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회 작전 변경이다.
악인이 아니라서 그렇다.
차라리 귀령자나 임향, 두 사람 중 누군가 악인이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혼인 생활이 지옥이 되진 않았을 거다. 누가 떠나도 떠났을 테고, 누가 죽여도 죽였을 테니까.
둘 다 평범한 사람들이라서 그렇다. 지지고 볶다가 정이 들어버려서, 정말 밉고 싫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버린, 하지만 절대 그 인생을 반복하기 싫은 그런 관계고 삶이었으리라.
“자, 안으로 들어가시오. 음식이 마련되어 있으니 요기부터 하세요.”
이안과 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이 우릴 따라붙었다.
“제가 안내해 드리죠.”
나는 지난 생에서의 서진과의 인연을 이번 생에서는 이안과 이어주려고 한다.
함께 걸으며 이안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안아, 여기 서진이 귀영대 제이조장 후보다.
―앗!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그녀의 눈이 번쩍 뜨였다.
―네가 이끄는 귀영대에 귀술을 사용할 수 있는 조장이 있다고 생각해봐라.
―끝내주겠죠. 심지어 우리 대 이름에도 귀신 귀자가 들어가요!
―이 여인을 수하로 삼느냐 마느냐는 역시 네게 달렸다.
이안은 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왜 그녀인가?’에 대해서 어떤 말도 묻지 않았다.
대신 서진에게 말했다.
“오라버니 혼인, 축하드려요.”
“감사해요. 평생 혼인 못 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하네요.”
이안이 초면이었지만 서진은 유쾌하게 대답했다.
“왜요? 인물도 좋고, 성격도 좋으시던데요.”
“그래봤자 공부만 하던 샌님이죠.”
서진은 이안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서진도 예쁜 여자들을 참 좋아했다. 예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했다. 미녀도 좋아했고, 꽃도 좋아했고, 예쁜 옷도 좋아했다. 낭인과 어울리지 않는 그런 취향들은 바로 명문에서 순탄하게 자라온 어린 시절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전 말로만 들었지 귀술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어요.”
“별것 없어요.”
잠시 걸음을 멈춘 서진이 손을 들었다. 손바닥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순식간에 뱀 모양이 되었다.
연기로 만들어진 작은 뱀이었지만 묘하게 실감 나서 금방이라도 시커먼 흑사로 변할 것만 같았다.
휘익!
뱀이 갑자기 이안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안에게 닿기 전에 픽하고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너무 멋져요!”
“놀라지 않으시네요?”
“살기가 없었으니까요.”
이안을 향한 서진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아무리 살기가 없었다 하더라도, 누구라도 갑자기 뱀이 달려들면 흠칫 놀라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안은 전혀 동요가 없었다.
“다음에 또 보여주세요.”
“그땐 더 크고 무서운 것 나갑니다.”
“좋죠!”
성격적으로도 그녀들이 잘 맞으리라 생각한다. 두 여자 모두 모나지 않은 시원시원한 성격에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성격이었으니까.
만약 청면과 서진이 모두 귀영대에 들어올 수만 있다면?
청면이 일조장으로 무게를 잡아주고, 서진이 이조장으로 밝게 분위기를 잡아주고. 벌써 그림이 좋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일이었다. 한 사람은 마존 후보고, 다른 한 사람은 귀문주의 혈육이었으니까.
대청에 이미 몇 사람의 손님이 와 있었고, 이후에도 손님들이 속속 도착했다. 귀령자의 손님도 있었고, 임향의 손님도 있었다.
초대받은 이들이 모두 도착하자 귀령자와 임향도 대청으로 들어왔다.
함께 건배하며 얼마 남지 않은 그들의 혼례를 축하해주었다.
초대받은 이들은 대부분 명문의 후계자들이라서 예의가 바른 이들이었다.
