니 엄밀히 따지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과하는 뜻으로 제가 술을 대접할게요. 오늘은 두 분이 오랜만에 재회하신 것 같으니, 내일이든 모레든 시간 나실 때 뵙죠.”
이안의 제안에 임향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술을 사도 제가 사야죠.”
서로 술을 사겠다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귀령자가 나섰다.
“마침 내일 가까운 친우들을 불러 조촐한 축하연을 가지려던 중이었는데 두 분도 초대하고 싶소.”
“그런 귀한 자리에 저희가 갈 수 없어요.”
이안이 거절하자 임향이 나섰다.
“아뇨, 꼭 오세요. 그래야 제가 마음이 편할 것 같아요.”
임향까지 나서자 이안은 못 이기는 척 그들의 초대를 받아들였다.
“좋아요, 내일 찾아뵐게요.”
잠시 후 식사를 끝낸 귀령자와 임향이 작별을 고한 후 먼저 객잔을 떠났다.
그들이 가고 나자 이안이 괜히 으스댔다.
“저 잘했죠?”
“훌륭하다. 네게 맡기고 가도 되겠다 싶을 정도로.”
“앗! 그건 안 돼요. 전 아직도 왜 저들의 혼인을 말려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요!”
이안이 객잔 밖으로 멀어져가는 그들을 보았다. 길을 가면서도 귀령자는 임향에게서 시선을 떼질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귀령자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아직도 지옥이오?
―더 뜨거운 지옥이라네. 면목 없지만, 그래도 부탁하네. 끝까지 말 안 들으면 내 하물을 뜯어버리게.
―그 정도요?
―그 이상이네.
굳이 말리려면 못 말릴 것도 없겠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억지로 말렸다간 오히려 그가 더 불행해지는 것은 아닐까 걱정되었다. 세상 제일 어려운 것이 남녀문제라더니.
“아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나도 잘 모르겠다.”
* * *
다음 날 오후, 이안과 나는 귀문을 방문했다.
안내 무인을 따라 내원으로 들어가는 동안 곳곳에서 귀기가 느껴졌다.
―이안아, 저기 왼쪽 기운 느껴져?
―네, 생전 처음 느끼는 기운이에요.
―귀문의 귀기다.
섭혼마존의 귀기와는 또 다른 느낌의 귀기였다.
―이런 귀기를 사용하는 자들은 정말 신중히 상대해야 한다.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당황하지 않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당황하면 죽는다.
―네, 명심할게요.
그렇게 내원에 들어서자 화원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귀령자와 임향, 그리고 내가 그토록 보고 싶었던 한 사람, 바로 서진이었다.
“오라버니를 믿지 마세요. 일에 빠지면 옆에서 비무를 해도 모를 사람이에요. 우리 오라버니.”
서진의 말을 농담이라 여긴 임향이 웃었다.
“농담 아닌데.”
“그럼 멋진 비무를 해야겠네요. 고개를 제게 돌릴 정도의 비무를요.”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우리의 등장으로 이쪽을 쳐다보았다.
나와 서진의 시선이 마주쳤다.
원래 그녀를 만난 것은 지금보다 한참 후의 일이다. 그래서 지금 서진의 모습은 너무 낯설기만 하다.
너도 이렇게 파릇파릇하던 시절이 있었구나.
그 거친 낭인의 삶에 그녀는 너무나 잘 어울렸었다. 똑똑했고 생각도 깊었으며 의리도 있었다.
지금 모습에서 그때가 연상되지 않았다. 지금의 그녀는 명문가에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밝고 쾌활한 소녀였으니까.
이안의 전음이 날아들었다.
―천화루의 그 아름다운 기녀들을 볼 때도 이렇게 보시지 않았는데. 저 여인을 보는 눈빛은 남다르네요.
역시 나에 대해선 이안이 제일 잘 안다.
―질투는 사절이다.
―마마! 질투가 아니라 호기심이옵니다!
그래, 어찌 서진을 보는 눈빛이 평범할 수 있겠는가?
친구야.
이번 생에서는 너를 이름 모를 들판에서 식어가게 하지 않겠다. 너는 죽어가면서 네 삶에 만족했다고 했지만, 그런 최후를 맞이하게 하진 않을 거다. 친구로서의 약속이다.
그렇게 우린 그들 앞에 갔다. 귀령자가 서진에게 우릴 소개했다.
소개가 끝나자 서진은 이안에게 관심을 보였다.
“눈이 이렇게나 아름다우신데 왜 면사를 쓰셨나요?”
내가 이안을 보며 얼굴을 보여주라는 눈빛을 보냈다. 미인계다, 이안!
내 뜻을 눈치챈 그녀가 면사를 벗었다.
두 여인의 입에서 절로 감탄사가 나왔는데, 뜻밖에도 목표 대상인 귀령자는 별다른 동요가 없었다.
내가 귀령자에게 물었다.
“서 공자, 우리 사매 예쁘지 않소?”
세상에 이렇게 예쁜 여자들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이었는데.
“아름답소. 아름답긴 한데, 우리 임 소저가 더 아름답소.”
나는 알 수 있었다. 귀령자가 진심으로 말했다는 것을.
사랑에 빠지면 눈이 먼다더니 이 정도면 눈에 콩깍지가 아니라 섭혼술에 걸린 수준이었다.
이안에게 전음을 보냈다.
―못난이! 면사 써라.
―이미 썼어요. 뭐야, 저 남자!
―미인계로 혼례를 막아보려 했는데, 안 되겠다.
―저렇게 좋아하는데 왜 막아요? 보기 좋은데.
그때였다. 임향이 굳은 얼굴로 귀령자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시오? 임 소저?”
“제가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요?”
“모르겠소만.”
귀령자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솔직하지 못한 거죠? 저 소저가 더 아름답잖아요? 그렇게 말하면 제가 좋아할 줄 알았나요?”
자신이 봐도 이안이 더 아름다운데, 거짓말을 했다고 여긴 것이다.
“내 눈에는 그대가 더 아름답소.”
“거짓말이잖아요?”
“아니오. 정말 그대가 더 아름답소. 하늘에 맹세할 수도 있소.”
“정말인가요?”
그렇게 확인하고 나서야 임향의 표정이 풀어졌다.
이 순간 나는 확신했다.
어제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던 모습도 그렇고, 지금 보이는 모습도 그렇고. 그녀는 그냥 넘어가도 될 일을 반드시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는, 강하다면 강한 성격이었다.
저 성격으로 귀령자를 옥죄었다면? 언젠가는 귀령자의 눈꺼풀에 낀 콩깍지가 사라졌을 테고.
그녀에게 질린 그는 대법 연구로 현실도피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면서 둘의 사이는 더 나빠졌을 거고.
이건 그녀만의 책임이 아니다. 그녀는 이렇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숨기지 않고 보여주고 있는데, 귀령자 본인이 못 보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뭐가 그리 좋은지 귀령자는 임향을 보며 웃고 있었다.
어휴, 귀령자야. 이걸 어떡하냐? 정말 하물이라도 잡아 뜯어야 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