하지만 딱 한 사람은 예외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임향의 친구였던 서종파의 주명(周銘)이었다. 들어설 때부터 표정이 어두웠던 그는 이번 혼사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시작부터 들이부은 술기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임향을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는 귀령자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임향에게 말했다.
“솔직히 오랜 친구로서 이번 혼례는 축하해줄 수 없다.”
“왜 그래?”
“본래 무가는 무가와 연을 맺어야 뒤탈이 없는 법이다.”
당연히 그 말에 귀령자는 기분이 나빴다. 게다가 뻔히 자신이 옆에 있는데 저런 말을 하는 것은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겠다는 것 아니겠는가?
주명은 임향의 손님이었기에 귀령자는 좋은 어조로 그에게 말했다.
“본문 역시 무림에 몸담은 어엿한 무림 문파요.”
“이곳에 누구도 귀문을 무림 문파라 생각지 않을 거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오? 지금껏 본문이 무림에 기여한 바가 얼마나 많은데.”
“서 소협, 그대는 귀문의 술법이 정당한 무공이라 생각하시오?”
순간 귀령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군가 저런 식으로 물어온 적이 없었기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무공과 잡술은 엄연히 다른 법이오.”
주명이 선을 넘자 카랑카랑 목소리가 대청을 울려 퍼졌다.
“그럼 그쪽은 뭐 그리 대단히 무공으로 잡술을 상대하는지, 한 번 확인해 볼까요?”
나선 사람은 서진이었다. 살짝 한쪽 아미가 올라간 채 상대를 노려보는 모습을 보자, 나는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낭인 시절에도 화가 나면 저렇게 한쪽 눈썹이 올라갔다.
그녀가 손을 내뻗자 주명 주위로 검은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헛!”
놀란 주명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검을 뽑아 들었다.
“뭐야? 이거 뭐야?”
그가 허공에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무엇인가 환상을 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내 눈에는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보였다. 눈과 입만 붙은 시커먼 그림자가 그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생긴 것이 너무 무섭고 실감 나서, 그것이 환상임을 알면서도 가슴이 섬뜩해졌다.
그리고 내 눈에는 저 환상을 없앨 파훼법도 보였다. 혈안정수와 신안술이 합쳐진 결과였다.
주명이 여기저기를 오가며 검을 휘두르는 바람에 주위 사람이 다칠 수도 있을 상황이었다.
서진이 술법을 거둬들이자 허공에 검을 휘두르던 주명은 이내 자신이 귀술에 빠졌음을 알아차렸다. 그것이 환상임을 알았음에도 자기도 모르는 새에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알면서도 당하는 것이 귀문의 귀술.
그가 서진을 노려보았다.
“이따위 사술로 나를 능욕하다니 절대 용서하지…….”
짝!
그의 뺨이 돌아갔다. 성큼성큼 걸어가서 그의 뺨을 때린 사람은 임향이었다.
“죽을래? 술 안 깨? 감히 누굴 용서하지 않겠다는 거야?”
“너!”
“친구 맞아? 친구라면 이러면 안 되지? 친구라곤 고작 너 하나뿐인데, 날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그 말에 주명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친구는 너 하나뿐이란 말이 비수처럼 날아가 박힌 모양이다.
주명이 짧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하다.”
불꽃처럼 치밀었던 분노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나도 때려서 미안.”
“괜찮다. 어려서도 여러 번 맞아봤잖아?”
주명이 귀령자와 서진에게도 사과했다.
“미안하오. 그대의 가문을 깎아내린 것은 무례한 짓이었소. 사과하오.”
하지만 뒤끝도 있었다.
“그래도 이 혼사, 나는 싫소! 반대하오!”
그 길로 주명은 그곳을 떠나버렸다.
내 시선이 귀령자를 향했다.
귀령자야, 원래라면 네가 저렇게 소리쳐야 한다.
‘이 혼사 싫다! 축하하지 마라! 정녕 이 혼사 반대인 사람이 신랑인 나뿐인가?’
귀령자는 함부로 나선 서진을 혼내려 들었지만, 임향이 그를 말렸다.
그리고는 귀령자에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어려서부터 친구라, 제가 혼인한다니 많이 섭섭했던 모양이에요.”
“그만큼 임 소저를 아껴서 그런 거 아니겠소?”
“아낀다면 저러면 안 되죠. 그냥 술 처먹고 지랄한 거예요. 잊어버리세요.”
그녀를 바라보는 귀령자의 눈빛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보며 나는 내심 한숨을 쉬었다.
‘더 빠져드는구나.’
오늘 보니 임향도 괜찮은 여자였다. 저 귀령자가 그녀의 성격을 정확히 알고 이해할 수 있다면, 둘이 잘 어울릴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 * *
귀령자는 연회 중에 잠시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임향 앞에서 내색은 안 했지만, 왠지 기분이 자꾸 가라앉고 있었다.
아까 주명 때문이었다. 그가 불만을 표하고 나섰을 때, 자신이 나서야 했나 하는 후회가 자꾸 들었다.
임향이 자신을 겁쟁이로 본 것은 아닐까?
나섰으면 이겼을 텐데. 한 번 제대로 솜씨 발휘를 해야 했었나? 아니다. 아버지는 귀문이 무림의 분쟁에 휩싸이는 것을 항상 경계하셨다. 무림 분쟁은 무슨? 그냥 친구들 감정싸움이지. 나섰어야지!
귀령자의 마음이 이랬다저랬다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나서지 않은 것보다 뒤늦게 후회하는 자신의 모습이 더 싫었다.
상념에 빠져 걷다 보니 도착한 곳은 자신의 서재였다.
창가에 서서 서재 안을 쳐다보았다. 이곳에 있을 때 자신은 가장 마음이 편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버지에게 야단맞거나 뭔가 문제가 생기면 항상 여길 찾아왔다. 이곳은 귀령자의 유일한 쉼터이자 도피처였던 것이다.
귀령자는 안다.
자신은 주명을 제압하고 무릎 꿇려서 으하하하, 할 때 행복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책 읽고 연구하고 조사하고. 조용히 있을 때 가장 행복한 사람이란 것을.
‘그나저나 여길 임 소저에게 보여줘야 하는데.’
자신이 얼마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인지 임향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런 마음이 더 들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책이 정말 많으시군요.”
귀령자가 놀라 돌아보았다.
뒤에는 그를 뒤따라 나온 내가 서 있었다.
“답답해서 바람 쐬러 나왔다가 걷다 보니 여기까지 왔소.”
“그러셨군요.”
“무림인 중에 이렇게 책 많은 사람은 처음인 것 같소.”
“어려서부터 책 읽는 것 좋아했소.”
“그러셨군요. 제 주위에도 책 좋아하시는 분이 한 분 계십니다.”
“오, 그렇소? 다음에 기회 되면 소개해 주시오.”
“그러시죠.”
난 그 상대가 혈천도마란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기겁하는 귀령자 표정을 떠올렸다. 귀령자를 쳐다보는 혈천도마의 그 못마땅한 얼굴까지 떠오르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와 함께 자연스럽게 대청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서 공자와 임 소저, 두 분은 보면 볼수록 정말 잘 어울리시오.”
“아까 그 일 때문에 하시는 위로라면 괜찮소. 나는 다 잊었소.”
“내 눈에는 질투로 보였소. 한데 그 소협도 이해가 가오. 오랫동안 좋아했던 친구가 혼인하면 나라도 가서 잔칫상 엎고 싶었을 거요.”
나는 귀령자의 기분을 풀어주었다. 그의 혼인을 말리든 말든, 어쨌든 그와 어느 정도 친해져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누군가와 친해지는 가장 빠른 방법은 상대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해주는 거다.
“언젠가 그 소협은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냉수를 마시며 이럴 거요. 내가 그때 왜 그런 머저리 짓을 했을까?”
그 말에 귀령자가 웃었다. 그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으니, 푸는 것도 그 일로 풀어야지.
“잘 참으셨습니다. 안 참았으면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 사람이 서 공자가 되었을 테니까요.”
귀령자가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다 갑자기 물었다.
“혹시 우리 언젠가 만나지 않았소?”
귀령자야, 어떤 운명이 느껴지냐? 하긴 당신이라면 뭔가를 느낄 수도 있겠지.
“이번에 처음 뵙소.”
“한데 소협을 보고 있으면 낯설지 않소.”
“처음 만나도 오래 본 사람처럼 편한 사람이 있잖소? 친구 같고. 괜히 믿음 가고. 막 뭐라도 챙겨주고 싶고.”
“그 정도는 아니오만.”
“아마도 내가 처음부터 서 공자에게 호감을 느껴서 그럴 거요. 아까 책까지 보니 더 존경스럽소.”
나는 계속 듣기 좋은 말을 해주면서 그의 경계심을 해제하고 있었다. 닳고 닳은 혈천도마나 극악소마도 내 아부신공에 못 당하는데 이 젊은 귀령자와 가까워지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이 아부신공의 가장 중요한 점은 적당히 하고 물러서야 할 때 칼같이 물러서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한 말을 그가 곱씹으며 기분 좋아할 시간을 줘야 하니까.
“자, 그럼 먼저 들어가겠소.”
나는 그를 두고 대청으로 들어섰다.
* * *
연회가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이안에게 물었다.
“서진은 어땠어?”
연회 내내 서진과 이야기를 나눴던 이안이었다.
“마음에 들었어요. 조장 감으로 훌륭해요.”
“내 추천은 실패가 없지.”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녀가 본교에 투신하겠느냐는 거지?”
“네.”
“귀문은 본래 정사지간의 문파다. 과거 귀문의 선조 중에서는 본교에 몸담았던 사람도 있었고. 잘 설득하면 문제 될 것 없을 거다.”
“귀문에 대해 잘 알고 계시네요?”
“오기 전에 공부 좀 했다.”
사실 과거 서진에게 다 들었던 내용이었다. 낭인 시절 서진은 계파에 묶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어디에도 속하고 싶지 않아 했고, 그렇기에 어디에도 갈 수 있는 사람이었다.
“어차피 우린 조만간 본교로 돌아가야 할 테니, 그녀를 함께 데려가진 못할 거다. 나중에 그녀가 찾아올 수 있도록만 하면 돼.”
언젠가 답답해서 집을 뛰쳐나올 때, 낭인의 삶이 아니라 이안을 찾아오게 만들면 되는 것이다.
“알지? 우리에게 연락하려면 중원 곳곳에 있는 서호객잔에 이름을 남겨두면 된다는 것.”
“나중에 헤어질 때 꼭 말해둘게요.”
이안과 별개로 나는 따로 서진의 행보를 신경 쓸 작정이다. 큰 운명의 줄기가 이안에게로 이어질 수 있도록.
“참, 도련님은요? 혼인 말리는 것 어떻게 됐어요?”
“작전 변경이다.”
오늘 연회장에서 귀령자와 임향을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본교 철방의 곽 방주는 매번 말한다. 작은 차이가 명품을 만든다고.
난 그것이 인간관계에도 해당한다고 믿는다. 작은 차이가 결과를 바꿀 거라고. 사람은 바꾸지 못해도 관계는 바꿀 수 있을 거라고.
우린 말 한마디에 감동해서 평생을 충성하고, 말 한마디에 섭섭해서 헤어지고. 말 한마디에 평생을 미워하고. 그게 바로 우리들이니까.
그래서 나의 새 작전은 바로 이것이었다.
“귀령자의 혼인은 막지 않되 두 사람이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해준다.”
할 수 없다, 귀령자야. 혼인은 해야겠다. 대신 지옥문이 아니라 다른 문을 열어주마.